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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18]안양 비산동 수푸루지마을2(2013.06.22)

안양똑딱이 2017. 5. 17. 05:00

 

안양기억찾기 탐사 18차(2013년 6월 22일)로 찾아간 곳은 안양 비산동 임곡3지구. 1, 2지구에 이어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추진중인 곳으로 '수푸루지'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리우던 마을로 이날 탐사는 비산사거리 이마트 앞 골목에서 부터 시작해 왼쪽 지역의 골목길을 따라 임곡교, 안양1동 진흥아파트 까지의 여정입니다.

■ 안양 수푸루지 마을의 이야기

안양 비산1동인 수푸루지 마을은 안양8경중 제1경인 '망해암 일몰'을 볼 수 있는 비봉산이 품고 있는 곳. 대다수(임곡 1.2지구) 지역이 주거환경개선으로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임곡3지구에는 아직 사람이 한명 지나갈 정도로 아주 좁은 골목길과 기와집, 철지붕집, 판잣집, 양옥집, 다세대, 다가구 등 마치 건축물의 변천사를 한 공간에서 볼 수 있다.

예로부터 비산동에는 전설이 내려온다. 아주 먼 옛날, 비산동 일대는 허허벌판이었다. 하루 밤을 자고나니 어디선가 산이 날아와 앉아,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후로 날아온 이 산을 비산(飛山)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 비산1동은 과천군 상서면 외비산리였다. 1941년 10월 1일 시흥군 안양면 비산리로 바뀌었고, 안양면에서 안양읍을 거쳐 1973년 안양시 비산동으로 개편됐다. 동쪽으로는 비산3동, 서쪽으로는 비산1동, 남쪽으로는 비산2동이 있다.

안양시 자료에 의하면 조선조 인조 때 좌의정을 역임한 심기원(沈器遠 ?∼1644)이 그의 부친인 심간(沈諫. 1560∼1624. 청풍군수 역임)이 죽자 이 마을 뒷산에 예장한 후 그의 후손인 청송 심씨가 묘하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뒤 수원 백씨, 고령 박씨, 곡부 박씨, 전주 이씨, 안동 김씨 등이 살기 시작하였다.
'수푸루지'(林谷洞)는 마을은 깊은 골짜기에 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인 고을이라 하여 칭하였다고 한다. 또 마을 앞으로 큰 하천(안양천, 임곡천)이 흐른다 하여 ‘수풀내(林川)’라 부르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수푸루지 내에서도 동쪽지역을‘건너말’, 서쪽지역을 ‘아랫말’, 북쪽지역을 ‘웃말’이라 칭했다. 또 마을에서는 예전에 해마다 음력 10월 2일에 평화보육원 동쪽에 위치한 당봉 정상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유적으로는 안양 유일의 향교지(평화보육원 자리)와 영의정 류정현, 청풍군수 심간 등의 선현 묘가 있다.

1978년 대림대학(비산동 526번지의 7호)이 건립되고, 이어 비산동 신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임곡1지구와 임곡2지구에 이어 마지막으로 임곡3지구 재개발사업이 추진중에 있다.

안양 원로 병원신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1977년 이재준 이사장이 대림대학을 설립했다. 원래 이 학교 부지는 무허가촌이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집권시절, 낙후되고 위험한 무허가촌을 철거, 이주토록 지시해 안양 최초의 아파트였던 임곡아파트가 완공됐고, 후에 대림대학이 매수해 학교를 설립했다고 한다.

대림대학은 1977년 6월 학교법인 대림학원이 대립공업전문학교로 설립해 개교했으며 1979년 대림공업전문대학으로, 1990년 대림전문대학, 1998년 대림대학, 2011년 ‘대림대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대림대학교와 안양여중고는 설립 모체가 (주)대림산업으로 같다. 사진 자료를 보면 대림측은 당초 안양여중고를 이 곳으로 이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진원]수푸르지 [숲골>숲울>수푸르지, 임곡(林谷)]지금 안양역 동쪽 지역 안양1동 주민센터를 중심으로 한 아파트 자리에 일찍이 정기시장이 형성되었다. 안양에서는 유일한 시장이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안양중앙시장이 나중에 만들어지면서 이곳은 구시장이 되었고, 얼마 지나다가 사라져버렸다. 시장의 북쪽 끝부분에 있었던 소시장터를 지나서 안양천 다리(임곡교)를 건너면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을 ‘수푸르지’라고 하였다. 그것이 여느 동네 이름과 달라서 이상하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마을 이름이 한자로 ‘임곡’임을 알게 되었다. 한자 지명 임곡(林谷)에서 그 훈(訓)을 빌려 써서 수푸르지가 된 것이 아니라, 그 역순으로 변화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순수한 우리말 마을이름이 아주 어색하거나, 당치도 않은 한자어로 바뀐 것들은 일일이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숲이 우거진 골, 즉 임곡은 ‘숲골>숲울>수풀>수푸르다>수푸르지→임곡(林谷)’으로 부르기 쉽게 변화되었을 것이다. 두 강이 합쳐지는, 즉 ‘아우러지는’ 곳에 ‘아우라지’라는 지명이 된 것과 같은 음운 변화일 터이다.


■ 안양1동 진흥아파트 내 이승만 대통령 기념 식수

안양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식수한 나무가 있다. 이 대통령 식수한 나무가 있는 곳은 만안구 안양1동 진흥아파트 단지내 8동 3∼4호 입구로 수종은 느티나무, 현재 크기는 밑동 둘레 약 1.5m에 높이 약 20m로 수령은 70~80년 정도로 추정된다.이 나무 바로 옆에는 ‘이승만 대통령 기증식수, 서기 1955년 4월 5일’이라는 백색의 사각철재 표식이 세워져 있으며,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관리를 해오고 있으나 정작 아파트 주민들은 이 나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으며 안양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이 나무가 심어졌다는 1955년 당시 이 자리에는 삼흥방직이 자리하고 있었다. 삼흥방직은 1953년 1월 서선하 사장이 설립했다가 1956년 금성방직 김성곤 사장이 인수해 태평방직으로 바뀐 곳으로 안양3동의 금성방직과 함께 가장 큰 공장중 하나였다.


■ 평화보육원 자리가 안양향교?

안양에는 안양향교가 있었다. 과천문화원 자료에 의하면 1944년 1군 1향교 제도에 따라 시흥군 관내 3개 향교(안양<安養>, 시흥<始興>,과천<果川>)를 폐합, 과천향교라 개칭한 것을 1959년에 다시 시흥향교라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안양향교는 어디에 있었을까. 안양시에 확인항 결과 안양향교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안양시 문화유산팀 김지석 상임위원은 옛 어른들의 얘기를 전하면서 안양 비산동 평화보육원 자리가 안양향교였다는 것이다. 보육원 내를 돌아본 바로는 석탑, 돌 등이 있는데 이것이 안양향교와 연관이 있는지는 좀더 확인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