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02/ #아키이브 #사진 #기록 #수리산 #동굴 #한국전쟁 #중공군/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말을 넣어두었던 수리산 동굴.
한국전쟁사, 시흥군지, 안양시지 등의 자료와 안양 담배촌 토박이 원로의 증언, 수리산 전투 참가 구술기록 등을 보면 한국전쟁 당시 수리산 전투는 치열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름답기만한 수리산이 6일간의 전투의 포화 속에서 신음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미 제8군의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1군단의 터어키여단, 미 제25사단, 한국군 제1사단 15연대는 1월 31일부터 안양 남쪽에서 수리산-모락산을 공격하였다. 수리산은 영등포로 통하는 국도와 반월리를 거쳐 소사 및 인천으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감제고지였다.
수리산에는 전투가 치열했던 만큼 인민군 연대본부와 중공군 여단본부가 있었다고 한다. 사진속 동굴은 중공군이 화기와 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사용하던 말을 넣어두엇던 곳으로 지난 2013년 수리산 옛지형 탐사 및 수암천 물줄기에 대한 조사시 담배촌 원로 주민의 안내로 방문했을 당시의 기록이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수리산전투에 참여했던 김춘삼씨(1931년생. 황해도 재령군 출신)가 자서전 형태로 쓴 수리산전투 관련 글을 보면 수리산뒤에 커다란 동굴이 2개나 있으며 여기가 인민군 8사단 2연대 본부라고 증언했다. 그는 동굴 2개중 하나는 완전히 인민군 부상자들로 꽉 차 있는데 거기에는 팔다리가 없고 얼굴에 피투성이가 되어 사람살려달라는 소리에 귀가 너무 따거웠다고 기록해 남겨 수리산에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동굴이 더 있을것으로 추정된다.
[수리산 전투와 터키여단]
일명 440고지 전투로도 불리우는 수리산 전투(修理山 戰鬪)는 안양시, 군포시, 안산시에 걸쳐 있는 수리산에서 1951년 1월 23일부터 1월 31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 수행했던 선더볼트 작전의 일부로 분류된다.
한국전쟁의 전세는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완전히 역전되엇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들은 안양을 비켜가지 못했는데, 대표적인 전투 사례는 바로 1951년 1월 28일부터 2월 4일까지 전개된 수리산전투다.
수리산은 감제고지로 영등포, 안산, 인천으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주요한 고지(440고지)였다. 미 제25사단과 터키 여단이 중공군과 인민군을 상대로 총 4차례의 공격끝에 고지를 점령했다.
특히 김량장 전투에서 수훈을 세웠던 유엔군 산하 터키여단은 수리산전투에서도 용감하게 싸웠다. 이 전투에시 터키여단의 담당지역은 안양 남쪽에 자리잡은 수리산으로부터 남해안까지의 서부 지역이었다.
'형제의 나라’라는 호칭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터키는 6.25전쟁 당시 1만5천여명 규모의 군대를 파병해왔다. 참전한 국가들 가운데 미국과 영연방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다. 이중 총 747명이 전사했고, 전사자 중 20명이 수리산에서 전사했다.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現 군사편찬연구소)가 1980년 발간한 한국전쟁사 11권에 터키군의 수리산 전투 내용이 자세하게 기술돼 있고, 시흥군지와 안양시사에도 같은 내용이 나와 있다.
이 책들의 기록에 따르면 터키군이 수리산 탈환 작전에 나선 것은 1.4후퇴 직후인 1951년 1월 28일이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UN군은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한강이남까지 밀리기도 했지만 이후 썬더볼트작전, 라운드업작전 등을 통해 재반격해 서울을 재탈환하고 현재의 휴전선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중 1차반격작전인 썬더볼트작전 중에 벌어진 전투가 수리산 전투다. 기록에 의하면 썬더볼트작전의 첫 목표선인 수원-김량장(용인)-이천선을 점령할 때 공을 세운 터키군은 수리산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당시 터키여단의 담당지역은 수리산으로부터 서해안까지 였으며 북한군과 중공군은 수리산과 관악산, 모락산을 잇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저항하고 있었다.
1월 28일 새벽, 중공군과 북한군 8사단이 점령하고 있는 수리산을 탈환하기 위해 터키여단의 3개 대대가 반월리 인근에 집결, 작전에 돌입했다. 431고지(슬기봉)를 목표로 전진하던 터키여단 2대대는 1월 30일 수리사 근처 바람고개에서 처음으로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적군의 저항에 터키여단과 미군은 포대(砲隊)와 공군의 집중 폭격을 퍼부었지만 적군이 수류탄을 굴리는 등 완강히 저항해 고지 점령에 실패한다. 수리산 전역에서 벌어진 이날 전투에서 터키여단은 적군 600여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터키여단도 10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37명이 부상당했다.
한편 2대대의 좌우측에서 수리산을 공격한 1대대와 3대대는 각각 안양과 시흥방향의 고지를 차례로 점령하며 북진했고 2대대는 2월 4일까지 슬기봉을 점령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2월 4일 236고지(안양 서쪽 3km)를 점령함으로써 수리산 중심의 모든 고지를 차지한 터키여단은 슬기봉 점령 임무를 미군에게 인계하고 한강으로 이동했다.
1월 28일부터 2월 4일까지 8일에 걸쳐 벌어진 수리산 전투에서 터키여단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공격하는 불리한 전투조건에도 불구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수리산의 대부분 고지를 점령하는 공을 세웠다. 또한 2월 3일 미군 25사단 35연대가 수행한 수리산 정상 탈환작전에서는 미군이 태을봉과 관모봉을 되찾도록 도왔다. 수리산 전투의 승리는 당시 안양과 수리산을 점령하던 북한군과 중공군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지리상의 이점을 제공했고, 국군이 한강을 탈환하는 데 교두보 역할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수리산 전투의 전사(戰史)에 나타난 터키여단의 규모는 3개 대대다. 1개 대대의 규모를 250~300여명으로 볼 때 수리산 전투에 참가한 터키군은 대략 800명 가량일 것으로 추정된다. 터키여단은 이 중 20명이 수리산에서 전사하고 83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전사(戰史)의 내용으로만 볼 때 여단의 약 12%가 죽거나 다친 것이다.
2006년 안양학연구소가 펴낸 ‘이야기로 듣는 안양 근대사’라는 책을 보면 안양지역의 토박이들이 옛 안양의 모습에 대해 증언한 녹취록이 기록돼 있다. 이 중 정덕환(1942년생, 안양시 박달동 출생) 씨의 증언 내용을 살펴보면 수리산 전투에 관한 증언이 눈길을 끈다.
"내려갈 때는 그냥 막 내려간 겁니다. 무슨 저항이고 뭐고 없어요. 근데 저쪽에서 올라올 적에 인천서 상륙작전해서 박달리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안양읍내로 들어왔어요. 탱크가. 내가 어려서 나가보니깐 망해암 뒤에서 내무서원 총 썼다고 미군이 갑자기 얼른 탱크 문 닫고 망해암으로 한방 쬐버린 거야. 그래서 망해암이 날아간 거야... 22연대, 25연대는 안양, 인천 따라서 반월저수지 쪽으로 접근을 해가지고, 그런데 인천 쪽에서 들어 온 미군이 수리산 때문에 신흥 일대로 진격을 못하니까, 그 저항세력을 없애기 위해서 당시로서는 육박전 전투 능력이 강하다는 터키여단을 군포쪽에서 접근을 시켰습니다. 접근시켜서 싸우는데 아마 군포 사람들은 지금 사실 터키 사람들한테 보은의 표시를 해야 할 거야. 터키연대의 거의 절반 이상이 수리산 일대에서 죽었어."
수리산 전투 당시 열살이던 정씨는 “인천 쪽에서 들어온 미군이 수리산에 주둔한 북한군과 중공군을 몰아내기 위해 당시 육박전 전투 능력이 강하다는 터키여단을 군포 쪽에서 접근시켰다”며 “군포 사람들은 사실 터키인들에게 보은의 표시를 해야 한다. 터키여단의 거의 절반 이상이 수리산에서 죽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 정씨는 “중공군이 군포사람들을 데려다가 현재의 레이더기지 인근 주차장에서 시작되는 능선의 돌을 쪼아서 계단을 만들고 인력으로 박격포를 끌고 올라갔다”며 “중공군이 태을봉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포탄을 쐈다”고도 증언했다.
정씨의 증언은 터키군의 인명피해 부분에 대해서는 전사(戰史)와 큰 차이가 있지만 중공군과 북한군이 산 정상에서 포격을 가했다는 부분은 어느 정도 일치한다.
당시의 수리산 전투 상황도(그림 참조)를 보면 터키여단의 2대대는 반월리에서 출발, 바람고개를 거쳐 슬기봉으로 진격했다.
2대대의 진군 경로와 북한군 8사단이 점령했던 슬기봉의 위치, 적의 포격, 미 공군의 바람고개 폭격이 있었다는 내용들을 바탕으로 볼 때 6.25전쟁당시 수리사가 소실된 상황을 어느정도 상상할 수 있다.
이렇게 중요한 전투가 우리가 살고 있는 수리산과 모락산에서 일어났다. 이 산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의 수많은 선배 전우들과 터어키군, 미군들이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잊어가고 있다.
의왕 모락산 정상에는 조그마한 전적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지난 2000년 6.25전쟁 50주년 기념으로 의왕시와 모락산대대가 공동으로 건립한 기념비이다. 모락산 대대에서는 새해 아침에 해맞이 행사와 함께 전적기념비에 헌화와 분향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현충일, 6.25기념일, 훈련시 등 수시로 이곳을 방문하여 선배전우들의 넋을 기린다. 특히 김안일 예비역준장은 모락산전투를 15연대장으로 직접 지휘를 하셨던 분이다. 그래서 집도 모락산이 바라다 보이는 의왕시 내손2동에 정하시고 수시로 모락산을 오르내리시면서 당시의 전투를 회상하고 전우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고 한다.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치열한 격전의 현장인 수리산을 가지고 있는 안양과 군포시에서는 이역만리에서 동맹국인 한국의 자유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터어키와 미국 전우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후손들이 전쟁의 참혹한 현실과 냉정함을 잊지않도록 경계하기 위해서 전적기념비를 수리산에 세워야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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