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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나그네 쌈짓돈 뜯던 사또 민담 뒤로하고 사근행궁으로

이야기보따리/기사

나그네 쌈짓돈 뜯던 사또 민담 뒤로하고 사근행궁으로
[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36) 통영별로(統營別路) 2일차
출처: 2013.01.31일자 경남도민일보에서(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04003)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 webmaster@idomin.com
 
오늘은 과천과 경계를 이루는 남태령에서 길을 잡습니다. 이곳이 지경(地境) 고개임을 알 수 있는 현대적 증거는 고개의 서쪽에 자리한 수도방위사령부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수도를 지키는 부대가 이곳에 있음은 이 고개가 지경으로서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노정을 〈과천시지〉에는 남태령(南泰嶺)-과천현행궁(果川縣行宮)-읍내전천교(邑內前川橋)-냉정점(冷井店)-은행정(銀杏亭)-인덕원점후천교(仁德院店後川橋)-인덕원천교(仁德院川橋)-독박지(禿朴只)-갈산점(葛山店)-독동현(禿洞峴)-군보천점-자잔동(自棧洞)-원동점-사근참행궁(肆覲站行宮)으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과천, 교통의 요충
남태령 옛길의 자취는 고개 동쪽에 살려두었고, 고갯마루 한 가운데에는 남태령(南泰嶺)이라 새긴 큰 빗돌이 세워져 있습니다. 남태령을 내려서면 관문동(官門洞)인데, 과천관아의 문이 있어서 그런 지명을 가졌다고 합니다. 예전 이곳 속담에 '현감이면 다 과천현감이냐?' '(서울이 무섭다고) 과천서부터 긴다'는 말이 있는데, 당시 과천현감 중에는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에게 남태령을 무사히 넘도록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받아내기도 했나 봅니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과천과 남태령이 한양을 오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 요충임을 풍자적으로 일러 주고 있습니다.
과천현 옛터의 은행나무와 송덕비.
과천현 옛터
옛길은 관문사거리에서 서쪽 산기슭을 따라 난 지금의 중앙로와 비슷한 선형을 따라 걷습니다. 과천 신도시 들머리에서 옛 과천현의 치소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 바로 앞 식당 돌계단이 예사롭지 않아 사진에 담고 조금 더 가니 바로 의구심이 풀립니다. 곁에 있었던 과천현 관아에서 가져다 쓴 돌로 만든 계단이었던 것이지요.
왕의 거둥 때 행궁(行宮)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던 과천현 옛터는 중앙동 주민센터와 과천초등학교 일원입니다. 지금 그곳에는 주민센터 자리에서 1986년에 옮겨온 온온사(穩穩舍)가 복원되어 있고, 늙은 은행나무 아래에는 과천현감을 지낸 이들의 선정비 15기를 옮겨 두었습니다. 온온사는 인조 임금 27년(1649)에 여인홍 현감이 과천현의 객사로 건립한 것인데, 1790년에 정조 임금이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고 돌아가던 길에 이곳에 들러 경치가 쉬어가기에 편안하다고 그런 이름을 지어 친필을 내렸다고 합니다. 건물은 중앙의 정청과 양쪽의 동·서헌이 각각 세 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패를 모신 정청은 원주(圓柱)를 쓰고 지붕을 높여 격을 달리했습니다.
이곳 온온사 들머리에는 수세가 예사롭지 않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우뚝하니 버티어 서 있습니다. 밑동의 둘레가 6.5m이고, 높이가 25m에 이르는 거목으로 나이가 600살을 헤아리니 조선 개국 무렵부터 자리를 지켜 온 셈입니다. 그 아래에 모아져 있는 송덕비는 홍천말 도로변에 있던 것을 옮겨왔는데, 정조 6년(1782)에 세운 정동준 현감의 것이 가장 오래됐습니다.
 
과천현감 송덕비에 얽힌 이야기
옛적 어느 때 과천 현감을 지낸 이가 고을을 떠나면서 미리 만들어 종이로 덮어 둔 송덕비를 벗겨 보았더니, 빗돌에 '금일차송도(今日此送盜: 오늘 이 도둑을 보내노라)'라 적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해서 현감은 그 비문 곁에 '명일래타도(明日來他盜: 내일 다른 도둑이 오려니)' '차도래부진(此盜來不盡: 이 도둑은 끊임없이 올진저)'라 써 두고 고을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의 부패한 공직자상을 풍자한 이야기이지만, 과천이 처한 장소성과 연동하여 이해하자면 위의 과천현감 통행세 뜯는 이야기와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위의 선정비 15기를 다 살펴봐도 그런 내용이 적혀 있는 빗돌은 없습니다.
원행길을 바꾼 사연
과천현 옛터를 나서 정부 제2청사를 뒤로하면, 지금은 옛 자리를 헤아리기 어려운 읍내앞다리를 건너 냉정점(冷井店)이 있던 찬우물에 이릅니다. 아마도 이곳에 점이 두어진 것은 갈현삼거리 서쪽에 있는 이 우물 때문이었던 듯합니다. 정조가 수원 현륭원(顯隆園)에 원행할 때, 이곳의 물을 마시고 가자(加資:정3품 이상의 품계 또는 그것을 올리는 일) 우물이라 불렀을 만큼 물맛이 좋았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정조는 머잖아 수원 거둥길을 과천로에서 시흥을 지나는 길로 바꾸게 되는데, 일설에는 이 우물 가까이에 있는 김약로의 무덤 때문이라고 합니다. 까닭인즉 정조 임금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김상로의 형이 바로 그이니, 효심 지극한 정조가 이 사실을 알고도 이리로 지나기가 편치 않았을 겁니다.
갈재 넘어 안양으로
이곳을 지나 나지막한 갈재(가루개·갈현:葛峴)를 넘으면 안양시에 듭니다. 갈재는 과천의 남쪽 고개라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갈현동은 지금도 과천신도시의 남쪽 경계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 지명유래를 살피기 위해 과천문화원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를 찾으니 그 변천을 갈고개-갈오개-가로개-가루개로 해두고 있더군요. 또한 갈을 갈림을 뜻한다고 보고 관악산과 청계산을 잇는 지맥에 의해 물이 양쪽으로 나뉘어 흐르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세상 어느 고개가 분수령 아닌 게 있던가요. 남태령도 지지대고개도 모두 분수령이니 저로서는 갈을 달리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곳의 갈재 가루개 갈현은 남쪽을 이르는 우리말 갈과 고개가 합쳐진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칡이 많아 갈현이라 했다는 설도 역시 갈을 뜻으로 읽었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일 뿐입니다. 이 고개를 경계로 과천과 안양 사이에는 아직 미개발지가 많이 남아 있어 찬우물 가루개 옥탑골 등 정감어린 지명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인덕원
이 고개를 넘어 옛 자리를 잃은 은행정(銀杏亭)과 인덕원점(仁德院店) 뒷다리를 지나면 머잖아 인덕원에 듭니다. 다리의 이름이 그리 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원의 기능을 점이 대신하면서 인덕원점으로 불리게 된 듯한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과천현 역원에 인덕원(仁德院)은 부의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에서의 위치와 이수가 조금 달라 보입니다. 〈대동지지〉에는 인덕원(仁德院)이 과천에서 8리라 했으니 이 이수가 실제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지금 안양시에서는 인덕원을 지나는 옛길이 남아 있는 구간에 '인덕원 옛터'를 알리는 표지석을 세워 두었습니다. 47번 국도가 지나는 대로에서 약간 서쪽으로 들어선 주막1길과 2길이 만나는 즈음인데, 지금은 상업지역으로 변해 옛 정취를 살피기 어렵습니다. 빗돌에는 인덕원이란 이름이 한양에서 내려 온 환관들이 어진 덕을 베푼 데서 비롯한 것이라 했고, 1597년 5월 초사흘에 이순신(李舜臣)이 이곳에서 쉬어갔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한편, 〈춘향전〉에는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행할 때 이곳에서 점심을 들었다고 했는데, 이 또한 이곳이 원으로서 점으로서 여전한 교통의 요충임을 알게 해 주는 예라 할 것입니다.
인덕원 옛길.
사근행궁 가는 길
인덕원에서 지금은 없어진 인덕원천(지금 학의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 벌말인 독박지(禿朴只, 민배기)를 지나면 원에서 3리 거리의 갈산점(葛山店)이 있던 평촌동 갈뫼마을입니다. 예서 모락산 자락을 돌아 독동현(禿洞峴:의왕에서 독박지로 가는 고개)을 넘으면 안양교도소 뒤의 모락산 기스락을 따라 난 옛길이 잘 남아 있습니다. 이즈음이 군보천점(軍堡川店)을 지나던 길인데, 조금 더 가면 원동점(遠東店)이 있던 성라자로마을 입구를 지납니다. 옛 원동점을 지나면서 지방도를 버리고 1번 국도와 비슷한 선형을 따라 수원으로 길을 잡아가면 사근행궁(肆覲行宮)이 있던 고촌동 주민센터에 이릅니다. 옛 이름이 사근평(肆覲坪/沙近坪)인 것은 오래되어 바탕이 변한 것을 이르는 '삭은'의 음차로 보입니다. 지금 이름이 고촌(古村)인 것은 사근을 예스러운 마을을 훈차한 것으로 보이니 더욱 그렇게 볼 수 있다 여겨집니다.
/글·사진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