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萬安橋<석수2동>
안양을 대표하는 문화재의 하나로, 안양문화를 상징하는 文化祭의 유래가 된 조선 후기의 虹霓石橋이다. 이 다리의 축조는 조선 제22대 임금으로 효심이 지극 했던 正祖(1776~1800)의 명에 의해 가설되었다.
정조는 英祖(1694~1776)의 왕 세손으로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 했으나, 아버지思悼世子(1735~ 1762)는 영조의 왕세자이었으나 부왕인 영조에 의해 영조 38년 (1762) 윤 5월 13일 왕세자의 지위에서 폐출되어, 뒤주속에 갇힌지 8일째 되는 동년 윤 5월 21일 죽은 비운의 인물이다.
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세자의 位號를 회복시킴과 동시에 시호를 思悼라고 하고, 세자빈을 惠嬪이라 하여 비명에 간 아들의 영혼을 위로 하였으나 이미 지나간 비극이었다. 영조가 재위 52년(1724~1776)만에 83세를 일기로 죽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였다.
정조의 이름은 神, 자는 亨運, 호는 弘齋로, 영조 35년(1759)에 세손에 책봉된 후, 아버지가 원통하게 죽은 뒤 孝章世子(眞宗, 1719~1728)의 後嗣가 되었고, 영조 51년 (1775)에 늙은 영조를 대신하여 국정을 다스리다가 영조가 죽자 25세에 왕위에 오른 후, 부왕인 사도세자의 존호를 莊獻(1899년 에 莊祖로 추존)이라 추상하고 양주 배봉산에 있는 그의 묘소인 垂恩墓를 永祐園으로 封하였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매년 한 두차례씩 영우원을 전배하고, 局內를 두루 살피곤 했으나, 영우원의 園 淺狹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명당으로 천장할 계획으로 年運·山運·本命運 등을 살펴 吉年인 정조 13년(1789)에 천장할 것을 筵敎하고, 地 師를 各地로 보내어 명당을 살피도록 명한데 이어 城尉 朴明源, (정조의 친누이동생 화평옹주 남편)이 「영우원은 원침의 형국 이 좁고 또 불길한 듯 하오니 다른 곳으로 천봉하는 것이 좋겠다」는 요지의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大臣.閣臣.禮堂 등 2품 이 상의 신하들을 熙에서 見하고 영우원 천봉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홍제동의 녕릉건원릉우강의 원릉과 더불어 수원의 화산이 3대 명당으 로 꼽히게 되었는데, 그중 수원의 화산은 《寧陵儀軌》에 실려 있는데, 천년에 한번 만나볼까 말까한 길지로 「盤龍珠形」이어서 정조도 이 곳을 천봉지로 의중을 굳히고 승지로 하여금 水原山論을 낭독케 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찬동하여 천봉지를 수원 화산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정조 13년(1789) 7월에 山役 이 시작되자 8월에는 園號를 顯 隆으로 결정한데 이어 10월 7일 에는 현륭원의 천봉례를 거행하였으며, 10월 17일에 마무리 산역이 있었다.
이후 정조의 현륭원 전배는 춘행과 추행의 두 행사가 있었는데 춘행은 1월말에서 2월 초 에 거행되었으며, 추행은 8월 삭망사이에 거행되었으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춘행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이는 사도세자(장헌세자)의 탄 신일이 1월21일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江民과 농민의 한가한 시기를 이용 함으로써, 그들의 폐해를 최소한에 그치게 하려는 정조의 배려 때문이었다.
정조의 수원능행은 천봉 이듬해(1790)부터 정조가 사망(1800)하기까지 11년동안 모두 12차에 걸쳐 행해졌는데, 제1차(1790) 부터 제5차 (1794)까지의 능행로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출발하여 돈녕부전로(서울 종로구 익선동)~파전교(종로구 묘동 57) 통운교(종로2가 30 동남쪽)~종루 전로(종로 네거리 앞길)~대광통교(종로구 서린동 122 남쪽)소광통교(중구 남대문로 1가 23 남쪽)~동현병문전로(중구 을지로 1가에서 명동·롯데백화점 사이)~松峴(중 구 소공동 111 부근)~수각교(중구 남대문 로 4가 1)~崇禮門(중구 남대문)~도저동 전로(용산구 도동과양동)~청파교(용산구 청파동 1가 168)~석우(청파천과 만천 만나는 서쪽)~률원현(용산구 원효로2 가에서 용산가는 동남쪽 산?)~라업산전로(용산구 신계동)~만천(용산구 한강로 3가)~로량주교(한강)~룡기봉 정(동작구 본동 10-3)~만안 현 (만냥고개)~금불암(상도터널 ~숭전대 사이에 있던 암자)~ 금불현~사당리(동작구 사당동) ~상엄천교(관악구 남현동)~남 태령(관악구 남현동)~과천현 행궁(과천시 중앙동소재 온온사)~읍내전천교(과천전화국 앞)~랭정점(과천시 갈현동?)~ 銀杏과천시 갈현동)~仁德院 店川橋(안양시 관양2동 인덕 원네거리)~인덕원천교(안양시 평촌동, 이동교)~독박지(안양시 평촌동·민배기)~갈산점(안양시 평촌동 갈미)~독동현(안양시 평촌동, 호계1 동)~軍堡川店(안양시 호계1동)~自棧洞(안양시 호계3동)~院洞店(의왕시 오전 동)~근평(의왕시 고천동)~이근참발소전로(의왕시 고천동)~이근참행궁(의왕시 고천동 의왕시청) 등을 거쳐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 소재 현융원에 이르는 83리 과천로정 택했으나, 이상의 노정이 다리가 많은데다가 남태령 등 험준한 고갯길이 있어서 치도하는데, 민력이 배나 들어 이 폐단을 깊이 근심한 정조가 여러 차례나 민폐를 줄일 방도를 강구하도록 하명하자 전 후도들이 금천로정(또는 시흥로정)이 편리하다는 뜻을 전달하자 정조 18년(1794) 4월에 이르러 정조의 명으로 경기감司 서룡보(1757~1824)가 과천로정과 금천로정을 살펴본 결과 금천로정이 거리에 있어 과천로정이 85리, 시흥로 정이 83리로 별반 차이는 없으나 과천정에 비해 땅이 높낮음이 없이 고른데다가 길이 평평하고 넓어 금천노정을 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품계하자 정조가 윤허를 하여(《정조실록》39 18년 갑인 4月 무오조)관서의 남당성 축조공사 때 남은 1만3천량을 빌어서 도로의 제치에 착수하여 당년에 끝냈다.
이리하여 금천현과 과천현 사이의 安養川安陽川, 현 삼성천)위에 만교를 가설하고, 시흥현 치소(현 서울시 구로구 시흥2동)에 금천행궁을 설치했다. 이듬해(1795) 윤 2월 1일에는 금천현監을 현령으로 승격시키고, 고려 성종때 (990~ 994) 금주의 별호로 정해진 시흥을 읍호로 개호하여, 이후부터 금천현을 시흥현 으로 금천로를 시흥로로 부르게 되었다(《정조실록》 2 19년 을묘 윤 2월 계미조) 만안교가 가설되기 이전에 이 다리는 사람이나 간신히 다니던 나무다리였다. 어쩌다 임금이 행차할 때는 목재로 가설했다가, 행차 뒤에는 바로 철거되어 보관 했다가 행차가 있을 때에 다시 가설하는 것이 상례여서 얼음이 풀릴 때나 장마 가 질 때면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고생이 많았는데, 시흥로의 개설과 정조의 능 행으로 항구적인 돌다리를 축조케 된 것이다.
만안교의 가설은 본래 경기감사였던 서용보가 다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수행 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후임인 徐有坊(1741~1798)이 정조의 명을 받고 정 조 19년(1795)7월에 착수하여 3개월만인 동년 9월에 완공을 보았다. 이처럼 다 리가 빨리 완공을 보게 된 것은 경기관찰사가 직접 지휘한 탓도 있었겠지만 만 안교 부근의 하천가에 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만안교는 길이가 15장, 폭은 4장, 높이는 3장에 閘門(다리구 멍을 뜻함) 7개(사적비에는 5개 로 기록)의 虹霓石橋이다.
이 다리의 중요성을 인식한 정조는 준공 후 감독한 사람과 工匠에게 상을 내림은 물론 萬 安橋란 橋名도 직접 명명했는 데, 만안교는 「聖駕(임금이 탄 수레 즉 정조)와 慈駕(혜경궁홍 씨)가 六龍에 멍에를 메이고 방 울을 울리면서 편안히 지났다가 편안히 오기를 만만년을 할 수
봉수당진찬도: 1975년 음력 2월 13일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거행되고 있다. (그림《원행정례》에서)
있으며, 그 외에도 편의는 만백성에게까지 미처 원근의 짐꾸러미들이 튼튼한 다리로 건너게 되어 만만년토록 聖恩을 입게 되고 慈德을 기리게 되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만안교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정조가 어머니 惠慶宮 洪氏를 모시고 함께
건너면서부터인데, 이 때는 만안교가 가설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나무로 임시 가설했다가 행차를 하였다.
혜경궁 홍씨는 영의정 鳳漢의 딸로 세 자인 사도세자와 함께 영조 11년(1735)에 탄생하여 16세 때 <영조 20년 (1744)〉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2남2녀를 두었으나 28 세때 (1762) 세자가 살해된 뒤 어린 3남매 (큰아들은 요절)를 거느리고 홀몸이 되었 다. 시아버지인 영조와 남편인 세자의 괴벽 틈에서 끝내는 당쟁의 소용돌이로 뒤주속에 갇혀 굶어 죽는 것을 살아서 지켜 보아야 했던 혜경궁 홍씨의 인간상황은 그가 《한중 록》에서 썼듯이 「눈물이 말라 슬프면 눈이 아플지경으로 처절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42세 때인 1776년 둘째 아들 癲이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즉위한지 20년이 되는 1795년 윤 2월 13일이 回甲日이 되어 세자의 원칙이 있는 수원에서 회갑연을 거 행키 위해 그해 음력 윤 2월 9일 원행길에 올랐다. 왕궁을 출발한 정조는 용양봉자정에서 잠시 쉰 후 시흥행궁에서 經宿하 고 다음날 시흥행궁을 출발하여 만안교를 처음으로 건넜는데, 이후부터 만안교란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만안교를 지난후 안양행궁 남변 중로(안양경찰서뒤 동아아파트 부근으로 추정)에 이르러 혜경궁 홍씨와 淸衍郡主·淸璿郡主의 床에는 미음 한 그릇(米飮一 器), 고음 한 그릇(膏飲一器), 정과 한 그릇(正果一器) 등을 들고 사근행궁(현 의왕시청자리)을 거쳐 華城行宮(현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및, 남창동의 경기도립 병원, 수원경찰서, 신풍국민학교 일대)에서 경박하고 11일에 공자사당(聖廟)을 배알하고 새로 印出한 四書三經과 노비를 하사하고 화성행궁 내 于華館에서 試 하고 洛南軒(현재 수원 신풍국민학교 교정에 소재함)에서 무사들에게 과거를 시행하였다.
12일에 정조는 혜경궁을 모시고 현융원을 전배하고 西將臺에 올라 城操와夜 操를 열람하고 13일 辰時(오전 8~9시)에 화성행궁 내 奉壽堂(현 경기도립병원 으로 수원시 장안구 남창동 6-2에 있었음)에서 거행되었다. 進饌서 參宴한 內賓 이 13명, 外貧이 69명이었으며, 參宴老人은 384명이었다.
회갑연이 끝난 후 14일에 정조는 친히 낙남헌에 임어하여 四民에게 쌀을 나누 어 준 후 영의정 洪性 등 15인과 화성(수원)노인 李奭祚 등 384인을 위한 養 老宴을 베풀었다.
15일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환궁길에 올라 사근행궁에서 停하여 광주부윤 徐美修와 시흥현령 洪景厚, 과천현감 金履裕(1794. 2. 6~1797. 12. 20 재임) 등과 소견하고 만안교를 거쳐 안양교 앞길에서 잠시 쉬었다가 시흥행궁에 당도하여 경숙하고 16일에 환궁하였다.
정조가 만안교를 처음으로 통과한 것은 형융원 제7차 전배가 있던 정조 20년 (1796)이었다. 이해 1월 20일 왕궁을 진발한 정조는 만안교를 거쳐 당일에 화 성행궁에서 경숙하고 현륭원을 전배한 후 24일에 환궁하였다.
이후 정조의 현륭원 전배는 제8차(1797)에 2회 실시한 외는 11차(1800)까지 모두 5회나 실시해, 정조는 시흥로정을 택한 제6차 (1795)까지 6회나 안양을 거 쳐 전배했으나, 1795년에는 나무다리였으므로 정조가 실제 돌다리로 축조된 만 안교를 왕래한 횟수는 제7차 (1796)부터 제11차 (1800)까지 5회에 이른다.
정조의 효심에 의해 가설된 만안교는 그 후 안양에 많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 했다. 첫째는 전술한 바와 같이 노정의 변동으로 서울에서 삼남지방으로 가는 도 로가 과천에서 안양으로 우회되어, 1백여년 후에는 경부선 철도가 거의 정조의 陵幸을 따라 부설되므로, 교통이 발달되자 과천에 속한 작은 마을 안양은 점차 도시화로 변모되는가 하면 한때(신라시대)는 인천직할시와 서울시 강서구 양천 구·영등포구·구로구 • 관악구 · 용산구 • 서초구·동작구와 안양시·군포시 등의 제 지 역이 영역 또는 영현이었을 만큼 웅군이었던 과천은 점차 한촌으로 전락되어 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두번째는 학교, 행정구역, 문화제, 일반 상호에 이르기까지 만안이란 이름을 취하기 시작했다. 1901년에는 만안교 서남쪽(위치 안양2동 248)에 국민학교가 설 립되자 「萬安國民學校」라 하였는데 이 교명은 관양동 출신의 吳炳이 이 학 교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명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84년에는 석수2 동 소재 석수주유소에서 호계동 삼거리에 이르는 길이 8.8km의 도로를 「萬安」라 칭하였으며, 1986년에는 안양문화를 상징하는 종합문화제의 명칭을 「安文化祭」로 명명하고, 그 해 10월 6일부터 17일까지 12일간에 걸쳐 체육행사를 비롯하여 시민위안공연, 전야불꽃놀이, 연극제, 수석전, 가훈전, 관악백일장, 안양미협전 등의 각종 문화행사를 거행하였다. 1992년에는 안양에 2개의 구가 개청되었는데, 그중 안양1동·2동·3·4동·5·6동·7동·8동, 박달동, 석수1동·2동 ·3동 등에 이르는 제 지역을 「萬安區廳」이라 하였다. 이 밖에 만안의 명칭을 취 한 것으로는 만안새마을금고(위치 안양1동 842-4), 만안각수영장(위치 석수동 241-41). 만안감리교회(위치 안양2동 822-3), 만안교회(위치 박달동 50-5), 만안유치원(위치 박달동 10), 만안파출소(위치 안양1동 842-5) 등이 있다.
세번째는 만안교 축조 후 안양지역 주민들이 이 곳에서 해마다 음력 정월 초 닷새 부터 열엿새 사이에 답교놀이를 했다. 답교놀이를 하면 풍년이 들고 농사일 에 허리와 다리가 아프지 않다는 풍속에 의해 행해졌다. 대보름 다음날(16)은 「귀신당날」이라 하여 하루를 더 놀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 날까지 놀아야만 나무가 죽지 않아 땔 나무를 많이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답교놀이는 일제강 점으로 식민착취가 시작되면서 경제적 여유가 없는데다가 인심마져 각박해져 술 과 음식을 대접하는 풍습이 점차 사라졌기 대문에 1920년경까지 실시되다가 그 이후 사라졌다고 한다.
이 놀이의 악사는 「짠지패」가 주동이 되다가 차츰 「두레페」(일명, 뚱뚱패)들이 담당했는데, 그 배역을 살펴보면 무동으로 小僧 1인, 小巫 2인, 별감 1인, 밭복 1 인 등 5인과, 밑무동 5인 왜장녀 1인, 잽이(쌍호적 제금·장고·북·징 · 꽹과리)등 잽이 7~8인, 선소리꾼 5~8인, 기수 3인, 양반(샌님) 1인이다.
놀이는 길놀이를 시작으로 마당놀이-선소리꾼 놀이-대동놀이-다리밟기-줄 다리기-짚불놀이 순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답교놀이는 1987년 무용평론가 李炳 •玉 교수에 의해 현지조사로 대본이 작성되어 1989년 9월 제6회 경기도 민속예술 경연대회에 안양시의 대표 전통민속놀이로 경연에 참가하여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만안교는 본래 안양대교에서 동쪽으로 안양유원지 길을 따라가다 만안로와 서로 만나는 +자 교차로에서 북쪽으로 약 20m 지점에 있었다. 그러나 구 한말에 이르러 일제가 경부선을 부설하면서 안양천을 남쪽으로 우회한 후부터 다리로서 의 효용가치는 상실되어, 다리의 위와 아래지역에 공장과 민가가 들어섰는가 하면 한 때는 다리 밑은 넝마주이 등의 안식처(?)이기도 했으며, 광복후 국도1호선에 포장을 실시하면서 다리위에 콜타르를 부어 만안교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언론인 이규태(1933년생, 조선일보 논설위원)가 1976년 만안교를 둘러본 후 <주간조선〉(1976.9.16)에 「만안교」란 제하에 글을 기고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안양에 다가가니 넓은 새길이 도로 나고 右로 나, 산책자(이규태)가 찾고자 하는 역사의 한 현장을 찾아가는데 갈피를 못잡겠다. 무작정 우로 돌아가니 안양로 이어지는 구도와 안양유원지로 가는 새길이 마주쳐, 전에 없던 새 十字路가 나타난다. 그 +의 구길쪽에 걸친 다리가 찾고자 하는 만안교였다. 이상한 일이다. 다리를 놓았던 정조 19년(1795)에는 안양천의 물줄기가 달리 흘렀던 것 같다. 지금은 안양대교가 놓인 쪽으로 물굽이가 돌아갔지만 1백80년 전에는 만안교가 놓인쪽으로 흘렀던 것 같다. 지금은 늪이 되어 그 강바닥 위 아래 쪽에 집이 들어서고 공장이 들어서 만안교란 사실상 다리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이 돌다리는 정조의 효심을 입증한 많은 유적가운데 하나다. 사도세자로 속칭된 장헌세자의 비명을 몹시 슬퍼한 그의 아들 정조는 수원화산에 능을 옮기고 거의 해마다 릉을 했던 것이다. 수원은 동작동·과천을 거쳐 가는 것이 바른 길이었으나, 그 길 도중에 정조의 숙원인 금상의 무덤이 있다 해서 이를 피해 금천(시흥안양의 새 길을 택했던 것이다. 대제학금의 아들인 금상로는 좌의정 금약로의 아우로 영조때 호조판서·우의정·여의정를 역임한 정승이었는데, 영조와 장헌세자간을 가운데 들어 이간하고, 두편을 오가면서 고자질하여 서로 시기케 하여 끝내는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게 한 식이었다. 이에 정조는 병신년에 금상로의 관직을 하고 그의 치양‧치현 두 아들을 유배하는 한편, 그의 손자를 종으로 하시켰던 것이다.
이 숙원의 무덤을 피한다는 정조의 감정 때문에 서울-시흥-수원간에 새 길이 다듬어졌으며, 남도로 가는 로가 과천 우회로부터 시흥 우회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임금의 대련을 지탱하기에는 너무 빈약했던 나무다리를 뜯고, 길이 15장, 너비 4장, 높이 3장의 돌다리를 놓은 것이 만안교다. 경기관찰사를 비롯, 경기도 관내 병마,수군절도사, 그리고 수원, 개성, 강화의 각 류수가 총 동원되어 놓은 다리니, 그 중대성이나 규모가 당시로서는 대단했음을 알 수가 있다. 다리 목에 세워진 만안교비를 보면 만안이란 다리 이름이 만년동안 단단하다는 뜻과 正祖의 넋이라도 만년동안 안전하게 이 다리를 건너게 한다는 뜻과 만성받이가 안전하게 이 다리를 건넌다는 뜻이 복합되어 지어진 것이라 한다.
한데 겨우 1백80여년만에 다리 구실을 잃고 말았으니 무상하다. 다리 밑을 내려 보면 여덟개의 완벽한 반원의 홍예가 제대로 남아 있는데, 그 역사적 유물위에다 가 콘크리트를 붓고 콜타르를 부어 새 다리를 만들어 기구한 이중구조의 추태를 드러내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옛 것에다 콘크리트로 씌어놓는 이 만안교의 몰골이야말로 곧 한국인의 야누스적인 이중구조를 고스란히 엿보여 주는 치부만 같아 낯간지럽기까지 했다. 다리의 효용이 있더라도 못할 짓인데, 이미 다리의 효용이 없어진 지금에 그 꼴로 두어 둔다는 것은 고유문화를 모독하는 우리 민족의 치부요, 이 고을의 수치가 아닐수 없다. 깨끗이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예대로 복원시킴으로써 지금도 오가고 있을 효심의 행들 만안케 해야 할 줄 안다」
이상의 글중 「...정조의 숙원인 금상의 무덤이 있다 해서......」는 지금의 과천시 갈현동 찬우물(랭정동)에 있는 묘를 지칭하는 것인데, 이 묘는 김상노의 무덤이 아니고 그의 형인 금약(1694~1753)의 무덤이다. 김상노의 무덤은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쌍봉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경기관찰사를 비롯, 경기도 관내 병마, 수군절도사, 그리고 수원,개성, 강화의 각 류수가 총동원되어 ...」라 했는데, 이상의 5개 관직은 당시 정조의 명으로 만안교를 가설한 경기관찰사 서유방의 관직명을 총칭하는 것이며, 「... 여덟개의 완벽한 반원의 홍예가...」라 는 글은 7개의 오기이며, 또 만안교비에는 5개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역시 이다. 이러한 오류는 1956년에 경기도가 편찬한 《경기도지》에서부터 비롯되었는 데, 이후에 발간된 각종 자료가 대부분 《경기도지》를 참고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오류가 생긴 것으로 보여진다. 만안교의 안내문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1988년 10월 25일자 경인일보에 「만안교 안내문 오기란 제하의 보도로 오기임이 밝혀지자, 1990년에 재작성하였다.
만안교는 1973년 7월 10일에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관리되어 오다가 1980년 도시화로 현재의 위치인 석수2동 270으로 복원, 이전하였으나 몇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첫째, 문화재는 본래의 자리에 있어야 하고 아울러 원형보존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만안교의 가설은 남·북을 연계하여 서울과 안양은 물론 서울과 삼남지방간의 원활한 교통수송의 일익을 담당해 안양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만큼 중요한 문화재인데,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부터 이상의 기능은 상실하고, 다만 석수2·3동 주민들이 지하철 등을 이용하는 구실밖에 되지 못할 만큼 국소화 되고 말았다. 두번째는, 만안교는 역사적으로 옛 과천군과 시흥군(금천)의 군계여서 경계교 역할도 함께 수행했으나 이전된 자리는 옛 시흥군 영역의 보도로 이용되는 외에는 역사성 등의 당위성이 결여되어 있다. 세번째는, 복원·이전된 후, 그 자리에 표석이라도 세워, 선조들이 남긴 훌륭한 문화유적지를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자료: 이행《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정조《원행정례》 1789, 이병모《정조실록》 1805,
정조《을묘원행정리의괘》 1795, 정조《화성역의괘》 1801, 김정호《대동지지》 1862, 시흥군《시흥군읍지》 1899, 경기도지편찬위원회《경기도지》 1956, 박광성 《기전문화연구》10-1979, 이규태(주간조선> 1976. 9. 16, 안춘배《역사의 얼 굴》 1980, 김성한《길따라 발따라》상 1984, 이승언 <안양의 유래〉 안양문화 5-1985, 이승언 <안양시지명유래> 안양문화 5-1986, 이병옥《만안답교놀이》 안양 문화원 1988, 이규태《역사의 산책》 1988, 최영희 《과천·안양의 답교놀이 연구》 1988, 이명규<원행정례에 나타난 경수정어연구> 인문평론 16-1988, 시흥군 지편찬위원회《시흥군지》 1988
'이야기보따리 >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0211]국토발전 희귀 정책자료 디지털화 구축 목록_국토연구원 (0) | 2023.02.11 |
---|---|
[20230208]경기부흥총람, 건국10주년 기념 화보집-시흥군편 (0) | 2023.02.08 |
[20230204]옛 검역원 본관 기둥에 부착됐던 1960년 한미협조 표식 (0) | 2023.02.04 |
[20230202]국민보도연맹학살 안양에서도 죽음 있었다 (0) | 2023.02.02 |
[20230130]안양시 승격 50주년에 보는 1973년 안양 기록들 (0) | 2023.01.30 |
[20230127]1992년 안양시지에 실린 주간조선 이규태컬럼 만안교 (0) | 2023.01.27 |
[20221229]안양에 있던 신영순 병원 관련 자료 어디로 갔을까 (0) | 2022.12.30 |
[20221217]안양시 만안구&만문누리 선정 만년가게 리스트 (0) | 2022.12.17 |
[20221213]안양기독보육원에 숙소 지어준 `클라크` 박사 훈장 서훈 (0) | 2022.12.14 |
[20221213]안양기독보육원에 숙소 지어준 `클라크박사' 표창 영상(1957.04.14) (0) | 2022.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