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대 전 안양문화원장
안양 병목안의 본래 이름은 ‘후두미’ 였는데 뒷두미라고도 불렸다. 지금은 공식 명칭이 ‘후두미동·안양9동’이 되었으나 모든 사람들이 병목안이라고 부른다. 병목 속에 모여 사는 동네라는 의미다.
안양9동에는 병목안, 창박골, 담배촌, 신촌말 네 동네가 있었는데 6·25동란으로 피난 나온 이북 동포들이 모여 사는 ‘새마을’이 있고 전에는 그 골짜기를 ‘심부골’이라 했다.
6·25가 발생한 며칠 뒤 북한 정찰기와 호주 비행기가 공중전을 벌였다. ‘구로망’이라는 호주 비행기는 전투기였고 북한 비행기는 정찰기였으니 상대가 되지 못했다.
북한 정찰기가 우리집 앞 산봉우리를 넘자마자 뒤쫓던 구로망으로부터 집중적인 기관총 공격을 받고 공중에서 불이 났다.
우리 집 지붕위로 떨어질 것 같았는지 아버지는 숨넘어가듯 급한 목소리로 식구들을 집에서 다 나오라고 했다.
담배촌 치릅골로 빨리 피하라고 하더니 혼자 집을 지키셨다.
다행히 북한 정찰기는 불붙은 상태에서 더 날아가 심부골에 떨어졌다. 북한 정찰기 조종사는 낙하산을 펼쳐들고 무사히 산비탈에 안착하였고 정찰기는 논 바닥에 처박혔다. 순식간에 국군과 경찰이 패잔병을 에워쌌다.
그는 인민군 공군 대위였는데 권총을 손에 들고 있었다. 남은 실탄은 단 1발, 자살하고자 1발을 남겼으나 죽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국군은 인민군 장교를 수갑 채우고 큰길로 나와 지프차에 태우고 수원으로 떠났다.
내 개인 경험으로는 6·25 전쟁과 1.4후퇴를 통틀어 가장 아슬했던 체험이었다. 우리 가족은 공중전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이 1950년 6월 27일 이었던 것 같다.
지금 병목안(안양9동)은 살기 좋은 마을로 변해 있다. 담배촌 입구에 채석장이 아름다운 대형 공원이 되어 있고 창박골에는 운수회사가 들어서 교통이 편리해졌다.
그 앞에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 주거 환경도 현대화 되어졌다. 새마을이 발전하여 마을 모양을 갖췄다. 땅값 집값도 높이 상승되어져 있다. 병목안이 안양에서 촌이라고 하던 시절은 사라지고 주거 환경이 우수한 마을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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