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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9]서울의 관문 과천과 남태령 옛이야기

함께쓰는 과천시지 훝어보기 http://www.gcbook.or.kr □ 과천의 행정구역 변화 과천은 삼국시대애는 고구려의 '율목(栗木)' 또는 '동사흘(冬斯 )' 또는 '율목군(栗木郡)'이었다. 이를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율진군(栗津郡)'으로 고친 것을 고려 초에 '과주(果州)'로 고쳤고, 8대 헌종 9년(1018)에 이를 광주(廣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3대 태종 13(1413)에 지금의 이름인 '과천(果川)'으로 고쳐서 현감을 두었는데, 다음 해에 금천(衿川.지금의 서울 금천구와 시흥시 일부)에 합쳐 '금과(衿果)'라 하였다가 두어 달 만에 복구되고, 7대 세조 때에 다시 금천에 합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또 복구하였다. 그리고, 조선 말인 고종 32년(189..

[20240109]과천과 남태령 옛길

며칠씩 묵으면서 과거장에서 갖추어야 할 예절과 기풍등을 매사에 빈틈없이 익히 고 수련한 다음 과거 전날은 이 산 자락에서 흐르는 맑은 시냇물에 몸을 정갈하게 닦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해서 과거를 보 러가는 과객들이 목욕을 하는 시내라 해서 과천(科川)이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도 하고 과거 보러 가는 과객들이 묵어가는 촌 이라 해서 과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점차 실과 果자를 붙혀서 부르게 된 오늘의 과천이라고 전해옵니 다. http://www.gctour.go.kr/gctour/kor/infor/intro_5_9.jsp 서울서 한강을 건너, 노량진 나루에 이르고, 다시 흑석동(黑石洞)을 지나 강변을 끼고 한강을 바라보면서 동작동(銅雀洞) 이수교(梨水橋)를 우편으로 돌아가..

[20240108]1960년대 안양 경제 타운타운 시대동(市垈洞)

2024.01.09/ #아카이브 #옛사진 #안양 #태평방직 #기록 #역사/ 사진에 나오는 거대한 지역은 과거 1970년대 안양읍 시절 시대동(市垈洞.현 안양1동)이라 불리우던 곳으로 안양에서 비산동, 인덕원, 청계, 서울 강남(말죽거리)으로 가던 길목에 있던 마을로 사진에는 경부선철길(욍복2차선)과 1번국도(현만안로), 안양 최초의 시장인 안양시장(구시장)과 태평방직 공장, 안양천과, 수푸루지 다리 그리고 수푸루지마을 등이 보인다.사진 아랫쪽에 경부선철길과 1번국도가 보이고 사진 중간이 태평방직 안양공장(진흥아파트딘지)다, 사진 좌측 동네가 당시 시대동(안양1동)과 안양시장(구시장)으로 1950-60년대 안양의 다운타운이었다. 동네 좌측으로는 한국제지가 있었다. 사진 위쯕으로는 안양천이 보이고 사진 윗쪽..

[20240109]아파트단지와 카페거리로 변신한 안양 동편마을

새로 개발되는 신도시에도 이국적인 풍경으로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곳이 있다.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1동의 ‘동편마을’이 그곳이다. 동편마을은 기존 전원마을을 개발한 안양의 신도시로 제1기 평촌신도시가 들어선 이후 도시가 팽창하면서 조성된 새로운 신도시가 형성된 마을이다. 여느 신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거리 하나 덕분에 더 머물고 싶고, 살고 싶은 마을, 사람들이 찾아오는 마을이 됐다고 한다. 지난 2012년 ‘관양택지지구’ 재개발사업이 마무리되면서부터 아파트촌 밑으로 상가 등이 밀집된 마을이 조성되면서 다양한 연령층이 찾고 있는 곳으로 변화했다. 평촌신도시가 들어선 이후 도시가 팽창하면서 아파트 중심의 재개발이 이뤄졌지만 동편마을은 늦어진 재개발 탓에 오히려 득을 ..

[문동원]안양 부림말의 참새와 방앗간(2008.12.12)

우리동네 '부림말' 그 곳의 방앗간((?) 이름은 버드나무 집이다. 동네 초입에 버드나무 아래에 위치해서 붙여진 이름인것 같다.조롱내 개울을 건너면 조그마한 집이 나무 아래서 목을 축이고 가라고 사람들을 부른다. 정확히 몇 살인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것 같다. 아버지와 둘이서 어디를 다녀오다 그 앞을 지나는데,내가 아버지의 소맷자락을 잡으며,하는말.... "아빠!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가면 돼?" 아버지는 웃으시며 나를 데리고 버드나무 집으로 들어가셨다.-미성년자 출입금지 구역이지만 그당시에는 그런 법이 없었다. 내 머리만한 왕대포에 김치 한조각,그리고 걸직한 주인 할머니의 웃음 소리가 귀머리를 돌아 다닌다. 술 한잔에 어린 놈이 맛이 갔다. 아버지는 그 모습이 웃겼던지 계속 '허허..

[20240107]안양시농수산물도매시장 신축기공(1994년)

2024.01.07/ 아카이브 #옛사진 #기록 #역사 #안양 #안양시농수산물도매시장 #since1994/ 안양시농수순물도매시장 신축 기공식. 1994년 10월14일. 안양시청 홍보실에 근무했던 이정범 선생이 찍은 사진이다. 안양 농수산물도매시장은 수도권 남부지역의 유통을 담당하는 공영도매시장으로 1997년 9월 개장하였다. 청과(과일동), 청과(채소동), 수산동이 있으며, 관련 상가 및 직판상가, 냉동 제빙도, 보관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새벽에는 과일, 야채, 수산물의 경매를 통한 도매거래가 이루어지고, 주간에는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소매거래도 한다. 산지 직송의 품질 좋은 농수산물을 제철에 만나볼 수 있어 많은 소비자가 방문하며, 특히 회센터가 있어 횟감을 직접 보고 구매한 뒤 회센터로..

[20240108]안양농수산물도매시장 과거와 현재

안양 농수산물도매시장은 뛰어난 접근성과 연계성으로 수도권 남부지역의 유통을 담당하는 공영도매시장이다. 도매상인 뿐아니라 일반 소비자도 즐겨 찾아 항상 활기를 띠는 곳으로 1997년 9월 개장하였다. 청과(과일동), 청과(채소동), 수산동이 있으며, 관련 상가 및 직판상가, 냉동 제빙도, 보관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새벽에는 과일, 야채, 수산물의 경매를 통한 도매거래가 이루어지고, 주간에는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소매거래도 한다. 산지 직송의 품질 좋은 농수산물을 제철에 만나볼 수 있어 많은 소비자가 방문하며, 특히 회센터가 있어 횟감을 직접 보고 구매한 뒤 회센터로 이동해 신선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점포별 물량 및 사정에 따라 공지된 영업 종료 시각보다 일찍 문을 닫기도 하므로 영업 ..

[20240106]안양아트센터 미디어아트쇼 2024년 첫 관람

2024.01.06/ #도시기록 #미디어아트 #안양아트센터/ 안양아트센터 광장 바닥을 무대로 펼쳐지는 미디어아트쇼. 2024년 들어 처음보다. 미디어아트쇼는 안양아트센터·명학공원 일대를 새롭게 문화적 명소로 조성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해 10월 14일부터 시작되어 12월 31일까지 상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2024년에도 계속하는듯 싶다. 하기사 투입된 비용이 1억원이 넘는데 본전 뽑기는 커냥 바람만 날린듯싶다. 그런데 오늘도 관객은 나 혼자다. 투입된 비용과 준비 과정을 알기에 미안스럽기도 하다. 당초 사업 목적이 안양아트센터·명학공원 일대를 새롭게 문화적 명소로 조성하기 위한것이니 안양시와 안양믄화예술재단이 적극 나서야 하지 않을까 싶다. 관계자 말에 의하면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거나 교체하는..

[20240106]안양지역 여성운동의 선구자 故 정어진원장

1939년 시흥군 의왕 청계에서 태어나 2021년 11월 26일 향년 82세로 타계한 정어진 원장은 시흥군 시절부터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경기도 여성정책국장까지 시흥군, 안양시, 경기도 공무원으로서의 공직 생활과 아동복지시설 해관보육원(좋은집) 원장, 홀트아동복지회 소장 등을 역임하는 동안 안양시여성단체협의회를 설립하고 안양시에서 여성 권익향상을 위해 수많은 여성 지도자들을 육성하고 안양시가 현재의 여성친화도시로 선정되는 데 그 초석을 다진 안양시 여성발전을 위해 헌신해 안양 여성운동의 선구자이자 여성계의 대모로 칭송받고 있는 인물이다. 정어진 원장은 1939년 의왕 청계에서 태어나 안양여중고를 졸업했으며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에서 공부했다. 유년시절 덕장교회를 다녔던 그는 관양동 부림말381번지 문씨 ..

[20240106]안양제일교회 설립자 故 이형래장로

지난 2000년 9월28일 외할아버님의 유고소식을 접하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몇 시간 후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편에 몸을 담았다. 그는 애국지사도 아니었고 고위공무원직을 지내신 분도 아니었으나, 경기도 안양시 근대사에서 기독신앙인과 의료인으로 남긴 자취는 자못 큰 것이었다. 만 94세로 결혼 81주년을 목전에 두고 만96세이신 외할머님을 홀로 남기시고 돌아가신 외할아버님에 대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교훈 되는 점이 있어 그의 일생을 재조명하여 보려한다. 나는 학교 갈 나이인 일곱 살 때까지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어머니의 손을 덜어주고, 손주를 키워보고 싶으셔서 자원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방학 때면 늘 외갓집에서 지냈었다. 그 곳에서 보고자란 일들은 후의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외할아버지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