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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 정상부에 있는 삼막사

안양똑딱이 2016. 5. 5. 17:45
[볼기행]삼성산 정상부에 있는 삼막사


삼성산 정상부에 있는 삼막사
소재지;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41-54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석수동 삼성산(해발 481m)8부 능선에는 삼막사(三幕寺)란 천년 고찰이 있다. 이 절은 1천300여년전 신라 문무왕(文武王) 17년(677년)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潤筆) 등 3명의 고승이 암자를 지어 정진하던 곳으로 삼성산(三聖山)이란 이름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후 신라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가 중건하고 고려 태조가 중수했으며 조선조 무학(無學)대사에 의해 한양 남쪽의 비보 사찰로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구가 침범, 절에 불을 질렀으나 법당 건물은 타지 않아 왜구가 참회하고 떠났다는 전설이 있으며 조선시대부터 남왈삼막(南曰三幕)이라 하여 남서울의 수찰(首刹)역할을 했다.


천년을 버텨온 고찰답게 각종 유물.유적과 전설,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절 입구에 들어서면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상징하는 천불전(千佛殿)이 나타난다.


법당에는 석가모니불, 가섭불, 구나함모니불 등 1천명의 부처가 있어 보는 이를 압도하게 만든다.


천불전 옆에는 지난 1990년 신축된 6명의 부처를 모신 육관음전(六觀音殿)이 있고 그 앞에는 조선 태조 7년(1398년) 무학대사가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 망해루(望海樓)가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 2층 누마루 건물인 망해루는 명칭이 말하듯 맑게 갠 날이면 서해바다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60호인 명왕전(冥王殿)은 지장보살을 위시, 명부의 10대왕을 모신 곳으로 조선 고종 17년(1880년) 건립됐다.


특히 천불전 뒤편에 위치한 일명 살래탑이라고 불리는 고려시대 3층 석탑(경기도 유형문화제 제 112호)이 있다. 이 탑은 승도(僧徒) 김윤후(金允候)가 몽고군 원수인 살리타이를 살해하고 싸움을 이긴 것을 기념해 세운 승적기념탑으로 적당한 크기의 바위 위에 높이 2.55m 크기로 세워졌다.


천불전을 가로질러 삼성산 정상 부근으로 오르다 보면 삼귀자(三龜字)란 암각화가 나타난다. 삼귀자는 조선후기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의 형 지운영(池雲英.1852∼1935년)이 인근 백련암지(白蓮庵址)에 은거할 당시 쓴 글로 바위면을 다듬어 음각으로 거북귀(龜)자를 3가지 형태로 새겨놓았다.


삼귀자를 지나 계단을 오르다 보면 남녀의 성기 모양을 한 남녀근석(南女根石.경기도 민속자료 제3호)을 만나게 된다. 이 바위는 자연 형태의 남근석과 여근석이 있는데 바위를 만지면서 자식 두기를

원하고 출산과 일가의 번영, 무병 장수를 빌면 효험이 있다는 전설 때문에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남근의 길이는 150㎝, 여근의 높이는 110㎝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남근석을 뒤로하면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94호)이라 하여 중후하고 자비스런 인상의 양각화를 만날 수 있다.


매애삼존불은 자연암벽에 감실(龕室)을 만들어 바위에 부조(浮彫)한 치성광삼존불(熾盛光三尊佛)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주존(主尊)인 치성광여래의 머리는 소발(素髮)에 반달형 계주가 보이며 얼굴은 사각형이지만 눈과 입.볼 등을 율동감 있게 묘사, 미소짓게 함으로써 중후하고 자비스런 인상을 풍긴다.


이 절에는 어부와 관련한 이색적인 전설이 하나 있다. 옛날 박씨 성을 가진 한 어부가 고기를 잡으려고 바다에 나갔다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됐다.


동료는 모두 숨지고 박씨 등 2명이 난파선에 살아 남아 몇날 며칠을 바닷물로 목숨을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 갑자기 난파선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이 수북이 담겨 있는 놋그릇이 떨어졌고 이들은 쌀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육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같은 시각 삼막사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스님이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제단에 올려놓은 불기(佛器)가 소리도 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불공을 드리던 스님은 너무나 죄송해서 다시 공양을 올리며 기도를 계속해야 했다. 이윽고 집에 돌아와 기력을 회복한 박씨는 밥의 출처를 알아보려고 마을 서당에 찾아갔고 훈장으로부터 밥그릇에 삼성산 삼막사란 글씨가 쓰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그릇의 출처는 난파당한 아들이 살아오기만을 여망 하던 박씨의 어머니가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며 간절히 기도하자 부처님의 법력으로 제단에 있던 밥그릇이 난파선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박씨는 어머니와 절을 찾아가 그릇을 간직하게된 사연을 털어놓게 됐고 이후 매년 소금을 절에 공양하게 됐으며 최근까지도 박씨 후손들의 소금 공양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많은 유적과 유물,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삼막사는 관악산 줄기인 삼성산 중턱 풍광이 으뜸인 지점에 위치, 요즘도 일반 신도는 물론 등산객들로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유형문화재 삼막사마애삼존불상(경기도 안양시)
이 마애불은 자연 암벽에 감실< 龕室 >을 만들고, 거기에 부조< 浮彫 >한 치성광삼존불< 熾盛光三尊佛 >로 조선후기< 朝鮮後期 >를 대표할 만한 걸작이며, 석굴사원< 石窟寺院 >유구< 遺構 >로 전해오는 중요한 자료이다. 주존< 主尊 >인 치성광여래< 熾盛光如來 >의 머리는 소발< 素髮 >에 반달형 계주< 계珠 >가 보이며, 얼굴은 사각형이지만 눈과 입, 볼 등을 율동감 있게 묘사하여 미소짓게 함으로써 중후하고 자비스러운 인상을 풍기게 한다.

목은 밭아서 더욱 어깨가 움츠려 보이고, 신체는 두터운 불의< 佛衣 >에 파묻히고 선각< 線刻 >으로 묘사하여 양감을 느낄 수 없다. 좌우< 左右 >협시< 脇侍 >인 일광< 日光 >·월광보살< 月光菩薩 >은 각각 연화대 위에 합장한 모습인데, 머리에는 소박한 삼산관< 三山冠 >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본존과 비슷하지만 환한 미소 때문에 활력이 넘쳐 보인다.

이 삼존불은 얼굴이나 상체의 활달한 부조< 浮彫 >로 생동감이 넘쳐 조선< 朝鮮 >불상< 佛像 >에서는 파격적 수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몸의 표현을 생략한 평판적이고 경직된 신체와 하부로 내려갈수록 얕은 기법 등은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불상 아래 건륭< 乾隆 >28년(영조< 英祖 >39년, 1763)이라는 명문< 銘文 >이 있어 조선< 朝鮮 >후기< 後期 >불교조각사연구< 佛敎彫刻史硏究 >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칠성신앙< 七星信仰 >과 다산신앙< 多産信仰 >이 결합한 불교< 佛敎 >와 민간신앙< 民間信仰 >의 결합상태를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삼막사삼층석탑(경기도 안양시)
삼막사삼층석탑< 三幕寺三層石塔 >은 삼막사 승도< 僧徒 >인 김윤후< 金允候 >가 몽고군< 蒙古軍 >의 원수< 元帥 >인 살리타이< 撤禮塔 >를 살해, 싸움을 이긴 승적< 勝績 >을 기념한 탑이라 전한다. 기단부< 基壇部 >는 장대석< 長臺石 >4매< 四枚 >로 하층기단< 下層基壇 >하대< 下臺 >를 만들고, 하층기단 면석< 面石 >도 역시 장대석 4매로 되었으며, 갑석< 甲石 >은 2매석으로 구성되었다.

상층기단< 上層基壇 >면석< 面石 >은 4매석< 四枚石 >으로 짜여 있고, 갑석은 한귀퉁이가 파실< 破失 >되었다. 탑신부< 塔身部 >는 탑신< 塔身 >과 옥개석< 屋蓋石 >을 각기 1석씩으로 조성하였는데 각층의 옥개받침은 3단씩이다. 전체적으로 둔중하여 고려시대< 高麗時代 >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높이는 2.55m이다.


삼막사사적비(경기도 안양시)
삼막사사적비< 三幕寺事蹟碑 >의 비갓은 팔작지붕형이고 지대석< 地臺石 >은 땅에 묻혀 있다. 비문< 碑文 >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나 "조선국경기< 朝鮮國京圻 >관악< 冠岳 >산맥갑묘행룡삼성산하< 山脈甲卯行龍三聖山下 >사명삼막좌유향로봉< 寺名三幕左有香爐峰 >"과 건립년대< 建立年代 >를 밝히는 "강희< 康熙 >46년 정해< 丁亥 >"란 명문< 銘文 >이 있어 비석< 碑石 >의 위치는 경기 관악산맥 삼성산 밑 삼막사에 있고, 왼쪽에는 향로봉이 있으며, 조선< 朝鮮 >숙종< 肅宗 >33년(1707)에 건립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시도민속자료 삼막사남녀근석(경기도 안양시)
삼막사남녀근석 < 三幕寺男女根石 >은 삼막사< 三幕寺 >칠성각< 七星閣 >옆에 있는 자연 형태에 남근석< 男根石 >과 여근석< 女根石 >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돌에다 정성을 들인다. 속전< 俗傳 >에는 신라< 新羅 >문무왕< 文武王 >17년(677) 원효대사< 元曉大師 >가 삼막사를 창건하기 전부터 이 선바위는 토속신앙< 土俗信仰 >의 대상으로 숭배하였다 한다.

이 바위를 만지면서 자식 두기를 원하고 출산< 出産 >과 일가< 一家 >의 번영< 繁榮 >, 무병< 無病 >및 수명장수< 壽命長壽 >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전하며 4월 초파일과 칠월칠석날 등 이름 있는 날에는 경향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촛불과 삼색과실< 三色果實 >등을 차려놓고 빈다. 천연 그대로의 돌인 남근의 높이는 150cm, 여근의 높이는 110cm이다. 이러한 성기숭배< 性器崇拜 >사상< 思想 >은 수렵< 狩獵 >, 채집< 採集 >의 풍족과 풍농< 豊農 >, 풍어< 豊漁 >, 다산< 多産 >과 무병장수 신앙과 하나를 이루어, 선사시대< 先史時代 >부터 행해져 왔으며 고려< 高麗 >, 조선시대< 朝鮮時代 >는 물론 현재까지도 무속< 巫俗 >, 풍수신앙< 風水信仰 >, 동제< 洞祭 >, 미륵신앙< 彌勒信仰 >속에 어우러져 이어지고 있다.


문화재자료 삼막사명부전(경기도 안양시)
삼성산<三聖山>에 위치한 삼막사는 신라시대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여 그 뒤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수하였고 서산대사<西山大師>등이 수도한 곳이라고 전한다. 사내에는 명부전을 비롯하여 육관음전, 망해루, 삼층석탑, 사적비 등이 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위시하여 명부의 10대왕을 모신 곳으로 명왕전<冥王殿>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 곳 삼막사에서는 명왕전이라고 현판했다.

조선 고종<高宗>17년(1880)에 건립된 명부전은 장대석<長臺石>으로 쌓은 2단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었다. 현재는 맞배지붕에 방풍판(비바람을 막기 위해 처마가 없는, 지붕의 박공 부분에 대는 널판)까지 시설되어 있으나 원래 팔작지붕이었던 것을 개수한 것으로 생각된다. 공포는 조선 말기의 일반적인 주심포계(주심포 : 기둥 윗면에만 사각형의 주두를 올려 놓고 그로부터 여러 부재들을 짜 맞춰 올라가면서 처마를 받치는 공포 형식) 형식으로 귀포(처마를 안정되게 받치고 처마의 무게를 기둥이나 벽으로 전달하기 위해 여러 부재들을 짜 맞추는 공포 가운데 모서리에 꾸며진 공포)의 용머리 조각 등 장식적인 요소가 많이 사용되었다.


2003-05-31 14:5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