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사진기록/탐사공지

[공지]안양탐사대 115차 탐방(20171111)_명학시장과 밧데리 골목

안양똑딱이 2017. 11. 5. 13:48

 

안양탐사대 115차 여정_지도가 바뀌는 안양6동 명학시장과 밧데리 골목
11월 11일(토) 오후 3시/ 집결_농림축산검역본부 버스정류장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이하 안양탐사대)가 2017년 안양탐사대Ⅱ를 공개탐사로 시작하면서 재개발, 재건축 추진으로 삶의 흔적들이 사라지고 있는 동네와 골목을 돌아보는 '다같이 동네 한바퀴'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안양탐사대는 도시와 마을과 동네의 골목길에서 사라지고 변화되는 흔적들을 찾아 지난 2003년 2월부터 매주 토요일 마을과 동네 골목길을 걷는 마실을 해 왔습니다. 사진, 영상, 스케치, 이야기 등으로 도시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를 통해 또다른 프로젝트, 기획 등을 해보려는 도시.마을.골목연구, 건축, 사진,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탐사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탐사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SNS 페이스북 안양기억찾기탐사대 ( www.facebook.com/groups/132023160294699/ )에 접속후 신청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길잡이 최병렬(016-311-1001)

 

11월 둘째주에 갖는 115차 여정은 오는 11월 11일 오후3시 국립종자원, 국립식물검역원,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등 중앙정부의 농축산 관련 공공기관이 있다가 지방 이전에 따른 매각으로 고층주상복합 오피스텔이 신축을 시작함으로 도시 지형이 바뀌고, 자동차 정비업소들이 밀집해 밧데리 골목으로 불리우다 이젠 빠들이 불야성을 이루는 골목으로 바뀌어 골목 이름도 빠 골목이라 불러야 할 안양6동 명학시장과 밧데리 골목 주변을 탐방합니다.

 

■ 안양6동 소개/ 옛 지명-주접동(住接洞)
안양6동은 동(東)으로 안양7동, 서(西)로 안양9동, 남(南)으로 안양8동, 북(北)으로 안양5동이 각각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취락으로 소골(小谷洞)과 주접동(住接洞)이 있다. 행정의 1번가로 불리워지는 안양6동은, 조선후기에 정조가 부왕의 묘를 수원 화산으로 천장하고, 능행을 위해 지금의 안양만안경찰서 뒤에 정각(亭閣, 政閣)을 짓고 잠시 휴게했다는 연유로 주접동(住接洞)이란 마을명이 유래되었다,
이 마을은 정조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정조는 양주 배봉산(拜峯山)에 있던 부왕(사도세자)의 묘를 1789년 수원 화산으로 천묘한 후, 처음에는 서울-과 천-인덕원-사근(현의왕시)을 잇는 노정을 택했다가, 1795년에 안양에 만안교를 가설한 후부터 서울-시흥(현 구로구 시흥동)을 잇는 시흥노정(또는 금천노정)으로 변경하고 아울러 안양 1동에 안양행궁을 짓고, 안양경찰서뒤 동아아파트 부근에 정각(亭閣또는 政閣)을 세워 능행과 환궁 때 잠시 쉬어 갔다고 한다. 그후부터 이 마을을 주접동(佳接洞) 이라 불렀다고 한다. 보통 주젭이라 칭하며, 나주 정씨, 삭녕 최씨, 상산 김씨, 함평 이씨, 전주 이씨등이 오래동안 세거한 마을로, 예전에는 안양변전소 부근을 아랫말, 만안구청 부근을 가운데말, 성문중학교 아래(동)를 내곡동, 중앙병원 부근을 명학동, 덕천국교부근을 벌터(坪村)라 각각 칭하였다.
또 만안구청 남쪽은 창녕 성씨의 분묘가 많았는데 도시화로 이장 또는 화장되어 현재는 모두 택지로 조성되어 민가가 들어섰다. 이곳에 있던 묘 중 세상에 알려진 인물로 성후영(1571-1626)이 있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가 해를 당하자 대신 왜병의 칼을 맞아 장(腸)이 튀어나와 거의 사경(死境)에 이르렀을 때 부인 심씨의 구혈로 살아 일생을 폐업하고 두문불출하고 자취를 감추어 스스로 서호처사(西虎處士)라 칭했다한다.
광복 직전만 해도 5개 마을의 민가라야 불과 100여호에 지나지 않았으나, 1960년대(?) 중앙로가 개설된 후 이곳은 평초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까지 안양의 관가로 술집과 음식점, 여관 등 유흥업소뿐 아니라 요정이 있을 정도로 번창하던 곳이었다.
역사를 보면 1938년에 밤나무밭이었던 자리에 안양식림묘포(→경기도임업시험장)를 설치한 후, 수의과학검역원(안양로 175), 국립식물검역원(안양로 178), 시흥군 임업협동조합(안양6동 532-11), 농산물 품질관리원(안양6동 433-21), 한국담배인삼공사 안양지점(안양6동 437), 국립종자원(안양로 184) 등과 1975년에 안양시청사(안양6동 530), 1977년에 시흥군청사(→ 전만안구청· 현만안여성복지회관·안양6동582-4), 안양상공회의소(안양6동 502-2) 등이 들어섰으며, 1979년에 안양7동, 1985년에 안양8동을 각각 분리시켰을 만큼 인구의 급격한 추세를 보였었다.
교육기관으로는 신성중·신성고(안양6동 587-68), 안양상업고(안양6동 541-33)가 있고, 금융기관으로는 농협중앙회 안양남지점, 단위농협 남부지소, 6·8동새마을금고, 소곡새마을금고 등이 있고 아파트로는 성업그린,빌로채주상복합,삼익,한솔,서희아리채,세양청마루,엘리제빌리지,미랜드명학타워,미주아파트 등이 있다.

 

■오래된 공간 명학시장
안양6동 434-3번지에 자리한 명학시장(면적 2,359.7㎡)은 1977년에 공사를 시작해 1978년 5월 23일 소매시장으로 문을 연 4층 건물로 시장으로 불려지지만 사실 1층은 시장, 2층은 임대사무실들 3-4층은 아파트의 주거형태를 지닌 주상복합건물의 초기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공간은 현재 시장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로 1층에는 슈퍼와 순댓국집, 수살가게, 야채가게 등 서너개 정도만이 운영될뿐 알루미늄삿시로 만든 칸막이 형태의 대다수 점포들은 창고 또는 살림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2층에는 허스름한 임대형 공간(사무실)들이 있는데 한달 임대료가 보증금 없이 10만원으로 매우 저렴해 노인들 동호회, 학교 동창회 등에서 사용하는 친목 공간으로 인기이다.
특히 이 건물은 오래된 건축 구조와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 영화 촬영지로 쓰였을 만큼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을뿐 아니라 예술가들에게 매력적인 공간으로 여러 작가들이 이곳에 살거나 작업실을 운영하고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곳에 살았던 김정표 작가는 지난 2008년 '명학시장 택배보관소'를 통해 시장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자 시도했다. 그는 아버지, 그리고 시대에 따른 지역공동체의 변화 등을 온라인 쇼핑과 택배를 통해 접근한 <명학시장 택배보관소> 프로젝트를 가졌었다.

2015년에는 이야기너머에서 밧데리골목 프로젝트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2017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종이모형작가 장형순 선생의 작업실겸 창고가 있었다.
<명학시장 택배보관소> 2008
- 김정표 작가의 하나뿐인 아버지와 추억 만들기 작가 블로그
http://m.blog.daum.net/jpkimart1111/13
- 네오룩 게시물
http://neolook.com/archives/20080911i


한편 이 건물은 명학시장 주변지구에 포함되어 재개발이 추진되다가 2014년에 해제된 이후 주춤하다가 최근 다시 재개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는 명학시장 주변의 변화와 무관치 않다. 비로 인근에 있는 농림부산하 공공기관들이 모두 일반에 매각되어 고층의 오피스텔 등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는 등 새로운 변화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명학시장 사진첩 보기 https://www.facebook.com/coreachoi/media_set?set=a.1064974930213890.1073742326.100001041789694&type=3

 

■명학시장 앞에 자리했던 중앙정부 공공기관들의 건축 형태
1950-70년대 안양의 남부지역(현 안양5.6동)이 개발이 되지 않았을 때, 명학시장 주변은 길 건너편 국립수의과학검역원과 같은 대지의 영역에 속하였으며 정부의 농축산물 관련 공공기관들이 이곳에 자리했는데 북쪽부터 국립종자원, 국립식물검역원,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 각각 독립기관으로 들어섰다. 건물의 건립 연대를 살펴보면, 국립종자원 1975년, 국립식물검역원 1986년,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1986년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남쪽으로 한 블록 떨어진곳에 국립생사검사소가 1974년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 있다.
1970년대에 세워진 국립종자관리소와 국립생사검사소는 공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3층, 좌우대칭의 모습을 했다. 중앙의 현관을 중심으로 각층은 중복도형의 평면 배치를 하여 복도에서 양편의 사무 공간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기둥의 수직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각 층의 창을 일정한 간격으로 분절시켜 리듬감을 자아내고 있다. 아울러 1층보다는 2층, 3층으로 올라갈수록 외벽이 나오게 하여 수평으로 긴 그림자가 건물 전면에 드리워지게 함으로써 건물 전체의 형태가 단조롭지 않게 배려하였다.
이러한 외형의 디자인은 1970년대에 성행하던 한국 전통 건축의 처마를 현대적으로 이미지화한 건축물들이 관공서 건축을 중심으로 상당히 많이 채용되었는데 아마도 그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980년대에 건립된 국립식물검역원(1986),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1986)은 앞의 건물들과 10여 년의 차이를 두고 있는데, 건물 전체가 하나의 상자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각 층의 창이 끊어지지 않고 건물 폭 전체에 걸쳐져 있는 띠 창을 이루고 있다. 이는 창문틀에 사용되는 재료의 발달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