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변원신]안양시민신문 그시절 안양이야기(8) 박달동(博達洞)

안양똑딱이 2026. 10. 20. 17:26

1960년대 박달동의 모습 . 뒤쪽으로 초가지붕과 전봇대가 눈에 띈다

 

박달동의 박달은 ‘밝다’, ‘밝은 산’ 또는 ‘밝은 땅’의 뜻으로 보기도 한다. 또 배우리 선생의 ‘우리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에 따르면 ‘높은 산’의 뜻도 가진다.

 

박달1동은 조선시대에는 금천현 현내면 박달리였다. 정조 때 만안교가 가설된 후 시흥현 현내면 박달리로 개청됐다. 후에 1973년 7월 안양시 박달동이 됐다. 박달1동사무소 일대는 ‘먹해이 들’이라고 불렀는데 박토여서 농사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 건설로 마을이 폐동됐다.

 

박달2동은 자연취락지역으로 수리산 서쪽 끝 산에서 줄기를 따라 크고 작은 산으로 이뤄졌다. 햇골, 선녀골, 곤두레미 고개와 남쪽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이밖에도 능골, 동수암, 막상골, 미름물, 범고개, 붓골, 삼봉마을 등의 부락이 있었다.

 

대농단지 초입에는 어수정이란 우물이 하나 있었다. 이 우물은 200년 전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능행을 하기 위해 안양에서 잠시 쉬다가 갈증이 나자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전해질만큼 안양 일대에서 수질이 가장 우수했다. 일제 때 일본인이 안양 전지역의 수질을 조사한 결과, 현 박달동과 안양2동 경계지는 물이 제일 많이 고이는 지점이었다. 때문에 조선직물주식회사를 건립, 펌프시설을 설치하고 직물을 제조, 광목과 군복 등 2차 대전 시 군수물자로 공급했다.

 

안산, 시흥, 광명, 인천의 서부관문인 박달동은 지금의 박달삼거리에서 곤두레미 고개에 이르는 지역은 산세와 땅이 비옥하고 수원이 풍부했다. 농업에 최적이어서 일찍부터 취락이 발달했다.

 

그러나 1930년 일제가 이곳 농가를 전부 이주시켰다.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을 건설했고, 2차 대전을 위한 탄약 저장고와 군수물자를 비축한 창고가 생겼다. 일제가 말레이시아와 싱가폴을 침범할 때 사용하기 위한 엄청난 양의 탄약을 저장했고, 인천방향으로 운반했다.

 

군수물자 비축 창고는 해방 후 미군이 탄약고로 사용했다. 현재는 탄약고 및 2개 군부대가 서울일부지역 예비군 훈련장으로 사용중이다. 탄약저장고 지역은 현재 그린벨트 구역 및 군사보호구역이 많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안양발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지적도 있다.

 

박달동은 또 지리적으로 안양천과 박달동을 끼고 있다. 때문에 교통의 발달로 6· 70년대부터 만도기계, 삼아알미늄, 노루표 페인트, 동서유리 등의 기업이 들어섰다.

 

이 일대는 공업, 준공업 지역으로 90여 개의 공장이 건설되면서 공장지대로 변모되기 시작했다. 후에 우성아파트, 극동아파트, 금호아파트 등이 자리 잡았고, 농촌지대가 시가지로 점차 바뀌었다.

 

교육시설로는 안양고등학교가 있다. 만도기계는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그 자리에 한라비발디 아파트가 들어섰다.

 

[편집자 주]안양시민신문의 기획 연재 및 지역 향토 기록에서 다뤄진 '그 시절 안양 이야기'는 해방 전후부터 1960~7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 이전, 안양의 소박했던 동네 풍경과 삶의 애환을 담은 대표적인 지역사 콘텐츠로 작고하신 고 변원신 어르신께서 연재의 글을 쓰셨다.

 

고 변원신 선생은 1933년 현재 안양9동인 과천군 하서면 후두미(과거 안양3동에서 분리)에서 태어났으며 군 제대후 20대때 시흥군 안양읍 서기로 시작, 안양3리 이장과 초대 안양시의원, 새안양회 회장, 안양시새마을회 초대회장, 사랑의집수리 이사장, 고충처리위원장, 안양시한일친선협회  회장, 안양시 프로축구 LG연고이전 범시민대책위원회 위원장, 안양권 4개시 행정구역 통합추진 안양시위원회 상임대표, 안양시공직자윤리위원장, 협심새마을금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행정과 시민사회 등 전 방위에 걸쳐 두루 소통하면서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여 1960년부타 2000년대까지 안양읍 시절부터 안양시뿐 아니라 과거 시흥군 구역 전반에 걸쳐 지역사회 발전 방향에 대한 원로의 입장에서 고견을 제시하는 등 행정 업무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 안양시정과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존경받았던 원로 인사로 2015년 9월 6일 오전 5시18분 82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참고 글]

박달동은 안양의 변방...원래 시흥군에 속한 변두리 시골마을, 박달리였다. 일제는 1930년대 제국주의 대륙침략을 노골화하며 병참기지화의 첨병으로 이 넓은 부지에 탄약고를 세웠고 대대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밀려나고 해방이후로도 이 지역은 국방부 차지로 부대와 탄약고가 유지됐고 최근에는 정부사령부가 부지를 넓히며 들어와 있다. 정부사령부가 들어올때 주민들의 반대시위가 있었다. 국방부는 타협책으로 이곳 주민들의 숙원인 중학교를 군부지옆에 짓게 토지 일부를 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