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안양풀 #안양유원지 #안양예술공원 #관광지 #기차역 #임시역/ 지금의 안양예술공원은 조성 당시인 1930년대에는 안양풀이라 불렀으며 1960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 까지는 안양유원지라 부르던 관광지였다.
사진은 1969년 안양유원지 입구(현 안양교사거리)의 풍경으로 당시 1번국도(현 만안로)에서 안양유원지로 가던 길(현 예술공원로) 입구에 안양유원지 입구임을 표기한 아치가 설치되어 있다.
사진 오른쪽은 안양역 방향으로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오른쪽 안양천이 흐르고 안양교와 안양철교가 있으며, 사진 왼쪽에는 만안교(1980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는 영화아파트가 들어섰다)와 고려석면 공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 아치가 있는 곳에는 현재 예술공원지하차도가 놓여졌으며 도로 주변에는 상가와 주택들이 들어서 당시와는 크게 변했다.
사진속 아치를 지나면 경부선 철길이다. 사진 오른쪽 뒤로 철길에 설치된 지붕이 열차 임시 승강장으로 당시 안양유원지로 피서오는 인파들이 이곳에서 내려 안양유원지까지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다.
안양 풀은 일제시대를 거쳐 광복 이후 60년대까지만 해도 대단한 명소여서 여름 한철 하루 약 2만 명의 유람객이 찾은 것으로 금천지는 기록하고 있다. 안양 역에서는 행락철에 한하여 유원지입구에 간이역을 설치했고, 이 곳에서 풀장까지 임시버스를 운행할 정도로 인파가 많이 몰렸던 곳이 바로 안양 풀이었다.
경부선 안양역에서 안양유원지까지 도보로 가는 것은 아주 불편했다. 1960-70년대에는 여름철에만 안양역에서 유원지행 합승버스를 운행했는데 차량이 몇대 되지도 않았으며 줄을 선 인파가 어마어마 했다.
안양유원지 입구에 임시 안양풀장역이 개통돼 운영되기도 했는데 일제강점기인 1935년, 1939년 여름에 단발성으로 운영되다가 중단됐다. 이후 1960년대부터 여름철 물놀이 문화가 성행하면서 서울에서 안양유원지로 피서오는 인파가 늘어나자 1966년에 안양풀장역을 다시 열어 여름철 주말과 공휴일에 평일 4만명, 주말 10만명이 타고 내렸으나 1969년 여름을 끝으로 안양풀장역은 사라진다.
실제 관보를 보면 1966년 여름피서철인 8월 6일-28일까지 토요일.공휴일에 경부선 안양 풀 임시승강장(시흥~안양역, 안양풀입구)이 운영됐으며, 1967년에는 7월 14일부터 8월 20일까지 여객을 받는 등 안양 풀 임시승강장은 1969년까지 운영했다.
안양지역 원로로 2015년 작고하신 고 변원신 어르신은 1933년 안양 풀이 생기자 당시 "일제가 서울에서 안양풀행 철도를 운영했다"도 증언하고 있어 안양 풀의 유명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해방 이후 서울과 수도권 시민들의 피서지로 이어져 1967년 7월29일자 <매일경제>에 안양유원지에는 하루 평균 4만여명(일요일 10만)의 피서객이 몰리고 서울에서 당일코스로 40원이면 왕복할 수 있고, 기차도 매시간마다 입구에 정차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1963년 7월17자 <동아일보>에는 국립도서관이 피서객을 위해 안양유원지 풀장에 7월26일부터 8월14일까지 임간문고를 설치해 운영했으며, 1968년 6월8일자 <동아일보>에는 체신부가 6월10일부터 8월30일까지 안양우체국 임시출자소를 운영한 기록도 있다. 1976년 3월25일자 <경향신문>에는 안양유원지에 해마다 100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자 입장료를 받기로 했다는 기록도 있다.
안양출신의 수필가인 이 용구 씨는 '양짓마을 까지소리'란 그의 수필집에서 일제시대인 '30년대 안양초등학교 시절 소풍을 가면 학년을 불문하고 무조건 안양유원지로 갔다고 하면서, 유원지계곡이 일찍부터 안양사람의 휴식처였을 뿐만 아니라 서울이나 수원 지역 사람들도 봄부터 가을까지 즐겨 찾던 명소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용구 씨는 이 안양 풀 때문에 서울에서 친척과 학우들이 매년 한 번씩 찾아왔고, 자신은 매해 그들의 안내자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어 이 씨는 '30년대에는 유원지 입구 좌우에 수박, 참외, 토마토 밭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안양 풀이 쇠락의 계기를 맞은 것은 1960년대 말 상류에 대형풀장, 맘모스풀장, 만안각 풀장 등 인공풀장이 들어서고, 또 행락객들이 버린 오물들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면서 자연하천인 삼성천이 오염되어 자연풀장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부터다. 이처럼 인파와 행락객이 몰리면서 관악산과 유원지계곡의 오염이 심화되자 당국에서는 이러한 명소의 심층적인 관리가 필요해 졌는데, 그래서 나온 것이 건교부의 전신인 교통부에서 '69년 1월 21일에 국민관광지로 지정한다. 이 때부터 입구에 아치모양의 철구조물로 '안양유원지'라는 표찰이 붙고, '안양 풀' 대신 '안양유원지'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으며 경기도관광협회 안양유원지지부가 결성되어 입구에서 매표를 하게되고, 입장수입으로 유원지를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1971년 7월 30일 개발제한구역(일명 그린벨트)으로, 1973년에는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건축 및 재건축이 억제되는 특별관리하에 들어가면서 발길이 뚝 끊긴다.더욱이 230명의 인명피해를 낸 1977년의 안양 대홍수는기존 안양유원지 계곡의 경관을 참혹하게 파괴하고 지나갔다. 이로인해 안양 풀은 상류에서 내려온 토사와 자갈, 대형 바위돌로 메꾸어지고 휩쓸리며 완전히 자취를 감춰서 결국 잊혀져 버리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잃어버린 안양유원지는 이후 계곡을 넘칠 정도로 풍부하던 수량도 줄어들면서 인적이 끊긴 유원지로 전락하자 결국 교통부는 1984년 11월 28일 국민관광지 지정을 취소하면서 안양유원지의 번창과 영화는 지난 추억의 이야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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