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청계산 청계사와 조심태 장군
김산 홍재인문학연구소장
[山과 사람, 京畿를 세우다]청계산 청계사의 조심태 장군
정조의 개혁 도운 최측근…사도세자 원찰 지정 주도
청계산은 한남정맥의 주산중의 하나이다. 안양, 의왕, 서울의 양재까지 아우르는 이 산은 경기중 남부 지역의 시민들에게 좋은 안식처가 되는 곳이다. 청계산을 오르는 이들 대부분이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올라가서 이수봉을 지나 국사봉을 거쳐 양재동 옛골로 내려오는 산행을 한다. 약 3시간 반에서 4시간에 이르는 이 산행은 청계산 주요 봉우리를 거치면서 산행의 참맛을 느끼게 한다.
가장 대중적인 이 산행로와 더불어 청계산 등산의 진미를 보여주는 곳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이 바로 청계사 등산로이다. 청계산에 청계사가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청계사는 청계산의 이름을 단 절집이기에 당연히 청계산의 그 어떤 절집보다 규모가 있고 역사가 오래되었다.
청계사 등산로는 인덕원에서 청계사 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가도 좋고, 의왕의 백운호수를 끼고 승용차로 이동해도 좋다. 청계사 입구에 대형 주차장이 있어 차량을 주차하기가 쉽다. 절집 입구의 나무데크로 만든 등산로를 따라가면 소나무 숲이 주는 아름다움에 만끽할 수 있다. 그 숲길 끝에 이르면 그리 크지 않지만 기품있는 청계사가 나온다. 청계사 대웅보전과 와불 뒤편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는 처음에 급격한 경사가 있지만 조금 올라가면 완만한 산행길로 이어지면서 이수봉으로 올라가기 된다. 그리고 능선을 따라 국사봉으로 갈 수도 아니면 서울대공원 쪽으로 갈 수도 있다.
청계사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다른 등산로와 달리 역사와 문화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청계산 계곡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그렇다면, 청계산 산행을 역사와 함께하는 여행으로 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바로 정조대의 무신 조심태 장군이다. 몇 년 전 발견된 청계사 중수기인 ‘청계사법당중건대공덕주’의 기록에 의하면 사도세자의 원찰인 용주사를 지정하기 이전에 청계사를 먼저 지정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유명한 불교학자였던 권상로의 『조선사찰사료』에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 기록은 조선시대가 아닌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기록이고 그 외 관찬사료를 비롯한 어떠한 기록에도 청계사가 사도세자의 원찰이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아 신뢰성에 의심을 받았었다.
그래서 청계사가 사도세자의 원찰이었다는 내용은 전문가뿐만 아니라 사찰 관계자들에게도 모두 생소한 일이었다. 결국, 이 기록이 발견됨에 따라 청계사가 정조시대 비중 있는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일을 주도 한 이가 바로 조심태였다. 이렇기 때문에 청계산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조심태인 것이다.
조심태(趙心泰)는 본관이 평양으로 정조가 가장 측근으로 둔 무인이다. 그의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집중(執仲),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그는 유장(儒將)이라 할 만큼 문무겸전하였다. 특히 대자(大字)에 능해서 왕명에 따라 편액의 글자를 많이 썼다고 전한다.
조심태는 영조 16년(1740) 정월 25일에 태어났다. 정조가 1752년생이니 정조보다 12살 앞서 태어난 것이다. 그는 4세 때 부친상을, 22세 때 모친상을 당했다. 그는 8척 장신인데다가 멋진 수염을 가졌던 미남형이었다. 그는 매우 총명해서 한 번 본 것은 바로 기억하였으며 활쏘기에도 매우 능하였다. 그는 성격이 장중하고 과묵해서 말을 빨리하거나 어지간해서 감정표현을 하지 않았다. 손님을 대할 때에는 공손히 예절을 지켰으며 교만한 기색이 없었다.
그는 무인임과 더불어 요즘으로 치면 도시계획 전문가이기도 하다. 1789년 7월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있는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기로 결정하고 새로운 수원부사로 조심태를 임명하였다. 이러한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조심태는 정조가 화성 축성할 때 화성 유수로서 화성 축성의 실질적인 일을 모두 맡아 진행하였다. 이처럼 정조가 자신의 핵심적인 사업을 추진할 때 책임자로 일을 맡기는 인물이었으니 조심태가 정조에게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
조심태가 이곳 청계사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시대 청계사 창건을 주도했던 조인규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조인규는 고려말에 능통한 몽골어를 기반으로 원나라의 후원을 받아 성장한 인물이었다. 충선왕의 장인이 되어 고려 조정을 장악하였고, 원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었다. 이 조인규가 청계사 창건을 주도하였고, 이후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져도 청계사에 대한 평양 조씨 문중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조심태는 앞선 내용처럼 정조의 개혁정치를 도와주는 최측근 인물이었다. 사실 조심태는 소론이라는 당파에 속해있었지만, 소론보다는 무당파에 가까웠다. 그래서 정조는 더욱 그를 신뢰하였고, 자신의 부친 사도세자와 연관된 주요 사업들을 대부분 그에게 맡기게 되었다.
조심태의 집안은 대대로 무반이었기에 어린 시절부터 무예 수련을 통해 당대 최고의 무장이 될 수 있었다. 28세(영조 43, 1767) 때 음보로 선전관이 되었고, 29세 때 무과 을과에 합격해서 정식으로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다. 29세(영조 44년, 1768)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두루 거친 다음, 45세(정조 8년, 1784)에 홍충도 수군절도사, 46세(정조 9년, 1785)에 홍충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총융사·수원부사·훈련대장·포도대장· 금위대장·어영대장·수원부 유수·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까지 올랐다. 1798년(정조 22)에는 정조의 친위군영인 장용영의 대장이 되어 정조의 정치 개혁과 국방강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조심태는 일반 무인과 달리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승지의 관직을 수행한 것이다. 승지란 승정원의 관리로서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행정관 정도로 이해하여야 한다. 정6품에 해당하는 직위이지만 국왕 옆에서 늘 함께 있어야 했기에 모든 관료들이 반드시 해보고 싶어하는 직책이었다. 당연히 최고의 가문을 배경으로 하고 있거나 뛰어난 학문을 가지고 있어야 승지로 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무반이 승지로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정조는 조심태가 비록 무반이었음에도 그의 학문적 능력을 인정하고 승지로 임명하며 자신을 보좌하게 한 것이다. 이럴 정도로 조심태는 특이한 무반이었다.
조심태는 창의성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화성을 축성할 때 봉돈에 대한 계획은 그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봉화대는 산정상부에 있어야 하는데 조심태는 이런 생각을 파격적으로 깨뜨리고 성곽에 이어 만들었다. 봉화대의 기능과 대포를 설치한 돈대의 기능을 합하여 새로운 개념의 봉돈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창의성은 정조가 가진 국방정책에 상당한 이바지를 하였다. 정조는 청나라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화약무기를 개발한 신무기를 만들고 싶어 하였다. 요즘의 무기로 보자면 지뢰였다. 이 지뢰를 개발한 이가 바로 조심태였다.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위한 8일간의 화성행차에서 6일째 되는 날 화성행궁 득중정 앞에서 정조와 관료들이 활을 쏘았다. 활쏘기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화약을 땅에 묻고 성능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 날씨가 좋지 않았다. 이에 정조는 “지금 비가 오려고 날씨가 잔뜩 찌푸려 있으니 이와 같은 데도 할 수 있겠는가?”하고 조심스럽게 장용외사 조심태에게 가능성을 타진했다.
이에 조심태는 강한 자신감을 보여 주었다. 첫 번째로 화약의 성능이 강하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두 번째로 비가 오더라도 땅속까지 스며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즉 조심태는 장용외영에서 개발한 새로운 화약무기가 어지간한 비에도 견디어 폭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심태의 자신감에 정조는 성능 시험에 대한 지시를 하였고 마침내 매화시방은 날씨가 안 좋은 상태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조심태의 창의성으로 인하여 정조는 화약무기 개발에 성공하였고 국방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정조의 깊은 인정을 받았기에 자신의 집안과 깊은 인연이 있는 청계산의 청계사를 사도세자의 원찰로 지정하는 일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정조시대 국방정책과 수원 화성 건설을 주도하였던 조심태는 1799년(정조 23)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특별히 전교를 내렸으며 좌찬성에 추증할 것을 명하하고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1년 뒤 정조 역시 세상을 떠났다. 하늘에서 만난 두 사람은 다시 정순왕후와 노론이 장악한 조선을 보면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궁금하기 이를 데 없다.
김산 홍재인문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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