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8/ #도시기록 #표지석 #안양풀 #안양예술공원/ 안양예술공원 초입 계곡에 있는 일본어 표지석. 일제강점기 당시인 1932년 안양풀을 만들때 조성한 표지석으로 대형 암석에 일본어로 새겨진 명문이 남아 있다. 안양예술공원 입구 주차장을 지나 오른쪽 도로를 따라 100미터쯤 지나 삼성천으로 가는 돌계단을 내려가면 자연석으로 된 거대한 초석에 '일본어로 쓰여진 안양 풀 글씨와 소화 7년 8월 준공(安養 プ-ル 昭和 七年 八月 竣工)'이라는 일본 연호 명문과 마쓰모도(松本)라는 공사책임자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초석의 3분의 2 가량이 1977년 대홍수 이후 안양유원지를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들과 콘크리트로 뚝을 쌓으면서 덮어버려 마지막 글자를 판독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한편 안양예술공원은 1930-50년대 안양풀, 1970-80년대 안양유원지로 불리우던 곳으로 삼성산과 관악산의 풍부한 문화유산과 더불어 고래로 시인묵객들의 발길을 붙잡아 풍류담과 더불어 많은 시문을 남기게 하기도 했으며 고려조의 명신 강감찬은 이 곳을 경기금강이라고 불리웠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편에 의하면 태종 17년 금천 현감 김 문과 수원 부사 박 강생이 과천 현감 윤 돈의 전별잔치를 안양유원지 계곡에서 열었는데 강권하던 소주를 못 이겨 김 문이 갑자기 죽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어전까지 보고된 이 사고에 대한 태종의 수습책은 의외로 간단해서 "술을 권하는 일은 고래의 미풍이지 악습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일은 큰일이니 관련자들을 파직하라"는 명쾌한 판결로 매듭을 지었다고 한다.
안양유원지 계곡은 관악산의 여러 골짜기 중 수량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부터 여름철 피서지였으며 1930년대 이후 70년대까지 전국에 명성을 알렸다.
공식적인 안양유원지의 출발은 1932년 당시 일본인 안양역장 혼다 사고로(本田貞五郞)가 철도수입 증대와 안양리 개발을 위하여 조한구 서이면장과 야마다(山田) 시흥 군수 및 지역유지들을 설득 당시 1,500원의 예산으로 계곡을 막아 2조의 천연수영장을 만들어 안양풀이라고 명명한 데서 비롯된다. 그 당시 만든 풀장의 둑과 탈의용 계단의 형태는 1990년대 중반까지 보존되어 있었으나 안양유원지 재개발 사업을 하면서 원형들이 모두 훼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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