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구술]김대규시인에게 듣는 내 고향 안양3동 이야기

이야기보따리/구술

문학과 고향을 사랑한 ‘사랑의 팡세’ 김대규 시인


“ 안양을 삶과 문학의 어머니의 고향이라 생각했다”
“나의 고향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곳. 친구야, 놀러 오려거든삼등객차를 타고 오렴.” - 김대규 시인의 엽서 -  

이 시를 읽으면 가을 햇살을 받으며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시인이 말하는 ‘나의 고향’은 그의 고향 안양이기도 하면서 우리 모두가 꿈꾸고 있는 영혼의 고향이기도 하다. 1960년 고교 재학시절 시집 ‘영의 유형’으로 등단해 고향인 안양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 작품 활동을 해온 한국문단의 중견시인이자 안양지역 문화예술계 어른인 김대규(73) 시인의 아호는 ‘문향(文鄕)’이다. 여기엔 삶과 문학의 어머니인 고향 안양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평생 안양을 사랑하고 흙의 문학, 농민의 문학에 상징적인 시인으로 지방문단을 벗어나지 않고 올곧게 지역에서만 활동해 왔다.
김대규 시인은 1942년 4월 안양시 안양3동 양짓말에서 태어나 오직 안양에서만 살며 후학들을 지도해 온 향토시인으로 60년대부터 줄곧 문학의 불모지나 다름 없던 안양지역에 문학의 혼을 불어 넣었고 문화예술의 중요성을 인식시킨 장본인이자 산증인이다. 안양초교와 안양중, 안양공고와 연세대 국문과, 경희대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한 김 시인은 1960년 시집 ‘영의 유형’으로 문단에 등단해 안양여고 교사, 한국문인협회 안양시지부장과 경기도지부장, 안양상공회의소 사무국장, 예총 안양시지부장, 시와시론 주간, 현대시인협회 중앙위원, 새안신문 대표이사, 안양시민신문 발행인·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양지동 946번지’‘, 흙의 사상’‘, 흙의 시법’‘, 가을 소작인’등 16권의 시집을 비롯‘ 무의식의 수사학’‘, 보들레르론’등 수많은 평론집도 출간했다. 특히 1989년 화제였던‘ 사랑의 팡세’‘, 당신의 묘비명에 뭐라고 쓸까요’등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러한 마음은 책뿐 아니라 지역사회 곳곳에 기록돼 ‘안양시민의 노래’작사, 안양시청‘안양시민 헌장비’‘, 현충탑 진혼시’, 자유공원‘독립유공자 기념탑 헌시’, 평촌공원‘6·25참전 공적비 헌시’, 운곡공원‘베트남참전용사 기념탐 헌시’등에도 담겨 있다.
70평생을 문학과 함께 고향 안양에서 살아온 삶을 보여주듯 연세문학상(1963), 흙의 문예상(1985), 경기도 문학상(1987), 안양시민대상(1988), 경기도 예술대상(1988), 경기도 문화상(1990), 경기도민대상(1992), 제4회 편운문학상(1994), 한글문학상(1996), 제6회 후광문학상(1998), 한국시인정신상(2001)등을 수상했다.  

[김대규시인 구술]내 고향 안양3동
내 고향 안양3동에 대해서 얘기를 해달라니 여러 가지 생각이 납니다. 저는 시인입니다. 시인은 어디가든지 그냥 시인이라고 소개를 하면은그 이상 바랄게 없어요.저는 요 옆, 태어난 곳에서, 그 집터에서 그냥 살고 있어요.75년 쯤 된 거 같네요.그러니깐, 제가 3동 이야기 하는 데는 조금 관계가 된다고 보고,3동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서 수락을 했어요.제가 문학 강연을 하라고 하면, 참 신나게 잘 해요.어제도 수원 가서 서 너 시간 문학 강의를 하고 왔는데,오늘은 제가 모르는 옛날,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 뭐 이런 것들을얘기하려니 참 부담이 됩니다.하지만, 우리 안양의제 사업 하는데 필요 하다고 해서이 책, 저 책 또 찾아도 보고, 또 옛날에 어른으로부터들었던 것 기억도 해보고, 또 제 어린 시절 회상도 해 보고,그래서 그냥 크게 순서 없이옛날 얘기 하는 식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주어진 주제가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말씀 드리는 거니깐여러분 부담 없이 들어 주시면 좋겠습니다.고향 사랑은 남한테 지고 싶지 않다.안양을 사랑한다는 것이 말로는 쉬운 일이지만,저는 옛날 청소년 시절부터 “고향을 사랑하는 거는 남한테 지고 싶지는 않다” 이런 생각을 좀 했어요.그래서 대학 시절에도 고향에 대한 시를 좀 썼고, 중 고등학교 시절에도그랬지요. 제가 책만 읽고 글 쓰는 일을 주로 했으니까요.나이 먹어서 제 호도 문학 문(文)자하고 고향 향(鄕)자를 써서,문학하고 고향하고를 제일 사랑한다. 이래서 ‘문향(文鄕)’이라고만들어서 쓰고 있어요.그 연장선상에서 안양시민의 노래라든지, 또 시민헌장이라든지,또, 저기 충혼탑 가시면 거기 호국영령들께 바치는 헌시가 있어요.저기 월남 참전용사 탑이라든지 6·25 참전 용사 탑,항일 독립투사 탑, 이런데 글 써 놓은 것이 상당히 많이 있어요.그게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런 건 다른 사람이 하면은약 오를 것 같아서 제가 좀 하겠다고, 그런 욕심을 상당히 많이 낸편이구요. 책을 상당히 많이 냈어요.제 환경으로는 제 처지로는 과분하다 할 정도로 좀 많이 낸 편이예요.그런 쪽 얘기는 여기와 맞진 않겠지만,그 중에 세 번째 낸 시집의 제목이“ 양지동 946번지”예요.그게 바로 제가 태어난 그 번지거든요.지금은 고 앞에서 두 집으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945-7 이지만,원래 946번지였지요.그래서 안양을 생각하고 고향을 생각한다는 뜻으로,그 집 주소를 시집 제목으로 만들어서 이렇게 책으로 냈어요.제 시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제일 많이 알고 있는 게 두 편이 있어요.하나는 그 책 맨 앞에 있는‘ 엽서’라는 시예요.제가 참 많은 시를 썼지만, 제가 외우고 있는 건그거 딱 하나예요.하하하   엽 서나의고향은급행 열차가서지 않는 곳.친구야!놀러 오려거든,삼등 객차를타고 오렴끝이야.   대학교 들어가자마자 이 시골에서, 그 때 안양은 아주 시골이거든.서울을 들어갔는데, 이 촌 놈이 같이 공부를 해야 되니까,아 걱정도 되고, 그래서 꿈적 꿈쩍 거리다가 그래 니들은 서울이고,나는 시골이다. 그런데서 사실은 흙과 콘크리트, 정신과 물질, 이런거를 제가 생각해서, 아 그래 시를 써야 되겠다.그래서 제일 처음 쓴 게, 그 엽서라는 시예요.니들은 급행열차 브루조아고, 나는 3등자리 농민의 자손이다.이렇게 생각하다가, 나도 몰래 나도 안 간다.그냥 니들이 타고 와라. 그런 식으로...대학생 초년병 때 썼는데도 그렇게 괜찮았는지, 많이들 좋아했어요.그리고 또 하나, 가을의노래 라고 하는 게 있어요.자세한 배경은 말씀은 안 드리겠지만 여기저기서 낭송 할 때 제일 많이 읽히는 시중에 하나예요.    가을의 노래...   지금 가을이 됐잖아요. 가을이 되면, 그걸 제일 많이 낭송하고 이야기해 줘요. 여러분도 아마 만날 기회가 있을 거예요.그런 배경이 있다고 하는 걸 조금 말씀 드리고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말씀 드리면, 그래도 안양을 위해서 평생을 뭐, 이것저것 했어요.그래서 안양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에 하나라고, 요기 삼덕공원에도서관을 짓는데, 제 문학관을 조그맣게 하나 만들어 준대요.참 얼마나 가슴 뭉클하고 눈물이 나던지 상당히 고마워요.이렇게 사랑을 한 거를 더 큰 사랑으로 보답 받으니까 참...보람이크지요. 제가 좋아하는, 저는 좀 싫어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글 쓰는 사람 다 좋아해요.제가 묘비명을 많이 모아 봤어요.제가, 다른 사람들은 묘비명에다 뭐라고 쓰나그런데 살아 있는 동안에 자기는 이렇게 써야 되겠다.자세히 써 놓은 것도 많아요. 그중에 프랑스 소설가인 미셀 트루니라고 하는 사람은“나는 얼마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너는 몇 백배 나한테 사랑을 주었구나. 고맙다, 나의 인생이여”뭐 이런 게 있어요. 그래서 저는 거기다가“고맙다, 나의 안양이여!” 이러면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그러니깐 이렇게 책을 읽으며, 글을 쓰며, 고향을 생각하며,이런 생각하는 거에는 문학하는 사람이 상당히 좋아요.여러분도, 문학은 하지 않더라도 책은 좀 가까이 해 보시는 게 상당히 도움이 되실 겁니다.하여튼 제가 노벨문학상을 탄 사람이라면 이렇게 자기 자랑을 안 하고 다 아는 건데, 안 탄 사람은 자기소개를 자기가 해야 돼요.하하하내 고향 안양, 그리고 양짓말이제 안양 얘기, 양짓말 얘기 이렇게 섞어 가면서 하게 되겠는데,안양, 안양이라고 허는 말이 도대체 어떻게, 언제 생겼는가정설은 없어요. 이런 게 뭐 날짜가 나와 있진 않으니깐.그런데 기록에 보면, 옛날에 왕건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정벌도 하고, 안정을 유지하려고 다니다가,나라를 세우기 전에 이 쪽, 여기를 지나가다가 삼성산, 관악산 옆에요.석수동 그 너머 거기 지나가는데, 산등성이에서오색구름이 그냥 찬란하게 내리 비치더래요. 산 쪽으로.그래서 부하를 시켜서‘ 야 저기 좀 가봐라’그랬더니, 거기 능정이라고 하는 아주 노스님이 한 분이 계시더래요.그래 찾아가 인사하고“ 어떻게 해야 나라를 잘 세울 수 있냐여기는 어떤 곳이냐” 그랬더니,이 안양이라는 데가 편안히 많은 백성을 양성 할 수 있는 곳이니까,여기다 도읍을 정해라.그래서 안양사도 짓고 여기 도읍을 하려고 했다고 하는 기록이이렇게 남아 있어요. 그래서 안양이라고 하는 말이 그 때 처음 구전 되고,지금 유유산업, 김중업 박물관이 있는 거기가 안양사의 터예요.그런데 거기에서 안양사의 기와로 쓰였던 조각들이나왔는데, 거기에 한자로 '안양사' 이렇게 쓰여 있는 게 증거로 나왔지요.왕건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그렇게 거짓말은 아니었구나 하는 게증명이 됐고, 그 안양의 역사가 일찍, 참 오래 됐구나 하는생각을 해 봤습니다.하여튼, 그런 큰 설화를 배경으로 안양이 외부로 이렇게 많이 알려지기시작하고, 발전의 기반이 됐다고 할까요? 그런 거는 어느 도시든지,항구가 생기거나 버스종합터미널이 생기거나 그래야물류도 왔다 갔다 하고 사람도 왔다 갔다 하는 거죠.1905년도에 안양역이 생겨요. 안양역.그러니까 그 무렵에도 안양이라고 하는 말이 쓰인 거지요.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동네는,그 때는 시흥군 서이면 안양3리 양지촌 이렇게 불리어 왔어요.오랫동안 양지촌, 양짓말이라고 불리어 왔지요.그런데 그 양지라고 하는 것이 볕양자에 지혜지자 예요.양지(陽智)그래서 그거를 해설을 한 책을 보면“ 햇볕이 슬기스럽게 먼저들어오는 게 아닌가!” 하는 뜻으로 이렇게 지어진 게 아닌가 싶어요.그런데 양지의 지를 따지(地)로 쓰는 사람도 있었고,알지(知)로 쓰는 사람도 있었어요.우리 아버님은 뭐 쓰시는 거 보면 꼭, 따지(地)로 쓰셔서아~ 그걸 지혜지자인데 그렇게 쓰시냐고 그러면,“난 그래도 이거로 쓸텨, 이게 맞어” 그러고 대답하던 걸내가 기억을 하고 있거든요.그런데 양지, 따지자 쓰는 햇볕 드는 땅은,양지라고 하는 동네 이름은 웬만한 도시에는 옛날부터 있어요.이렇게 도시가 있을 때, 남향, 이렇게 동쪽으로 바라보는 동네는 대게 양짓말이라고 그래요.그래 안양에도 우리가 사는 이 동네가 양짓말이죠. 양지동.그럼 이 안양 3리가 언제부터 행정구역으로 확정이 됐느냐행정구역으로 안양이 독립한 거는 1941년 10월 1일부터 안양면, 서이면이라고 행정구역명이 없어져 버리고 안양면이 돼요.1941년 10월 1일.그래서 안양 시민의 날을 10월 1일로 정해서 행사를 하는 이유가안양면 이라고 하는 말이 제일 먼저 행정명으로 채택 된 날이1941년 10월 1일이기 때문에 그래요.그리고 그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승격이 된 게, 1949년도에 읍이 되구요.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1973년도에 시가 됩니다.안양시가 됨과 동시에 3동, 1973년에 3동,물론 양짓말, 양지촌이라는 말은 아주 옛날부터 있어 온 말이고, 행정적으로 3동이라는 말이 쓰여진 게 1973년도, 만안구청 생긴 게1990년도, 그렇게 해서 오늘날 까지 이렇게 3동이 지내온 겁니다.양짓말에 최초로 터를 잡은 전주 이씨근대 기록에 보니깐 최초로 여기 와서 터를 잡고자손을 번성 시킨 사람들이 전주 이씨래요.전주 이씨, 흥자 수자 어른이시래요.이 흥수라고 하는 분이 여기 먼저 원주민으로 이사 와서 터를 잡았다는거예요.그 다음에 원 씨 되는 분들이 오셨다 이거야.그래서 사실, 여기는 알려 지기를 원 씨 집성촌으로 되어 있어요.그렇게 알려져 있는데, 우리 원태우 박사,저 이등박문이 경부선 열차를 타고안양유원지, 지금의 예술공원 거기를 지나 갈 때 돌멩이 던져 가지고상해를 입혀서 혼이 났었던,그 자랑스런 원태우 지사도 우리 원 씨 가문의 후손이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깐 지금도 원 씨 가문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죠. 양지동에. 어느 동네에 그 집성촌이 되어 질 때,그 가문이 어느 정도 번성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동네가 많이 드러나요.안양 산업의 발원지양지동, 3동에 관계 되는 산업 문제라든지교육문제라든지, 문화면, 이런 거를 또 무시 할 수 없어서 자료를 들추어 봤더니, 그래도 안양에 최초의 산업체가 아! 우리 동네에 있었어요.안양산업사 터가 지금 3동 사무소 근처 바로 그곳이에요.1928년에 엄기승 이라고 하는 분 이외에 한 스무 분 정도가 주주가 되어가지고 설립한 회사예요. 안양산업사가. 그래서 양잠, 양계, 양돈, 이런 거주로 농촌에 연관되는 산업체를 꾸려서 많이 활동을 했다고 해요.동아일보 1928년도 12월 2일자에 안양산업사가 이런 목적으로 설립 되었다는 기사가 나와요. 그거 자랑스러운 거예요. 자랑스러운 일이예요.그게 여기가 산업을 일으킬만한 좋은 토질이거나, 자리였기 때문에그랬겠지요.일제 강점기에 최초로 안양에 거대한 공장이 선 것이 조선직물주식회사, 지금 대농자리, 거기에, 조선직물주식회사가 있었다고 합니다.일본 사람들이 그걸 세운 게 1924년도에 그 회사를 만들어 가지고직물을 생산을 해 내다가, 일본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점점 망해가고 군수물자가 모자라니깐 그 조선직물주식회사를 무슨 비행기 회사로 만들어요. 비행기 부속품으로.아주 여러분들 옛날에 가미가제 특공대라는 말 들어 보셨지요? 여기원로 분들 계시니깐...그 비행기가 전부다 싸우러 나가서 돌아오지 못한 게 많아요.그냥 떨어져 죽으니깐, 같이 돌격해서...도라도라도라, 그 비행기 영화 보면 그런 얘기가 좀 나오잖아요. 참무섭죠해방 전까지 비행기 부품들을 여기서 생산 해 내다가,지금 평촌 뻘을 비행장으로 만들 계획까지 세웠다고 해요. 거 좋잖아요.거, 다 옛날에 논이었으니까, 평촌이 다.거기 비행장 만드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해방이 되니깐못한 거예요. 그래, 우리로서는 굉장히 수지맞은 일이지만.그래서 해방 되고 얼마 안 있다가, 금성방직 이라고 하는 명칭으로커다란 방직공장이 1948년도에 이렇게 생깁니다.금성방직, 보통 공장이 아니죠? 그게.김성곤 사장이라고 하는 분,참, 아주 재벌 중에 재벌, 대구 분인데, 달성, 거기서 직공 여자들을전부 끌어다 써 가지고 나중에 그게 대농 회사가 돼요.저 쪽, 그 옛날 구시장에 태평방직이라고 있었어요. 거기에 있는 공장하고 합쳐가지고, 그래 이게 대농이 되는데, 그게 1977년경이에요.나중에 청주로 다 이사를 가지만, 그 무렵에 이 금성방직, 대농이 최고일 때그 때 3,000 궁녀라고 그랬어요. 거기 여자 직공들이 많아 가지고.하하하그래서 이 양짓말에 민박하듯이 직공들이, 이제 3교대 하고 그럴 때도 있었거든요. 그러니 집집마다 직공들이 없는 집이 별로 없었어.그냥 잠만 자고 나가. 교대하면 밥은 회사에서 먹으니까.하여튼, 길거리가 온통 경상도 사투리였어.금성 방직 월급이 안 나오면, 안양 시장이 망한다고 했으니까.하하하안양경제가 아주 망하는 거야. 참. 그만큼 금성방직 대농이 뭐 동양에서 제일 크다. 이런 얘기가 있었으니까.그게 안양 경제에 안양문화에 기여한 점이 굉장히 큽니다.그냥 공장만 경영한 게 아니고, 안양의 웬만한 행사에 지원을 참 많이 했어요. 지원을.그래서 저희도 그 시화전을 하거나 문학의 밤을 하면, 거기 가서 돈을 울궈다 쓴 기억이 있거든요.거 그런 지원을 잘 해줬어요. 그러니까 고맙지요.어~ 지금은 그게 대농단지, 주택단지가 되어 가지고그래도 안양산업의 근간을 이루었던, 그 아주 추억이 아련합니다.추억이 많은 수암천과 삼덕제지까지삼덕제지, 삼덕공원이 된 것도 그건 좀 늦게 세워지죠.1960년 초에. 대농방직은 아주 유년시대, 간난쟁이 시절에 세워진 거지만 이거는 우리가 청년기 때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그 전에 추억이참 많습니다.거기에 개울이, 지금 그 삼덕공원, 수암천 이라고 하는 거,그게 옛날에는 넓었어요. 아주 넓었어요.그 조약돌, 모래 이런 게 많아 가지고, 지금도 눈에 선해요.고기도 또 많았고, 또 삼덕제지의 공장 굴뚝이 참 크고 멋있었어요.지금은 1/3로 줄인 거죠.그 옆에 큰, 거대하게 있었던 그 생각, 거기 그 정화조 물 가두어 놓은 데서 수영하던 생각...참 그런 게 많지요. 그 대신, 제지공장, 안양에 다른데도 한국제지나중앙제지나 뭐 이렇게, 물 좋은 데를 찾아 가거든요, 제지공장은.물 좋은 데를 찾아 가서 물을 오염시킨다는 말이야.거기서 아주 고약한 화학 성분이 많이 나오니까.그래서 한 해 이렇게 가을로 접어들면, 여름에 냄새가 나고, 그 찌꺼기, 찌꺼기들이 더께로 앉아있어요.그러면 그거를 긁어다가 땔감으로도 쓰고, 광주리 같은 거, 소반 무슨 소반 이런 거 만들어도 쓰고 그랬어요.그게 다 눈에 선해~ 그게.그래, 그 전재준 사장께서 그렇게 피해를 많이 주민들한테 줬다고 해서 그걸 기증하신 거예요. 고맙다고. 참... 그 기부한다는 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에요.누군가 이렇게 앞장서서 하시면 또 따라서 어느 분도 뭐 3억인가, 2억인가 낸다고 하고, 남 도와 주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이 없지요.이렇게 많이 해 보진 못했지...저는 뭐 그런 쪽에서 많이 해 보지 못해서 모르는데, 근데, 아름다운일입니다.삼덕공원, 4동, 장내동, 담안...여기 양짓말, 여기 사람들은 꼭, 공원 같잖아요. 자기공원 같잖아요 .자기 집에 있는 공원. 얼마나 좋아요, 아름답고.그리고 이쪽은, 도서관 짓는 자리 이쪽에는 삼영하드보드 라고 있었어요.삼영하드보드, 그 건축자재 만드는.이게 있었는데, 그거는 크게 주민들하고 마찰이라든지,오래 돼 있지도 못해서 그냥 기업이 없는 그런 느낌이에요.산업 쪽 면에서는 그 정도가 이제 두각을 나타낸 얘기 거리입니다.안양 교육의 산실교육기관은, 일제시대 때 조선직물이 생기면서,이쪽 안양공고 쪽으로 사택도 있고 그랬었는데,거기다가 일본 사람들이 강습소를 하나 만들어서 안양에 살고 있는일본인 자녀들 교육을 거기다가 따로 시켰어요.이제 그게 한, 1940년? 기록에 의하면 아사히 학교, 일본말을 어떻게쓰였는지 모르고 나는 그냥 말로만 아사히 학교라고 들었어요.그러니깐 처음 어쨋거나 우리 동네, 우리 3동에 처음 나타난 교육기관이에요. 근데 금방, 5년 안에 패망해서 사라졌어요.그런데 그 자리가 안양 여성교육의 산실이 됐으니 의미가 있죠. 그 자리에서 여성들, 안양의 여성들을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어요. 안양여중의 출발이 거기라 할 수 있는데, 당시 안양여중이라는 말은 안 붙이고,그냥‘ 안양여성강습소’라고 하구서 그냥 여자들을 가르쳤어요.저는 안양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거기서, 어~거기 그쪽으로 가면은 가방 들고 교복 입고서 여학생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거 이런 걸 본 느낌이 지금까지도 이렇게 있구요.안양초등학교를 지은 게, 삼십년? 삼십삼년인가안양중고등학교가 사십팔년, 사십팔년도에 지금 안양 공고 자리로왔고, 중학교가 먼저 생겼어요. 그리고 고등학교도 49년도에 생기고.또, 그 바로 아래 안양여중 산실이 있고...그러니까 산업도 안양 3동에서 시작이 됐고,교육도 요기서 이렇게 시작이 됐기 때문에 안양3동 양짓말은 자부심을 가질만한 동네에요. 안양여중은 율목으로 가서 1952년도에 개교를하고, 지금의 자리로 이사를 간 거죠.또 기억나는 중요한 한 가지 특기 사항은, 지금 조기 소공원 있잖아요. 그 옆에 강당이 큰 게 하나 있었어요. 강습소 또는 공회당 이렇게불렀어요.강습소라고 불리우다가 나중에는 공회당 이렇게 불렀어요.우리 어렸을 때 기억이, 거기서 여성들 양재, 재봉틀, 그것도 가르쳐 주고,우리 작은 누이가 거기서 양재를 배웠어요.그리고 한문교육도 시키고, 근데 이상하게 거기서또, 교회도, 기도도 드리고, 찬송가 소리도 나고 그래요.그리고 크리스마스 되면 거기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사탕을 주니까그 때는 사탕이 없잖아요. 그거 받아먹으려고 저도 거기 그렇게 가서그거 받아먹던 생각이 나요. 아주 그리운 추억이에요.옛날에는 저는 뭐 신자가 아니지만,이렇게 밤에는 크리스마스 전날이 되면 누가 담장에 소곤소곤 하는소리에 눈소리 뽀드득 뽀드득 나면 ‘기쁘다 구주 오셨네’노래 소리나고 그러면, 보리차 이렇게 뜨거운 것도 타다가,그 때 커피는 뭐 맛도 몰랐으니까. 대접도 하고,그렇게 새벽 캐롤도 부르곤 했죠.그 것 기다리느라 밤잠 설치고, 참 은은해요. 그 소리가 그렇게,지금도 그리워요.그게... 그 때 그 소리가.물론 크리스마스 12월만 되면시내에는 전축 크게 틀어 놓고 징글벨서부터 요란하게,교회에는 종소리 같은 건 그렇게 크게 내는지 그냥,그래서 공해 문제로 다 못하게 금지가 된 모양인데,그러나 어렸을 때 그 크리스마스 캐롤, 교회 사람들이 순시 하는 소리.뭐 꼭 교회 사람들 집에 가서만 부른 게 아니니깐.우리집 앞에 와서 이렇게 부르든 거, 참 그 소리 듣고 싶다.그런 생각이 좀 납니다.문화 예술의 산실이기도안양3동은 문화 예술 면에서도 특기사항 비슷하게 하나 충분히 얘깃거리가 될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예술인들이 많이 거쳐 갔지요.방송 작가 이서구 라고 하는 분이 있어요.‘홍도야 우지마라’ 그거 작사 하신 분.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방송작가죠. 아주 초창기에 연속극도 쓰시고,참 훌륭한 방송인이자 희극 작가셨죠.지금 쯤 활동하셨으면 아마 수십억 버셨을 거야.그리고 제가 좋아 하는 후배 중에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박건호라고 참 저를 잘 따랐어요.여러분이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틀면 박건호 작사가 한 80%는 돼요.옛날에, 이미자가 노래는 제일 많이 했고,작사는 박건호 작사가 많아. 아까 제가 쓴 가을의 노래,그 것도 박건호가 저한테 전화를 해서 쓰게 된 시예요.지구레코드사가 7동 저 철로변에 있어요.레코드 취입한다고 거기 왔다 갔다 하면서,가을이라는 걸 좀 써 달라고 해서... 가을...그래서 문득 생각이가을이 되면 멀리 떠나고 싶어진다.가을이 되면 사람이 보고 싶어진다.~~~이런 게 생각이 나서 녹음 했다가 이렇게 길게 써 준거거든요.가을의 노래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다.떠나지는 않아도황혼마다 돌아오면 가을이다.사람이 보고싶어지면 가을이다.편지를 부치러 나갔다가집에 돌아와보니주머니에 그대로 있으면 가을이다.가을에는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지고그 맑은 마음결에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떠나보낸다.‘주여!’ 라고 하지 않아도가을에는 생각이 깊어진다.한 마리의 벌레 울음 소리에세상의 모든 귀가 열리고잊혀진 일들은한잎 낙엽에 더 깊이 잊혀진다.누구나 지혜의 걸인이 되어경험의 문을 두드리면외로움이 얼굴을 내밀고삶은 그렇게 아픈거라 말한다.그래서 가을이다.산 자의 눈에이윽고 들어서는 죽음死者들의 말은 모두 詩가 되고멀리 있는 것들도시간 속에 다시 제자리를 잡는다.가을이다.가을은가을이란 말 속에 있다.참 암으로 죽었죠, 그 사람. 그런데 죽고 나서도 한 달에 1억 이상 들어와요. 작사한 게 많으니깐, 사용료가 전국 노래방에서, 어디서, 어디서이렇게...그런데 이서구 라는 양반은 뭐 저작권이 어디 있어요.그 때 그냥 원고료나 조금 받으면 그걸로 그냥 만족하고 그랬지.근데 이 양반 이서구가 저기 웃동네(양지마을) 거기 태생으로 돼 있는데,어느 기록에 보면 서울 출생인데 호적을 이리 옮겼다는 말도 있고.그런데 또 어느 기록은 안양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여러 가지가 있어요.하여튼 이양반 추모비가 시흥에 세워져 있어요.‘홍도야 우지마라’ 비가.그런 양반이 여하튼 안양과 연관을 맺었다는 것도 우리로서는,그 후예인 우리로서는 참, 흐뭇한 생각이 들어요.안양3동과 청록파의 거두 박두진 시인두 번째는 박두진 시인이 있어요.청록파 중에 유명한 박두진이라는 분이 안성 태생이시지만,일제 시대 때 이 삼덕제지에 근무합니다.그 분이 1942년부터 1945년 정도까지 여기서 근무 하세요.삼덕제지 서무과에.우리나라에서 나온 시집에서 랭킹을 따질 때 제 1위를 청록집으로 치는 이도 있고 제1위를 김소월의 진달래꽃으로 치는 분도 있어요.근데 제 1위가 청록집이 맞을 거예요. 박목월, 유치환, 박두진 이렇게제본 한거. 근데 중요한 것은 그게 1946년도에 나오거든요. 그 책이.그럼 그 책에 시를 싣기 위해서 시를 쓰셨을 거 아니에요가만히 보니까 이걸, 안양에서 쓰신 거야. 이거 합산을 해 보니깐.그러니깐 이게 상당히 기분이 흐뭇해요.다른 분보다도, 안양의 다른 분야보다도 저는 참 기분이 좋고,그래서 그전에 신중대 시장 계실 때삼덕제지 터에 박두진 시인 시비 좀 세워 달라고 했었어요.그래서 그게 잘 되다가 그 양반이 시장 물러나게 되면서 잘 안됐지.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그 양반(박두진)이 그 대학에서 강의를 하시기 때문에 만날 수도 있었는데, 3학년이 되어야 전공과목에 그 양반의시도 강의를 하시잖아요. 1, 2 학년 때는 들을 수가 없어서 댁으로 찾아가서 인사를 드린 적이 있어요. 안양과 인연이 있는 걸 아니깐. 그래서인사드리고 좋은 말씀 많이 듣고 그랬는데, 참, 지금은 돌아 가셔가지고... 더군다나 이분이 안양중학교에 장로로 계신 기념사진이 지금남아 있습니다.그래서 저희들이 안양 문화 60년사를 낼 때 그 사진을 실어 주고 그랬는데 하여튼 그 분이 안양서 이렇게 좋은 활동을 하셨다는 거 이건우리가 자랑할 만한 것 같습니다.양지마을에 살면서 ‘안양복거기’를 쓴 소설가 채만식근데 더 중요한 분이 있어요. 더 중요한 분.채만식이라고 소설가예요. 탁류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소설을 쓰셨어요.물론 호남, 이리 분이시지만. 근데 그 분이 안양으로 이사를 왔는데,바로 그 동네가 양짓말 이에요. 양짓말로 이사를 왔는데,이사 와서 가만히 작품만 쓰셨으면 괜찮았을 텐데...안양에 와서, 양짓말에 와서 사는 얘기는 쓰셨어요.안양 복거기. 복거라고 하는 말은 살만한 곳을 찾아가서 머문다는 뜻이에요.그러니까 안양은 자기가 살만한 곳으로 찾아와서 살았다는 기록이에요 .이게 1940년에 매일신보 라고 하는 당시에 신문이 있어요.아주 유명한 신문이에요.거기에 이 양반이 5일 정도 연재를 해요.그러니까 무척 길죠. 길어요. P형이라고 하는 사람 앞으로편지 형식으로 썼는데 P형이 누군지는 밝혀져 있지는 않아요.근데 그게 상당히 길어요. 그러고 그 때 1940년도니깐,지금 쓰는 말법하고 조금 달라요. 그래서 재미있어요. 그게.모르는 말도 조금 나오지만, 내용을 조금 보면은 양짓말에 대한 아주고급 정보들이 잘 나와 있단 말이야.송도에서 안양으로 이사 왔다는 얘기, 안양이 경성과는 24킬로미터가 되는데 풀장, 포도, 수박 이런 과일이 아주 풍부하다는 것,더군다나 관악산 하이킹도 가고 연주암 같은 볼 것이 있다는 것,그리고 여기가 시흥군 안양면 안양리 양짓말, 양지촌이라고 이렇게불린다. 그런데 270원 주고 주택을 하나 샀다. 이런 얘기들이 나와요.하하하집을 한 채 사는데 270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940년을 따지면75년 정도 되지자기집으로서는 처음 마련한 거래요. 셋방살이만 하다가.그래서 기뻐서 270원 주고 샀는데, 올 때 안양역에서 내려서 이렇게보니깐. 조선직물이라고 푯말이 있고 고 옆으로 이렇게 골목으로 들어온 거지.지금 조 아랫길, 초원약국 있는 대로 이렇게 들어 온 거지.그런데 보니깐 자갈, 돌멩이 이렇게 황폐 했더라, 땅이.그러고 10분 정도 걸으니깐, 초가들이 한 10여 호 이렇게 있더라.그게, 양짓말, 양짓말 전경이 그랬다 이거예요.요렇게 쳐다 보니깐 울타리도 없고, 담장도 없고, 대문도 없고,또 목욕탕도 없더라, 근처에.근데, 삼사백미터 남향에 공동묘지가 있고, 그 옆에 상여집이 있더라이거예요. 이게, 그 남향이니깐 저 쪽이지 뭐예요. 동덕아파트 쪽.그 쪽 옛날에는 공동묘지가 있었어요.그래서 우리들도 그 쪽으로 잘 안갔어요. 무서워서.하하하이 양반도 그걸 기록에 남겼거든. 거 역전에 우편소가 하나 있는데,우체국이 격일배달, 하루만큼 쉬었다가 배달하고 있다.그 역전에 지금 남아 있는 조그만 우체국 하나 있죠.그거예요. 그거. 그거 그 때부터 있는 거야.참, 거기에, 그게 안양 우체국의 역사야.안양 우체국, 저도 제일 많이 신세진 데가 거기죠.편지도 많이 쓰고 책고 많이 보내고 했으니깐.조금 환경이 불편한 편이고 살기가 조금 그렇지만,파도 맑은 물이 나와 가지고 집집마다 우물이 다 있다 이거예요.집집마다 어디를 파도 맑은 물이 나오더라, 이런 말이 있었대요.안양 물은 오랫동안 먹으면 디스토마가 없어진다. 뭐 그런 말이 있었다니까.하하하이런 얘기가 있었대요. 안양사람들은 쳇증 걸린 사람이 없다.체해서 뭐 속이 쓰리고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거야.그런 얘기 들으니깐 그럴 듯 해. 괜찮어.집 가까이 율림, 밤나무 숲. 율곡, 저 쪽 율곡동.이 양반도 거기다가 그런 걸 조금 썼지만, 저희들이 들은,변원신 회장님으로부터 들은 얘기로는 가을이 되면 밤 줍기 대회가부녀자 밤줍기 대회가 해마다 열렸대요. 해마다.전국에 사람들이 오기도 하고, 그러니까 밤골, 율곡이지 뭐야, 율곡.그러고 꿀벌 치는 사람들, 양봉 이동하는 사람들은 봄에 어디가고,여름에 어디가고, 가을에 어디가고 하는데, 거기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이동 해 왔었다고.그 다음에는 자갈 운반 이민 철로가 있었다. 그래 철로가 있었어요.저쪽 시민공원(병목안시민공원)이 채석장이었어요. 거기 바위산이기때문에.거기 다이나마이트 터뜨려서 돌멩이 떨어뜨리면 그거를 기차에다 싣고 이렇게 일본사람들이 어디다 쓰는지 하여튼 뭐 그거 많이 봤죠.나도 나이 들어서도 왔다 갔다 했으니깐.또 산과들에는 각종 꽃이 만발하고, 뻐꾹새 두견새가 울음소리가 고와서 풍류객들이 안양을 귀히 여기는 까닭이 이런데 있다.자연 경관이 좋다. 여기 자랑거리는 많지만, 다음에 다시 하겠다. 그러고 아주 길게 연재를 했어요.이거, 안양에 대해서 편지 형식으로 특히 양짓말 이야기를 이렇게 쓴건 최초이자 유일하다시피 한 거야.이 양반 자료가 있어요. 인쇄 된 게 있어요. 필요 하신 분은 언제든지말씀 하시면 제가 이렇게 복사 할 수 있도록 해 드릴게.평론가 정귀영, 시인 김창직이 양반들은 좀 옛날 분들이지만 현대에 와선 평론 하시는 정귀영 씨라고 하시는 분이 안양여고 교감 하시던 분이 오랫동안 저의집 앞에사셨어.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유명한 평론가야.김창직 이라고 하시는 시인도 양짓말에 사셨어.성기조 라는 시인도 그렇고.그 분도 전국적으로 유명한 분이고.문화 예술 쪽으로는그런 분들이 양짓말, 안양에 다른데도 많이 계시겠지만, 우리가 아는양지동에 사셨던 이야기.   양짓말의 기록들   중요한 산업관계나 교육관계나 문화예술관계는 그 정도로 줄이고 기타 사람들과 이런저런 자료에 의하면 양짓말에 전기불이 처음 들어온 게 1938년도래. 그리고 그 때는 기독교인이 두 가구가 있었대.하하하기독교인이 두 가구, 서경두와 이흥균. 참 재미난 걸 기록에 남긴 사람들이 있어요. 책을 읽다가, 이런 게 눈에 띄면 저는 번뜩해요.그렇잖아요. 우리 동네의 기록이니깐.근데 그 때는, 지금은 9동으로 분동이 됐지만, 그 때는 다 3동이잖아요. 양짓말 일대가. 저 속에가 담배촌이고.그 담에 안골, 그 담에 창박골, 그 담에 뒤뜸이 이렇게 불렀어요.뒤뜸이라는 거 지금의 새마을, 고기 고기예요.그 담배촌은 다 아시겠지만 천주교 박해 때문에천주교인들이 거기로 도망 와서 농사진 거. 주로 담배를 재배한 거.거기서 생계를 유지 했다고 해서 담배촌이 됐고, 특히 최경환 성인,프란체스코 그 양반의 묘소가 그 쪽에 주~욱 있잖아요.안양 8경 중 한곳으로 되어 있어요.그래, 생각에 그 쪽 가는 길을 최경환으로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이렇게 생각을 해 보고 그랬는데, 그게 잘 안돼요. 그게 행정 쪽에서는.아까 동장님한테 말씀 드리고 그랬지만, 어떤 형식을 벗어나는 걸 상당히 어려워하고 그래요.안양시가 인문학 도시를 꿈꾸는 그런 걸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그럴 바에야, 지금 이런 거 말씀 드리는 거 이런 게 중요한 거예요.이런 문학이라는 게 별게 아니에요.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걸 뒷받침 해주는 게 문학이거든요.서울에 세종대왕, 을지문덕, 원효대사는 무슨 관계가 있어서, 세종로, 원효로, 을지로 이렇게 붙였을까요소월로, 김소월이가 거길 가 보기를 했나요하하하근데 우리는 저쪽 길을 왕건로, 여긴 최경환로, 그렇게 붙여도 근거가 충분하잖아요.또 내가 살던 데는 문향로, 이렇게 해 줬으면 얼마나 좋아하하하아니, 그런 거 사람을 먼저 기리는 게, 먼저 사람을 기려야 돼요.경제인이건, 정치인이건, 문화예술인이건, 그래야 뭐가 돼지.사람이 없는데 뭐가 되겠어요하여튼 최경환 성인이 그래도 3동과 관련이 되는, 그래도 이렇게 계시다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6·25 피난처이자 중공군격전지그 옛날에는 이 수리산에 호랑이, 멧돼지, 노루 이런 게 많아 가지고 수렵가들이 많이 내려 왔대요. 많이. 기록에 보니깐 그런 기록이 있어요.그러고 6·25때에는 중공군하고 아주 큰 전투가 벌어 졌던 곳이고 나중에 얘기 할 것 먼저 말씀 드리면,6·25 때 저의 가족은 담배촌으로 피난 갔거든요.그러니깐 이제 먹을 거 놔두고 잠자리하고 보따리 해 갖고.그때가 초등학교 3학년 때니깐, 자세히는 생각나지 않지만 몇 호가 살지않았는데, 거기서 살다가 산에 올라가 보니깐 바위 큰 게 있고 그래서바위 밑에 요렇게 들어가 놀고 그랬는데...지금도 보니깐 그 바위가 있어. 거기 원두막이라고 하는 음식점이 하나 있고 그 옆에 산이 조그만 야산에 바위덩어리가 있는데,야~ 옛날에 초등학교 때, 저리로 피난을 와서 저기서 지냈구나.참 감개무량해.새마을에 있었던 성황당새마을 동네에 성황당이 있었대요. 지금은 없어졌지만.이렇게 나무에다가 새끼줄 말아 놓고, 하얀색 뿌리에 징징 감고 돌멩이 쌓아 놓은데 있잖아요. 지금도 시골가면 그런 게 많아요.그런데 거기에는 이런 설화가 있어요.지금은 다 그게 전해지지 않을 거야. 기록에 그렇게 남아 있지.한 부자가 거기 살았는데, 거지가 하도 많아 와서 이놈을어떻게 할 수가 없어 가지고 스님을 찾아 가서‘아 이거 거지가 이렇게 많이 오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그랬더니 그 스님이 그럼 당신, 거기 느티나무가 있는데 거기 느티나무에다 정성껏 돌을 쌓아 올려 봐라, 그러면 거지가 안 온다.그러니깐 진짜 거지가 안 오더래요. 근데 거지는 안 왔는데, 나중에부자가 망했어.성황당 그 자리에 오며 가며 돌을 쌓으며 난 망하지 않게 해 달라고...전 그거 본 기억은 없지만, 그런 얘기가 그렇게 전해져 내려와요.내 고향 양짓말의 추억지금까지는 약간의 공적인거예요. 공인 되었거나, 이렇게 기록에 남아 있거나 한 얘기들.이제 앞으로는 개인적인 추억을 중심으로 해서 몇 가지 좀 말씀드릴게요.제가 정신분석학, 심리학 이런 걸 제가 혼자 공부를 했어요.그래서 꿈 해석 이런 것도 좀 논문도 많이 써 보고, 문학적으로, 해몽을 제가 잘 해요. 근데, 심리학 정신분석학에서는 돼지꿈 꾸면 어떠니, 뭔 꿈은 어떠니 뭐 이런 건 없어요.절대 그런 건 예언적인 게 아니고, 살면서 스트레스 콤플렉스 쌓인무의식이 이게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그 무의식이 잠든 사이에 의식이 해결한 상태에 나와서 연극 하는걸 꿈이라 해요, 꿈.근데 어디까지 그 기억을 더듬어서 우리가 유년시절까지 갈 수가 있느냐? 그거에 대한 연구가 지금 요새‘ 망각’이라는 책을 읽어 보고 있는데상당히 기발한 얘기가 많아요.뱃속서부터 기억 해내는 사람도 있고 그건 다 망상일 텐데, 이게 진짠지아닌지는 모르겠는데, 제 기억으로 가장 유년시절, 언젠지도 모르죠.하여튼, 제가 1941년생이에요.그러니깐 해방 전인지 아닌지는 모르는데 저쪽 동네 박달동 이쪽에폭발물을 갖다 놓고, 그걸 처리하느라고 터뜨린다고 했어요.그러니깐 주민들, 동민들 대피하라고, 그런 얘기가 있었나봐.그래서 아버님인지 누가 나를 품에 요를 감싸 앉고 저쪽,옛날 우리집 뒷문으로 나가서 외갓댁으로 갔던 생각이 나요.그게 언제인지 잘 모르겠어.근데, 폭발물, 박달동 그거는 사실이거든. 그 때 그런 게 있었거든.하여튼 그런, 아련한 기억이 이렇게 떠올라요.요게 옛날에는 뭐 이게 지금 제가 기억하는 건, 이랬다 저랬다 중구난방이니깐, 순서가 없는 거예요.요새 애들은 조그만 벌레만 봐도 질겁을 하지만, 옛날에는 쥐들하고같이 살았어. 한 집에서, 쥐들하고.쥐들이 왔다갔다 하고, 그 뿐 아니잖아.우물, 초가지붕 이런데 능구렁이 뱀이 참 많았어.우리집에도 그게 있었으니깐.앞집에 우물에도, 직접 보고 그랬으니깐.좀 어렸을 때 본거는 다 크게 보이잖아요.지금 보면 안 그랬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큰 능구렁이들이 꾸물럭 꾸물럭 이렇게...제가 뱀띠기 때문에 뱀을 좀 안 무서워해요.그러고 겨울에는, 옛날에 다 초가집이니깐, 후레쉬 갖고 새 잡으러 가요.이렇게 후레쉬 쭉 비춰 보면 새들이 요렇게 초가지붕을 뚫고 요렇게파고 들어 가서 보금자리 치고서 빠꿈빠꿈 쳐다보고 있죠. 그럼 손으로 가서 이렇게 잡는 사람이 있고.그러면 집주인이 그냥 집 망친다고 소리를 지르면 또 도망가구 말이야. 그리고 겨울에는 많이 생각나는 게, 새잡기, 참새.한군데 담에다 소쿠리 이렇게 놓고 그 다음에 막대기를 이렇게 줄달아서 구멍 뚫어 놓고, 거기다 쌀 같은 거 이렇게 뿌려 놔요.그러면 새들이 와서 쪼아 먹고, 그때 확 잡아 댕기면 그 안에서 폭삭.그렇게 해 마다 겨울 되면 그걸 잡는 재미가 있었고, 새고기가 참 맛있어요. 참, 맛있어...그리고 가을 되면, 고사. 고사떡 돌리기, 돌리러 이웃동네 거기 몇 집없었으니깐. 이거 누구네 갖다 줘라, 이거 누구네 갖다 줘라... 그러면 신나게 그런 짓은 자선사업 한다고 갖다 주고.그러면 고맙다고 그러기도 하고, 또 다른 것을 주기도 하고...노적봉에서 했던 유년시절의 병정놀이우리 어릴 때는 병정놀이를 많이 했어요. 병정놀이.이거는 뭐, 저의 유년시절에만 해당 되는 게 아닐 거예요. 그 때 병정놀이는.지금 우성 아파트 있는 쪽에 야산이 있었고, 또 노적봉 민가 부분, 지금 안양예술고등학교 있는 곳, 거기 양쪽 산에서 많이 했거든요.참... 뭐, 학교만 갔다 오면 그리로 가는 거야. 애들하고 같이 그냥,갈대로다가 모자 만들어서 위장을 하고 돌아 댕기고, 기어 다니고,빵~그러면, 저쪽에서 또 빵~참 많이 했어요. 그리워, 그 때가 그리워.또, 선배들하고 같이 포도서리, 배서리, 훔쳐 먹는 거, 포도가 좀 많았어요. 여기도 포도가 많았고, 특히 지금 살고 있는, 우리집 앞에,그 옆에 빌라도. 거기 한 씨가 살고, 부자 한 씨가 살고 있는데, 그사람 포도밭이 컸어요. 원두막도 있고. 근데 거기 포도 밭 그걸 지나다니면서, 참 먹고 싶었어.주렁주렁~ 손만 대면 딸 것 같아도, 양심상 그걸 못 해. 양심상.근데 밤에 선배들이 불러, 어느 날 몇 시 어디로 모여라.다 들 그리 모여. 자주. 그럼 우리들은 시키지 않고, 꼬마니깐.너는 어디 가서 팀을 만들어서 포도를 훔쳐다가 씻어서 먹고 그래.서리 한다고 그러잖아요. 포도 서리~그거는 도둑질로 인정을 안 했어. 그냥, 문화야. 그게 하나의.없는 시절에 그렇게 해서 그냥 간식 대용으로 하고, 그 주인들도 그냥 야단이나 좀 치고 그랬지 뭐.또, 엿 장사도 생각나.집에 있는 고무신, 또 뭐 쇳조각 조그만 것만 있으면남의 것도 갖다 엿 바꿔 먹고, 야단맞고. 참 남의 집 것 많이 갖다줘서야단 많이 맞았어. 야단 많이 맞았지.여름 되면 저 충훈부, 거기 냇가가 좋았어요.개구리 잡으러 소금 석쇠 가지고 잡아 갖고 개구리 잡아서 뒷다리 이렇게 구워 먹으면...야~~~ 불고기 저리가라야.널빤지 썰매, 배고팠지만 그리운 추억들그 뭐 그리운 것 중에 하나가 겨울에 꽁꽁 얼어 붙으면은, 이 성원 아파트쪽서부터 역전까지 길이 그냥 얼음이야. 그럼 썰매 타고 냅다 가는 거야.야~~~ 그것 참 좋았는데, 추억이 새로워. 그리웁고.썰매 타고 올 때는 조금 힘들어. 그러니깐 조금 내리막길이었거든요.올 때는 들고, 또 가고, 몇 번 하면 땀이 쩔쩔 나고.그 때 썰매는 굵은 철사, 이렇게, 나무토막 두 개에 다가 이렇게 하고...그 위에다가 널빤지 얹은 거예요. 스케이트날 가진 거 있으면은 온동네에 영웅 되지. 그거 한 두 사람 정도는 그거 갖고 있었는데...그 하여튼 썰매 타던 거...내 지금 살고 있는 집 옆에, 아래가 일본 사람들 살았는데, 그 소녀야. 기집애인데, 야~ 그거 옥수수 먹는데 말이야, 커.한국 옥수수 보다 일본 옥수수가 커요. 거 왜무가 크듯이 그거 보고,집구석에서나 먹지 나와서 먹는 거야.그거 먹고 싶어서, 그 옆에 이렇게, 아이스케키 누가 먹으면, 옆에서이렇게 쳐다 보고.하하하참, 그 시절 참 좋았어. 그래도, 응배고프고 먹을 게 없어서 그랬지만, 그리운 거예요.특히 6·25 때, 참 6·25 때 고생 안 한사람 뭐 없잖아요.6·25 때 안 계신 분들도 있었죠? 몇 될꺼야.근데, 그 때 17연대, 시흥군 출신 장병들이 17연대 라고 아주 유명해.17연대 집합 장소가, 군인 떠나가는 사람들이 안양여고 마당이야.그럼, 겨울에 거기 다들 모여. 뭐 자고 눈이 왔는데, 거기서 환송식하고 울고, 밥 해 주고, 관계없는 사람도 뜨거운 물 갖다가 주고, 그거를 눈여겨 봤어요.참 서글퍼. 가슴이 뭉클해. 그냥, 죽는 거거든, 느낌이.군대 나가면 죽는다고.아까 말씀 드린 담배촌으로 피난 가다가 한국전 최초로 공중전이 벌어진걸, 그냥 비행기들이 이렇게 투앙 투앙 그러는데 그냥 굴속으로, 덤불속으로, 다들 들어가는 거지. 그게 뭐 소용이 있어요? 덤불속으로 가 봐야.근데 하여튼, 그렇게 비행기 하나가 칙~ 하고 연기를 뿜더니, 그게우리집으로 거기서 보니깐 우리집으로 떨어지는 거야.근데, 그게 떨어진 데가 지금 서초등학교 약사골이라고 하는 그 터예요.거기 다 논이었거든요. 거기 떨어져 가지고, 그거를 나중에 도에서동네 사람들이 옮겨다가 아까 말씀드린 공회당, 강습소 자리에다가이렇게 놔서, 프로펠라도 만지고 우리들이 날마다 올라가서 장난을놀았죠. 근데 그게 괴뢰군, 이북 비행기예요. 그래서 그 비행사는 낙하산 타고 저 박달동으로 떨어졌다. 실제예요. 실제. 근데, 그게 기록에도 나와 있어요. 6·25 최초의 공중전.그 비행기가 안양 3동 약사골에 떨어졌다는 거예요.그게 말이 그렇지 지금 생각하면은 아찔한 거지요.근데 그 쪽, 약사골이라는 덴데, 왜 약사골이라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어느 기록에 보면, 약삭 이라고도 쓰고 보통 약사, 그냥 제 추측으로는, 거기 가재도 많고, 거기 가면 개울이 조그만 게 있었어요.이렇게, 양짓말 가운데로 개울이 있었을 거예요. 뱀이 많았어요.그래서 약뱀이 많다고 해서, 약사골이라고 그런 걸로 저는 생각을 해요.옛날에는 이름 질 때 그런 게 많으니깐. 뱀을 약으로 많이 썼잖아요.뭐, 지금도 그렇지만 그게 약사골 유래가 아니냐고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담배촌 피난 시절 봤던 것들담배촌 피난을 갔을 때, 소문으로는 이렇게 들어요.가재 잡아다 먹기도 하고... 밤 따다가 먹고, 그러다 같이 한번 내려다보면, 많이들 떠나요. 안양 쪽으로 많이 내려 와요. 그러고 지금 시민공원 거기까지 내려 왔는데, 비행기(쌕쌕이라고 부르기도)가 막 소리 지르며 날아와서 무서워서 나무위로 이렇게 올라갔어요. 이렇게보니깐, 그 채석장에 시민공원 거기에 자갈, 바윗돌 실어 나르는 기차 곡간이 한 두어 개 있었어요. 그게, 비행사가 보니깐 그게 군사 시설 같잖아. 그러니까 그거를 폭격을 하는데, 그걸 다 봤어. 내가 나무에서. 참 영화관람 잘 했네, 그 때. 전쟁영화. 그게 비행기가 이렇게와서 소리가 펑 나면, 연기가 쩍~ 나고, 쭉 와서 꽝~ 터지고. 참 명중 잘 해. 그런 것도 이렇게 보고.우리 아버님이 그 당시에 부읍장을 하셨어. 부읍장을. 지금으로 말하자면 부시장이지. 그러니깐 공산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아주 저건 부르조아 중에 부르조아거든, 처치 대상이지.그래가지고 초등학교 3학년 머리 박박 깎고 총 거꾸로 맨 사람들이와서 사탕 같은 거 주면서, 야~ 아버지 어디 가셨냐나 어디 숨어 있는지 알걸랑. 그거, 내가 손가락질 했으면 큰 일 날 뻔 했어.하하하그런데 어린 마음인데, 이거 사탕 같은 거 받아먹어야 되는 건지,안 받아 먹으면 잡아 가서 뭐 헐 거 같구. 받아서 먹으면 부모님에 대해서 불효 허고, 그런 갈등이 순식간에 이렇게 스쳐 지나가더라구.그래서 이렇게 받아만 갖고, 엉거주춤 하고.그러고 9·28 수복이 돼서, 다 물러 가고 그럴 때도 참, 구사일생으로살으셨어.그 땐,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 대한민국 쪽 편을 너무 드는사람들은 다 잡아다가 처치를 해야 되거든.도망가야 되니깐, 후퇴를 해야 되니깐.그래, 데려다 잡아 다가 지금 저 안양유원지 가는 고 안양천 언덕 저쪽으로 언덕 넘어 보면은, 지금은 다 고쳤지만 옛날에는 이렇게 둔덕이 있고 골이 쭉~ 져 있었어요. 거기다가 이 사람들로 하여금 다 골짜기를 파게하고거기다 총살을 시켰거든. 여러차례.그런데 우리 아버님도 붙들려 가지고 나중에 그렇게 끌려가는데, 안양, 양지교까지 끌려갔어. 그런데 그 때 비행기가 뜨니깐 다들 양지교 밑으로 이렇게 밑으로 들어갔거든.그 때 아니면 살 길이 없는 거야. 그 때 도망 치셨다는 거야. 그 때.그래 가지고 빠져 나와서 사셨다구. 참 그 옛날 말씀 하실 때, 그런옛날 얘기를 허시더라구요.그래, 그 담배촌 산위에서 바위에서, 미군 부대 온다, 그런 소문을 우리가 알었어. 그 때 인천상륙 한다는 거. 그래서 밤에 보니깐, 거기서보이거든 이렇게 볼라구 하면 소리는 안 들려도 대포 쏘고, 불 왔다갔다 하고,풍~ 풍~ 소리가 들리더라구요.그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그러니깐 얼마 되지 않더니, 탱크가 이렇게, 박달동 있는 데로 들어 와서 그냥 그 망해암 쪽으로 대포를 쏘고그러는 걸, 그런 경험을 그렇게 했지요.미군부대 주둔 시절의 기억그래, 지금 이렇게 보면은, 참 전쟁, 전쟁이라는 거, 추억으로 더듬으니깐, 영화 감상 하는 거 같은데, 진짜 어마어마한 얘기죠.그래서 그 때 무렵에 미군부대가 이 금성방직하고 이 쪽 성원아파트 하고거기 미군부대들이 주둔하고 있었어요. 미군부대들이.야~ 그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는데, 제일 많이 버리는 게 크리스마스카드야. 이 삼덕공원 쪽에도 거기가 쓰레기장이 있었어요. 그러면 거기를 매일 같이 뒤지러 가는 거야. 어떤 때는 쪼꼬렛트(초컬릿)도 나와.야! 그 때 그게 크리스마스 카드 라는 걸 처음 본 거거든.솜으로 산타크로스 할아버지 붙인 거에다가 뭐 참 황홀해.그 때 그걸 많이 모아 가지고, 많이 모으는 사람이 부자야. 그거는.하하하그 문화 감각, 그게 그래도 그걸 시각적으로 그런걸 보고 만지고 그런 게 나중에 내 정서에 도움이 됐어.다만 미군부대가 이렇게 주둔함으로 해서, 우리 흔히 얘기하는 양색시들이 우리 동네 까지도 이렇게 많이 있어서 청소년들한테는 그렇게 좋지 않았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해요.그래서 우리집에서도 어디 쪽은 가지 말아라. 어느 쪽은 가지 말아라. 어머니가 그런 말씀 해 주신 게 기억에 남거든요.아~ 학교에 가면은 뭐 시설이 다 파괴가 됐으니깐.가마니 깔고 공부를 해요. 가마니 깔고. 그래, 눈. 비 오고 그러면 새요.저는 몸이 어려서부터 약해요. 태어나자마자 무척 약했으니깐.지금도 병원은 각종병원, 산부인과 빼고 다 다니지.하하하드러누워서 학질, 옛날에는 학질이라는 게 있었어요. 하루걸이라 그러죠. 하루걸이. 드러누워서 공부 했으니깐 드러누워서.그래서 책 읽기, 드러누워서 할 게 뭐 있어요. 빈둥빈둥 책 밖에 할게 없었지. 그런데 그 때는 책이 없었어요.6·25 나고 바로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이라는 소설 두꺼운 거를이틀 만에 동네 형한테 빌려 가지고 전기도 없는데, 이틀을 밤새 읽으니깐 콧구멍이 새까매가지고, 철로길 모냥, 이렇게. 하하하야! 그 때 그거 읽고서 원균이라는 사람, 그거 참 얄밉고 말이야. 부엌칼로 찔러 죽이고 싶지.그 어린 마음에 국가관, 그러니까 위인전을 어렸을 때 많이 아이들에게 읽히고, 남학생들은. 여학생들한테는 순정 소설이라든지 이런 걸많이 읽혀야 돼. 그래야 정서가 많이 튼튼해져.안양공고 지금 초원약국 자리, 금성방직 입구 인데, 그 옆에 찐빵집이 하나 있었어요. 유일하게~ 야! 그 찐빵~~~그래서 우리가 학생시절에 서로 운동시합을 해서, 지는 팀이 그거 사주기.시합을 했거든. 근데 제가 운동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공짜로 많이얻어 먹었는데... 하나하나 큰 솥에다가 쪄 내고 그러던 그 아주머니얼굴은 지금도 안 잊어 버려.아주머니는 참 인정 많고, 참 푸근하게 생기신 분인데, 그거 먹으면,하루는 완성 되는 거야. 성공한 거야. 하루는. 야~~ 입맛이 지금, 다시 싹 도네.하하하서부영화를 좋아했던 소년특히 잊어버리지 못 할 추억이 하나 있어요.그 때는 영화를 참 좋아했어요. 학생들은, 옛날에 빵집이건, 극장이건 못 가니깐. 그런데, 저는 서부영화를 좋아 해서, 서부영화만 들어오면, 몰래 가고, 그때 화단극장이라는 데가 있었어, 화단극장. 거기서 몰래 봤지.그거 보고 와선 동네 애들 전부 모아 가지곤 얘기 해주는 거야. 겨울이면, 굴뚝 옆에 바깥에 굴뚝 있으니깐, 그 영향을 많이 받았지. 우리양짓말 후배 애들이 서부영화 얘기하고 참 멋있었어요.그런 쪽에 좀 호기심이 많아서, 선후배들이 많이 모이니깐,거기서 무슨 제안을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했다던가 하면은 우리 이러지 말고 우리들끼리 연극을 만들어서 동네사람 위안잔치를 하자.아주 아이디어를 좋게 냈어요, 그랬더니 아, 좋다고. 그 때는 노래 잘하는 형, 기타 치는 형 뭐 별사람 다 있어서 뭐 군인출신들 뭐 이렇게화장, 메이크업도 하는 사람, 뭐든지 이렇게 구색이 맞아야 도둑질도허는데, 그래서 제가‘ 원한의 복수’ 이렇게 드라마를 썼어요.이렇게 제목을 썼어. 그 걸 어디서 했느냐 하면, 수암천에서 했어.그 때의 이 수암천이라는건요 저 쪽~ 저 쪽에 한줄기 있고,지금 요 동네에 큰 밀밭이 있었어. 그리고 한 줄기는 이쪽으로. 그래서 이 앞으로 해서 다시 저리로 갔다구. 삼덕제지 이쪽으로. 그래서두 줄기로 나뉘어서 흘렀어.겨울인데 무대 짓고 뭐 극장을 빌릴 수가 없잖아. 그래 가지고 천변에다가 길거리에다 가설무대를 세워 가지고 거기 저쪽 사람들한테,겨울이니까 물이 없잖아. 넓은 자갈밭에 거기가 앉을 자리야.그래서 제가 쓴 원한의 복수 라고 하는 연극을 거기서, 거기서 했어요.사람 참 많이 모였어.참 많이 모였어요. 그래서 기분 좋고 그거, 1년밖에 못 했어.그거 다 잘 맞지 않고, 이사도 가고, 군인도 나가고 그러니깐.거, 지금도 눈에 선해. 원한의 복수야, 원한의 복수.1954년도. 그 스토리는 나도 많이 잊어 버렸어.제가 근데 새롭게 쓴 게 아닌가 봐요.여기저기서 듣고 읽은 거, 거기서 이렇게 훔쳐 와 가지고짜깁기 것 같애. 지금 생각 해 보니깐.위조지폐, 양심고백이거는 양심의 고백인데, 우리나라에서 제가, 완전 위조지폐범이에요.그림을 잘 그려가지고, 아주 그림을 잘 그렸어요.내 그림이 없었던 적이, 우리 동네에 다 내 그림을 붙였어요. 펜으로그린 거. 특히 제일 잘 그린 게 유비, 관우, 장비. 말 타고 가는 거.김용환 만화가가 그린 거, 그대로. 고대로 그려, 잉크로.참 잘 그렸어요. 근데, 뭐 군것질을 하고 싶은데 돈이 있어야지.그 때는 뭐 군것질, 용돈이라는 게 없으니깐,그러니까 심심한데 돈이나 그리기 시작을 했고, 옥색 물감으로.그 때 뭐 단군할아버지인지 이렇게 있는 거야. 옥색 물감을 사다가종이를 좀 구겨 가지고 이렇게 그렸어. 뭐, 한 삼사일 걸렸어.하하하그리고, 고 아래쪽에 지금도, 그 아들들이 살아 있지만,거 좀 눈이 나쁜 아주머니가 가게를 하셔.그런데 전기가 별로 없었어요. 저녁 때 어떨 때 보면 나가고 없대요.그래, 촛불도 그러고 시도 때도 없이 전기가 잘 나가고.지금 이북하고 비슷할 거야. 그래 거기 가서 그걸 주고사탕 두 개 이만한 거, 큰 거 그거 샀어. 어떻게 떨리는지 말야.그래도 먹고 싶은 생각이 이기니까,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거야.그래도 여태까지 안 들켰어.하하하여태까지 안 들켰다고. 그래, 완전 위조지폐범이지 뭐야.최초의 텔레비전 설치하던 날그전에 라디오 있는 집이 별로 없어요.그 때 여기 한국 부대가 미군들 떠나고 들어 와 있었는데,거기 확성기를 틀어 놔서 동네 사람들한테 들리고 그랬어.어린이 시간 되면은, 내 동생하고 같이 가는 거야.추운데 거 둑에 앉아서 요렇게 연속극을 들었어. 그럼, 다른 애들도그렇게 나와 있어. 거기 앉아서 듣는 거야, 그거 듣는 거야.그러고 들어가고, 들어가고. 그것도 기막힌 추억이고.그러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니깐 텔레비전이 나오지.우리 아버님이 그래도, 취직을 잘 하시고 그래서 동네에서는 괜찮게사셔 갖고 제일 먼저 텔레비전을 놓는데, 야! 그 텔레비전 안테나가국기게양대 몇 개는 있어야 돼.그냥 하늘 높이 올라가는 거야. 그 뒷집에다가 마당 뒤에 다가 그거 세우는 게 더 힘들어. 그래 그거 해 갖고 기술자들이 방에다 텔레비전 놓고,화면이 잘 안 나와. 그냥 지지지지 하고.그 때‘ 벤허’라고 하는 영화 선전하는 게 기억이 나요.텔레비전, 이제 동네 사람들 와서 보기도 하고, 또 라디오 시절에는내가 다른 라디오 있는 집에 가서 들어 보기도 하고, 그런 아름다운추억이 그렇게 있구요.안양공고 축구 우승, 카퍼레이드 하던날또, 그 후에 안양공고 축구가 아시아 청소년 대회에서 우승을 했을때, 카퍼레이드, 안양 최초로 카퍼레이드를 하던 기억도 나요. 뭐, 지금은 생각도 못 할 일이지. 하도 많으니깐. 밴드부가 있어 가지고 그옛날, 행사가 그렇게 많았어요.하여튼, 행사만 있으면 밴드부 앞에 서고, 꼭 U.N. 에 보내는 메시지낭독하고, 그러면 메시지 낭독을 하면 꼭 메시지라고 그래. 그러면 우린 맷돼지 그러고 답장을 하고. 중고등학교 시절에 여름에는 모내기지원을 많이 했고, 겨울 되면 토끼 잡으러 집단으로 체육시간에 전교생이 저 청계 쪽으로 갔었지. 몽동이 같은 거 하나씩 조그만거 들고 그냥 밴드부 가서 아주 소란스럽게 하면, 토끼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눈에 파묻히면 못 도망가고. 토끼는 괴롭겠지만, 우린 그렇게 즐겼지.   가정교사 첫 월급 1,500원대학교 들어가서는 금성방직 그 때 있었으니깐. 거기 공장장님 댁에가정교사를 제가 했어요. 중학교 때는 신문 좀 돌려 본다고 하다가 포기 했고, 추워서 못 허겄어. 그래서 한 두어 주 하다가 포기 해버렸구,동네 선배는 계속 했구.그런데 그 금성방직 가정교사 처음 월급을 받았는데, 1,500원 이었어.그 때 좋은 책이 150원 할 때니깐, 1500원 이면 지금 한 20만원 될까하여튼, 새 돈으로 그것도 주셨어, 새돈.야! 그거 두고 참 오랫동안 안 썼어요. 기념이라고.그런데, 어떻게 썼는지 지금 기억이 없어.그 아이가 상기라고 한상기였어. 초등학교 애를 거기서 가르쳤는데,제가 대학 졸업 맡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 연세 대학교에서 강의를하는데, 어떤 놈이 인사를 하는데, 저 상기예요. 보니깐, 그놈이야.야~ 어떻게 반가운지. 연세 대학교 수학과를 들어 왔어.그때 제가 대학 다닐 땐, 고무신만 신고 다녔거든요.참, 저도 성질이 이렇게 좀 편칠 못해요. 이렇게 좀 괴팍해서,연세 대학교 라는 데가, 그게 참 웃기는 대학이야.거~ 신사도를 가르친다면서, 또 우리는 4·19 세대기 때문에 학생들 규율잡는다고 그래서 교모, 사각모에다가 다른 데는 학생들 이렇게 카라 맞춰서 탁 끼우는 거 했는데, 우리는 뒤에 탁 세워진 신사복에 넥타이 딱 매고,야~ 그거 못 허겠대, 난 죽어도 못 허겠어.그래서 금성방직 직공들 입는 퍼런 죄수복 같은 거 있어. 그거 입고밀짚 모자 쓰고, 신발 신고 그러다가 체육선생한테 들켜 가지고 싸움도 많이 하고. 그래, 그 양반 하고 나중에 친해 졌지만, 그 때, 내가한말은 그 모자를 뺏길래 이렇게 당신들처럼 손이 하얀 사람이 이거만질 자격이 없다.이건 농사짓는 사람거니깐, 그거 당장 만지지 말라고, 말이야.어~ 그랬더니 깜짝 놀래 가지고, 그 양반이, 의외로 나오니깐, 그래나중엔 그냥, 무사통과야. 그냥 보고 의례, 그런 줄 알고...그래 4년간 흰 고무신만 신고 다녔어, 안양에서 통학을 하면서. 그래서 제, 전설 신화가 있어요. 연세 대학교 문학과에서. 그래, 그걸 이어 간 놈도 있대. 내가 졸업을 하고 나니깐 어떤 놈이 하얀 신발만 신고 다닌 놈이 있다고 그래. 그래서 학창시절이 이렇게 좋죠. 가정교사 해서 용돈 벌어 쓰고 그런 거.아픈 7·8수해의 기억, 양짓말 모임들또 뼈아픈 거는 77년 7월 8일날, 7·8수해라고 그러는 수해가 나 가지고저기 노적봉 그 아래 한 몇 가구가 산사태가 일어나서 20여 호가 한꺼번에 거기서 몰살당하는 참 그거 나쁜 추억이요. 우리동네에. 그때 제일 큰 수해가 난거야. 그래 정부에서 위로금도 답지하고, 그 때안양이 쑥밭이 됐으니깐. 기업체고 뭐고 참. 저야 뭐 직장생활 할 때지만, 그래 그런 추억거리도 좀 있고.양지동에는 이렇게 여러 단체들이 많아요. 봉사단체도 많고. 그 어느동네다 대게 비슷하겠지만 거기 양지회라는 게 있고, 안양 양짓말 본토들이 주로 모이는 양지회.그리고 또, 신양지회, 뭐 오래 하다 보니깐, 아버지 하고 아들내미 하고 같이 회원이 되니깐, 담배도 못 피고 술도 못 먹고 그러니깐갈라 서 갖고, 60세 전까지는 신양지회 그 위로는 양지회 하기로 했지.그러다, 변원신 선배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힘을 많이 잃고... 참 아쉬워.아파트 문집 경연대회 등 이뤄졌으면어쨌든,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나 이렇게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뭐든지책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창조 생산도시작 되는 거예요.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돼. 안 이루어지죠.제가 글 쓰는 사람이니깐 뭐 다른 건 별로 없는데, 여러 가지 동네에문예 사업 같은 거 중에 하나 뭐 이러면, 이것 좀 하나 했으면 좋겠다하는 게 하나 있었어요. 여러 가지 메모 해 놨는데 하나만, 말씀 드리면, 마지막 말씀이에요.아파트가 많잖아요. 여기는 아파트가 많아.그러면 그 아파트 주민들이 일기를 쓰던, 편지를 쓰던, 사진을 찍건,그림을 그리건, 여행기를 쓰건, 뭐 하여튼 문집을 만드는 아파트 문집경연대회 같은 거, 그런 거를 좀 했으면 좋겠어요.요새는 컴퓨터가 있어서 집에서 책도 만들 수 있어요. 거 뭐 칼라 다 되고,인쇄 다 되고 그러니깐 아파트 주민들끼리 모여서 그런 마을, 우리아파트 단지의 여러 가지 현상들, 이런 것도 여러 가지 보고 할 수가 있고, 그래서 동에서 주최를 해서, 아파트 문집 경연대회라 그래 갖고책으로 만들어서 아파트 마다 갖다 놓고 우리가 보면은 상당히 좋기도 하고, 그 아파트에 그 뭐라 그럴까요? 문예, 문화, 인문과 이렇게접맥을 할 수 있는 좋은 가교가 생길 거다. 이런 생각을 하거든요.그래서 안양, 지금 뭐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그런 것도 역시 우선내가 살고 있는 주변부터 이렇게 관심을 갖고 사랑을 하는 일로부터가야지.사람을 너무나 사랑을 해야지, 그게 결여가 되면 다른 일도 잘 완성되기는 어렵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그래서 오늘 욕심으로는 많은 얘기를 해 보려고, 너무 빨리 얘기를 했고또 이렇게 순서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볶음밥 뭐 비빔밥 모냥얼기설기 얘기가 된 것 같아요. 그래서 하여튼, 짧지 않은 시간잘 조용히 들어 주셔서 감사 하고, 앞으로 다른 기회 있으면 좀 더 말씀 좀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책자는 푸른경기21 도시대학 마을의제 작성 시범사업으로 안양3동에서 진행한 “인정 넘치는 살기 좋은 안양3동”프로그램 가운데, 안양3동 토박이이면서 시인인 김대규선생의 “내 고향 안양3동 이야기” 강의 내용을녹취해 풀었습니다. 풀이 과정에서 혹시 이름이나 지명 등이 잘못 표기된 점 있으면 양해바랍니다.
발행처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주 소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시민대로 235(관양동) 안양시청 6층TEL 031) 8045-5797D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8)/ 안양사(安養寺)와 정덕한(鄭德漢)

이야기보따리/자료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8)
안양사(安養寺)와 정덕한(鄭德漢)         

 

안양에 경사가 났다.
유유산업 부지에서 발굴된 매장유물 가운데 <安養寺>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된 것이다.
발굴조사단은 수습된 기와류, 전돌류, 도자 및 도기편 조각, 철제 동물 장식들의 유물과, 하천의 돌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중문→탑→금당(부처를 모신 공간)→강당→승방으로 연결되는 건출물터와, 좌우에 회랑(복도)이 있는 구조인 점에서 하부 초석층은 통일신라 시대의 중초사터이고 상부는 안양사의 초석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는 미확인의 설(說)로만 떠돌던 안양사 터가 유유산업부지라는 것이 공인된 것이며, 이로써 ‘안양’이라는 지명의 유래도 그 생모(生母)가 공식 확인된 것이다.
그러하니 경사가 아니겠는가. 아니 그냥 경사가 아니라 안양시 유사 이래 최대의 경사인 것이다.
필자가 이 글의 표제에 ‘정덕한’이라는 개인명을 쓴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안양사 문제와 정덕한 선생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알 만한 분들은 익히 알고 있는 일이지만, 차제에 일단락된 발굴조사의 청원인 당사자로서의 비중을 생각해서 언급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정덕한 선생은 고대 북아시아의 기층언어 가운데 중세 만주어 연구를 통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한반도의 지명을 고찰하는 ‘역사 제터잡이연구·우리 옛말 연구’의 재야 학자로서, 유유산업이 현 위치에 설립될 당시인 1960년에도 시흥군 청년학생단체 협의회장 자격으로 “해체된 삼층석탑은 중초사 당간지주 근처로 이전·복원하고, 추후 공장건축 과정에서 출토되는 역사 유물들은 철저하게 수집하여 시흥군이 지정하는 장소에 보존하기로 한다.
”는 이행각서를 받은 바 있다.
그 이후에도 안양사의 터가 유유산업부지라는 주장을 펴오다가, 지난해 1월에 매장문화재 발굴 청원서를 안양시에 제출했고, 안양시는 이에 따라 전문가들의 회의를 거쳐 (재)한울문화재연구원과 용역 체결을 하고, 금년 6월18일부터 10월6일까지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앞에 약술한 바의 성과를 올린 것이다.
세계문화사에서 희귀한 문화유물이나 사적일수록 특정 전문가의 집요한 탐사와 연구의 결과인 것처럼, ‘안양사’의 경우도 ‘정덕한’이라는 향토인의 애정과 열정의 결실인 점이 다분하다는 뜻에서 우리는 그의 존재 자체를 기려야 할 것이다.
(여기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지만, 24쪽에 이르는 그의 청원서는 고려사·조선왕조실록·동국여지승람·안양사탑 중신기(重新記) 등에서 안양사와 관련된 부분을 발췌·수록한 자료집이기도 하다.
) 문제는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일 터이다.
사안의 중요성으로 볼 때,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는 안양시의 권한 밖으로 일로 확대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안양시는 이에 대한 중·장기 계획의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안양사 연구팀’을 별도로 구성할 필요성도 자연히 제기될 것이며, 이에는 안양문화원의 ‘향토문화연구소’나 성결대 부설의 ‘안양학연구소’가 필히 그 주체적 역할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리모델링을 통해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용코자 한 당초의 계획도 차후의 발굴 확대와 같은 문제와 연계되어 있어 어쩔 수 없이 재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앞으로는 그 명칭의 비중이나 역사적 문화성에 비추어 ‘유유산업 부지’보다는 ‘안양사지’로 해야 되지 않을까. 또한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현재 유유산업 본사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들을 안양시가 인수하여, 금번 발굴될 문화재들과의 연관성을 검토하고, 차후 보관·전시할 공간도 마련해야 할 것이며, 더욱 어려운 것은 가능한 문화재의 복원 문제, ‘왕건로·능정로’라는 도로명 부여 문제, 홍보 영상물·책자, 또는 KBS 역사스페셜과 같은 TV프로 방영문제 등 풀어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인근 주민들의 재산권 문제도 만만치 않은 현안이다.
문화행위에는 사자들에 대한 생자들의 의례(儀禮) 의식도 담겨 있는 것이다.
안양사지의 확인과 함께 1천년이 넘는 역사의 요람에서 안양의 부활을 새삼 느낀다.
2009년 10월 16일(금) 01:01  [안양시민신문]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7)/ ‘안양예술인장’

이야기보따리/자료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7)
‘안양예술인장’         

 

지난 11월9일 이른 아침 7시에 샘안양병원에서 ‘故홍사영화백 안양예술인장’이 안양예총 주관으로 거행되었다.
이는 안양 최초의 일로서, 지역 문화예술인들은 물론이요 지역사회 전반에 걸친 뜻 깊은 영결식이었다.
고인이 생존시에 위문을 마친 예총 및 미술협회 임원들은 상황의 위급성에 따라 작고시에 ‘안양예술인장’으로 치룰 것을 잠정 결정하고, 유족의 동의를 얻고 그대로 집행한 것이다.
한 마디로 고인이 안양지역사회에 남긴 예술적 공로에 대한 예우인 것이다.
故홍사영화백의 생전의 활동상을 여기 일일이 예거할 수는 없다.
고인은 국전 입선(1981) 이후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펼쳐 7회의 개인전, 40여회의 국내외 전시회 출품, 그리고 안양예총 회장을 비롯한 한국미협 이사, 경기미협 회장, 국제 현대수채화학회 부총재 등의 직책과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경기미술대전 대회장, 관악현대미술대전 운영위원장 등의 행사 및 심사를 통해 그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니, 경기문화상과 안양시민대상은 오히려 부족하다 할 것인 즉, 몇 년만 더 살았어도 그 이상의 영예가 주어질 즈음에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니, 안타깝고 아까워 애통한 마음 형언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고인을 각별히 기리게 되는 것은 위에서 짧게 소개한 활동상들도 있지만, 안양시청·비산사거리·안양민자 역사·평촌먹거리촌·자유공원·현충탑 등 10여개 처에 제작 설치한 조형물들이 고인의 발자취를 여실히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인은 떠났지만 그의 분신들은 안양의 곳곳에 서 있어, 그곳을 지날 때마다 우리는 ‘홍사영’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길 것이다.
안양의 예술인들이 모두 알고 있듯, 고인과 필자와의 관계는 일반성을 훨씬 뛰어 넘는다.
내가 대학생 때, 그림을 잘 그리는 중학생이 있다는 얘길 얼핏 들었고, 안양여고 교사로 재직시에 그가 고등학교 2학년 생으로 개인전을 열고부터 8년 차의 나이를 무시한 인간적·예술적 관계가 불붙듯 시작됐다.
당시에는 얼마 되지 않던 문인·미술가들과 함께 만나면 술이었고, 통금을 핑계로 밤을 지새우며 마시기가 일쑤였다.
그때부터 고인이 되기 전까지 나는 “사영이”, 그는 “형님”이라고 불렀다.
서로 시인이니 화백이니, 선생님이니 회장이니 하는 호칭들은 거추장스런 덧옷이었다.
그놈의 술 때문에 그가 너무 일찍 ‘고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같아 웬만큼 가슴이 아픈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의 일생에서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예술과 인생과 사랑을 논하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니, 고인도 그 추억 속에서 편히 잠들기를 바랄 뿐이다.
영결식이 진행되는 동안, 고인이 생전에 즐겨 부르던 애창곡들이 배경음으로 잔잔히 흘러 나왔다.
모두 서글픈 노래들이다.
그는 참 노래를 잘 했다.
특히 목소리가 감미로웠고, 성량 또한 넘쳐났다.
한창 때는 음반도 냈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본인은 실패한 노래들이라고 한사코 들려주기를 거부했다.
나는 매번 그의 노래를 듣는 것으로 술자리를 파하자고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그를 찾아갔을 때, 초점을 잃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알았다는 듯 손을 움적거리던 모습, 내가 손을 꽉 잡고 “대규 형님 왔다!”고 소리치니 한 줄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영 지워지지 않는다.
영결식장에서 조시(弔詩)를 낭송하며 솟구치는 울음을 참느라 몹시 힘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시 대신 한바탕 통곡을 할 걸 그랬나 싶다.
故안진호시인의 ‘안양문인협회장’때도 그랬지만, 마지막 가는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가장 애통스럽다는 것을 새삼 절감했다.
그는 안양 출생인 모든 예술가 중에서 가장 천부적이고 가장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너무나 빠른 영결식은 우리 모두의 불행이자 손실이로되 지역사회 최초의 ‘안양예술인장’이 다소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또한 ‘故홍사영화백 안양예술인장’을 통하여 모든 예술인들의 지역예술 활성화에 대한 의지가 새로워지고, 안양시나 안양시의회를 비롯한 지역인사들의 예술단체와 예술인들에 대한 관심이 배가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09년 11월 13일(금) 01:01  [안양시민신문]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6)/ 박두진 시인

이야기보따리/자료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6)
박두진 시인         

청록파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혜산(兮山) 박두진 시인은 1916년 안성 출생으로 199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시인의 유명도에 비해 안양과의 연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최근에 ‘안양시사’ 발간을 위한 자료정리와 ‘안양의 자랑거리’ 선정위원회에서 박두진 시인이 화두에 올랐던 터라 안양 관련 부분을 정리·소개해 보고자 한다.
박두진 시인은 1942년 8월에 일가족 5인이 안양으로 이주하고 금융조합의 사무원으로 취업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일가족은 안양중앙교회에서 1944년 8월에 세례를 받고, 1948년에 장로에 장립되었다.
“안양으로 온 뒤로 그간 이렁성 하는 중에 아직 아무 것도 착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악 못 미처의 풍광은 매우 가려하고 안정되어 있으나, 아직 주택 구하지 못하고 두어 간 세 얻어서 지냅니다.
한 30분이면 도보로 통근되오며, 저녁이면 석유불 밑에서 겨우 눈을 밝히고 있습니다.
(중략) 벗이 그리움에 관악산 <연주암>을 고쳐 나의 <연우암>이라 불러야겠습니다” 위는 박두진 시인이 ‘소향(素鄕·이상로 시인)’에게 1942년 9월25일자로 보낸 편지의 일부다.
(이상은 박용산 목사의 ‘안양중앙교회 55년사’ 참조) 박용산 목사는 당시 박두진 시인이 시작뿐만 아니라 ‘북치고, 나발불고, 행진하면서 사람들을 모이게 하였던’ 노방전도에 함께 나섰던 일을 그립게 회상했다.
한편 박두진 시인은 1947년 말부터 구 삼덕제지의 서무과장으로 근무했지만, 1950년 초 가족이 서울로 이주하면서 중앙교회와 삼덕제지는 물론이요 안양과의 인연도 끊어진다.
박두진 시인이 8년 동안 안양에 거주하면서 남긴 두 가지 문학적 업적이 있다.
그 하나가 한국시문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청록집’의 출간이고, 또 하나는 ‘안양문학동인회’의 결성과 동인지 ‘청포도’의 간행이다.
박두진·박목원·조지훈 시인의 합동시집 ‘청록집’이 간행된 것은 1946년, 곧 박두진 시인이 안양에 기거하던 때다.
그러니까 시인은 ‘청록집’에 수록된 12편의 주옥같은 시들을 안양에서 탈고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양은 박두진 시인을 잊을 수 없다.
다음으로 ‘안양문학동인회’의 결성과 동인지 ‘청포도’의 발행에 대해서는 1947년 8월30일자의 동아일보 신간 소개란의 기사로 확인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인들의 면면이나 활동내용, 특히 ‘청포도’ 동인지가 남아 전해지지 않음은 웬만한 문학적 유실이 아닐 수 없다.
창간 주역인 정귀영 평론가 자신도 “8·15광복 직후에 안양에 「청포도」라는 동인지가 탄생했는데, 이것이 아마도 안양문학의 효시였다고 생각한다.
워낙 오랜 세월이 흘러 당시의 동인들 이름도 박두진 외에는 기억에서 되찾을 수 없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박두진 시인이 안양 최초의 동인회와 동인지의 창립·창간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안양문인협회에서는 그분들이 ‘안양문학동인회’를 결성하고 ‘청포도’를 창간한 1947년을 기점으로 「안양문학60년사」의 편찬계획을 세운 바 있는 터에 안양시에서도 삼덕공원의 조성과 함께 박두진 시인의 일터였던 그곳에 기념시비의 건립계획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모두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연세대 입학 직후 박두진 교수님 댁을 찾은 적이 있다.
1학년이어서 교수님의 강의는 없었지만, 안양과의 연고를 들은 바 있고, 또한 시인 지망생으로서는 당연히 인사를 드리는 게 도리였기 때문이다.
그때 교수님은 “나도 안양에 살았었지…” 하시며 운을 떼셨지만 그 이상의 말씀은 없으셨다.
교수님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얼마 후 대학을 떠나셨고, 조병화 시인이 강의를 맡게 되었다.
편운 선생과의 관계는 여기서 새삼 재론하지 않겠다.
다만 박두진 시인의 생존시에 자주 찾아 뵙고 안양에서의 문학생활을 자상하게 여쭙지 못한 점, 그리고 좀더 일찍 시비건립을 추진하지 못한 점이 못내 죄스럽다.
선생님, 용서해 주십시오.
2007년 10월 26일(금) 01:01  [안양시민신문]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5)/ 안양을 ‘시의 금광’으로 만듭시다

이야기보따리/자료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5)
안양을 ‘시의 금광’으로 만듭시다(2009.03.20)         

 

나는 지난 번 칼럼에서 미국의 ‘시의 달’(4월) 행사들을 소개하면서 평소 생각하고 있던 대안들을 제시해 보겠노라고 했다.
이에 앞서 먼저 전제할 것이 있다.
우선 이 글은 시를 쓰자는 것이 아니라 즐기자는 것이다.
삶의 질이란 즐거움을 많이 느끼며 살수록 증가된다.
의식주는 그 즐거움의 3대요소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밥을 먹으며, 좋은 집에서 살면 행복하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몸에 해당된다.
마음에도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밥을 먹이고, 좋은 집을 지어주면 더 행복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몸의 의식주에는 돈이 많이 들지만, 마음의 옷·밥·집에는 돈이 그리 필요치 않다.
그 마음의 의식주가 바로 문화예술인데, 예술은 문화의 꽃이요, 또한 시는 예술의 향기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그 향기를 널리 퍼뜨려 많은 사람이 맡도록 하자는 것이 이 글의 취지다.
우리네 삶의 주변에는 꽃들이 무수히 많이 피어 있는데도, 살기에 급급해 그 향기를 맡지 못하니 분위기를 바꿔 후각의 기능을 자극해 보자는 것이다.
시낭송회나 시화전에도 그런 의미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대개 일회적이다.
대중성, 곧 시민의 삶과 직결되지 못한다.
연결고리의 확장이 필요하다.
우선 전철역, 버스정류장, 아파트 엘리베이터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시화 한 폭을, 아니 마음에 드는 시 한 구절이라도 게첨하면 어떨까. 공원이나 안양천 산책로, 또는 공공건물의 게시판이나 공중화장실이면 어떤가. 유명 시인의 작품이 아니어도 좋다.
학교에는 교사와 학생들, 공공건물에는 근무자들, 아파트에는 입주자, 다중 집회장소에는 일반 시민들의 시를 부착하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이런 연장선상에서 시화(詩畵)거리·시비(詩碑)공원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삼덕제지에 근무했던 박두진시인의 시비를 삼덕공원에 세우자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좀더 적극적인 방안으로는 아파트 단지들의 정서적 유대감을 위해 단지별로 시문집(詩文集) 만들기 경연대회를 실시하여 시상과 함께 전시회를 개최한다든가, 그 많은 까페들 가운데 어느 한 곳에서는 주 1회 정기적으로 시와 노래, 그리고 시인과의 대화 시간을 마련할 수도 있다.
그 행사는 일반 시민들의 자작시·애송시 낭독을 위주로 진행하고, 더 바람직하기로는 안양시 시장과 시의회 의장을 비롯한 각급 기관장, 사회단체장에 국회의원·도의원·시의원들이 출연해서 애송시·애창곡을 들려 준다면 행복한 도시 만들기에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여기서 끝낼 것이 아니라, 아예 안양TV 방송국에서 이 행사를 주관·제작해서 방영한다면 그 효율성이 극대화되지 않을까. 만일 안양방속 측에서 용의가 있다면 구체적인 실행방법은 추후 상의하면 된다.
더욱 규모가 큰 사업으로는 ‘시집박물관’의 건립도 있다.
이는 안양시에서 그간 고민해 온 ‘테마박물관’의 한 가지 대안도 되리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국민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전통시인 ‘하이꾸’를 모집·시상한다.
외국의 신문사들에까지 파급되어 있다.
부러운 일이다.
한국에서는 중앙일보가 ‘시조’를 공모하고 있다.
우리 안양에서만이라도 초등학교부터 ‘시조 외우기’를 의무화시키면 어떨까. 다윈은 자서전에서 서른 살 이후까지 시를 읽으며 살았는데, 자신의 삶이 수많은 사실들을 수집하여 일반법칙을 쥐어짜내는 기계처럼 되어, 한 줄의 시조차 읽지 못하게 된 점을 못내 한탄했다.
또한 최고의 미래학자로 불리우는 존 나이스비트는 그의 명저 『마인드 세트(Mind Set)』에서 올바른 인성교육을 위해서는 교실에 반드시 시인을 한 명씩 배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는 시인만의 것이 아니다.
모든 속담은 시적 비유가 생명이다.
사실 성경도 시집이다.
노래는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요즘에는 음악치료·미술치료·연극치료에 ‘시치료’까지 등장했다.
시는 쓰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가슴으로 향유하는 사람의 소유다.
우리들 가슴 속에는 무한한 시의 광맥이 묻혀 있다.
그걸 캐내자는 것이다.
그 광맥 가운데 시가 금이다.
우리 안양시가 가장 아름다운 ‘시의 금광’이 되기를 염원하는 뜻에서 이 글을 썼다.  2009년 03월 20일(금) 01:01  [안양시민신문]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4)/ 삼덕공원에 박두진 시비를

이야기보따리/자료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4)
삼덕공원에 박두진 시비를(2008.11.07)

 

삼덕공원 기반공사를 위해 설치됐던 가림막이 제거되고, 옮겨 심은 나무들이 눈에 들어오니, 벌써 마음은 공원길을 걷게 된다.
안양시가 근래 펼친 사업 가운데서 단연 돋보이는 것이 문화예술 부문이 아닐까 한다.
이들 대부분은 전임 신중대 시장의 재임시에 선포된 ‘아트 시티’ 만들기에 따른 일련의 사업들로서 도심 간판 교체, 공공예술 프로젝트, 만안구 디자인 사업, 예술공원 조성, 문화재단 설립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삼덕공원도 이에 속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것 한 가지도 이의 제기없이 진행된 일이 없다.
삼덕공원이 특히 그러했다.
공원부지 제공자와의 인간적인 갈등, 지하 주차장 설치를 둘러싼 시민단체들과의 불협화음, 주변 환경과 연계된 각종 문화예술 설치물에 따른 지역 전문가들과의 이견 등이 ‘공원’이라는 시민 공익성을 무색케 할 정도로 난무했다.
시설물 설치와 이용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세상만사는 각론보다 총론이 언제나 우선 순위로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총론은 항상 ‘본질’을 지향하고, 각론은 그 본질 구현의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방법론은 언제나 수정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한국의 현실에서 모든 대주민 사업은 관이 주체가 되기 때문에 그 최초의 발상이나 기획에서부터 ‘본질’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적지 않게 마련이다.
전문성이 요구되는 일일수록 더 그러하다.
당초의 문화재단 설립안이 그 좋은 예다.
그럴 때는 외부로부터의 건설적인 제안을 속히 받아들여 일을 도모하는 것이 최상책이로되, 관의 속성이나 시정 책임자의 성향이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어쨌거나 삼덕공원은 조성 중이고, 문화예술재단은 설립 추진 중이다.
그동안 나는 재단 설립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지나치지 않았나 여겨지게 많은 제안의 글을 썼는데, 이번에는 삼덕공원에 ‘박두진 시비(詩碑)’를 건립하자는 제의를 하는 바이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박두진시인은 1916년 안성 출생으로서, 1939년에 ‘문장(文章)’을 통해 등단한 후, 1942년에 안양으로 이사와 삼덕제지 서무과장으로 근무하면서, 1948년도에 안양중앙교회 장로에 장립되어 시작(詩作)과 종교생활을 함께 했다.
그리고 1950년 6·25 직전에 서울로 이사했다.
안양에 거주한 것은 비록 얼마 되지 않지만,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그의 문학적 업적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첫째는 박두진시인이 정귀영 평론가와 주도하여 1947년에 ‘안양문학동인회’를 결성하고, 안양 최초의 동인지 ‘청포도’를 간행 했다는 점. 이는 ‘안양문학’ 60년의 효시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둘째는 한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청록집』(1946년)이 박두진시인의 안양 거주시에 간행됐다는 사실에 비추어, 많은 수록 작품들이 안양에서 집필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사실만 가지고서라도 그의 안양에서의 문학생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인 바, 시인이 바로 ‘삼덕제지’에 근무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시비 건립의 의의는 적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당초 전임 시장 재임시 ‘삼덕공원’ 조성사업 논의 때, 박두진시인의 시비 건립에 대한 긍정적인 검토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 후의 추진 상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 공론화의 계기도 마련할 겸 해서 제안 형식을 빈 것이다.
전국에는 지자체마다 자천타천으로 향토 출신 시인의 시비가 무수히 많고, 사업성이 두드러진 시비공원도 있다.
이에 대한 공과(功過)는 논외로 하더라도 문화예술진흥에 있어 지역 연고의 문화예술인을 기리는 것이야말로 우선 순위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기왕에 ‘삼덕공원’이 조성되고 있는 와중이라서 제안이 늦은 감은 있지만, 공원 조성 이후일지라도 이에 대한 전향적인 검토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자연 다음으로 인간 영혼을 정화시켜 주는 것이 예술이다.
그런 뜻에서는 시심(詩心)은 인간 풍성의 ‘방부제’라 할 수 있겠다.
그 방부제를 위한 첫삽이 박두진시비 건립으로부터 새롭게 시작되기를 희구해 본다.          2008년 11월 07일(금) 01:01  [안양시민신문]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3)/ 내가 생각하는 ‘안양사람’

이야기보따리/자료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3)
내가 생각하는 ‘안양사람’ (2008.11.28)


‘안양사람’ 이라는 말은 곧바로 ‘안양토박이론’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내가 여기 쓰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이분법적인 얘기가 아니다.
‘안양사람’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겠다.
첫째는 법적으로 안양시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사람이다.
안양시민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 가운데는 주민등록만 안양시에 되어 있고, 실제로는 타지에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주민등록은 타지에 되어 있고 거처는 안양시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법적인 안양시민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법적인 안양시민은 안양에 세금을 내고, 안양에서 투표권을 행사한다.
선거때 불거지는 위장전입 문제도 투표권 때문이다.
명예시민도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납세·선거 의무를 갖고 있지 않다.
두 번째 ‘안양사람’은 안양 출생자를 말한다.
그러니까 토박이란 안양에서 태어나 안양에서 살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부모가 토박이는 아니더라도 그들이 안양에서 낳은 자녀들은 당연히 안양사람이다.
외지에서 살더라도 안양 출생자는 영원히 안양사람이다.
그게 바로 ‘고향’의 운명이다.
여자는 일반적으로 성년이 되면 타지로 출가를 한다.
전국에 그 얼마나 많은 ‘안양댁’이 있겠는가. 고향은 탯줄처럼 운명의 줄을 끊는 법이 없다.
그래서 고향은 어머니요, 애향은 모성애적인 사랑이고, 향수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닮은 꼴이 된다.
토박이론이 대두되는 것이 바로 이 대목에서다.
지금까지 태어난 집터에서 그대로 살고 있는 나는 평생을 글만 써오면서 호(號)도 문학과 고향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文鄕’이라 했고, 편지 말미의 내 이름 앞에는 반드시 ‘안양’이라고 써서, 안양사랑의 마음을 표출해 보기도 했고, 안양을 소재도 적지 않은 시와 잡문을 쓰기도 했다.
그게 어찌 안양사랑의 능사랴. 그런 뜻에서 나는 위에 말한 두 종류의 안양사람 얘기에 한 종류의 안양사람을 추가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법적·태생적인 문제와 관계없는 ‘정신적’인 안양사람을 말한다.
곧 안양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안양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된 증상이 있다.
‘안양’이라는 말만 들으면 ‘가슴이 뛴다’는 것이다.
시인 워스워드는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뛰노라”라는 유명한 시를 썼다.
‘산’이라는 말을 듣고서도 가슴이 뛰지 않으면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낚시, 축구, 책, 술, 커피, 돌, 음악, 꽃 등등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것을 설레게 한다.
외국에 나가 태극기를 볼 때 가슴이 뛰면 당신은 애국자임에 틀림없다.
애독·애석(愛石)·애마·애주·애견·애연이 다 그렇다.
‘애향’도 마찬가지다.
이들 ‘사랑(愛)’이 지나치면 거기에 ‘광(狂)’자가 붙는다.
축구광·독서광·낚시광·영화광·수집광의 마니아들이 그들이고, 술·담배·커피를 미치게 사랑하면 알콜·니코틴·카페인 중독자가 된다.
안양을 사랑한다는 것은 고향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지 않다.
안양 태생이 아니더라도 안양을 사랑할 수 있고, 안양에 살지 않더라도 안양을 사랑할 수 있다.
안양의 초·중·고·대학의 어느 시절의 학교생활에 아름다운 추억 때문에, 안양의 프로농구팀 때문에, 관악산·수리산 때문에, 안양에서의 오랜 직장생활 때문에, 애인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첫사랑을 나눈 곳이기 때문에 안양을 사랑할 수도 있다.
그 많은 ‘ 때문에’ 가운데 안양 출생과 안양 거주는 가장 중요한 ‘때문에’일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안양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곧 ‘안양’이라는 말을 듣고서 가슴이 뛰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안양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말로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안양사랑 단체도 많다.
그러나 그들이 다 진정한 의미의 안양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나 안양 토박이가 안양을 사랑하지 않는 것, 말로만 안양사랑을 드높이는 것은 배향자(背鄕者)라고 생각한다.
이게 어디 안양만의 얘기인가. 애향, 애국, 애세(愛世:세계 사랑)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2008년 11월 28일(금) 01:01  [안양시민신문]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2)/ ‘대동문고’와 ‘전영선’

이야기보따리/자료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2)
‘대동문고’와 ‘전영선’ (2008.12.12)


1963년 대학 졸업반 때, 나는 안양여중고에서 아르바이트로 배구코치를 하고 있었다. 그해 가을 어느날, 교문을 들어서려는데 한 젊은이가 상자 판지에 책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이때나 그때나 책을 좋아 했던지라 몇 권을 골라 샀다.
며칠 후에 또 그가 왔다.
책을 또 샀다.
그러기를 몇 차례,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가고 우리는 곧 친한 사이가 됐다.
그가 바로 오늘날 대동문고의 전영선 사장, 그와의 교우는 그렇게 시작됐던 것이다.
45년 전의 일이다.
전영선 사장은 ‘자수성가’보다 ‘입지전적’이라는 말에 더 합당한 사람이다.
전남 영광 출생으로 가정 형편상 중학교 이상의 학업을 계속 할 수 없게 되자, 고학 일념으로 무조건 가출·상경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음식점·세탁소 종업원, 공사판 막노동, 신문배달, 봉투제작, 자전거 용달에다가 뻥튀기·멸치·오징어·아이스 케익·참외 장사 등, 배고픔의 서러움을 흠씬 맛보고, 그래도 공부는 해야겠다고 책은 좋아해서 1961년에 포천에서 헌책들을 모아 ‘대동서점’을 꾸리게 된 것이 서점과의 인연이 된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포천을 떠나 마침내 찾아든 곳이 바로 ‘안양’이었다.
안양여고 맞은 편 셋방에 ‘대동서점’ 간판은 또 내걸었지만, 실제 장사는 당시의 금성방직, 태평방직, 유유산업, 동일방직, 동국물산 등의 회사와 안양공고, 안양여고의 정문 앞, 또는 구시장이나 현 중앙시장에서의 노점상이었다.
그는 정말 근면·성실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작전을 방불케 하는 노력 끝에 노점상을 그만두고 안양공고로 들어가는 길가에 단칸 판자집을 얻어 ‘대동서점’의 둥지를 틀었다.
단 한 권의 책을 주문받아도, 그것이 희귀본이라면 청계천·동대문의 고서점들을 샅샅이 뒤져서 반드시 찾아 왔고, 학생들에게는 덤핑 서적이 아닌 양서를 공급하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지성감천이라고 ‘대동서점’은 날로 번창하여 드디어 8층의 매장 건물과 서너 곳에 별관까지 설치한 대형서점으로의 성장·변신을 이룩해내고 명칭도 ‘대동문고’로 바꿨다.
전영선 사장은 서적상이기보다 철저한 교육주의자다.
자신이 더 배우지 못한 한을 대신 풀기 위해 불우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새마을문고 안양지부장 재임시에는 안양교도소에 ‘독서대학’을 개설, 재소자들의 독후감을 모아 「책 속에서 새 인생을」(1984)이라는 책을 펴내고, 안양시 각 동에 새마을문고를 설치해 도서 기증을 하고, 각종 지역문화예술 행사는 물론이요, 최근에는 중국 요녕성의 조선족 중학교에까지 지원의 손길을 펼쳤다.
이와 같은 그의 헌신적인 봉사에 감동한 안양지역의 퇴직 교장단은 수년 전부터 자원봉사단을 결성하고 주 6일간 대동문고 현장에서 독서지도와 책도우미 활동을 하고 있다.
아, 그런데 그 대동문고에 부도가 난 것이다.
바로 앞 건너편에 대형문고가 들어서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현 위치로 확장·이전한 것이 무리한 투자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안양시민에게 서점의 상징이자 문화적 명소로 자리매김한 45년 전통의 대동문고가 존폐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에 평소 전영선 사장을 아끼는 사람들이 서둘러 ‘대사모(대동문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만들고, 시민들에게는 한 권의 책이라도 대동문고에서 구입해 주기를, 금융기관과 출판사 측에는 부도처리 기간을 연기해 대동문고가 재생할 수 있도록 선처해 줄 것을 당부하는 ‘호소문’을 작성·배포했는데, 대동문고의 부활에 일조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구나 전영선 사장 내외가 오랜 지병으로 건강이 여의치 못한지라 설상가상의 고통인들 오죽하랴. 사람에 따라서는 사정(私情)에 치우친 글이라고 탓할 지도 모르겠으나, 반 세기에 가까운 우정도 우정이려니와, 안양에서 대동문고가 45년 간 쌓아 올린 문화·교육적 상징의 탑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도 안타깝고, 한 인간의 입지전적인 신화가 물거품이 되는 것도 후세들이 본받을 인생교본의 상실이라는 점에 인간적 연민이 더해져, 누구보다도 ‘전영선’이라는 인간을 잘 아는 사람으로 이 글을 쓴 것이다. 2008년 12월 12일(금) 01:01  [안양시민신문]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1)/ 채만식의 ‘안양복거기(安養卜居記)’

이야기보따리/자료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2008.12.29)

채만식의 ‘안양복거기(安養卜居記)’

안양은 1960년대 이후부터 급속히 성장·발전한 후발 산업도시지만, 문학의 경우는 이보다 앞선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극작가 이서구(李瑞求), 소설가 이무영(李無影)·채만식(蔡萬植), 시인 박두진(朴斗鎭), 평론가 정귀영(鄭貴永) 등의 문인들이 작품활동을 한 관계로 일찍이 문학성이 높은 지명으로 알려져 왔다.
그들 가운데서 정귀영만 아직 생존해 있지만, 92세의 고령으로 인천의 한 노인병원에서 요양 중에 있다.
위의 네 선구자들이 안양에 남긴 업적 가운데서 문학적 유산으로 기릴 수 있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가 아닐까 한다.
첫째는 정귀영·박두진 등이 1947년에 ‘안양문학동인회’를 결성하고, 안양 최초의 동인지 『청포도』를 창간했다는 것. 이는 ‘안양문학’의 공식적인 출범으로서, 이를 깃점으로 한 『안양문학60년사』가 곧 출간 준비 중에 있다.
둘째는 1958년에 정귀영이 성기조·노영수·김창직 등과 함께 『시와 시론』을 창간하여, 소읍(小邑)이었던 안양을 지방문학의 요람으로 부각시킨 일이다. 이의 문학적 성과에 대해서는 상술하지 않겠다.
그리고 세 번째가 이 글의 주제인 채만식의 ‘안양복거기’이다. 소설 『탁류(濁流)』로 유명한 채만식은 1940년에 인천 송도에서 ‘양지말’(현 안양 3동)로 이사를 와 작품활동을 하다가 1946년에 낙향(이리)하여 4년간의 폐결핵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안양복거기’는 그가 새롭게 삶의 터전으로 삼게 된 ‘안양의 인상기’라 할 수 있겠는데, 아주 긴 편지 형식의 글이다.
‘P형’에게 보내는 ‘안양복거기’는 “이번에 불시로 송도를 떠나 안양으로 이사를 했오. 경부선 안양역이고 경성(京城)과는 바로 24킬로 상거(相距)에 아주 지근한 사이고, 여름 한철이면 푸울과 포도와 수박으로, 그밖에도 관악산 하이킹의 초입처로 두루두루 서울 주민들에게(그러니까 형한테도) 잘 알려진 그 안양이오.”라는 대목으로 시작된다.
글 가운데는 주거 환경의 어려움이 적잖게 나타나 있지만, ‘복거(卜居)’라는 말이 “살 만한 곳을 가려서 정함”이라는 뜻인 점에 비춰, 그래도 안양으로의 이주에 정서적인 거부감은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이 ‘안양복거기’를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삼는 것은 그것이 문학작품이어서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 특히 안양과 관련된 생활사 연구의 자료적 가치 때문이다.
예컨대 1940년대 양지말의 집값이 ‘270원’이었다는 점, ‘역전의 조선직물이라는 푯말’, 대부분의 집에 울타리와 사립문이 없었고, 등기조차 나지 않았으며, 수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홍수때는 범람하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고(바로 그곳에서 78년 수해가 났다), 건너 편에 공동묘지(현OO아파트)와 마을에 상여집이 있었으며, 안양에 공중목욕탕이 없어 ‘목간’을 하려면 서울로 가야 했고, 여름엔 푸울에 가서 씻었으며, 목욕비가 1원이요, 편지는 기수일(奇數日)의 격일제 배달에, 인력거(人力車)가 없었으며, 당시 서울은 외미(外米) 백미 잡곡 비율이 3:4:3 이었는데, 안양은 5대1의 잡곡 대 백미 혼합이었다는 것. 또한 물이 대단히 흔하고 수질이 좋아 집집마다 우물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물이 좋아서 이 고장 사람들은 체증이란 걸 모른다고까지” 할 정도여서 “일설에는 ‘안양물을 오랫동안 먹으면 디스토마가 없어진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수리산 아래로는 ‘수천 주의 밤나무가 울창했고(율목동), ‘하천을 지나 자갈 운반의 인입선(引入線) 철둑을 넘어서면 이내 그 율림(밤나무숲)이 나타나니’, 그곳이 바로 현재의 시민체육공원 가는 길이다.
채만식은 특히 이 밤나무숲에서 울어대던 두견을 좋아해서 “이 두견의 울음 하나만 가지고도 풍류객으로 하여금 안양을 귀히 여기게 하기에 족한 것이오”라고 쓰고 있다.
양지말은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이어서 더욱 마음이 이끌리는 글이지만, 자연 하나만으로도 행복했고, 그래서 안양을 귀하게 여긴 한 소설가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는 것이다.  2008년 12월 29일(월) 01:01 [안양시민신문]

[김대규]지역발전을 위한 고언(苦言)

안양지역얘기/담론
[김대규]지역발전을 위한 고언(苦言)

안양시민신문 발행인


 

최근 수삼년 간 우리 안양에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발전의 기반조성을 위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여기에는 벤처벨리조성, 시민축제개최, 경인교대유치, 안양학연구소설립, 문예진흥기금조성 등을 비롯하여, 시민단체들의 의욕적인 조사·연구·제안, 여성계의 눈부신 활동, 안양역사와 롯데백화점 개설, 그리고 최근의 ‘아트시티’조성계획, 신필림종합예술학교 설립과 무비타운 건립을 위한 일련의 논의들이 포함된다.

국가경영은 정치와 경제를 축으로 삼게 마련이지만, 지역사회의 경우는 ‘행정’이 주체가 된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일단 시당국의 적극적인 사업의 개발과 추진에 응분의 평가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와같은 괄목할 만한 과업의 추진에 있어, 그것이 시당국과 관계될 때는 해당분야의 전문가들, 특히 시의회나 시민단체로부터 거부감이나 비판을 받아왔음도 묵과할 수 없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바로 지금이 이 문제에 대해 함께 중지를 모아야 할 시점이라는 취지에서 시당국과 시의회나 시민단체측에 고언을 하고자 한다.

먼저 시당국은 추진사업의 당위성이나 중요성보다, 계획수립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시행결정에 이르는 전과정에서 의회나 전문성이 있는 시민사회단체와의 협의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되돌아 봐야 한다. 이는 지방자치의 본질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더 훌륭한 대안을 가진 인사가 참여의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 소외감을 안게 되거나, 의회와의 조율이 필요한 부분이 결여될때, 시당국은 ‘독단’이나 ‘무시’라는 굴레를 벗기 어렵게 되고, 이는 소기의 목표달성에 장애요인으로 등장되게 마련이다.

이와는 반대로, 시의회나 시민단체의 관계 전문가들은 비판이나 거부감 표출의 방향성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다 나은 ‘대안’이 없는 반대는 ‘반대를 위한 반대’일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투쟁’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갈등’이 아니라 ‘상보(相補)’의 구조로 가야 한다. 투쟁은 항상 ‘all or nothing’의 논리다. 그러나 상보는 이질성의 조화에 의한 대안의 창출이다.

지금까지 한국사회가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을 정착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 지역적, 종교적, 이념적 갈등 구조에 의해서 편재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선결되어야 할 것이 ‘지도자’부터의 의식변화다.
따라서 필자의 고언의 촛점은 시행정의 책임자인 시장, 각동의 지도자인 의원, 그리고 여러 시민단체의 대표에게로 모아질 수밖에 없다. 안양의 발전을 위해서는 위의3자들이 이마를 맞대고 함께 ‘고민’해야 한다. 가장 진실되게, 가장 깊이 고민하는 사람이 어떤 일에 있어서나 가장 본질에 달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진정으로 지역사회를 사랑하고, 공익을 염원하며, 발전을 기원한다면 누구를 탓하고, 어찌 상대방에게 손가락질을 하겠는가. 투쟁은 배격하고, 상보는 포용한다. 행정은 민(民)을 먼저 헤아려 베풀려고 해야 하며, 민(民)은 행정을 이해하고 협조하도록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렇다면 거기서 어찌 갈등이 생길 것인가.
고정관념은 자기우월주의의 창이며, 선입견은 배타주의의 방패다. ‘너-나’의 관계가 아니라, ‘우리’라는 의식의 틀부터 먼저 만들어 가자.

2003-05-28 09:3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