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지도읽기

[안양권지도]19세기 초 제작된 여지도 속 안양권

안양똑딱이 2019. 5. 21. 16:54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에 등장하는 수리산 지명 표기. 당시 안양 주변의 행정구역 명칭은 금천(衿川)과 과천(果川)이다.

 

금천은 조선시대 관아와 행궁이 자리했을 만큼 규모가 컷던 고을 행정의 중심이었으며 시흥현과 시흥군의 행정 명칭을 시작한 곳으로 1960-70년대 시흥이라 통칭하고(지금은 행정구역과 전혀 상관없는 시흥시가 사용함) 시흥역(금천구청역 바뀜)이 있었을 만큼 행정구역이 오래된 곳으로 안양은 고거 금천의 변방이자 때로는 과천의 변방이기도 했다. 

금천은 원래 백제 영토였다가 고구려의 남하 정책으로 고구려에 편입되어 잉벌노현(仍伐奴縣)이 되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뒤 757년(경덕왕 16) 곡양현으로 고쳐 율진군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시대 940년(태조 23) 금주(衿州)로 개칭하였고, 995년(성종 14)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폐지하였다. 1018년(현종 9) 수주(樹州)에 예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 지방관인 감무를 파견하였다.

1413년(태종 13) 금주를 금천현으로 개칭하였고, 1414년(태종 14) 금천현과 과천현을 병합하고 금천의 ‘금(衿)’자와 과천의 ‘과(果)’자를 따서 금과현이라 하였다가 두어 달 만에 혁파하여 다시 금천현과 과천현으로 나누었고, 다시 금천현과 양천현을 병합하여 금양현이라 하였다. 1416년(태종 16) 금천과 양천을 다시 나누어 금천에 현감을 두었고, 세조 때에는 과천과 병합했다가 곧 복구하였다.

1795년(정조 19) 2월 금천현을 시흥현으로 개칭하였고, 1895년(고종 32) 지방 제도인 8도제를 23부제로 개편하면서 부목군현의 명칭을 모두 군으로 통합함에 따라 시흥군이 되어 인천부에 속하였다가 다음해 경기도의 한 군이 되었다. 이때에는 읍내와 안양에 행궁(行宮)이 있었고, 충현서원(忠賢書院)이 있었다. 서울의 외곽지역으로 교통상 중요한 몫을 하였던 곳이다.

광복 이후에도 여러 차례 행정구역 개편으로 변화를 겪다가 현재는 경기도와 서울특별시의 여러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졌다. 금천이라는 지명은 행정구역상 존재하지 않다가 1995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로구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금천구로 독립하면서 옛 이름을 되찾았다.

옛 금천현의 행정구역을 보면 현재의 경기도 광명시·안양시, 서울특별시 일부 지역을 포함한다. 조선 전기 과천현과 분리될 당시 금천현은 동쪽으로 과천현, 남쪽으로 안산군, 서쪽으로 부평부, 북쪽으로 양천현과 이웃하고 있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광명시[옥길동 제외]와 안양시 일부, 서울특별시 금천구·영등포구·동작구·관악구·구로구 등의 일부 지역이 포함된다.

 

과천의 역사는 아주 오래된 곳이다. 삼국시대의 명칭은 동사힐현(冬斯肹縣)·율목군 등 이었으며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에 율진군으로 바꾸어 한주에 속하였다. 이때 곡양현(穀壤縣:시흥)·공암현(孔巖縣:양천)·소성현(邵城縣:인천)을 영현으로 두었다. 940년 과주로 개칭하였으며, 1018년에는 광주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감무가 파견되어 독립하였다.

1413년(태종 1)에 지금의 이름인 과천현으로 바뀌어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듬해 금천에 병합되어 금과현으로 되었다가 수개월 후에 복구되었고, 세조대에도 금천현과 병합된 적이 있으나 곧 분리되었다. 별호는 부안·부림이었다.

1895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군이 되어 인천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안산군·시흥군·과천군이 시흥군에 통합되어 과천군의 관할구역 중 노량진동·본동·흑석동·동작동은 북면에, 우안리·양재리 등 8개리는 신동면에, 안양리 등 4개리는 서이면에, 관문리·문원리·갈현리·하계리·막계리 등은 과천면으로 개편되어 시흥군에 편입되었다.

과거 과천의 변방이었으나 정조대왕 능행차길인 시흥대로(국도1호선) 개통, 1905년 경부선 철길과 안양역이 생기면서 도시로 급성장하기 시작한 안양과 달리 농촌의 모습을 지니고 있던 과천은 1978년 과천신도시계획이 확정·공고되어 계획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1979년에는 경기도 과천지구 지원사업소가 설치되었으며, 1982년 경기도 과천지구 출장소가 설치되어 행정을 관장하다가 1986년 과천시로 승격되었다. 정부제2종합청사·서울대공원·국립현대미술관·국사관·경마장 등이 들어서면서 서울의 행정기능을 분담하는 전원적인 위성도시로 자리잡았다.

 

지도 전체보기: 서울역사 아카이브 (
http://www.museum.seoul.kr/archive/archiveView.do?currentPage=5&type=C&type2=&arcvGroupNo=3121&lowerArcvGroupNo=&arcvMetaSeq=24799&arcvNo=73639&realArcvGroupNo=3121&searchVal= )

 

여지도(경기도)
아카이브번호 73639

유물번호 서13183

자료출처 『(이찬 기증)우리 옛지도』(2006), 29쪽 

내용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대표적인 목판본 지도책. 〈함경도〉에 1787년에 신설된 ‘장진부(長津府)’가 있고, 1800년에 개칭된 충청도의 ‘노성(魯城)’이 표시되어 있으나, 1822년에 설치된 함경도의 ‘후주부(厚州府)’가 반영되지 않아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지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미 18세기에 개칭된 평안도의 ‘이산(理山)’과 경기도의 ‘금천(衿川)’ 등이 여전히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지명 표기의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장책의 순서가 독특한데, 중국도, 일본국도, 유구국도, 조선전도인 ‘동국팔도대총’에 이어, 팔도의 도별지도, 마지막에 세계지도인 ‘천하도’가 수록되어 있다. 팔도의 도별지도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배치해, 함경도 지도가 가장 앞에 수록되고, 전라도가 가장 뒤에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서울이 위치한 경기도부터 시작되던 일반적인 도별 배치의 순서와는 매우 다른 점이다. 음각으로 인쇄되어 잘 눈에 띄지는 않으나 각 면의 바다 부분에는 쪽수에 해당하는 숫자가 새겨져 있어, 지도의 순서를 알려 준다.
지도의 전체적 윤곽 및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된 조선전도인 〈팔도총도 八道總圖〉와 도별도 즉 ‘동람도(東覽圖)’와 유사하다. 그러나 조선전도인 〈동국팔도대총〉은 〈팔도총도〉에는 없던 묘향산(妙香山)을 크게 그리고, 각 도의 도명 우측에 소속 군현수(郡縣數)와 경지면적을, 좌측에 민호수(民戶數)를 기록해 더 많은 정보를 담은 점이 다르다.
또 ‘동람도’의 도별지도에서는 각 군현과 하천·진산(鎭山)만을 표시하고 있으나 이 지도에는 각 군현의 위계(位階)와 서울까지의 시간거리인 일정(日程)이 군현명 옆에 적혀 있다. 해안에는 포구(浦口)·진보(鎭堡) 등도 수록되어 있다. 우역제(郵驛制)의 역도(驛道)를 직사각형으로 표시해 ‘동람도’보다 훨씬 더 자세하다. ‘동람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17세기 이후에 설치된 군현인 칠곡(漆谷)·영양(英陽)·순흥(順興)·자인(慈仁) 등의 군현이 표시되어 변화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도별도에서 특징적인 것은 우리나라의 각 지역을 28수의 별자리로 구분하여 영역의 경계를 선으로 표시하고 별자리의 이름을 기록한 점이다. 이는 동양의 전통적인 천문 사상인 분야(分野)의 관념을 적용한 것이다. 하늘의 별자리와 땅의 나누어진 일정한 지역이 서로 대응해 짝을 이룬다고 보는 생각인 분야설은 하늘과 땅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으로 보는 천지상관적(天地相關的) 사고를 보여주는 점에서 동양 사상의 특징을 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