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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번국도 의왕구간에 대한 역사/의왕시사

안양똑딱이 2017. 2. 18. 14:53

1번국도의 연혁
현재 한국의 공설도로(公設道路)는 고속국도[고속도로], 일반국도, 특별·광역시도, 지방도, 시·군도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보통국도로 불리는 일반국도는 고속도로와 더불어 전국의 주요 도시와 항만·공항·관광지 등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의 양대축이다. 2004년 말 총 56개 노선으로 짜여진 한국의 국도는 총 길이가 1만 4,264㎞에 달하고 포장율도 계속 증가되어 97.4%에 이른다.
국도는 전세계적으로 남북축으로 뻗은 노선에는 홀수번호를 동서축으로 가로놓인 노선에는 짝수번호를 붙이는 것이 관례이다. 한국에서도 남북을 종관하는 간선도로에 대해 서쪽에서부터 1·3·5·7번을 부여하였으며, 동서를 횡단하는 간선도로에 대해 남쪽에서부터 2·4·6번을 부여하였다. 이밖에 8·9·10번국도가 북한에 소재하여 총 10개의 간선국도가 전국을 종횡으로 연결한다. 56개 노선 가운데 남북축 도로는 30개 노선에 길이 약 8,600㎞이고 동서축 도로는 26개 노선에 약 5,700㎞에 달한다.
전라남도 목포와 평안북도 신의주를 잇는 1번국도는 그 사이에서 광주·전주·공주·천안·수원·서울·파주 등과 북한의 개성·황주·평양·안주·정주 등을 경유한다. 이 가운데 공주·서울·개성·평양 등은 역사적으로 일국의 수도로 기능한 곳이다. 남북축 도로의 경우 서쪽부터 번호를 부여하는 관례에 따른 것이기는 하나 1번국도는 광역의 중심 도회를 경유함으로써 수위 국도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도 별 무리가 없다. 특히 전통시대에는 중국과의 사신왕래나 문물교류는 거의 대부분 1번국도 위에서 이루어졌으며, 고금을 막론하고 유사시에는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는 주요 군 작전로였다.
일부 주요 국도가 통일로, 호국로, 경강로, 경인로 등의 경우처럼 별칭을 갖듯이 서울과 수원 사이의 1번국도는 따로 경수로(京水路)라 불린다. 안양·군포시의 경계선 상에서 시작되어 수원시와의 접경선에서 끝나는 의왕시내 구간의 1번국도는 왕복 8차선의 도로 폭에 길이가 약 4.3㎞에 달하는 대로로서 교통량도 전국 최고의 수준이다. 조선시대 고지도에도 빠지지 않고 표기된 경수로는 1860년대에 전국 10대로의 반열에 오르고, 1910년대에 신작로로 정비되면서 근대적인 도로경관을 갖춘 후 산업화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대로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전근대 지도에 나타난 1번국도
현재까지 전해지는 전국 단위의 군현도(郡縣圖)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고 정보량이 많은 지도는 18세기 중반 영조 연간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이다. 광주부 의곡면과 왕륜면에 해당하는 의왕은 일용면·월곡면·낙생면 등과 접경하고 있으며, 주변에 청계산·학현·오봉산·백운산·목단산[모락산] 등이 표기되어 있다. 이 가운데 읍치에서 황해안에서 안산과 맞닿은 성곶면까지 뻗은 도로와 과천 및 수원까지 뻗은 도로가 현 의왕시 일대에서 교차하고 있다.
전자의 길은 현재 학현을 넘는 57번시도로서 여전히 성남과 의왕을 잇는 주요 도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도 이 고개 위를 지나게 되었다. 그 만큼 학현길이 오래 전부터 안양·군포·의왕 등의 안양천 유역권과 탄천 유역의 성남·용인·광주 사이의 가장 요긴한 영로(嶺路)임을 반영한다. 후자의 길은 과천에서 의왕으로 이어지는 47번국도 및 사그내마을에서 수원으로 이어지는 1번국도로 계승되었다. 이 길은 수원과 서울을 직통으로 연결하는 도로였기 때문에 아래 지도 좌하단에 주기하였듯이 ‘대로’로 인식되었으며, 이 길을 따라 서울 및 광주 읍내까지 각기 80리 이정임을 표시하고 있다. 노변 취락으로는 갈산주막(갈미)이 표기되어 있다.
『해동지도』 다음으로 도로망이 비교적 상세히 표시된 지도로는 1860년대에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와 1872년에 제작된 군현도를 들 수 있다. 우측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앞서 제작한 『동여도』를 합쳐 하나의 도면으로 편집한 것으로, 고딕체 글씨는 『동여도』에 표기되어 있으나 『대동여지도』에는 누락된 지명을 의미한다. 시흥읍내에서 안양-부곡-사근(창)을 경유한 후 지지대고개를 넘어 수원읍내로 이어진 선이 『대동여지도』에서 표기된 1번국도이다. 사근창에서는 갈산마을과 과천읍내를 경유하여 남태령을 넘는 길이 접속하는데, 1770년경에 여암 신경준이 그의 저작 『도로고(道路考)』에서 파악한 6대로 중 제4로인 제주로(濟州路)가 곧 이 길이다.
조선시대에 전국 단위의 간선도로 체제는 신경준이 처음 6대로 파악한 이후 19세기 초반에 7대로로 확대되고 중반에는 두 개가 더 추가되어 9대로가 되었다가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1864) 단계에 이르러서는 서울에서 화성까지 이어지는 수원로(水原路)가 대로로 승격함으로써 10대로 체제를 이루게 된다. 수원로는 정조의 화성 신도시 개발사업 당시 기존 도로의 노폭을 넓히고 새로 교량을 설치하는 등의 공사를 벌여 정비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신작로이다.
『대동지지』에 표기된 수원로는 서울에서 시작하여 노량진(10리)-문성동(15리)-시흥(5리)-안양행궁(10리)-사근평행궁(20리)-수원행궁(20리)을 지나 건릉(20리)까지 이어진다. 사실 이 노선은 이미 신경준의 『도로고』에도 ‘자경성유노량진저벌사근천일로(自京城由鷺梁津抵伐沙斤川一路)’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으니, 정조가 아버지 묘인 현릉원을 화산 아래로 천장(遷葬)한 것과 무관하게 수원은 이미 경기남부의 거점 도회였음을 반영한다. 사근평행궁(사그내마을)에서 화성까지는 제주로와 노선이 같다. 서울에서 화성까지 과천을 경유하는 제주로를 통하면 70리이고, 시흥을 경유하는 수원로를 이용하면 좀 더 먼 80리 이정이다.
사근평행궁 전후의 구간이 의왕지역에 포함되는 1번국도로서,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수원로의 진행방향도 이곳을 기점으로 실제와 같이 북서방향에서 남북방향으로 변화한다. 안양행궁까지의 노선을 잠시 살펴보면, 문성동은 오늘날 독산동에 해당하는데 그 흔적을 독산본동에 위치한 문성초등학교, 독산3동에서 신림동으로 넘어가는 문성골길, 그리고 그 길 중간에 건설된 문성터널 등의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 시흥은 현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에 치소를 두었는데, 치소 입구를 지켜주던 은행나무 두 그루만이 옛 흔적으로 남아 있다. 『경기지』(1842∼1843)와 『경기읍지』(1871)의 시흥군 공해조(公廨條)에 104칸 규모로 기재된 안양행궁은 『대동지지』에 따르면 “만안교 남쪽에 있다”고 하므로 오늘날 안양동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행궁이란 왕의 행차시 휴식이나 숙식을 위해 잠시 이용하는 시설물로서 사근평행궁 자리에는 지금 의왕시 고천동사무소가 들어서 있다. 옛 건물에 대해서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다행히 사무소 앞에 이를 ‘사근행궁터’라고 쓰여 진 표지석이 놓여 있다. 1872년 지도에 표기된 사근주막(肆覲酒幕) 역시 여행객들에게 식사와 숙박을 제공하는 주막으로 생각된다. 전술했듯이 이곳이 제주로와 수원로(1번국도)가 접속하는 요지임을 생각하면 이 지점에 주막이 자리 잡는 것이 쉽게 이해된다. 사근주막 아래에는 건물 모양의 범례와 함께 ‘행궁’이 표시되었다.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 나타난 1번국도
목측(目測)으로 지도를 제작할 수 있도록 특수교육을 받은 일본 육군 육지측량부 대원들은 1894~1906년까지 조선의 산하와 취락·도로 등을 측량하여 축척 1:50,000 지형도 484 도엽을 제작한다. 이 지도들의 원판은 소실된 채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과 미국 클라크대학 도서관에 인쇄본 전체가 소장되어 있으며, 한국에서는 1997년에 이를 영인하여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라는 이름으로 펴내었다. 지도가 발행된 지역은 전국의 4/7에 불과하지만 기존의 다른 어떤 지도보다 정확하고 정보량도 많아 조선말기 국토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이 지도들은 1914년에 실시된 대대적으로 변경된 행정구역이 아닌 조선시대의 지방행정구역을 반영하고, 한자 지명은 물론 우리 고유의 한글 지명이 일본문자 가타가나로 병기되어 있어 역사지리학 분야뿐 아니라 지역학 전반에 걸쳐 활용 가치가 높다.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 의왕시 1번국도는 과천도엽 및 남양도엽에 걸쳐 있다. 두 지도에서 두 개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된 노선은 제주로를 표시한다. 수원로와 제주로가 모두 10대로에 들지만 과천으로 통하는 제주로가 더 큰 도로였음을 알려준다. 전주리[전주나미] 위에 있는 등곡(藤谷, 등칡골)마을 부근에서 북서쪽으로 실선-점선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곧 1번국도이다. 전주리와 곡사근천이 도로변에 임박하여 입지하였고, 등곡과 내곡, 사근천 등은 1번국도에서 가깝기는 하지만 충적지와 사면이 만나는 접촉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지도에서는 사근천을 沙限川(사한천)이라고 표기하고 그 옆에 가타가나로 サクネ(사그내)라고 적었다. 사근천은 하천 이름이면서 동시에 마을 이름인 것이다. 이러한 예는 ‘청평천’의 경우처럼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사근평은 사근천 주변의 충적지를 일컫을 것이다. 즉 사근천·사근평·사그내 등은 모두 행궁이 위치했던 1번국도변 일대를 총괄하여 지칭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근천 아래 곡사근천은 골사그내마을로, 수원에서 지지대고개를 넘어오면 처음 만나는 영하취락(嶺下聚落)이면서 1번국도의 오래된 노변취락(路邊聚落)이다. 이 지도에서 도로는 네 등급으로 구분되었는데, 높은 등급에서부터 도로(道路), 연로(聯路), 간로(間路), 소로(小路)라는 이름을 붙였다. 도로는 두 개의 실선, 연로는 실선과 점선, 간로는 두 개의 점선, 소로는 하나의 실선으로 표현된다.
일제시대 지형도에 나타난 1번국도
합병 직후 설치된 조선임시토지조사국에서 6년에 걸쳐 1915년까지 전국 22만 762㎢에 대한 측량을 완료하자 한국의 국토 안에는 기선(基線) 13개소, 대삼각점 400처, 2등삼각점 2,401처, 3등삼각점 3만 1,646처 등의 측량점이 설치되었다. 일제는 측량 자료를 바탕으로 1913~1918년까지 1:50,000 지형도 722매 제작을 완료하는데, 비록 일제에 의한 것이지만 이로써 한국도 국가기본도를 완비한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나라가 된다. 이 지도들은 1985년과 1998년에 『근세 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라는 이름으로 영인되었다.
의왕시 1번국도는 일제시대에 들어 비로소 전국 최고 수준의 대로가 된다. 1914년에 측도된 남양도엽과 1915년에 측도된 군포장도엽에서 1번국도는 등급이 1등도로로 표기되었다. 일제는 1914년에 도로규칙을 반포하면서 도로의 등급을 1∼4등도로로 구분하는데, 1등도로는 폭이 약 7m에 달해 우마차가 교행하는 데에 전혀 불편이 없었다. 이는 오늘날 왕복 2차선도로와 비슷한 규모이다.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서는 등곡에서 군포장으로 향하는 길이 ‘도로’로, 북쪽의 과천으로 향하는 길이 ‘연로’로 표시되었으나, 1907년부터 실시된 치도사업 결과 신의주에서 서울을 경유한 후 목포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1등도로로 개수되면서 이 길이 명실상부한 1번국도로 발전한 것이다. 고천리는 사그내마을을 중심으로 1번국도변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의왕면 면소재지가 되었으며,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 없던 통산[통뫼·통미·통메]마을과 고고리마을이 사그내와 골사그내 사이에서 새로 등장하였다. 군포장 바로 아래쪽 도로변에 좁은 간격으로 찍힌 점들은 가로수를 표시한다. 이 구간은 산업화과정에서 그 동쪽으로 새로 길이 나면서 옛 자취를 그나마 간직하게 되었고, 이에 당시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제법 고목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1975년 지형도에 나타난 1번국도
1918년까지 평판측량을 통해 제판·인쇄·발행 완료된 1:50,000 지형도 722매에 대한 원판은 해방 후 미군정청으로 인계되었다가 1948년에 한국 정부로 이관된다. 이후 지형도 제작은 1962년에 건설부 산하 국립건설연구소가 발족되기 전까지 육군에서 담당한다. 이 연구소는 첫 사업으로 1:50,000 군사용 지도를 민수용으로 개편하는 작업을 진행하였고, 그 결과 1963년에 비로소 남한을 망라하는 1:50,000 지형도 350매가 완성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74년에는 1:25,000 지형도 762매가 완성되었으며, 이후 1:50,000 및 1:25,000 지형도의 수정판을 계속 증보하면서 동시에 1:5,000 지형도 제작을 병행, 현재는 1:5,000 지형도 1만 7,000여 도엽이 전역에 걸쳐 완간되었다. 축척 1:5,000 지형도가 전국적으로 발행되는 나라는 흔지 않다고 한다. 국립건설연구소는 1974년에 국립지리원으로, 2003년에는 국토지리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꾼다.
1914년에 발행된 1:50,000 지형도와 1974년에 편집되고 1975년에 발행된 지형도 사이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특징은 일단 1번국도가 포장되었다는 점과 구장터를 중심으로 기존의 소도로들이 확장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동칙골[騰谷, 등칡골]과 고천초등학교를 경유하는 곡선주로 바깥쪽에 직선으로 새 길이 놓이면서 1번국도의 노선이 살짝 바뀌기도 하였다. 일제시대의 군포장은 이름이 구장터로, 내곡은 안골로, 등곡은 동칙골로, 전주동은 전지남이로, 통산은 통뫼로 표기되는 등 한자어가 한글 지명으로 바뀌었다. 이는 단순히 한글표기법을 사용한 것을 넘어 원래의 이름을 표기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일제시대 지형도에 군포장에서 교차하는 소로는 1970년대에 395번 지방도로로 지정되어 북동쪽으로 인덕원과 남서쪽으로 반월을 잇는다. 한편 벌새전리 부근에서 덕현동 방향으로 길이 새로 포장되었는데, 안양 시가지를 관통하지 않고 외곽으로 우회하기 때문에 서울과의 연결상태가 호전되었다. 이로써 수원로를 계승한 기존의 1번국도가 새로 난 이 길로 옮겨갔다. 1970년대는 한국이 본격적으로 산업화를 추진하던 시기로 산업 물동량과 자동차 보급의 증가폭이 커지면서 서울과 주변 공업도시를 잇는 산업도로들이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서울과 경기도청소재지인 수원 사이의 1번국도가 이를 주도하였다. 경수로라는 별칭은 이러한 맥락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2005년 지형도에 나타난 1번국도
30년의 세월이 흐른 2005년도 의왕시의 도로망은 눈부신 발전상을 보여준다. 우선 1번국도는 지지대고개 북쪽에서 북수원인터체인지와 의왕인터체인지를 통해 영동고속도로와 과천-봉담간고속화도로가 접속함으로써 의왕시는 교통 요지로서의 면모도 갖추게 되었다. 창말 아래의 남부 철도화물 기지창고나 괴말 위쪽의 공용화물터미널이 입지한 것도 1번국도를 비롯한 철도 및 고속도로와의 접근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밖에 의왕시 내부의 주요도로 역시 1번국도를 주축으로 편재되었다. 모락산과 오봉산 사이에서 안양천 연안 저지의 중앙을 관통하는 1번국도가 남북방향으로 중심도로축을 형성하자 주변의 소로들이 이와 접속하는 과정에서 지역내 간선도로로 발전하였다. 안양천 연안의 충적지와 1번국도를 기반으로 의왕시는 성장하였으며, 지금도 의왕시의 중심시가지는 1번국도변을 따라 남북방향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197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한국의 산업화는 토지이용의 패턴을 농촌적인 것에서 도시적이고 공업적인 것으로 빠르게 바꾸어 나갔다. 1970년대 지형도에 의왕시에서는 고우물마을 앞에 있는 것이 유일한 대단위 공장이었으나, 2000년대 지형도에서는 1번국도와 오봉산 사이의 충적지에 공장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이러한 토지이용의 양상은 안양쪽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두드러진다. 지형도에서는 잘 확인되지 않지만 왕곡로와 오전천로 등은 안양천으로 유입하는 소지류를 복개(覆蓋)하여 만든 도로들이다.
1860대의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 단계에 의왕의 주요 도로망은 수원로와 제주로, 그리고 수원로에서 남양으로 빠지는 분기로로 구성되었는데, 수원로는 오늘날 대부분 1번국도로 계승되었다. 앞에서 기술한 고천초등학교 앞의 직선길은 1975년 이전에 새로 놓인 길이고, 그 안쪽의 굽은 길이 원 수원로 노선이다. 이 길은 현재 효행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효행길은 마을버스 노선이 지나는 왕복 2차선도로이다. 이 노폭은 1970년대나 신작로로 개수되었던 일제시대에도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곧 조선 후기의 수원로 본선의 노폭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시대 지형도와 비교하더라도 당시의 지역내 주요 도로들은 국도 또는 지방도로로 계승되어 오늘날까지 의왕시의 주요 도로로 기능하고 있으며, 이 밖의 지역내 소로들도 1970년대 이후 급속히 진행된 인구증가와 시가지 확장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 포장되어 지역 내외의 소통로로 활발하게 기능하고 있다.

/ 의왕시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