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안교는 본래 안양대교에서 동쪽으로 안양유원지 길을 따라가다 만안로와 서로 만나는 +자 교차로에서 북쪽으로 약 20m 지점에 있었다. 그러나 구 한말에 이르러 일제가 경부선을 부설하면서 안양천을 남쪽으로 우회한 후부터 다리로서 의 효용가치는 상실되어, 다리의 위와 아래지역에 공장과 민가가 들어섰는가 하면 한 때는 다리 밑은 넝마주이 등의 안식처(?)이기도 했으며, 광복후 국도1호선에 포장을 실시하면서 다리위에 콜타르를 부어 만안교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언론인 이규태(1933년생, 조선일보 논설위원)가 1976년 만안교를 둘러본 후 <주간조선〉(1976.9.16)에 「만안교」란 제하에 글을 기고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안양에 다가가니 넓은 새길이 도로 나고 右로 나, 산책자(이규태)가 찾고자 하는 역사의 한 현장을 찾아가는데 갈피를 못잡겠다. 무작정 우로 돌아가니 안양로 이어지는 구도와 안양유원지로 가는 새길이 마주쳐, 전에 없던 새 十字路가 나타난다. 그 +의 구길쪽에 걸친 다리가 찾고자 하는 만안교였다. 이상한 일이다. 다리를 놓았던 정조 19년(1795)에는 안양천의 물줄기가 달리 흘렀던 것 같다. 지금은 안양대교가 놓인 쪽으로 물굽이가 돌아갔지만 1백80년 전에는 만안교가 놓인쪽으로 흘렀던 것 같다. 지금은 늪이 되어 그 강바닥 위 아래 쪽에 집이 들어서고 공장이 들어서 만안교란 사실상 다리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이 돌다리는 정조의 효심을 입증한 많은 유적가운데 하나다. 사도세자로 속칭된 장헌세자의 비명을 몹시 슬퍼한 그의 아들 정조는 수원화산에 능을 옮기고 거의 해마다 릉을 했던 것이다. 수원은 동작동·과천을 거쳐 가는 것이 바른 길이었으나, 그 길 도중에 정조의 숙원인 금상의 무덤이 있다 해서 이를 피해 금천(시흥안양의 새 길을 택했던 것이다. 대제학금의 아들인 금상로는 좌의정 금약로의 아우로 영조때 호조판서·우의정·여의정를 역임한 정승이었는데, 영조와 장헌세자간을 가운데 들어 이간하고, 두편을 오가면서 고자질하여 서로 시기케 하여 끝내는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게 한 식이었다. 이에 정조는 병신년에 금상로의 관직을 하고 그의 치양‧치현 두 아들을 유배하는 한편, 그의 손자를 종으로 하시켰던 것이다.
이 숙원의 무덤을 피한다는 정조의 감정 때문에 서울-시흥-수원간에 새 길이 다듬어졌으며, 남도로 가는 로가 과천 우회로부터 시흥 우회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임금의 대련을 지탱하기에는 너무 빈약했던 나무다리를 뜯고, 길이 15장, 너비 4장, 높이 3장의 돌다리를 놓은 것이 만안교다. 경기관찰사를 비롯, 경기도 관내 병마,수군절도사, 그리고 수원, 개성, 강화의 각 류수가 총 동원되어 놓은 다리니, 그 중대성이나 규모가 당시로서는 대단했음을 알 수가 있다. 다리 목에 세워진 만안교비를 보면 만안이란 다리 이름이 만년동안 단단하다는 뜻과 正祖의 넋이라도 만년동안 안전하게 이 다리를 건너게 한다는 뜻과 만성받이가 안전하게 이 다리를 건넌다는 뜻이 복합되어 지어진 것이라 한다.
한데 겨우 1백80여년만에 다리 구실을 잃고 말았으니 무상하다. 다리 밑을 내려 보면 여덟개의 완벽한 반원의 홍예가 제대로 남아 있는데, 그 역사적 유물위에다 가 콘크리트를 붓고 콜타르를 부어 새 다리를 만들어 기구한 이중구조의 추태를 드러내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옛 것에다 콘크리트로 씌어놓는 이 만안교의 몰골이야말로 곧 한국인의 야누스적인 이중구조를 고스란히 엿보여 주는 치부만 같아 낯간지럽기까지 했다. 다리의 효용이 있더라도 못할 짓인데, 이미 다리의 효용이 없어진 지금에 그 꼴로 두어 둔다는 것은 고유문화를 모독하는 우리 민족의 치부요, 이 고을의 수치가 아닐수 없다. 깨끗이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예대로 복원시킴으로써 지금도 오가고 있을 효심의 행들 만안케 해야 할 줄 안다」
이상의 글중 「...정조의 숙원인 금상의 무덤이 있다 해서......」는 지금의 과천시 갈현동 찬우물(랭정동)에 있는 묘를 지칭하는 것인데, 이 묘는 김상노의 무덤이 아니고 그의 형인 금약(1694~1753)의 무덤이다. 김상노의 무덤은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쌍봉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경기관찰사를 비롯, 경기도 관내 병마, 수군절도사, 그리고 수원,개성, 강화의 각 류수가 총동원되어 ...」라 했는데, 이상의 5개 관직은 당시 정조의 명으로 만안교를 가설한 경기관찰사 서유방의 관직명을 총칭하는 것이며, 「... 여덟개의 완벽한 반원의 홍예가...」라 는 글은 7개의 오기이며, 또 만안교비에는 5개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역시 이다. 이러한 오류는 1956년에 경기도가 편찬한 《경기도지》에서부터 비롯되었는 데, 이후에 발간된 각종 자료가 대부분 《경기도지》를 참고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오류가 생긴 것으로 보여진다. 만안교의 안내문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1988년 10월 25일자 경인일보에 「만안교 안내문 오기란 제하의 보도로 오기임이 밝혀지자, 1990년에 재작성하였다.
만안교는 1973년 7월 10일에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관리되어 오다가 1980년 도시화로 현재의 위치인 석수2동 270으로 복원, 이전하였으나 몇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첫째, 문화재는 본래의 자리에 있어야 하고 아울러 원형보존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만안교의 가설은 남·북을 연계하여 서울과 안양은 물론 서울과 삼남지방간의 원활한 교통수송의 일익을 담당해 안양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만큼 중요한 문화재인데,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부터 이상의 기능은 상실하고, 다만 석수2·3동 주민들이 지하철 등을 이용하는 구실밖에 되지 못할 만큼 국소화 되고 말았다. 두번째는, 만안교는 역사적으로 옛 과천군과 시흥군(금천)의 군계여서 경계교 역할도 함께 수행했으나 이전된 자리는 옛 시흥군 영역의 보도로 이용되는 외에는 역사성 등의 당위성이 결여되어 있다. 세번째는, 복원·이전된 후, 그 자리에 표석이라도 세워, 선조들이 남긴 훌륭한 문화유적지를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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