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여주에서 태어나 1970년 10살때 안양으로 이주한후 만안초교, 안양중학교, 유신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찬응은 1979년 세종대학교 회화과 재학 시절부터 안양, 수원을 중심으로 한 지역미술 활동을 시작했다.
1980년 ‘청년화실’을 운영, ‘포인트’ 전에 참여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7년 그림사랑동우회 우리그림, 1989년 안양문화운동연합, 1989년부터 1999년까지 안양지역 젊은 미술인그룹 '우리들의 땅'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2002년 대안예술공간 스톤앤워터를 통해 공공성, 지역성, 생태성에 기반한 예술 활동을 펼쳤다.
2010년 사회적기업 (주)소셜아트컴퍼니-SAC을 설립하고 새로운 문화예술서식지운동을 펼쳐왔다.
2012년 일맥아트프라이즈에서 커뮤니티아트 예술가 상을 수상했다.
2013년 군포문화재단에 근무하면서 그림책박물관공원 건립을 추진했다.
2020년 지역기반예술연구소 ‘LBAR’를 설립하고 공공미술과 교육예술 활동을 펼쳤다.
2020년 군포문화재단 본부장직에서 퇴직한후 자유로운 삶을 갈구하며 신안군 비금도, 제주 북촌리, 옥천 청마리, 의왕 월암동 등으로 옮겨 다니며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또 프랑스의 베네쿠트, 고메쿠트, 남프랑스 뚜르즈 가베로니, 노르망디 해안가 절개지까지 ‘표류’ 생활을 이어왔다. 현재는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23년 ‘표류‘ 를 주제로 한국과 프랑스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2024년 그림책<소년날다> 출간, 원화전을 열었다.
[박찬응 페북에서]
안양예술공원에 자라한 <두나무아트큐브> 초대전 "한바탕 봄꿈, 노르망디 랩소디" 전시를 앞두고 김종길 평론가가 박찬응 작가론을 세편에 나누어 페북에 올렸네요! 화업45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셔서 고맙고 황송합니다! 다시 힘내서 잘살아야 겠네요! ㅎㅎ
한바탕 봄꿈, 노르망디 랩소디
4359년 2월14일부터 3월4일
#두나무아트큐브(설날 당일, 월요일 휴관)
[김종길 평론가의 박찬응 작가론]
미술평론가 김종길은 1968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나 경희대 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석사, 국민대 대학원 미술이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모란미술관 선임학예연구사, 경기도미술관 교육팀장과 학예팀장, 경기문화재단 수석큐레이터를 역임하고 현재 문예진흥실장으로 활동중이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신인평론상, 이동석전시기획상, 김복진미술이론상 등을 수상했다. 1989년 문화패 갯돌 산하 미술패 대반동에 들어가 활동했고, 해원 씻김굿 형식의 실험극 「숲」을 쓰고 연출했다. 이후 큐레이터와 미술평론가로 살면서 우리 근현대사의 옹이 진 사건들과 생태 미학에 주목하며 행위예술, 민중미술, 제주 4·3 미술, 자연미술, 바깥미술 등을 연구하고 있다. 녹색대학에서 강의했고, 성프란시스대학, 경기 지역 자활 인문학, 지순협 대안대학, 다사리문화기획학교, 하늘배곧의 생성과 기획에 참여했다. 모란미술관,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미술관에서 일하며 《경기천년도큐페스타: 경기 아카이브_지금,》, 《시점(時點) 시점(視點)?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 등을 기획했고, 저서로 『포스트 민중미술 샤먼 리얼리즘』(2013), 『한국현대미술연대기 1987~2017』(2018) 등이 있다.
[작가/기획자 연구 _ 박찬응(1)
‘낮힘’과 ‘산숨’으로 일으키다
- 박찬응 예술 40년의 ‘보충대리’ 연대기
(‘낮힘’은 하심(下心)이다. 낮은 자리로 가는 마음이니, 그 스스로 낮은 자리에 서겠다는 뜻이다. ‘산숨’은 생기(生氣)다. 낮은 자리에서 짓고 일으키는 숨이니, 낮은 자리가 곧 살아있는 숨의 자리라는 뜻이다. 미술운동에 뛰어들었을 때도 그랬고, 기획자이자 작가로 산 삶도 그랬다.)
박찬응 예술의 여정은 제도권(혹은 권력)이 가진 부정하고 부패한 ‘끼리끼리(Kartell)’에 맞서고, 시대정신을 크게 나타내지 못하는 불구의 미술에 맞서면서 비롯된다. 그는 스스로 ‘사건을 짓고 일으키는’ 작가/예술가이기를 결심하고 길을 나섰다. 아마도 그것은 강렬한 자각이었을 터이다.
1979년 세종대 미술대학에 입학한 청년 ‘예술가’는 아카데미즘의 전형인 석고 데생 수업을 거부하며 기성의 안일함에 균열을 냈다. 대학에서 마주한 아카데미즘은 시대의 한복판을 뚫지 못했다. 그것은 권위도 아니고 전위도 아니었다. 니체가 갈파한 ‘거룩한 긍정’을 실천하는 아이처럼, 그는 강의실 대신 학교 옥상에 방치된 철근과 쓰레기를 소재로 자신의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탐색했다.
이렇듯 ‘튀고 맞서는’ 기질은 1980년 수원지역 최초의 현대미술 소집단인 ‘포인트(POINT)’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학생이라는 신분보다 스스로를 ‘작가/예술가’로 이름 부르는 존재론적 선언을 앞세웠다. 검열과 억압이 횡행하던 엄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결코 창작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미술계/제도는 물론, 아카데미즘 형식을 거부하고 ‘난데없는 짓짓’을 향해 투신한 그의 초기 행보는 40년 예술 인생을 곧추세운 가장 강력한 내적 동력이 되었다. 이는 허물어지고 무너진 폐허 위에서 회복의 ‘산숨(生氣)’을 틔워 올리는 박찬응 미학의 숭고한 서막이자, 평생을 이어갈 자발적 표류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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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 주체성의 형성과 제도권 미술에 대한 저항 (1979~1981)
박찬응의 작가적 자존감은 멀리 열 살 무렵까지 머물렀던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의 외딴집으로 소급된다. 일곱 살 소년의 눈앞에 나타나 구멍 난 냄비를 때우고, 버려진 양철 조각과 나무토막으로 호루라기와 장난감 총을 지어내던 ‘땜장이’와의 경이로운 조우는 그에게 화가(예술가)에 대한 최초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2005년 출간된 『미술전시 기획자의 12가지 이야기』(한길아트)에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글을 쓰는 중에 새삼스럽게 35년 전쯤의 오래된 기억이 달려온다. 하늘과 땅과 산과 나무들 속에 집이 하나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아마 겨울이 막 녹아내리기 시작한 초봄의 기억일 것이다. 겨울 내내 한 사람의 외지인도 오지 않던 집에 등에 무거운 들짐을 지고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땜장이였다. 어머니는 겨우내 모아두었던 구멍난 냄비와 솥단지들을 내어놓았다. 땜장이가 마당 한편에 땜질도구를 펼쳐 놓았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신기했다. 반나절 동안 땜질을 마친 땜장이는 내게 여러 가지 장난감을 만들어주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양철을 가위로 오리고 구부리고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넣어 입으로 불어보니 호루룩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그는 나무토막을 깎고 다듬고 인두로 무늬를 내고 부러진 우산대를 양철조각으로 연결해 장난감총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경이로웠다. 땜장이는 저녁이 다 될 때까지 그리하다가 어디선가 구해온 손바닥보다 조금 큰 나무판에다가 인두를 달구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불에 달구어진 인두가 널빤지에 닿은 순간 하얀 연기 속에 그림의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술연필처럼, 댕기머리 처녀의 옆모습을 멋지게 그려서 내게 주고는 저녁노을을 등지고 떠나갔다. 그림을 우두커니 바라보다 아침나절에 잠깐 화로재를 비우러 나왔던 고모의 옆모습이었다. 그가 지금껏 나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걸 보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보충대리공간과 연관이 있는 것도 같다. 실제로 내 꿈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소년에게 화가란 곧 결핍을 메우고 ‘없(無)’에서 ‘있(有)’를 ‘지어내는 자’였다. 이러한 유년의 원형적 기억은 훗날 그가 주창한 ‘보충대리’와 ‘짓고 일으키다’의 미학적 씨알이 된다.
따라서 미술대학에 입학한 청년 박찬응이 스스로를 제도적 교육의 대상인 ‘학생’이 아닌 자율적 창작 주체인 ‘작가’로 규정하며 발현된 정체성은, 아카데미즘에 대한 단순한 반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유년의 둠벙에서 싹튼 ‘지어내는 자’로서의 실존적 확신이었다. 그는 입학 직후부터 아카데미즘의 상징과도 같았던 석고 데생 중심의 실기 교육에 강한 회의를 느꼈다. 아그리파 석고상을 대상으로 한 데생 수업에서, 이미 입시과정을 통해 3년여간 반복해 온 형식을 답습하는 것에 반발하여 수업 거부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는 작가/예술가로서의 자존감이 학문적 제도보다 앞서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초이다. 실제로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대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는 작가라는 의식이 굉장히 강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아이는 순수이며 망각이고,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이라고 읊조린 그 아이의 심성을 닮았던 것이리라. 본디 예술이라는 짓거리는 난데없이 일어나는 법이다. 누군가 시켜서 하는 짓은 ‘참짓’이 될 수 없다. 아니 ‘늘짓’이 결코 될 수 없다. ‘짓짓’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짓’은 인위(人爲)가 아니라 무위(無爲)다. 더 정확히는 ‘함없 함(爲無爲)’이다. 함없에 함이 일어난다. 인위는 ‘헛짓’이다. ‘늘짓’은 상도(常道)다. ‘늘짓’에 ‘늘길’이 있다.
제도권의 교육 방식을 거부한 그의 ‘맞섬’ 기질은 학교 옥상이라는 비정형 공간에서의 설치미술 시도로 이어졌다. 연암 박지원이 “그림은 형사(形似, 모양이 닮음)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흐르는 신기(神氣, 신령한 기운)를 옮기는 것”이라고 했듯이, 그는 강의실을 벗어나 옥상에 방치된 일상의 폐기물을 소재로 조형 실험을 감행했다. 이러한 ‘짓짓/짓거리’는 당시 미술계의 주류 경향과는 궤를 달리하는 이탈적인 행보였다.
또한 실기시험 과정에서(쉬는 시간에) 대리석 조각에 횟가루를 묻혀 잔디밭에 굴리는 등의 행위는 기성의 권위와 고착화된 미학 질서에 맞서는 날 것의 표현이다. 이러한 그의 전위적 태도는 고등학교 시절 은사였던 조각가 김인겸으로부터 받은 새로운 미술에 대한 열망과 영향이 밑바탕이 된 것이다.
그의 개인적 ‘맞섬’은 1980년 수원지역 최초의 민중미술 소집단인 ‘포인트(POINT)’에 합류하면서 집단적 실천으로 확장되었다. ‘포인트(POINT)’는 처음부터 ‘민중미술’의 속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들이 ‘시점․시점’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그런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엔 오히려 청년 정신을 현대미술로 발현시키려는 의도가 더 컸다.
당시 수원 미술계는 대학 졸업 후 교직에 몸담은 중견 작가들이 주도하는 매우 보수적인 토양이었다. 그런 토양에서 ‘포인트’는 현역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현대미술의 실험성을 극대화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1980년 개최한 제2회 포인트 전시에 참여한 박찬응은 실존적 요소와 사회적 관계, 그리고 소외된 삶이라는 주제로 새로운 미학 담론을 형성하고자 했다.
특히 1980년이라는 엄혹한 정치 상황은 그의 예술 활동에 사회적 긴장감을 부여했다. 당시 포인트 전의 팸플릿은 계엄 당국의 검열을 거쳐야만 발행될 수 있었는데, 박찬응을 비롯한 회원들은 도청에서 육군 소령으로부터 ‘포인트’의 의미에 대한 추궁을 받기도 했다. 그런 압박 속에서도 그들은 창작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렇듯 1979년에서 1981년에 이르는 박찬응의 초기 예술세계는 제도적 아카데미즘에 대한 단호한 거부와 지역적 한계를 돌파하려는 실험정신, 그리고 시대적 고통을 온몸으로 감각하는 예민한 작가 주체성이 결합된 시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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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점․시점(時點視點): 시대정신의 내면화와 탈중심적 미학의 실천 (1984~1985)
그의 예술 생애에서 1982년부터 1983년까지의 군 복무기간은 창작의 공백기가 아니다. 그는 작가 주체성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 사회에 대한 저항정신을 내면화하는 결정적인 ‘상처’이자 변곡점이었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역사를 역사적으로 구상한다는 것은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의 순간에 예기치 않게 번뜩이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했는데, 그는 군 생활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규정하며 당시의 억압적인 시대 상황에 순응할 것인지 혹은 저항할 것인지에 대한 실존적 고뇌를 거듭했다. 이러한 내적 단련은 1984년 제대 이후 기존의 현대미술 그룹인 ‘포인트(POINT)’를 동료들과 함께 ‘시점․시점(時點․視點)’으로 이름을 바꾸는 실천 행동으로 이어졌다.
소집단 이름을 ‘포인트’에서 ‘시점․시점’으로 바꾼 것은 그저 영어를 한자어로 치환한 행위로만 볼 수는 없을 터이다. 그것은 ‘현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시대적 물음에 대한 응답이자,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을 작품에 투영하겠다는 미학적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시점(時點)’과 ‘시점(視點)’은 각각 시대 상황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의 눈을 의미하며, 이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 사회 내 발언을 병행하겠다는 진취적인 태도를 반영한다.
때를 알아차리는 것은 시간을 재는 데 있지 않다. 때 사이사이, 아니 예술가 스스로 ‘때새(時間)’를 타고 가는 데 있다. 산다는 것은 늘 지금 여기 한복판에서다. 이러한 철학적 변화는 1985년 순회전인 <군중 속에서>를 통해 구체화 되었다. 박찬응은 이 전시를 통해 서울 중심의 중앙 집중화된 미술문화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는 수원, 안양, 부천과 같은 위성도시들이 문화적 베드타운으로 공동화(空洞化)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주변부’로 명명된 지역의 대중과 직접 소통하고자 하는 탈중심적 미학을 시도한다.
당시 그가 선보인 설치 작업은 이러한 시대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대형 비닐하우스용 비닐 속에 수많은 신문지를 구겨 넣어 전시장 바닥에 방치하듯 배치하는 아주 파격적인 조형 작품을 설치했다. 이것은 억압된 권력 아래에서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정보의 과잉,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시대의 불모성을 날카롭게 풍자한 것이다.
이 시기 박찬응의 작업은 초기 ‘포인트’ 시절의 순수 미학적 실험을 넘어,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발언하는 ‘사회 비평적 리얼리즘’으로 이행하는 중요한 미학적 가교역할을 수행했다. 1980년대 중반의 ‘시점․시점’ 활동은 박찬응이 훗날 민중미술의 현장과 공공미술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사상적 토대를 형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박찬응(2)로 이어짐
[작가/기획자 연구 _ 박찬응(2)]
3. 안양 이주와 ‘산그라픽스’의 자생적 게릴라 문예 활동 (1986)
1986년은 활동의 중심축이 수원에서 안양으로 급격히 이동하며, 예술 형식이 ‘전시’에서 ‘현장’으로 근본적인 전환을 맞이한 해였다. 이 전환의 결정적 계기는 1986년 “인천 5.3 민주항쟁”이라는 역사의 현장에서 이루어진 이억배와의 운명적인 재회였다. 당시 인천과 부평지역에서 노동운동 세력과 연대하고 있던 이억배와 재회한 박찬응은 안양지역이 지닌 노동현장의 역동성과 문예운동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안양으로의 이주를 결심하게 된다.
안양에 정착한 박찬응은 비산동 소재의 다방 지하공간을 임대하여 디자인 사무실인 ‘산그라픽스’를 설립했다. 1970년 10살 때 여주에서 안양으로 이주했다. 안양에서 만안초와 안양중을 다녔고, 수원의 유신고를 다녔다. 1979년 대학 1학년 때 비산동에서 ‘청년화실’를 81년까지 운영한 바 있고, 제대 이후(1984) 안양시 석수시장 어귀에 ‘아뜨리에 빈방’이라는 작업실을 운영하다가 그 공간을 1986년 5.3항쟁 이후 ‘카페 들풀’로 개조한 뒤 생활 기반을 마련하고, 이억배와 권윤덕 등과 합심하여 ‘산그라픽스’라는 별도의 작업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이 공간은 권윤덕, 이억배, 정유정 등이 결합하며 안양지역 문예운동의 자생적 거점으로 기능했다. ‘산그라픽스’라는 이름은 미술동인 ‘두렁’이 주창한 ‘산미술’, 즉 ‘살아있는 미술’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민족 자주정신과 대중 주체 문화를 창조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문화인류학자 미셸 드 세르토는 『일상생활의 실천』에서 말하길 “전술이란 자기만의 고유한 장소가 없는 자들의 계산된 행동이다. 그것은 틈새를 이용하고, 기회를 포착하며, 타자의 장소에서 승리를 거두는 유희다.”라고 했었다. 이 시기 박찬응의 예술 활동은 철저하게 생존과 투쟁이 결합된 이중적인 생활 양식을 띠었다.
낮에는 사무실에서 삼성출판사 등의 외주를 받아 그림책 삽화나 책 표지 디자인 등의 업무를 수행하며 활동가들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문예운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인근 다방의 영업이 끝나는 야간에는(담벼락하나 사이로 있는 다방이라는 점에서 보안이 요구됨) 철저한 위장 전술을 동반한 게릴라식 문예운동 조직으로 변모했다. 이들은 4인 1조를 이루어 밤새 민주화 유인물과 만화 전단지를 제작하고, 경찰의 감시를 피해 골목마다 배포하는 이른바 ‘피세일’ 활동을 전개했다. 새벽녘까지 활동을 마친 후 나이트클럽에서 나오는 인파 속에 섞여 해장국을 먹으며 새벽에 퇴근하는 이들의 일상은 당시 문예운동이 처했던 현실과 자생적 생존전략을 여실히 보여준다. 낮아지지 않으면 ‘산숨’은 돌지 않는다. ‘산숨’은 숨은 자리에서 먼저 돈다.
박찬응에게 있어 ‘산그라픽스’ 시기는 예술이 더 이상 ‘화이트 큐브’라는 박제된 공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골목과 치열한 노동 현장에서 대중의 숨결과 함께 호흡하는 것임을 증명한 과정이었다. 이것은 예술을 통해 삶의 결핍을 보충하고 사회적 모순을 변혁하고자 했던 실천 의지의 발현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이후 안양지역 문예운동 단체인 그림사랑동우회 ‘우리그림’과 ‘안양문화운동연합(안문연)’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징검다리가 되었다. 이처럼 1986년의 게릴라 활동은 박찬응의 예술 세계가 개인의 미학적 성취를 넘어 사회적 조각으로 확장되는 중요한 미학적 단초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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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그림’ 창립과 공동체 미학의 실천적 만개 (1987~1989)
1987년 12월, 박찬응은 안양지역의 자생적 문예운동을 체계화하기 위해 동료들과 ‘그림사랑동우회 우리그림(‘우리그림’)‘을 창립하고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하며 지역 문화운동의 중추 구심점으로 부상한다. ‘우리그림’은 당시 서구 세력의 향락적이고 소비지향적인 문화 침투에 맞서, 민중의 삶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우리 그림의 맥을 찾고 이를 현대적 미술 양식으로 창조하고자 한 실천 공동체였다. 그는 예술이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의 삶과 유리되지 않은 ‘생산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를 안양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터전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이 시기 그의 미학적 성취는 집단적 창작방식의 극대화를 통해 나타났다. 그는 5m가 넘는 대형 걸개그림인 <열사해원도>(1987) 제작에 참여하며 80년대 민주화운동의 거대한 서사를 화폭에 담아냈다. 이 작품은 광주민중항쟁부터 이한열 열사에 이르기까지의 투쟁사를 해신과 달신이 마주 보는 고구려 고분벽화 양식과 결합하여, 비극적인 역사를 승리와 해방의 집단적 신명으로 전환하는 ‘해원(解寃)의 미학’을 나타낸 것이다. 당시 전투적 리얼리즘이 지배적이었던 민중미술 지형 내에서 ‘부드러운 민중성’을 확보하려 했던 ‘우리그림’ 특유의 예술적 태도를 반영한 그림이기도 하다.
‘우리그림’ 미학의 휴머니즘적 깊이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사건은 1988년 3월 발생한 그린힐 봉제공장 화재사건에 대한 예술적 응답이었다. 그를 비롯한 ‘우리그림’ 회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희생된 22명의 여공을 위해 공동으로 <영정도>를 제작하였다. 이는 죽음의 현장을 고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영혼을 피안(彼岸)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숭고한 위무의 발현이었다. 전통 불화기법을 계승한 이 작업은 예술가가 시대의 고통을 어떻게 감각하고 치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그림’의 깊은 고뇌이기도 했고.
원(寃)은 싸워서 푸는 게 아니다. 넓고 크게 보듬어야 풀린다. ‘풀린다’라는 건 없애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살리는 ‘살림’이다. 조셉 캠밸은 『신화의 힘』에서 “제의(Ritual)는 신화의 실현이다. 제의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공동체의 고통을 공유하고, 그 고통을 보편적인 생명의 신비 속으로 복귀시킨다.”라고 하지 않았나.
나아가 ‘우리그림’과 더불어 박찬응은 예술의 민주화를 위해 교육적 지평을 넓혔다. 시민미술학교인 ‘신바람 나는 그림학교’를 기획하여 시민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표현하도록 독려했으며, 대우전자 부품 노조 미술패인 ‘까막고무신’ 결성을 견인하며 노동자들이 직접 걸개그림을 제작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전수했다. 이러한 활동은 예술이 전시장의 틀을 벗어나 대중의 일상과 노동의 현장으로 스며드는 ‘생활미술’의 선구적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우리그림’ 시기의 박찬응은 기획자이자 작가로서, 붕괴된 사회의 파편들을 예술적 연대를 통해 회복시키려는 ‘공동체 미학’의 예술가로서 확고한 위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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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직 운동의 확장과 예술 본령에 대한 비평적 고뇌 (1990년대)
1980년대 후반의 격정적인 거리 투쟁이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직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변모함에 따라, 박찬응의 예술 궤적 역시 중대한 전환기를 맞이한다. 1988년 10월, ‘우리그림’을 비롯한 안양지역의 문화예술 단체들이 결합하여 ‘안문연’이 창립되면서 그는 사무국장과 부의장, 의장 등 중책을 맡아 일을 했다.
이 시기의 박찬응은 전방위적인 문예 조직 운동의 설계자로서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관리하고, 조직의 자립을 위한 운영 자금을 마련하는 등 행정적·정치적 업무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헌신은 역설적으로 ‘작가/예술가’ 박찬응에게 ‘자기 소진’이라는 실존적 위기를 가져왔다. 그는 스스로를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는 활동가”로 규정하면서도, 정작 화폭에서 멀어지는 자신을 보며 “작가로서의 조형적 역량이 행정적 분주함 속에 매몰되고 있다.”라는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된다.
활동가 중심 조직의 한계와 개인적 소진을 미학적으로 돌파하기 위해 제시된 대안이 바로 미술동인 ‘우리들의 땅’(1989~1999) 활동이었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지속된 이 동인 활동은 박찬응이 안양이라는 지역 특수성을 넘어 보편적인 미술 담론으로 나아가는 가교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우리들의 땅’ 기획전을 통해 대중의 삶과 밀착된 예술을 지향하면서도, 전문 미술인으로서 가져야 할 독자적인 조형 언어를 탐구하는 데 몰두했다.
이 시기 박찬응은 “예술이 어떻게 선전·선동의 도구를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면을 건드릴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면서 작가로서의 본령을 회복하기 위한 사투를 벌였다.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예술가는 작품의 근원이다. 작품은 예술가의 근원이다. 어느 쪽도 다른 쪽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예술은 이 둘을 넘어서는 ‘진리의 일어남’이다.”라고 말한 까닭처럼.
1990년대 초반, 사회운동의 열기가 일상 영역으로 전이되는 흐름 속에서 박찬응은 예술의 근원을 재탐색하기 위해 내면으로 침잠하기 시작한다. 그는 불성사의 홍대봉 스님으로부터 고려 불화를 전수 받으면서 전통미학의 선과 색을 심도 있게 연구했다. 이 배움의 과정은 고전 기법을 습득하는 차원을 넘어, 80년대 투쟁 과정에서 붕괴된 개인의 서사와 시대의 상처를 우리 그림의 원형과 생명력으로 복구하려는 미학적 수행이기도 했다. 이때 단련된 ‘우리 선과 우리 색’에 대한 통찰은 훗날 그가 보여준 ‘우주 숨결’의 도상학적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권윤덕·정유정·이억배 등과 함께 공동체 창작방식으로 제작한 <구름가족 이야기>(1990)는 개인 작가의 성취를 넘어 한국 그림책 운동의 기념비적인 지점이 되었으며, 예술이 어떻게 공동체 기억을 보존하는 매체가 될 수 있는지를 증명하였다.
1990년대는 조직가로서의 박찬응이 작가로서의 자아를 재발견하고, 훗날 2000년대에 전개될 ‘보충대리’ 미학의 사상적 자양분을 축적한 시기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고통스러운 성찰과 침잠은 그가 기획자의 외피를 벗고 다시 전업 작가이자 시대의 치유자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내적 기반이 되었다. 그에게 90년대는 소진을 통한 비움의 시간이자, 동시에 새로운 예술적 봄을 맞이하기 위한 인고의 겨울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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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시장(Market)’의 미학과 사회적 조각의 실천 (2000년대)
2000년대에 접어들며 그의 예술세계는 대안 예술 공간의 창출과 ‘보충대리’라는 독자적인 미학체계의 정립을 통해 그 정점에 도달한다. 2002년 안양 석수시장에 설립한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는 80년대부터 이어온 그의 현장 중심적 사고와 90년대의 미학적 성찰이 결합된 결정체였다. 다산 정약용은 “기술(技藝)이란 인간의 삶을 보충하고 어루만져, 공동체를 살리는 실천적 도구여야 한다.”라고 했고, 자크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에서 “보충은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결핍을 드러내며 그 자리를 대리함으로써 비로소 전체를 완성하는 기이한 현존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빈탕은 없는 데가 아니라, 늘 도는 데다. 빈 데가 있기에 숨이 돈다.
『시장에서 예술하기』(2010 아침미디어 간)에 기록된 스톤앤워터의 실천은 ‘대안공간’이라는 명칭이 지닌 제도적 기대를 스스로 낮추는 데서 출발한다. 이 공간은 미술관의 기능을 대체하려는 또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도시의 틈새에 발생한 결손을 잠시 대신 떠안는 임시 구조물에 가까웠다. 박찬응이 말한 ‘보충’은 완성을 향한 덧붙임이 아니다. 그것은 당장 무너질 것 같은 삶을 지탱하기 위한 최소한의 받침이다. 시장의 빈 점포는 전시장으로 ‘전환’되기 이전에, 이미 삶이 빠져나간 흔적이 고여 있던 장소였다. 스톤앤워터는 그 흔적을 미학적으로 재단하기보다, 먼저 머물게 하고, 고이게 하고, 숨이 돌 수 있도록 내버려둔 공간이었다.
박찬응은 ‘예술이 삶의 결핍을 보충하고 대리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화두로 던지며,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쇠락해 가던 재래시장을 거대한 예술적 실험실이자 삶의 현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그가 시장으로 들어간 까닭은 미술제도의 외부를 ‘선택’한 결과라기보다, 도시의 균열과 생계의 압력,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지속 가능성 사이에서 떠밀리듯 도달한 자리였다.
그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자신을 “기획을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상황에 대응해 온 사람”으로 회고한 바 있다. 이 회고는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를 이상적 대안공간의 실현으로 읽게 하는 모든 미화를 경계하게 만든다. 스톤앤워터는 새로운 미술 제도를 꿈꾸기 이전에, 이미 손상된 도시와 삶의 결손을 당장 ‘어떻게든 버텨내기 위한 응급 처치’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박찬응에게 시장은 이상향이 아니라, 남아 있던 자리였고, 예술은 선택된 기획이 아니라 생존을 동반한 대응의 언어였던 것이다.
이 시기 박찬응이 주창한 ‘보충대리’의 미학은 주류 미술 제도가 외면해 온 삶의 틈새를 예술적 행위로 메우고, 소외된 타자의 목소리를 ‘예술의 언어로 대신한다’는 전복적인 사유를 담고 있다. 석수시장에서 전개된 활동은 화이트 큐브라는 박제된 공간을 벗어나 상인들의 일상과 작가의 창작이 유기적으로 공존하는 ‘사회적 조각’의 실천이었다. 특히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인 SAP_ARIA(Seoksu Art Project-Anyang Residency in Asia)를 통해 전 세계의 작가들을 시장 통으로 불러들임으로써, 지역적 특수성을 지닌 시장 공간을 글로벌한 예술 담론의 장으로 확장시켰다.
그의 기획은 시장의 폐점된 점포들을 전시장과 작업실로 뒤바꾼 <시장에서 예술하기>(2009)를 통해 예술의 공공성을 극대화 하였다. 그 첫 비롯은 2004년 안양천프로젝트였다. 그는 안양천이라는 생태적 공간에 예술적 사유를 입힘으로써 도시의 역사와 기억을 회복시키고, 물리적 공간을 심리적이고 미학적인 공간으로 재구조화했던 것이다. 이후로 2005년 오픈더도어, 2006년 가가호호, 2007년 국제레지던시프로그램으로 발전하였다. 시장 상인들에게 예술은 더 이상 낯선 구경거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보충해 주는 동반자가 되었으며, 작가들에게 시장은 무궁무진한 서사가 살아 숨 쉬는 창작의 ‘둠벙’이 되었다.
스톤앤워터 시기는 박찬응이 1980년대에 견지했던 ‘현장성’이 21세기의 ‘커뮤니티 아트’와 ‘도시 재생’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한국 대안공간 운동의 기념비적 사례다. 그는 기획자로서 활동하면서도 자신의 창작적 에너지를 공간 속에 녹여내어, 붕괴된 일상의 폐허 속에서 예술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회복의 미학’을 완성해 나갔다. 이 시기의 성취는 박찬응 예술이 개인의 성취를 넘어 어떻게 공동체와 시대의 통증을 치유하는 ‘우주 숨결’로 나아갈 수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학술적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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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응(3)으로 이어짐
[작가/기획자 연구 _ 박찬응(3)]
7. 제도적 공공성 내에서의 ‘사회적 조각’과 그림책의 도시 담론 (2013~2020)
2013년, 박찬응은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를 통해 축적한 대안적 공간 운영의 경험을 공공 제도의 영역으로 확장하며 군포문화재단 문화교육본부장으로 부임한다. 7년간 이어진 이 시기는 그가 80년대부터 견지해 온 ‘현장 중심의 예술운동’이 어떻게 공공정책과 행정의 틀 안에서 보편적 시민문화로 안착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 ‘거버넌스적 실천’의 시기였다. 그는 대안공간 디렉터 시절의 유연한 상상력을 관료 조직에 이식하며, 예술이 단순히 향유의 대상을 넘어 도시의 생태를 바꾸는 ‘사회적 기제’가 되어야 함을 몸소 실천하였다.
이 시기 박찬응의 대표적인 성취 중 하나는 유휴 공간의 미학적 재생을 다룬 <파출소가 돌아왔다> 프로젝트였다. 80년대와 90년대 그가 보여주었던 ‘장소 특정적’ 예술론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지역 내 방치된 파출소 건물을 시민들의 문화적 아지트로 탈바꿈시키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하는 등 정책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이를 통해 예술이 권력 공간의 무너진 기능을 보완하고 그것을 시민의 일상으로 되돌려주는 ‘보충’의 과정을 공공행정의 언어로 풀어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정치의 본질은 새로운 시작에 있다. 그것은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을 공동의 장으로 가져오는 기적과 같은 행위다.”라고 했다. 군포 시기의 미학적 집대성은 2017년 ‘NEXT 경기 창조오디션’에서 대상을 수상한 <군포 그림책박물관공원> 기획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는 1990년대 그가 권윤덕 등과 함께 시작했던 그림책 운동과 2000년대 스톤앤워터의 공간 실험이 결합된 결과물이었다.
그는 “상상이 없는 도시는 죽은 도시”라는 신념 아래, 그림책이라는 매체를 도시의 브랜드이자 시민 교육의 핵심 콘텐츠로 격상시켰다. 단순한 박물관 건립을 넘어 공원 전체를 서사가 살아있는 미학적 공간으로 설계하려 했던 그의 구상은, 80년대의 ‘공동체 미학’이 21세기에 이르러 ‘창의적 도시 재생’이라는 정책적 비전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가 되었다.
군포문화재단에서의 7년은 박찬응이 ‘작가’이자 ‘기획자’를 넘어 ‘문화행정가’로서 자신의 예술철학을 사회 시스템의 일부로 편입시킨 과정이었다. 그는 이 시기 동안 평생학습과 문화예술교육을 결합하여 시민 스스로가 자기 삶의 ‘작가’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에게 이 시기는 현장의 뜨거움과 제도의 차가움을 조화시켜, 지속 가능한 예술 생태계를 구축하려 했던 ‘행정적 수행’의 연대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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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작가적 본령으로의 회귀: ‘표류’하는 소년의 산숨과 회복 (2020~현재)
2020년, 박찬응은 7년여의 군포문화재단 본부장직을 마무리 지으며 화려한 행정가적 외피를 벗어 던졌다. 그는 제도권의 안락한 정주(定住) 대신 자발적인 야인(野人)의 길을 택하며 다시 안양 석수시장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곳은 과거 기획의 산실이었던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였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박찬응의 작업실로 쓰였고, 2007년 이후에는 ‘카페들풀’로 개조하여 운영되다가 2001년에 스톤앤워터라는 전시공간으로 개관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지역기반예술연구소–LBAR로 사용하고 있다.
10여 년 전 공공미술의 거점이었던 그 공간은 이제 작가의 ‘창작의 둠벙’으로 변모했다. 나는 지난 2023년의 평론 「짓고 일으키다」에서 이 귀환을 “물웅덩이 둠벙에 예술이 고이고, 생태계 선순환을 이루는 공간으로의 회복”이라 명명했다. 한마디로 온갖 생명이 깃들과 삭아 다시 태어나는 예술적 둠벙이 바로 그의 작업실인 셈이다. 작가 박찬응에게 이 ‘둠벙’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장소를 넘어, 그간 억눌러왔던 예술적 갈증을 채우고 삶의 결핍을 스스로 보충하는 성스러운 수행의 장이 되고 있다.
작가적 본령으로 돌아온 박찬응이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자신의 내면에 깊이 박혀있던 ‘소년’의 기억이었다. 2024년 출간된 첫 창작 그림책 《소년, 날다》는 그 회귀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이 책은 작가가 아홉 살 무렵 매일 밤 겪어야 했던 전쟁에 대한 공포와 식은땀 흐르던 악몽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어린 시절의 공포는 유년의 세계를 붕괴시키는 거대한 힘이었으나, 이제는 그 폐허 위에서 날아오르는 소년을 본다”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이 작품에서 소년이 밤하늘을 가로질러 비상하는 행위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적 압박과 개인적 트라우마라는 지상의 중력을 이겨내고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회복의 미학’이다. 박찬응의 붓질은 ‘난데없는 있음’인 ‘짓짓(繪畵)’과 ‘꼴짓(萬物)’을 통해 유년의 상처를 ‘산숨(生氣)’으로 북돋는다. ‘짓짓’은 난데없이 생겨나는 짓짓이요, ‘꼴짓’은 스스로 그러한 꼴짓이다. 고창 책마을 해리에서 열린 원화전은 그림책이라는 압축된 서사가 수묵의 자유로운 필치와 만났을 때, 어떻게 상실된 유년을 치유하는 입체적인 울림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2023년 안양 두나무 아트큐브에서 열린 초대전 <표류 이야기(histoire de dérive)>는 박찬응 후기 예술세계의 철학적 지향점을 명확히 보여준 전시였다. 여기서 그가 주창한 ‘표류’는 정처 없는 방황이 아니었다. 박찬응의 ‘표류’는 정주에 실패한 예술가의 후퇴가 아니다. 『시장에서 예술하기』에서 그가 반복해 언급하는 ‘유영’이라는 표현은, 특정 장소에 뿌리내리는 정착의 신화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뉴타운 개발과 재개발의 시간표 속에서 그는 ‘지속 가능한 마을’이라는 구호보다, 이주 이전까지 이어지는 임시적 관계의 밀도를 선택했다.
이 유영의 태도는 방향 상실이 아니다. 그것은 고착된 제도와 역할로부터 스스로를 풀어내기 위한 윤리적 이탈에 가깝다. 그에게 표류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이 아니라, 그때그때 요구되는 자리에 잠시 머물며 책임을 다하는 방식이다.
그는, “표류는 고착된 일상과 제도의 틀에서 벗어나 감각의 근육을 깨우는 가장 능동적인 예술 행위”라고 정의한다. 올해 새로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았던 ‘싶뜻(欲心)’을 덜어내고 스스로를 다시 ‘낮힘(下心)’의 상태로 가져갔다. 추사 김정희는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쌓인 뒤에야 비로소 ‘괴(怪, 범상치 않은 개성)’함이 나오며, 그 끝은 가장 어수룩한 ‘졸(拙)’의 경지에 닿는다.”라고 했다. 또한 장자(莊子)는 「지락(至樂)」 편에서 “지극한 즐거움은 즐거움이 없는 것이요, 지극한 기림은 기림이 없는 것이다. 천지는 무위(無爲)하되 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말을 비웠다.
박찬응은 어느 순간부터 ‘빈탕한데’에 머물고 있다.
전시장에 걸린 수많은 작품은 인위적인 기교를 배제한 채 먹의 번짐과 여백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나누지 않고, 오직 ‘현재’라는 찰나 속에 우주의 질서를 담아내려는 시도다. 나는 그것을 두고 “월암의 바람 햇살을 그리듯, 가고 오는 때새(時間)에 몸을 맡긴 채 지어낸 산알의 씨알 같은 그림들”이라고 말했다. 박찬응은 이제 ‘그리는 자’로서의 ‘높자리’를 내려놓고 자연의 숨결에 자신의 붓질을 맞추는 ‘산숨’의 경지에 다다른 듯 보인다.
그리고 그의 표류는 국내를 넘어 프랑스 노르망디의 해안선으로 넓게 확장되었다. 최근 그가 매진해 온 <한바탕 봄꿈, 노르망디 랩소디> 전시의 작품들은 전쟁의 흔적이 새겨진 폐건축물과 차가운 바다를 소재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화면 속 노르망디는 비극의 현장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노르망디의 해안선에서 붕괴된 문명의 파편을 발견하고, 그것을 거대한 ‘우주 숨결’ 속으로 편입시킨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노르망디의 폐허를 마주했을 때, 그것은 아홉 살 소년이 느꼈던 공포와 맞닿아 있었으나, 이제 내 붓은 그 폐허를 넘어 영원한 생명의 순환을 노래한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40년 전 수원과 안양의 아스팔트 위에서 시대의 통증을 기록했던 청년 박찬응은 이제 노르망디의 윤슬 속에서 인류 보편의 회복을 꿈꾸는 ‘예술가’가 되었다. 그의 그림은 이제 시각적 재현을 넘어 숨을 쉬는 행위 그 자체이며, 붕괴한 모든 것들에게 바치는 숭고한 헌사다.
박찬응의 40년 예술 연대기는 결국 ‘소년’으로 돌아가는 긴 여정이랄 수 있다. 수원과 안양의 전위적인 미술운동, ‘우리그림’과 ‘안문연’의 치열한 현장성, 그리고 스톤앤워터와 군포문화재단에서의 실험적 기획은 모두 ‘붕괴된 삶의 회복’이라는 하나의 과녁을 향해 있었다. 이제 작가/예술가 박찬응은 그 모든 사회적 성취와 행정적 짐을 뒤로하고, 다시 창작의 둠벙에 앉아 자유로운 ‘산숨’을 내쉬고 있다.
그의 예술은 “없긋(無極)이요 없비롯(無始)인 본래의 난데없음”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무너진 폐허 속에서도 기어이 회복의 싹을 틔워내는 그의 연대기는, 우리 시대 예술이 도달해야 할 가장 정직하고도 숭고한 지점이 어디인지를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다. 그는 이제 다시 소년이 되어 하늘을 날고 있으며, 그의 표류는 곧 우리가 마주할 새로운 예술적 봄의 시작이리라.
『시장에서 예술하기』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삽질’이라는 표현은 박찬응 예술의 윤리를 압축하는 몸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삽은 무엇인가를 세우는 도구이기 이전에, 땅을 파고 몸을 낮추는 노동의 상징이다. 그에게 예술은 이러한 삽질의 반복이었다. 낮아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고일 수 없고, 고이지 않으면 새로운 숨은 돌지 않는다. 시장에서의 예술은 그래서 완성이나 성과를 향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그 자리 곁에 오래 머무르며, 다시 싹이 틀 때까지 흙을 뒤집고 기다리는 느린 수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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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붕괴를 넘어선 산숨, 그 영원한 표류의 시작
‘둠벙’은 고인 물의 자리가 아니다. 삭고 삭아서 새로 샘솟는 자리다. ‘저절로 그러함’에 맡길 때, 사람은 가장 사람다워진다. ‘싶뜻(欲心)’을 내려놓으면 길은 스스로 열린다.
박찬응 연대기를 가로지르는 비평의 여정은 이제 한 지점에 다다른다. 그것은 ‘붕괴’를 목격하던 청년의 분노가 ‘회복’을 지어내는 예술가의 ‘산숨’으로 환생하는 극적인 화해의 지점이다. 그가 안양 석수시장의 창작 둠벙에 앉아 무심히 붓을 놀릴 때, 그 궤적은 일상의 결핍을 보충하는 행위를 넘어 우주의 ‘빈탕한데’를 채우는 영성의 몸짓이 된다.
그는 평생 ‘작가/예술가’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작가/예술가’ 정체성은 때로 활동가와 행정가라는 외피 속에 숨어 있었을 뿐이다. 이제 모든 사회적 중력을 이겨내고 다시 비상하는 소년이 된 그는, 노르망디의 차가운 파도 사이를 표류하며 존재의 본래적 빛깔을 길어 올린다. 그의 ‘짓짓’과 ‘꼴짓’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에 몸을 맡긴 채 내쉬는 가없는 숨결에 가깝다.
비평가로서 내가 목격한 것은 시대의 상처를 온몸으로 통과해 낸 한 영혼의 고결한 회복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표류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숨’으로 우주와 연결된다. ‘빈탕한데’에 숨을 쉬며 머물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산숨’의 도리다. 그의 붓끝에서 일어나는 산숨이 우리 시대의 모든 폐허 위에 새로운 봄의 씨알을 뿌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의 그림 속에서, 날아오르는 소년의 등 뒤로 펼쳐진 무한한 우주의 고요를 함께 호흡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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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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