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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9]민선 1.2대 안양시장을 지낸 이석용 시장

2023.01.29./ #아카이브 #기록 #인물 #군포 #안양 #이석용 11대 국회의원과 민선 1.2대 안양시장을 역임한 故 이석용 전 시장은 1938년 경기도 시흥군 남면(현 군포시)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우실업 이사, 대우전자 사장 등을 지내며 기업체에서 잔뼈가 굵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경기도 안양시-시흥군-옹진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윤국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경기도 안양시-광명시-시흥군-옹진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신한민주당 이택돈 후보와 민주정의당 윤국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7년 신..

[20230128]1988년 소멸돼 사라진 행정구역 시흥군 기록

2023.01.28./ #아카이브 #기록 #역사 #시흥군/ 1988년 소멸돼 사라진 행정구역 시흥군의 기록. 시흥의노래 시흥군민헌장, 그리고 상징물, 자료출처: 시흥군지(1988)에서 시흥군(始興郡)은 1895년부터 1988년까지 존재했던 경기도의 행정 구역으로 가장 번창했을 당시 안양시 중앙동(현 안양일범가)에 군 청사가 자리했었으며 소멸 직전에는 안양6동 현 만안평생교육센터 자리에도 잠시 있었다. 원래의 시흥군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 군청을 두고, 서울특별시 금천구를 중심으로 영등포구(양화동 제외) · 관악구(남현동 제외) · 동작구 일부(신대방동, 상도동) · 구로구 동부(안양천 동쪽)와 경기도 광명시(옥길동 제외) · 안양시 일부(석수동, 박달동)를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1914년 4..

[지도]1949년 안양면의 읍 승격 이후인 1961년 시흥군 관내도

① 안양면의 읍 승격과 동면 일부지역의 서울 편입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자 조선은 식민지에서 벗 어나 미군정의 잠정적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미군정기 지방제도는 식민지적 색채가 짙은 것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일제하의 지방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인 11월 17일에는‘지방행정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 공포됨으로써 우리나라 지방제도의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시흥군과 관련된 행정구역 변화는 1949년 안양면의 읍 승격과 동면 일 부지역의 서울 편입이다. 즉 1949년 8월 13일에 대통령령 제162호로 공포되어 8월 14일에 시행된‘읍 설치에 관한 건’에 의해 시흥군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승격되었고, 같은 날 대통령령 제159호로 제정..

[옛신문]시흥군청(영등포->안양) 이전 운동(1936.02.26 동아일보)

2023.01.28/ #아카이브 #옛신문읽기 #동아일보 #1936년 시흥군청 이전(영등포->안양) 운동 기사 동아일보 1936년 2월26일자 자료 발굴: 시흥시사 3권-시흥의 근현대중에서 기사는 동아일보(1936년 2월26일자)에 게제된 시흥군 청사 이전운동이다. 1936년 영등포읍과 북면 일원이 경성으로 편입된 후, 영등포읍에 소재하던 군 청사를 이전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영등포의 경성 편입 이전에도 청사가 있는 영등포가 시흥군 전체로 볼 때 너무 치우친 지역에 있어 불편한 점이 많았으므로, 지역의 유지들 사이에서는 이미 청사 이전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영등포가 경성으로 편입되자, 청사를 이전하자는 논의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36년 2월 21일 군내의 공직자와 유력자 등 1..

[20230128]안양에서 8.9.10.12대 4선을 역임한 이택돈의원

2023.01.28./ #아카이브 #기록 #역사 #인물 #안양 #이택돈 #국회의원 이택돈(李宅敦) (1935∼2012) 1935년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고잔리 391번지에서 태어났다. 인천고등학교(52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제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이후 서울고법 판사와 대법원 재판연구관등을 역임하다가 사직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시흥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전국구 국회의원인 민주공화당 이영호 후보를 꺾고 당선되면서 8·9·10·12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신민당 정책연구실장, 대변인, 법제위원장, 사무총장, 원내총무, 부총재를 지냈다. 한일의원연맹 부회장도 역임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와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20230128]안양 출신 독립운동가 이영래(1873-1949)

2023.01.28/ #아카이브 #기록 #역사 #인물 #안양 #이영래 #독립운동가 이영래(李永來) 고종 10년(1873~1949) 본관은 全州. 泰純의 장남으로 1873년 4월 12일 경기도 과천군 상서면(현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113)에서 출생했다. 그는 1919년 3월 상경하였다가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목격하고 돌아와 자신의 동네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하고, 3월 27일 광목 행상도중 서이면 일동리(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白基和 집에 들 러 그 집에 모여있던 敎 외 수명에게 「다른 마을에서는 조선독립만세를 크 게 불러 기세를 올리고 있는데 당신들은 짚신만 삼고 있어 되겠는가」라고 말한 후 주민 약 5명과 함께 그날밤 8시경 관양동 서쪽 언덕 위에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침으로써 독립운동의..

[20230128]42세때 국회의원에 당선 3선을 역임한 윤국노의원

2023.01.28./ #아카이브 #기록 #역사 #인물 #안양 #윤국노 #국회의원 윤국노(尹國老) (1936∼1986) 정치인. 본관은 해평. 호는 도암. 일제강점기 당시 경기도 평의원을 지낸 윤경섭과 어머니 김복성 사이에서 5형제 중 4남으로, 안양시 안양동 634에서 출생했다. 큰형 학노는 전 국회의장 이재형(작고)과 군포초등학교 동기동창으로 광복전에는 평양지법 판사. 광복후에는 대구.;대전.서울지법 부장판사를 역임한 원로법조인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법관 연임을 거부한 유일한 율사로 기록돼 있다. 양조업을 하는 부친 덕분으로 비교적 유복하게 자라 어려서부터 쌀을 몰래 빼어다 어려운 이웃을 돕기도 하고, 주말이면 안양2동에 있는 안양기독보육원을 찾아 원생들과 하루해를 보내기도 했다. 훗날 JC(청년회의..

[20230128]1992년 안양시지에 실린 <만안교>에 대한 기록

9. 萬安橋 안양을 대표하는 문화재의 하나로, 안양문화를 상징하는 文化祭의 유래가 된 조선 후기의 虹霓石橋이다. 이 다리의 축조는 조선 제22대 임금으로 효심이 지극 했던 正祖(1776~1800)의 명에 의해 가설되었다. 정조는 英祖(1694~1776)의 왕 세손으로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 했으나, 아버지思悼世子(1735~ 1762)는 영조의 왕세자이었으나 부왕인 영조에 의해 영조 38년 (1762) 윤 5월 13일 왕세자의 지위에서 폐출되어, 뒤주속에 갇힌지 8일째 되는 동년 윤 5월 21일 죽은 비운의 인물이다. 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세자의 位號를 회복시킴과 동시에 시호를 思悼라고 하고, 세자빈을 惠嬪이라 하여 비명에 간 아들의 영혼을 위로 하였으나 이미 지나간 비극이었다. 영조가 재위 52년(17..

[20230128]1974년 옛 안양시청사(현 만안구청) 신축 조감도

2023.01.28/ #아카이브 #옛사진 #안양 #기록 #기억 #구안양시청 #현만안구청 #1974년/ 2023년 올해는 안양시가 읍에서 시로 승격한지 50주년이 되는해로 관련 자료들을 발굴하고 있다. 이 사진은 1974년 발간한 제1회 안양시통계연보 자료집에 수록된 기록으로 당시 안양6동에 자리했던 안양시청사(현 만안구청)의 신축 조감도이다. 구 안양양시청(현만안구청)이 들어선 곳은 과거 밤나무가 무성한 율원(栗園) 이었다. 경기도 임업시험장(1938~1971)으로 쓰이다가 안양읍이 1973년 시로 승격하였으나, 새 청사가 마련되지 못한 관계로 안양1동(현 안양일번가)에 있던 안양읍 청사에서 일시 업무를 보다가 시 승격 2주년이 되는 1975년 7월 여기에 최초의 안양시 청사를 신축하고 이전하였다. 청사..

[20230127]1992년 안양시지에 실린 주간조선 이규태컬럼 만안교

2023.01.27/ #기록 #만안교 #안양시지 #이규태컬럼/ 만안교는 본래 안양대교에서 동쪽으로 안양유원지 길을 따라가다 만안로와 서로 만나는 +자 교차로에서 북쪽으로 약 20m 지점에 있었다. 그러나 구 한말에 이르러 일제가 경부선을 부설하면서 안양천을 남쪽으로 우회한 후부터 다리로서 의 효용가치는 상실되어, 다리의 위와 아래지역에 공장과 민가가 들어섰는가 하면 한 때는 다리 밑은 넝마주이 등의 안식처(?)이기도 했으며, 광복후 국도1호선에 포장을 실시하면서 다리위에 콜타르를 부어 만안교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언론인 이규태(1933년생, 조선일보 논설위원)가 1976년 만안교를 둘러본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