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명소/숨은공간

[의왕]100년 역사의 흔적이 있는 하우현성당

안양똑따기 2017. 3. 20. 14:47

 

100년 역사의 흔적이 있는 하우현성당

 

하우현(下牛峴)성당은 본당 설립 100년이 넘는 역사에 안양지역 천주교 전파의 첫 머리를 차지하는 의미 있는 곳이다. 신도수 200여명에 성당 규모는 전국 본당 성당 중 가장 작은 성당이지만 이 곳은 한국천주교뿐 아니라 근대역사의 흔적뿐 아니라 한국과 프랑스 건축양식을 절충한 한옥 사제관을 통해 근대사적 건축양식까지 만날 수 있는 역사 깊은 성당이다.
현 의왕시 청계동, 과거 시흥군 의왕읍 청계리(始興郡 儀旺邑 淸溪里) 속칭 ‘하우고개’ 자락과 청계산과 광교산맥을 잇는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하우현은 서울에서 약 24㎞ 떨어져 있고 안양시와는 20리 거리로 근접해 있으며 조선시대 동양원이라는 역원(驛院)이 있던 곳으로 현재 원터라고도 불리운다.
역원이란 과거 중앙관청의 공문을 지방관청에 전달하고 사신의 왕래나 관리 부임시 마필을 공급하던 역(驛)과 숙식을 제공하던 국가운영 여관 원(院)을 합친 말이다. 하우현은 조선시대에 인천, 제물포, 이천, 여주를 잇는 간선로가 통과하면서 동양원(洞陽院) 이라는 역원이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 언제부터 교우들이 모여들어 살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청계산과 광교산 등 높은 산들로 인해 자연의 계곡과 울창한 수목이 있었던 이 일대는 19세기 초 조선시대 말 박해를 피해 산길을 찾던 천주교인들에게는 더 할 나위 없는 피난처였음에 비추어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천주교 교우들은 때로는 땅을 파고 토굴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토굴이'라고도 불리우기도 했다. 하우현에서 국사봉을 넘어 5키로 정도 가면 둔토리성지가 대표적인 곳이다.
하우현에는 개화기인 1884년에 이미 공소가 시작되어 뮈텔 신부가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전교하였고, 1885년부터는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전교한 기록이 남아 있다. 1886년 한불조약의 성립으로 한국 천주교회에는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했다. 이 조약이 비준된 이듬해인 1888년 7월 왕림(갓등이)이 최초로 본당으로 설정되자 그 관할공소로 편입되었다.
1894년 5월 왕림본당 2대 신부인 알릭스(Alix) 신부는 하우현 신자들이 공소 강당없이 교우 집에서 공소 예절을 행하는 것을 보고 알릭스 신부가 협조한 금액과 하우현 교우들이 모금한 1,500냥으로 초가 목조 강당 10간이 건축되었으며, 이 건물이 명동성당에 이어 우리나라의 두 번째 성당이었다.
그 뒤 왕림 본당 주임신부 대리인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신부는 1899년과 1900년에 걸쳐 자주 이곳에 체류하면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하우현이 본당으로 되고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여 5년간 전교하였다.
하우현은 1900년에 왕림 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독립하였다. 프랑스인 샤플랭(Chapelain, 蔡) 신부가 초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여 사제관을 신축하고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봉헌하였다. 이 때 내빈으로 참석한 주한(駐韓) 초대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프랑스 공사가 종을 기증했다.
1900년 본당창설 당시의 신자총수는 1,105명이고 16개 공소를 관할하였다. 이는 광주군(廣州郡)과 용인군(龍仁郡)의 일부지역, 그리고 과천현(果川縣), 금천현(衿川縣, 지금의 安養지구), 안산군(安山郡) 등 넓은 지역을 관할할 만큼 교세 규모가 매우 컸다. 2대 본당신부는 르각(Le Gae, 郭元良), 3대는 페랭(Perrin, 白文弼) 신부로, 모두 프랑스인 선교사였고, 1920년에 처음으로 한국인 주임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가 부임하여 1927년까지 7년간 사목하였다. 그 동안에 ‘애경 강습소’를 개설, 육영사업에도 힘썼다.
1928년 프랑스인 부이수(Bouyssou, 孫以燮) 신부가 5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여 신개화사상(新開化思想)과 문맹퇴치에 많은 공을 세웠으나, 애경강습소는 운영이 어려워 끝내 폐쇄되고 말았다. 1930년 부이수 신부가 대신학교 교수로 전임된 뒤, 본당은 문을 닫게 되고, 수원 고등동 본당의 공소로 편입되었다. 1943년 황정수(黃貞秀,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이 부활되었는데 얼마 후에 6.25 전쟁을 겪게 되고, 1951년 황 신부가 떠나자, 본당은 다시 문을 닫고 영등포 본당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
1952년 구천우(具天佑,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다시 본당이 부활되었다. 하지만 구 신부는 안양 일대의 사목에 힘씀 결과 1953년 안양 본당이 설정되면서 1954년 안양읍에 장내동성당(현 안양중앙성당)이 설립되자 하우현 본당은 공소가 되었다. 그러나 성당과 사제관은 그대로 보존되어 신부들이 휴양처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목조성당이 낡아 붕괴 위험에 처하자 1965년 하우현에서 휴양하던 은퇴사제 김영근 베드로 신부님이 미군부대로부터 건축 자재를 원조받아 1,700평의 부지 위에 100평의 현 성당을 신축하였다. 이 사업은 벨기에인 레이몬드(Raymond Spies) 신부의 힘이 컸다.
하우현성당은 1975년에 군포(현 호계동) 본당 관할공소로 변경되었다가 1978년 다시 본당으로 부활되다. 이 과정에서도 레이몬드신부의 역할이 매우 컸는데 그는 1980년에 하우현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사회사업에도 힘썼다. 1993년에는 하우현 공소 건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출처 : 가톨릭 대사전 - 교회사 연구소]
현재의 성당의 외형은 동화책이나 영화 속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것 같은 하연 외벽에 연한 하늘색 지붕이 주위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경건하고 아담한 모습이다. 성당 내부는 지친 신발을 벗고 바닥에 앉아 편안하게 미사를 볼 수 있는 좌식이다. 아마도 동양의 정서에 맞춘 점도 있지만 작은 규모인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이는데 불편하기 보다 소박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하우현성당 본당 건물 오른쪽에 있는 한옥 건물은 하우현성당의 역사를 대변하는 곳이다. 이 곳은 1906년에 신축한 사제관(신부님 숙소)으로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건물의 몸체는 석조, 지붕은 골기와를 얹은 팔각지붕 형태로 한국과 프랑스의 건축양식을 절충했다. 20세기 초반 성당 건물에 한양 절충식을 쓴다는 건 당시에는 보기 드문 건축 양식으로 평면 및 구조ㆍ의장 등이 갖는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사제관 현관 지붕 아래에는 자그마한 종이 매달려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성당 건립후 프랑스 공사였던 골랭드 플랑시가 하우현성당 준공응 기념해 종을 보내왔다고 한다. 이 건물은 지난 2001년 1월 22일 경기도 기념물 제 176호로 지정되엇으며 2005년 보수작업으로 새로이 단장했다.
성당 마당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성당 주변에는 작은 정원들이 조성되어 연초록빛 풀잎 위에 아기자자한 꽃들.이 피어있고 사제관 옆 돌담길에는 하우현성당의 터주대감으로 귀여움을 받고있는 고양이 두마리가 산책을 즐긴다.
성당 왼편으로는 ‘십자가의 길’을 표현한 작품들이 있다.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은 후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에서 못박혀 죽을 때까지 중요 장면을 표현한 작품이다. 보통 14가지인데 하우현 성당은 15가지로 표현해놓았다. 데크로 조성된 작은 산책길을 따라가면 하우현성당 카페다. 신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곳이다. 신자들이 직접 운영하며 수익금은 전액 성지개발에 사용된다. 이곳 역시 신발을 벗고 들어가 친구 집같이 정겹다.
사제관 앞에는 주보 신부인 성 루도비코 볼리외(Beaulieu) 신부님의 동상이 서 있다. 조선 말기에 천주교의 전파를 위해 활동하던 12명의 선교사 중 가장 어린 나이인 25살에 조선에 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체포된 후 스물여섯의 꽃 같은 나이에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그는 1968년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고 이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려졌다.
하우현성당 인근에는 박해당시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가 은신했던 동굴이 있다. 이 동굴성지를 가려면 성당 옆길로 난 등산로를 따라 국사봉(542)까지 1시간40분 정도 올라야 한다. 이곳에서 이수봉 방향이 아닌 오른쪽 길로 1km 정도를 내려가면 쉼터(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갈림길)이고 여기서 ‘성 루도비코 은신동굴‘ 안내판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등산에 자신 없으면 하우현성당 앞에서 분당 반향 버스(303번, 1550-3번)를 타고 운중동먹거리촌 정류장(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하차한 후 연구원 앞을 지나 순두집에서 다시 서울외곽순환도로 밑의 터널을 지나 오르면 국사봉 등성이로 1.2km(40분 소요)를 오르면 동굴성지에 도착한다. 교우촌의 생업이던 옹기 굽던 도요지(陶窯地)와 얽힌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우현 성당 가는길은 인덕원사거리에서 청계를 지나 성남 판교가는 도로(57번국도)를 10여분 정도 가다 보면 우측으로 ‘원터마을 하우현성당’ 이정표가 보인다. 도로 아래쪽으로 난 굴다리를 지나 죄측으로 돌면 성당이 나온다. 성당앞 마당에는 주차공간이 있다.
대중교통도 비교적 편리하다. 인덕원사거리(지하철 4호선 2번 출구쪽) 버스정류장에서 성남행 303, 103, 1303, 1550-3번을 타고 청계원터마을 입구정류장에서 하차해 도로 밑 우회 터널(굴다리)을 건너면 된다. 의왕 마을버스 1-5은 성당입구까지 운행한다.
하우현성당 버스정류장에서 판교방향으로 약 200여미터 지근거리에는 2004년에 발견한 의왕의 도깨비도로가 있다. 도깨비도로란 경사가 낮은 곳이 높게 보이는 시각에 관해 생기는 착각이 주는 착시현상으로 인한 것이다. 이 도로는 판교쪽 방향 고갯길에 있는데 언덕으로 이어지는 판교로 탓일까요? 주변 환경이 만든 착시현상으로 인해 마치 내리막길 처럼 보인다. 도깨비도로 중간쯤 구간 양쪽에 도깨비도로 체험구간이 있다. 동그란 음료수병이나 공을 도로에 놓거나 물을 홀려 놓으면 왜 도깨비도로인지를 알 수 있다.
 
하오고개 또는 학현[鶴峴]
 경기도 성남시의 서남부 분당구 운중동의 서쪽에서 의왕시 청계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위치한 고개이다. 운중동에서는 하오개 · 하오고개 · 화의고개 등으로 불리고, 의왕시에서는 학고개 · 학현이라 부른다. 학현의 좌우 모두 조선 말기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해서 숨어 살았던 곳이다. 고개 너머 청계동은 1801년 신유박해 때 한덕운(토마스) 등이 붙잡힌 곳이다. 그는 교우들의 이름을 대지 안다가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조선 시대 동양원(洞陽院)이라는 역원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해동지도』에 학현이 기록되어 있다. 『중정남원지』에 "학현은 판교주막에서 서쪽으로 10리쯤에 있다. 서쪽으로 인덕원 · 과천 등지와 통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학현이란 명칭은 이웃한 의왕시 청계동 점말에 있었던 김해김씨 종산이 풍수지리상 학이 거동하는 형국이며, 인근의 안동김씨 묘도 학의 혈에 해당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참고자료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일러두기 및 '우리나라의 지명' 총론 목차-
 

 

 

 

[의왕]100년 역사의 하우현성당

 

#의왕 #하우현성당 #100년 #천주교 #한옥사제관/ 작고 소박하지만 100년 역사와 근대건축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하우현성당

하우현(下牛峴)성당은 본당 설립 100년이 넘는 역사에 안양지역 천주교 전파의 첫 머리를 차지하는 의미 있는 곳이다. 신도수 200여명에 성당 규모는 전국 본당 성당 중 가장 작은 성당이지만 이 곳은 한국천주교뿐 아니라 근대역사의 흔적뿐 아니라 한국과 프랑스 건축양식을 절충한 한옥 사제관을 통해 근대사적 건축양식까지 만날 수 있는 역사 깊은 성당이다.

현 의왕시 청계동, 과거 시흥군 의왕읍 청계리(始興郡 儀旺邑 淸溪里) 속칭 ‘하우고개’ 자락과 청계산과 광교산맥을 잇는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하우현은 서울에서 약 24㎞ 떨어져 있고 안양시와는 20리 거리로 근접해 있으며 조선시대 동양원이라는 역원(驛院)이 있던 곳으로 현재 원터라고도 불리운다.

역원이란 과거 중앙관청의 공문을 지방관청에 전달하고 사신의 왕래나 관리 부임시 마필을 공급하던 역(驛)과 숙식을 제공하던 국가운영 여관 원(院)을 합친 말이다. 하우현은 조선시대에 인천, 제물포, 이천, 여주를 잇는 간선로가 통과하면서 동양원이라는 역원이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 언제부터 교우들이 모여들어 살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청계산과 광교산 등 높은 산들로 인해 자연의 계곡과 울창한 수목이 있었던 이 일대는 19세기 초 조선시대 말 박해를 피해 산길을 찾던 천주교인들에게는 더 할 나위 없는 피난처였음에 비추어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천주교 교우들은 때로는 땅을 파고 토굴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토굴이'라고도 불리우기도 했다. 하우현에서 국사봉을 넘어 5키로 정도 가면 둔토리성지가 대표적인 곳이다.
하우현에는 개화기인 1884년에 이미 공소가 시작되어 뮈텔 신부가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전교하였고, 1885년부터는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전교한 기록이 남아 있다. 1886년 한불조약의 성립으로 한국 천주교회에는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했다. 이 조약이 비준된 이듬해인 1888년 7월 왕림(갓등이)이 최초로 본당으로 설정되자 그 관할공소로 편입되었다.

1894년 5월 왕림본당 2대 신부인 알릭스(Alix) 신부는 하우현 신자들이 공소 강당없이 교우 집에서 공소 예절을 행하는 것을 보고 알릭스 신부가 협조한 금액과 하우현 교우들이 모금한 1,500냥으로 초가 목조 강당 10간이 건축되었으며, 이 건물이 명동성당에 이어 우리나라의 두 번째 성당이었다.

그 뒤 왕림 본당 주임신부 대리인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신부는 1899년과 1900년에 걸쳐 자주 이곳에 체류하면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하우현이 본당으로 되고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여 5년간 전교하였다.

하우현은 1900년에 왕림 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독립하였다. 프랑스인 샤플랭(Chapelain, 蔡) 신부가 초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여 사제관을 신축하고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봉헌하였다. 이 때 내빈으로 참석한 주한(駐韓) 초대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프랑스 공사가 종을 기증했다.

1900년 본당창설 당시의 신자총수는 1,105명이고 16개 공소를 관할하였다. 이는 광주군(廣州郡)과 용인군(龍仁郡)의 일부지역, 그리고 과천현(果川縣), 금천현(衿川縣, 지금의 安養지구), 안산군(安山郡) 등 넓은 지역을 관할할 만큼 교세 규모가 매우 컸다.

2대 본당신부는 르각(Le Gae, 郭元良), 3대는 페랭(Perrin, 白文弼) 신부로, 모두 프랑스인 선교사였고, 1920년에 처음으로 한국인 주임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가 부임하여 1927년까지 7년간 사목하였다. 그 동안에 ‘애경 강습소’를 개설, 육영사업에도 힘썼다.

1928년 프랑스인 부이수(Bouyssou, 孫以燮) 신부가 5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여 신개화사상(新開化思想)과 문맹퇴치에 많은 공을 세웠으나, 애경강습소는 운영이 어려워 끝내 폐쇄되고 말았다. 1930년 부이수 신부가 대신학교 교수로 전임된 뒤, 본당은 문을 닫게 되고, 수원 고등동 본당의 공소로 편입되었다. 1943년 황정수(黃貞秀,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이 부활되었는데 얼마 후에 6.25 전쟁을 겪게 되고, 1951년 황 신부가 떠나자, 본당은 다시 문을 닫고 영등포 본당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

1952년 구천우(具天佑,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다시 본당이 부활되었다. 하지만 구 신부는 안양 일대의 사목에 힘씀 결과 1953년 안양 본당이 설정되면서 1954년 안양읍에 장내동성당(현 안양중앙성당)이 설립되자 하우현 본당은 공소가 되었다. 그러나 성당과 사제관은 그대로 보존되어 신부들이 휴양처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목조성당이 낡아 붕괴 위험에 처하자 1965년 하우현에서 휴양하던 은퇴사제 김영근 베드로 신부님이 미군부대로부터 건축 자재를 원조받아 1,700평의 부지 위에 100평의 현 성당을 신축하였다. 이 사업은 벨기에인 레이몬드(Raymond Spies) 신부의 힘이 컸다.

하우현성당은 1975년에 군포(현 호계동) 본당 관할공소로 변경되었다가 1978년 다시 본당으로 부활되다. 이 과정에서도 레이몬드신부의 역할이 매우 컸는데 그는 1980년에 하우현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사회사업에도 힘썼다. 1993년에는 하우현 공소 건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출처 : 가톨릭 대사전 - 교회사 연구소]

현재의 성당의 외형은 동화책이나 영화 속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것 같은 하연 외벽에 연한 하늘색 지붕이 주위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경건하고 아담한 모습이다. 성당 내부는 지친 신발을 벗고 바닥에 앉아 편안하게 미사를 볼 수 있는 좌식이다. 아마도 동양의 정서에 맞춘 점도 있지만 작은 규모인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이는데 불편하기 보다 소박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하우현성당 본당 건물 오른쪽에 있는 한옥 건물은 하우현성당의 역사를 대변하는 곳이다. 이 곳은 1906년에 신축한 사제관(신부님 숙소)으로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건물의 몸체는 석조, 지붕은 골기와를 얹은 팔각지붕 형태로 한국과 프랑스의 건축양식을 절충했다. 20세기 초반 성당 건물에 한양 절충식을 쓴다는 건 당시에는 보기 드문 건축 양식으로 평면 및 구조ㆍ의장 등이 갖는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사제관 현관 지붕 아래에는 자그마한 종이 매달려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성당 건립후 프랑스 공사였던 골랭드 플랑시가 하우현성당 준공응 기념해 종을 보내왔다고 한다. 이 건물은 지난 2001년 1월 22일 경기도 기념물 제 176호로 지정되엇으며 2005년 보수작업으로 새로이 단장했다.

성당 마당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성당 주변에는 작은 정원들이 조성되어 연초록빛 풀잎 위에 아기자자한 꽃들.이 피어있고 사제관 옆 돌담길에는 하우현성당의 터주대감으로 귀여움을 받고있는 고양이 두마리가 산책을 즐긴다.

성당 왼편으로는 ‘십자가의 길’을 표현한 작품들이 있다.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은 후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에서 못박혀 죽을 때까지 중요 장면을 표현한 작품이다. 보통 14가지인데 하우현 성당은 15가지로 표현해놓았다.

데크로 조성된 작은 산책길을 따라가면 하우현성당 카페다. 신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곳이다. 신자들이 직접 운영하며 수익금은 전액 성지개발에 사용된다. 이곳 역시 신발을 벗고 들어가 친구 집같이 정겹다.

사제관 앞에는 주보 신부인 성 루도비코 볼리외(Beaulieu) 신부님의 동상이 서 있다. 조선 말기에 천주교의 전파를 위해 활동하던 12명의 선교사 중 가장 어린 나이인 25살에 조선에 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체포된 후 스물여섯의 꽃 같은 나이에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그는 1968년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고 이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려졌다.

하우현성당 인근에는 박해당시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가 은신했던 동굴이 있다. 이 동굴성지를 가려면 성당 옆길로 난 등산로를 따라 국사봉(542)까지 1시간40분 정도 올라야 한다. 이곳에서 이수봉 방향이 아닌 오른쪽 길로 1km 정도를 내려가면 쉼터(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갈림길)이고 여기서 ‘성 루도비코 은신동굴‘ 안내판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등산에 자신 없으면 하우현성당 앞에서 분당 반향 버스(303번, 1550-3번)를 타고 운중동먹거리촌 정류장(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하차한 후 연구원 앞을 지나 순두집에서 다시 서울외곽순환도로 밑의 터널을 지나 오르면 국사봉 등성이로 1.2km(40분 소요)를 오르면 동굴성지에 도착한다.

하우현 성당 가는길은 인덕원사거리에서 청계를 지나 성남 판교가는 도로(57번국도)를 10여분 정도 가다 보면 우측으로 ‘원터마을 하우현성당’ 이정표가 보인다. 도로 아래쪽으로 난 굴다리를 지나 죄측으로 돌면 성당이 나온다. 성당앞 마당에는 주차공간이 있다.

대중교통도 비교적 편리하다. 인덕원사거리(지하철 4호선 2번 출구쪽) 버스정류장에서 성남행 303, 103, 1303, 1550-3번을 타고 청계원터마을 입구정류장에서 하차해 도로 밑 우회 터널(굴다리)을 건너면 된다. 의왕 마을버스 1-5은 성당입구까지 운행한다.

하우현성당 버스정류장에서 판교방향으로 약 200여미터 지근거리에는 2004년에 발견한 의왕의 도깨비도로가 있다. 도깨비도로란 경사가 낮은 곳이 높게 보이는 시각에 관해 생기는 착각이 주는 착시현상으로 인한 것이다. 이 도로는 판교쪽 방향 고갯길에 있는데 언덕으로 이어지는 판교로 탓일까요? 주변 환경이 만든 착시현상으로 인해 마치 내리막길 처럼 보인다. 도깨비도로 중간쯤 구간 양쪽에 도깨비도로 체험구간이 있다. 동그란 음료수병이나 공을 도로에 놓거나 물을 홀려 놓으면 왜 도깨비도로인지를 알 수 있다.


사진첩 [풍경]100년 역사 의왕 하우현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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