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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4개 지자체 유역을 지나는 안양천(安養川)

안양똑딱이 2019. 4. 2. 00:35

 

안양천(安養川)
한강의 지류인 안양천은 경기도의 의왕시, 군포시, 안양시, 광명시, 시흥시, 부천시 등 7개 시와 서울의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관악구, 동작구, 양천구, 강서구 등 7개 구 등 14개 지자체 지역에서 지천이 흘러들고 지나면서 성산대교 서쪽에서 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유역의 면적은 286km²이며, 총 길이(지류 제외)는 32.5km에 달한다.

안양천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하천이 안양 시가지 앞을 지난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 편에는 "대천(大川)이 현의 서쪽 4리에 있으며, 과천현의 관악산과 청계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양천현의 철곶포(鐵串浦)로 흘러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고, 만안교(萬安橋)는 "남쪽으로 10리에 있는데, 안양천에서 수원(水原)으로 통하는 대로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안양천의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안양을 중심으로 그 뒤로는 수암천이 지나고 앞으로는 안양천이 흐르기 때문에 안양천을 '앞개울'이라 하고, 수암천을 '뒷개울'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양평동 근처에서는 내의 모양이 오목하다 하여 '오목내'라고도 하며, '갈천(葛川)'은 안양천의 옛 이름으로 전해진다.

안양천은 국가에서 관리상 하천 명을 붙이기 이전에는 지역마다 이름을 달리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안양천만이 아니고 한강을 비롯한 전국에서도 그렇게 했다.

『여지도서』 「과천현」 산천 항목에 안양천(安陽川)이라 기록되어 있고, "과천현 서쪽 20리에 있다. 하나의 근원이 사근천(沙斤川)이고, 또 하나의 근원은 인덕원천(仁德院川)인데, 합해져서 금천현의 염천(?川)으로 흘러간다."라고 나온다. 오늘날 쓰는 안양천(安養川)의 한자와 다르게 표기하였음을 볼 수 있다. 사근천은 현재의 안양천 상류에 있는 의왕시 고천리의 사그내이며, 인덕원천은 현재의 안양천 지류인 학의천이다.

조선 시대에는 현재와 달리 하천의 구간마다 이름을 다르게 불렀다. 안양천 상류지역에서는 사근천(沙斤川), 그 아래에서는 군포천이라 불렀고, 학의천을 인덕원천, 안양에서는 갈천, 동천이라 했으며, 금천에서는 한내·한천·대천(大川) 등으로 불렀다. 또 오목교 부근에서는 오목내, 한강에 연한 양천에서는 철곶포라고 불렀다.

기록을 보면 『해동지도』 「과천현지도」에도 안양천 상류에 사근천이, 금천현과의 경계선인 안양사와 안양교 부근에 안양천(安陽川)이라 표기되고 "과천현 서쪽 20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금천현 구간을 염천이라 했기 때문에 "금천현의 염천으로 흘러간다."고 기록했다. 

『1872년지방지도』 「과천현」 편에는 안양천 상류가 군포천(軍浦川)으로 기록되었다.

『대동여지도』에는 기탄(岐灘)으로 표기되어 있다.

『광여도』 「금천현」에 읍치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하천이 지금의 안양천임을 알 수 있고, 이 하천 주위는 지금의 구로공단과 광명시 아파트단지가 있는 광활한 평지로, 지도에도 표현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천(大川)이 기록되어 있고, "금천현 서쪽 4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과천현의 관악 · 청계 등 여러 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양천현의 철곶포(鐵串浦)로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금천현 구간을 대천이라 기록한 것인데, 금천현에서 가장 큰 하천이란 뜻으로 보통 순우리말 '한내'에 대한 한자 표기로 많은 고을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양천현의 안양천 구간을 철곶포라 불렀음도 알 수 있는데, 조선 시대에는 포구나 갯가의 특수한 지형을 하천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밖에 현재의 양천구와 영등포구 사이의 오목교 사이에서는 '오목내'라고도 불렀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하천관리를 위해 본류와 1 · 2 · 3차 지류를 설정하면서 발원지에서 차수가 더 높은 하천과 만나는 지점까지 하나의 이름으로 기록하였고, 그것이 현재의 하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안양천은 크게 9개의 지천을 거느리고 있다. 상류에서부터 왕곡천, 오전천, 당정천, 산본천, 수암천, 학의천, 삼성천, 목감천, 도림천이다. 그러나 마을에서 부르는 이름까지 하면 더욱 많다.

학의천은 청계산과 백운산의 물을 담아 내려오고, 삼성천은 삼막천과 관악산 남쪽지역의 물을 받으며, 도림천은 관악산 물을 받아오고, 수암천과 산본천은 수리산(일명 佛見山)의 물을 담아내고 있다. 목감천은 시흥시 일대의 물을 담아 온다.

안양천은 금천, 구로, 양천 등 평야지대를 흐르면서 자연지형에 맞추어 흐르다 보니 구불구불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 일제강점기 때인 1936년에 직각공사를 하여 비교적 오늘과 같은 형태를 갖추었으며, 1974년경에 하상정비를 통해 오늘의 모습을 갖게 됐다.

이곳은 1973년 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수영을 하고, 물고기를 잡아 천엽하는 등 수질이 양호했다. 이후 수질이 갑자기 오염돼서 1979년경에는 악취가 심하여 접근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다행히 1994년경부터 하수관 분류 사업을 시행하여 점점 되살아나 오늘은 1970년대 초의 수질을 다시 찾았다.

 

안양천은 어디에서 발원(發源) 할까?

고운(高雲)  전 만 수

 

혹자는 백운산에서 발원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백운산(백운산 저수지)에서 발원하는 하천은 학의천으로 안양천의 지류이다.

안양천의 발원지는 지지대(遲遲臺)이다.

지지대라고 부르게 된 이유가 있다.
정조대왕이 1792년 1월 26일 화성의 현륭원<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 후에 장조(壯祖)로 추존>에 참배를 갖다 환궁할 때 수원 북쪽 사근현(沙斤峴, 사근고개)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본래 가슴이 막히는 병이 있어 궁궐을 나올 때 고통스러웠는데 이제 배알하는 예를 마치고 나니 사모하는 마음이 다소 풀려 가슴 막히는 증세도 조금 가라앉았다. 이 지역은 바로 수원지역의 경계이니 내가 말에서 내려 경들을 불러 보는 것은 행차를 지연시키기 위해서다.”고 하면서 이 고개를 지지대(遲遲臺, 천천히 가는 고개)라고 부르도록 했다.

그 후 이 고개에 ‘遲遲臺’라는 비와 비각을 세우고 오늘까지 보존하고 있다. 그러니 이 고개는 1792년부터 사근고개에서 지지대고개로 바뀌었다.

정조는 평생을 아버지 사도세자(정조 즉위 후 壯獻世子로 고침)를 가슴에 품고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살아야 했다. 이 지지대고개를 넘으면 아버님이 계신 화성이 안 보이게 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지체하고 싶은 마음에서 머뭇거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보인다.

나는 정조의 어전에 두 무릎을 꿇고 알현을 하고 그의 뒤를 따라 한양으로 향했다.

나는 안양천의 발원지와 지류 등 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양천 앞 안양천에서 계속 물을 따라 걸어서 지지대고개까지 왔다.

지지대 고개에 떨어진 빗물이 남쪽으로 흐르면 수원천을 이루고, 북쪽으로 구르면 안양천을 만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양천과 정조대왕의 깊은 인연을 오래 간직하기로 했다.

안양천 발원지는 일정한 샘이나 저수지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지지대고개 언덕마루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