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변원신 선생은 1933년 현재 안양9동인 과천군 하서면 후두미(과거 안양3동에서 분리)에서 태어났으며 군 제대후 20대때 시흥군 안양읍 서기로 시작, 안양3리 이장과 초대 안양시의원, 새안양회 회장, 안양시새마을회 초대회장, 사랑의집수리 이사장, 고충처리위원장, 안양시한일친선협회 회장, 안양시 프로축구 LG연고이전 범시민대책위원회 위원장, 안양권 4개시 행정구역 통합추진 안양시위원회 상임대표, 안양시공직자윤리위원장, 협심새마을금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행정과 시민사회 등 전 방위에 걸쳐 두루 소통하면서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여 1960년부타 2000년대까지 안양읍 시절부터 안양시뿐 아니라 과거 시흥군 구역 전반에 걸쳐 지역사회 발전 방향에 대한 원로의 입장에서 고견을 제시하는 등 행정 업무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 안양시정과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존경받았던 원로 인사로 2015년 9월 6일 오전 5시18분 별세하셨다.
“촛불의 삶이었다면 그것으로 족한다”
이 사람 변원신
경기브레이크뉴스 설원혁 기자 기사입력 2009/05/14 [21:53]
한 사람의 인생 속에는 저마다 고유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인터뷰 코너입니다. 진솔한 삶의 이야기에서 길어낸 가치는 별빛처럼 영롱하여서, 어떠한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별빛 같은 이야기가 하나 둘씩 모여, 우리가 오래 전 잃어버렸던 아름다운 밤하늘을 다시 되찾게 되길 소망합니다.
“실례합니다.”
푸른 대문을 여니 좁은 계단이 위로 뻗어있다. 콘크리트의 희뿌연 빛깔이 반짝이는 것으로 보아, 지은 지 얼마 안 된 집 같다. 하지만 이 계단의 끝에 맞닿아있는 또 다른 문을 열면, 지은 지 70여년 된 ‘집’을 만날 수 있다. 그 집은 안양 시민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곳이었고,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창구였으며, 차가운 비가 내릴 때 잠시 피할 수 있는 그늘이자 보호막이었다.
“오느라 고생 많았겠어. 목이라도 좀 축이시오.”
기자를 맞이하는 목소리에는 염려와 기품이 섞여있다. 이틀 째 지독한 감기에 걸려 고생했다는 그의 몸은 일흔 일곱의 나이에도 굳건하기만 하다. 길고 깊게 패인 주름도 그가 지나온 세월을 오롯이 말해주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악수를 건네는 큰 손에는 일꾼의 흔적이 담겨 있고, 허리를 펴고 걷는 당당한 걸음새에는 마을을 책임지던 패기가 서려있다.
70여년 된 그 ‘집’의 이름은 변원신(77) 씨이다. 1933년 11월 7일 생인 그는 일제시대와 한국동란을 거쳐 격변의 7, 80년대를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안양시에서 살아왔다. 단순히 ‘토박이’로 살기만 했다면 그 존재감이 한껏 반감되었을 터이지만, 변 씨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그의 삶은 남을 위한 순수한 봉사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전쟁과 가난 속에서
변원신 씨의 부친이 지병으로 별세한 날은 1950년 4월 23일로, 변 씨가 열여섯 살 나던 해였다. 해방 직후, 국내 정세는 매우 불안정했고 국민들의 삶은 피폐했다. 한 살 터울의 형이 군에 입대한 상황이어서, 변 씨가 동생 세 명과 어머니를 봉양해야 했다. 말죽거리에 사는 친척에게로 양곡을 얻으러 가곤 했다는 변 씨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말을 잘 잇지 못했다.
“모두가 어려운 때였으니까… 하루하루 힘들게 살았지. 그러다가 한국동란이 발발하면서 나는 다른 어른들 따라서 서대전으로 피난을 갔어요. 아마 일사후퇴 때였을 거야. 수리산을 넘어서 갔는데, 눈이 많이 내려서 고생했었어. 나중에 돌아와보니, 초등학교에 다니던 동생 둘이 안보이더군요.”
당시 변 씨의 어머니와 세 명의 남동생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안양9동에서 살고 있었다. 철수하던 북한군과 중공군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살던 산등성이 근처에서 미군을 향해 사격을 가했고, 이에 미군 측에서 포격으로 대응하여 마을 주민 마흔여덟 명이 사상하고 말았다. 그 포격으로 변 씨의 동생 두 명이 유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미군부대에서 일을 했어. 당시 안양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 중에 ‘loa 엔지니어 컴퍼니’라는 공병대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허드렛일을 시작했지. 일을 열심히 해서인지 나에게 조금씩 좋은 일을 시키더라구.”
허드렛일에서 접시 닦기로, 휘발유 담당 보조 등으로 진급(?)을 했지만 보수는 없었고, 하루 세끼 식사가 전부였다. 그래서 변 씨는 미군 식당에서 한 번 쓰고 버린 식용유를 모아다가 팔아서 생계를 해결했다. 그렇게 어머니와 막내 동생을 보필하던 변 씨에게 1954년, 입영영장이 날아왔다.
“그렇게 해병대에 가게 되었지. 58년 6월 26일날 제대할 때까지 엄청 고생했던 기억뿐이야(웃음). 그래도 미군부대 있을 때에는 잘 먹어서 볼살이 올랐었는데, 해병대 가서 훈련은 훈련대로 받고, 먹는 것은 변변치 않으니 꼬챙이처럼 마를 수밖에 없었어.”
봉사의 시작
변원신 씨는 전역 직후 영등포 소재의 경남방직에서 잠시 근무를 했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정리하고 다시 안양으로 돌아왔고, 이때부터 주위 어르신들의 권유로 안양읍 3리 서기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기 일도 만만치 않았다. 그 당시 대부분의 공문이 한자를 사용하여 작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안양초등학교(17회)를 졸업해 국문은 읽을 수 있었지만, 한문을 읽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62년도에 안양3리 이장직을 맡아서 이후로 십년을 일했으니, 그동안 작성한 서류가 얼마나 많았겠어. 그러다가 한자를 깨우치게 된 거지.”
변 씨는 마을이장을 맡으면서 경남방직에서 만난 김순임(73) 씨와 혼인하게 되었다. 하지만, 비좁은 셋방에 어머니와 막내 동생과 함께 신혼살림을 꾸려야 해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마을주민들이 나서 흙벽돌로 ‘이장님 집’을 지어주었다. 이 날의 일을 변 씨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마을일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 감사하다는 의미와, 앞으로 더 애써달라는 부탁의 뜻이 있었다고 봐요. 그래도 난 너무 감사하지. 그때부터 평생 봉사하며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아.”
이후 십년의 이장생활 중, 변 씨는 주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직접 몸으로 나서 해결했다. 물난리 때 급류에 떠내려가는 여자를 맨손으로 구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변 씨에게는 이보다도 더 가슴에 애틋하게 담아두고 있는 사례가 있다.
“한 번은 마을주민 한 분이 날 찾아오셨어. 어린 아들, 딸을 둔 엄마인데 ‘이장님 나 좀 살려주쇼’ 그러는 거야. 그래서 봤더니 몸이 많이 불편하신 것 같더라구. 당장에 아주머니를 모시고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갔어요. 복지과에 가서 담당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잠깐 기다리시라고 해. 그래서 한 세 시간을 앉아서 기다렸지. 나중에 알고 봤더니,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느라고 담당직원이 직접 안양에 다녀왔던 거야. 사실임이 확인되어서 로빈슨 박사와 닥터 양이라는 분에게 진찰을 받게 해드렸어. 검사 결과 자궁암 판정을 받았는데, 로빈슨 박사가 방사선 치료까지 무료로 해 주었지.”
변 씨가 이장 재직시절 설립한 ‘협심봉사회’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협심새마을금고’의 초석이었다. 마을 청년 삼십여 명으로 구성된 ‘협심봉사회’는 마을에 다리를 놓는 등, 많은 대소사를 감당했다. 하지만 ‘몸으로 하는’ 봉사에 한계를 느낀 변원신 씨는 ‘협심마을금고’를 만들었고, 다시 ‘협심새마을금고’로 전환하여 2004년 4월 19일까지 이끌어왔다. 변 씨가 명예퇴임하던 해 ‘협심새마을금고’는 650억 자산에 순수 적립금만 60억 규모로 성장해 있었다.
시민대학
1973년 7월 1일, 안양이 시로 승격되면서 안양읍 3리의 이장인 변원신 씨의 임기도 끝나게 되었다(1972). 하지만 이후에도 변 씨는 새안양회를 비롯한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하며 주민들을 위해 봉사했고, 지방자치 시대 초대 시의원에 선출(1991)되기에 이르렀다. 시의원 임기를 마친 이듬해에는 시장 추천에 의해 고충처리위원장(1996)을 맡아 2003년까지 근무하며 원만한 민원처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시민과 공무원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나는 초등학교만 나왔고, 안양고등공민학교도 나중에 이장일 하면서 수료했지만 남들이 물어보면 ‘시민대학’ 나왔다고 말해. 시민들의 일을 도우면서 한자를 깨우쳤고, 시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조례를 보고, 법 규정을 공부하고, 행정을 배웠노라는 설명도 꼭 덧붙이지.”
달콤한 포도쥬스과 구수한 쑥개떡을 앞에 놓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 창틈 사이로 초여름의 꽃향기가 스며들었다. 자리를 옮겨 윗층 서재에 가 보니, 한쪽 벽면에 표창장이 가득하다. 내무부장관 감사장(1970)과 경기도지사 표창장(1978) 그리고 제 1회 안양시민대상(봉사부문, 1986)에 이르기까지… 변원신 씨는 책상에 앉으며 “표창장이나 상장을 수도 없이 받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촛불은 어찌 보면, 요즘 세상에는 참 불필요한 존재야. 전깃불 안 들어오는 곳 없이 편한데, 불편하게 누가 촛불을 쓰겠어. 하지만 그럼에도 결혼식장에서, 종교행사에서, 중요한 곳마다 사람들이 촛불을 밝히는 이유는 그 숭고함에 있다고 봐요. 남을 밝히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태우는 촛불… 남을 위해 자기 자신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 것… 봉사의 정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서산으로 기운, 생의 마지막 뒤안길에서 ‘촛불처럼 산 삶’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면, 난 그것으로 족합니다.”
설원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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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혁 기자 | 기사입력 2010/01/07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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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01월 08일
https://m.ggherald.com/view.php?idx=6912
내일신문 <경기도 사람들>안양공직자윤리위원회 변원신 위원장
입력/ 2004.12.15. 오전 11:27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10769?sid=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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