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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안양의 역사와 각 동 지명유래(1)

안양똑딱이 2017. 3. 2. 14:56

안양의 역사 및 각 동 지명유래(1)

●역사
문헌상에 등장하는 안양의 역사는 율목군이라는 행정명칭이 있으나 이전의 원삼국시대와 선사시대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1989년 평촌지역 문화유적 조사시 석기시대의 각종 유물과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발견되어 안양지역의 오래된 주거근거를 알수가 있으며 청동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대에는 마한의 영토에서, 백제 근초고왕(346-375)때에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가 고구려 장수왕(394-491)때 한강연안 및 경기도 전지역이 고구려 남쪽의 영토가 되었다.
 
●지명유래
안양(安養)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효공왕 4년(900)에 궁예의 후예인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등의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산꼭대기의 구름이 5가지 빛으로 채색을 이룬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피게 했다. 구름밑에서 능정(能正)이란 노스님을 만났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건의 뜻과 같으므로 이곳(만안구 석수1동 산 2번지 일대)에 안양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이 안양사로 인해 안양이란 명칭이 탄생하였다. 조선시대에 정조대왕께서 부친 사도세자의 능행을 위해 가설한 만안교의 안(安)자와 함께, 양(養)자는 후세사람에게 인륜의 근본인 효의 뜻을 살리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짐작한다.또한 1941년 시흥군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되며 쓰였는데 안양이란 불교에서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하는 극락정토의 세계로 모든일이 원만구복하여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자유롭고 아늑한 이상향이다.
 
●동별지명유래
 
■남부동(南部洞) <안양1동>
교하동(안양5동)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안양시가지 남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남부동(南部洞) 이라 칭한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찬우물(안양5동) 에서 흘러 내리는 샘물로 농사를 짓던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광복 직후에 벽산쇼핑 앞에 민가 수호가 뜨문뜨문 있었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 원예.청과 시장이 개설되고, 이어 숙박업이 번성하면서 급성장한 곳이다.
 
■시대동 (市垈洞, 舊市場) <안양1동>
중앙동 동쪽으로 한국제지와 진흥아파트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안양의 중심부인데다가 지리적으로 군포, 의왕, 과천, 광명, 수암, 군자등이 인접해 있어 시장으로서는 최적지였다. 이곳에 시장이개시( 開市)되기는 1926 년 1월 28일이었고, 거래되는 품목은 농산물을 위시하여 축산물, 포목, 일용잡화까지 다양했다. 개시(開市)한 1년후(1927)의 년간 매출액을 보면 농산물 이 15만 6천원, 잡화가 21만 2천원, 그밖에 직물, 축산물, 수산물 등 모두 50여 만원에 달했다.
상인들은 개시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6 월 4일 단오절을 기해 대대적으로 기념식을 거행키로 했는데, <동아일보> 1927년 6월 1일자에 안양시장일주기념(安養市場 一週紀念) 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은 군의 중앙일뿐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따라서 산물도 상당함으로 동면에서는 작년중에 안양시장을 설치한 후 유래 성적이 비상히 양호하던 바 더우기 안양번영의 일책으로 오는 6월 4일(단오일)을 기하여 전시장(全市場) 일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리라 하며 여흥으로 예기의 가무와 오산청년(烏山靑年)의 소인극(素人劇) 외 안양소년척후대 주최의 축구대회 및 동화동요회 등이 있어서 많은 흥미가 있으리라더라"
1주년 기념식은 예정대로 동년 6월 4일 오후 2시부터 안양시장 내 광장에서 수천의 관객이 참석한 가운대 전대(田代) 발기인 대표의 식사와 조한구 서이면장의 경과보고, 신미(神尾) 시흥군수의 고사, 종문웅(안양금융조합 이사), 조희철(동아일보 시흥지국 기자), 엄기승(안양공보교 기성회장)의 축사에 이어 기녀들의 기무, 소인극등을 공연해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안양시장측에서는 이후로도 씨름대회.그네대회 등을 개최하여 시장의 번영을 도모하였는데,
일례로 1933년 8월 25일, 8월30일, 9월 4일 등 장날을 기해 안양역 광장에서 안양씨름대회를 개최했고, 같은해 음력 7월 30일 장날부터 추석날까지 매 장날마다 씨름대회를 개최해 1등에 황소1두, 2등에 광목 1필이 상품으로 수여되었다.
그러나 이곳이 저지대로 홍수가 나면 안양천의 범람으로 침수가 되기 일쑤였고, 더우기 1961년 11월 6일 안양4동으로 시장이 이전하자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가, 옛 태평방직 자리에 대단위 아파트(진흥아파트)가 들어서자 번성되기 시작하였다. 1929년에 안양지방에서는 최초로 전기가 송전(送電)된 곳이기도 하다.
시대동(市垈洞) 이란 마을 명칭은 안양시장이 있었다는 연유에 기인한 것이며, 일명 구시장(舊市場) 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앙동(中央洞) <안양1동>
북부동과 시대동(또는 남부동)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안양시가지 중앙에 있는 마을이므로 중앙동이라 칭하며, 이 마을을 기점으로 남쪽에 있는 마을이 南部洞, 북쪽에 있는 마을이 북부동(北部洞)이다. 중앙동이 오늘날처럼 안양의 중심지로 크게 번창되기는 조선조 제 22 대 임금인 정조가 1795년에 시흥현과 과천현 경계지점에 만안교를 가설한 후 화산능행의 노정(露程)을 과천-인덕원-수원에서 시흥(현 구로구 시흥 동)-안양-수원의 노정으로 바꾸면서 유래정 뒤(안양1동 674-67)에 안양행궁(安養行官)을 짓자 주변에 민가가 생기기 시작했고, 1905년 1월1일 경부선의 개통과 함께 안양역(安養驛)이 건설되자 교통의 요충지로 발달되어 1917년 7월에 호계 2동에 있던 서이면사무소가 안양1동사무소 옆으로(안양1동 674-271) 이전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안양금융조합과 안양연초조합 등이 속속 이 곳에 세워졌고, 광복후에는 시흥군청을 비롯하여 안양경찰서, 안양읍사무소등 공공기관이 들어서자 관가의 거리로 되었다가, 이들 기관이 1970년 대에 다른 곳으로 이전하자 뉴코리아호텔, 안양백화점, 그 밖에 상점과 유흥음식점이 붐벼 안양의 1번가로 자리를 굳혔다.
 
■석수동(石手洞.石水洞) <안양2동>
안양유원지 일대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 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석수동(果川郡 下西面 石手洞)이라 칭했다. 관악산과 삼성산에 둘러 쌓여있어 석공(石工)이 많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석수동(石手洞)이라 했으나, 1930년대 초에 마을 앞 하천(삼성천)에 석수동 수영장이 개설되면서 석공들이 자취를 감추자 석수동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효성의 다리로 불리워지고 있는 만안교(萬安橋)와 교비(橋碑)도 이 마을 석공들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양지동(陽地洞) <안양3동>
안양공고 주변에 위치한 마을로, 안양3동 1.2.3.4.6.25.26.27통에 속해 있다. 이 마을은 조선조 제 2대 정종의 7남인 수도군(守道君)의 증손 이공(지제부수) 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이래 원주 원씨 등이 세거했다. 이 마을 명칭 에 대하여 양지(陽地), (陽智), (陽知), (陽至)등 문헌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마을의 지세가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양지동(陽地洞)이라고 표기함이 옳다. 이곳은 1928년에 지금의 안양3동 부근에 안양산업사(安養産業社)란 안양 최초의 공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광복직전에는 아사이학교가 설립 되었고, 광복 직후에는 안양중학교(1948), 안양공고(1949)등 많은 학교가 운집되어 있어 안양교육의 요람지로 변모되었다. 양지동은 안양을 대표하는 시인 김대규(金大圭1942- )의 출생지이며, 방송작가 이서구(李瑞求1899-1981), 소설가 채만식(蔡萬植1904-1950), 시인.평론가 정귀영(鄭貴永 1917- ), 시인 성기조(1934- )등 문인들이 오랫동안 이곳에 살며 문학 활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채만식은 전북옥구 출신으로 <동아일보>.<조선일보>의 기자로 있으면서 1925년 단편 로 조선문단지의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뷰했다.
, , 등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는데, 1938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는 그의 대표작으로 현실을 비판하여, 풍류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는 평가 를 받고 있다. 채만식이 양지동에 이사와 살기 시작한 것은 1940년으로 그는 이해 6월 5일부터 8일까지와 6월 10일부터 11일까지 6일간 <매일신 보>에 안양복거기<安養卜居記>를 발표했다. 그 후 이듬해 3월에 양지동을 떠나 서울 광장리로 이사했다.
 
■장내동(墻內洞.澹安) <안양4동>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장내리라 칭했던 마을로, 진주 강씨, 전주 이씨, 원주 원씨 등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이곳은 밤나무, 뽕나무 등이 많았던 곳인데, 밤나무 울타리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내동 또는 담안 이라 부르고 있다. 1961년 11월 6일 안양1동 소재 시대동에 있던 안양시장이 이전되면서 상권이 형성됨과 동시에 중앙로의 개통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오늘날에는 안양최대의 번화가로 변모되었다.
 
■교하동(校下洞.敎化洞) <안양5동>
남부동과 주접동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구 한말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소나무가 무성했던 곳이나, 일제강점 후 왜병의 군사훈련장으로 되었다가, 1927년에 안양초등학교가 설립되자, 학교주변에 민가가 점차 늘기 시작했다. 이 마을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조선조 중엽에 이 마을에 어느 가난한 부부가 외아들과 함께 살았는데,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라 아들을 공부시킬 수 없게 되자, 그 아들이 서당 선생의 도움으로 무료로 글을 배워 노력 끝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그에게 높은 관직을 제수하려 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오직 이곳 마을에 향교를 짓고 우매한 백성을 가르칠 것을 임금에게 아뢰자, 이에 감탄한 임금이 이곳에 커다란 집을 지어주고 교화당(敎化堂)으로 명명해 주었는데, 그 후부터 이 주변의 마을을 교화동(敎化洞)으로 부르다가, 1927년 안양초등학교가 세워지자 학교 밑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교하동(校下洞) 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찬우물(冷泉洞) <안양5동>
주접동 북쪽으로 안양 5동 15통에 속한다. 충혼탑 아래 (안양5동 590-5)에 찬 샘물이 있어 그 인근을 찬우물 (冷泉洞)이라 칭하였다. 이 우물은 일제강점기만 해도 식수와 농업용수에 사용되었으며, 현재도 약수(식수)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 인구의 유입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직후 난민들이 찬우물 위쪽에 정착하고, 우물 아래의 농경지가 택지로 변모되면서부터 인데, 현재는 안양5동 사무소를 비롯하여, 장미 아파트, 건흥연립, 원불교, 현충탑, 장안사 등이 있다.
 
■소골안(小谷洞) <안양6동>
안양세무서에서 서쪽으로 수리산 계곡을 따라 형성된 마을로 광복 직 전까지만 해도 주접동 주민 3가구가 이주해 살던 한촌이었는데, 한국전쟁 직후 강원도 철원 등지의 난민들이 안양1동 소재 진흥아파트단지(구 태평 방직)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자 당시 시흥군 안양읍장 조한구(趙漢九)의 주선으로 이들을 집단 이주시키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곳 땅은 본래 서울출신 이해범(李海範)의 소유였는데, 이 토지를 조한구가 관리, 읍장으로 재직 중 소유주의 양해를 받아 이주를 성사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마을은 수리산의 작은 골짜기 안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소골안 (小谷洞)이라 칭하고 있는데, 일설에는 이곳이 예전에 나무와 숲이 우거져 골짜기안에서 소(牛)을 많이 기르던 곳이라 하여 소골안 (牛谷洞) 이라 했다고 하나, 지형상 소를 기를만한 곳이 못된다는 촌로들의 증언으로 보아 와전으로 생각된다. 1980년대부터 소곡(昭谷)으로 개칭해 사용하기도 한다.
(소곡새마을금고등) 이 마을 출신중에 시인 안진호(1944년생. 안양 상공회의소 근무)가 고향을 생각하며 쓴 소골안이란 시가 있다
 
■주접동(住接洞) <안양6동>
교하동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본래의 주접동은 현재의 안양6동, 안양7 동, 안양8동을 통칭했으나 도시화의 추세로 인구가 증가하자 분가 또는 분동으로 분리되자 현재는 안양상공회의소, 만안구청 주변을 일컫는다. 이 마을은 정조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정조는 양주 배봉산(拜峯山)에 있던 부왕(사도세자)의 묘를 1789년 수원 화산으로 천묘한 후, 처음에는 서울-과 천-인덕원-사근(현의왕시)을 잇는 노정을 택했다가, 1795년에 안양에 만안교를 가설한 후부터 서울-시흥(현 구로구 시흥동)을 잇는 시흥노정(또는 금천노정)으로 변경하고 아울러 안양 1동에 안양행궁을 짓고, 안양경찰서뒤 동아아파트 부근에 정각(亭閣또는 政閣)을 세워 능행과 환궁 때 잠시 쉬어 갔다고 한다. 그후부터 이 마을을 주접동(佳接洞) 이라 불렀다고 한다. 보통 주젭이라 칭하며, 나주 정씨, 삭녕 최씨, 상산 김씨, 함평 이씨, 전주 이씨등이 오래동안 세거한 마을로, 예전에는 안양변전소 부근을 아랫말, 만안구청 부근을 가운데말, 성문중학교 아래(동)를 내곡동, 중앙병원 부근을 명학동, 덕천국교부근을 벌터(坪村)라 각각 칭하였다.
광복 직전만 해도 이상의 5개 마을의 민가라야 불과 100여호에 지나지 않았으나, 1960년대(?) 중앙로가 개설된 후 시흥군청(전 만안구청,현재 만안여성복지회관 ), 안양시청, 안양상공회의소 등이 들어서면서 번창되기 시작하였다.
만안구청 남쪽은 창녕 성씨의 분묘가 많았는데 도시화로 이장 또는 화장되어 현재는 모두 택지로 조성되어 민가가 들어섰다. 이곳에 있던 묘 중 세상에 알려진 인물로 성후영(1571-1626)이 있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가 해를 당하자 대신 왜병의 칼을 맞아 장(腸)이 튀어나와 거의 사경(死境)에 이르렀을 때 부인 심씨의 구혈로 살아 일생을 폐업하고 두문불출하고 자취를감추어 스스로 서호처사(西虎處士)라 칭했다.
 
■덕천마을(德泉洞) <안양7동>
주접동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는 주접동과 한 마을이었다. 이곳에 사람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초에 시흥시 정왕동 출신인 원정상 (안양여고 원종면 선생의 증조부로, 묘가 안양중앙병원 뒤 에 있었다가 1990년 5월에 화성군 매송면으로 이장됨)이 분가를 하면서 지금의 안양7동 213에 정착했고, 이어 전주 이씨, 창령 성씨등이 세거하면서 취락으로 발달되었다. 이곳은 1960년대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농경지였었다.
예컨대, 명학 역과 주접지하도에 이르는 경부선 철도변은 아카시아 동산이었으며, 안양 냉동사(안양7동 196-15)자리는 농경지(논), 주식회사 삼풍(안양7동 199)자 리는 논과 포도밭, 대영모방주식회사(안양7동 196-12)자리는 잎두밭, 동화 약품공업주식회사(위치, 안양 7동 189)자리는 농장이었다.
이 마을이 오늘날처럼 번창하기 시작한 것은, 토박이 원종만(안양7동 138-32, 1932- . 원정상 증손)의 공로가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씨는 허허벌판인 이곳에 덕천슈퍼건물을 신축한 후, 7동새마을금고(안양7동 130-27)를 비롯하여 덕천국민학교(안양7동 192-5), 덕천우편 취급소 등의 기관과 유수의 공장을 유치하는데 공헌했다.
이 마을 본래의 이름은 넓은 벌판에 있다고 하여 벌터 (坪村)라 칭했는데, 1977년 7월 대홍수 때 안양천의 범람으로 많은 수재민이 발생하자 수재민촌(水災民村)으로 불리웠고, 이 해 9월에 안양의 시내버스(삼영운수)가 이 곳에 버스노선을 개설하면서 버스 안내판에 수재민촌으로 명기하자, 당시 이 마을의 새마을지도자였던 최돈세(崔燉世)가 중심이 되어 긴급 주민회의를 개최한 결과 수재민촌 이란 마을명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차 2세 교육을 위해서도 바람직스럽지 못하므로 차제에 새로운 마을명을 짓자는 제의가 많아, 큰 하천인 안양천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큰 德 자에 내 川 자를 취해 덕천마을 (德川洞)으로 명명했다가, 안양천의 오염으로 이미 지가 좋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1년만인 이듬 해(1978) 9월에 이곳 어린 이들이 샘솟듯이 씩씩하게 자라서 나라에 큰 일꾼이 되라 는 뜻으로 큰 德 자에 샘 천(泉) 자를 취해 덕천마을 (德泉洞)로 개칭하고 마을입구에 덕천마을 이란 표석을 설치했다.
 
■골안(谷內洞) <안양8동>
주접동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본래 주접동에 속한 마을이었으나 1962 년에 성결교신학교(안양동 산 1417-1),1971에 성문여중(안양동 산 117-1) 등이 설립되면서 급격한 인구의 증가로 주접동에서 분리되어 골안(谷內洞)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골안(谷內洞)이란 관모봉(성문여중 뒷산) 골짜기 안에 형성된 취락이란 뜻이다. 이곳엔 일찌기 전주 이씨와 여흥 민씨가 세거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명학동(鳴鶴洞) <안양8동>
주접동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평산 신씨, 함평 이씨 등이 배판 했다고 전해진다. 예전에는 명학국교 아래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다가 1974년 서울-수원간 전철개통과 동시에 명학역의 건설, 1976년의 명학국교(위치 안 양8동 349-1), 중앙병원(위치 안양8동 산 160) 등이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 인조 때 좌의정을 역임한 심기원(沈器遠1644)이 그의 부친 심간(沈諫)의 묘를 비산1동 수푸루지(林谷洞) 뒷산에 묘를 쓰려고 땅을 팠는데, 돌 밑에 학(鶴)이 두 마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한 마리는 양명고등학교 옆에 위치한 오미산(鳥尾山) 뒤로 날아갔고, 다른 한 마리는 안양경찰서와 명학국민학교 사이에 있는 바위에 날아와 앉더니 슬피 울고는 어디론가 날라갔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바위를 학이 울었던 바위라 하여 명학바위라 칭했고, 마을 이름도 바위 이름을 취해 명학동(鳴鶴洞) 이라 부른다고 한다.
 
■상록마을(常綠洞) <안양8동>
안양8동 11통 지역으로, 골안 동쪽에 위치해 있다. 예전에는 야산으로 돌이 많았던 곳인데 푸른 숲으로 둘러쌓인 마을이라 하여 상록마을 (常綠洞)이라 칭했다고 한다. 1990년 10월 경부터 성도, 대신, 일진, 한진, 삼성빌라 등이 들어서면서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이곳은 수리산 삼림욕장의 시발지가되며, 지대가 높아 선풍기가 없어도 한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을 만큼 최적의 주택지로 손꼽힌다.
 
■능골(陵谷) <안양9동>
현 안양서여자중학교(안양9동 1055-3) 뒷산이 흡사 陵의 활개같은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능골(陵谷)이라 칭한다. 일설에는 조선조 제21대 영조의 아들로, 속칭 뒤주대왕(사도세자)이 생전에 내가 죽으면 鳶을 띄워 떨어지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하며 연을 띄웠는데, 그 후 신하들이 연 떨어진 곳을 살피니 그 곳이 바로 능골이었다는 것인데, 그 후부터 능 후보지였다는 연유로 능골 (陵谷)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능골은 원주 변씨가 배판한 이래 채씨, 김씨등이 오랫동안 살아왔는데, 일제 강점기만 해도 불과 15호 남짓한 작은 촌락이었으나, 삼영하드보드 (안양3동774, 1946년 설립, 선창산업주식회사로 개칭), 삼진알미늄, 한국 아트제지 등 유수의 공장이 들어서자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이어 안양서여자중학교, 신안국민학교(안양3동 730, 1977년에 설립), 신안중학교(안양3동 728, 1980년에 설립) 등 교육기관이 속속 들어섰다. 1986년에는 삼진알미늄과 한국아트제지 자리에 프라자아파트가 신축되어 마을이 일신되었다. 보통 병목안을 웃능골이라 부르는데 반하여 이 마을을 일컬어 박능골이라 칭한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1979년 안양서여자중학교를 신축할 때 대리석으로 된 대형십자가가 출토된 것을 이 학교 화장실 부근에 묻었다고 한다.
 
■병목안(後頭尾洞) <안양9동>
새마을교에서 안양 채석장에 이르는 지역으로, 마을의 지세가 병목처럼 마을초입(새마을교)은 좁으나 마을에 들어서면 골(谷)이 깊고 넓다고 하여 병목안이라 부르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수리산 뒤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뒤띠미 (後頭尾洞)라 칭했고, 행정규역 명칭으로는 과천군 하서면 후두미동으로 불리웠다. 그런데 후두미동의 두 자는 豆와 頭를 함께 사용하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頭로 통일된 것으로 보이며, (1982)에는후둔(後屯)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두(頭)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병목안에 사람이 최초로 살기 시작한 것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촌로들의 증언과 이 곳에 소재한 묘소 등을 살펴보면, 대체로 조선조 숙종 년간에 진주 류씨에의해 세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인조년간에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류적(1597-1638)의 둘째 아들인 류명재(柳命才) (1623-1703)의 묘를 이곳에 쓴 후 부터인데, 류명재는 자가 유도(有道), 호가 사재(思齋) 로 통정대부에 올라 안산군수와 영천군수 및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후 81 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 인물이다.
진주류씨의 묘는 류명재외에 류명재의 아우 류명웅(柳命雄,1636-1722, 돈지돈령부사 역임. 1973년에 화장)을 비롯 하여 류명재의 큰 아들, 손자 및 조선조 영조 때의 화가인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처(晋州柳氏) 묘(후에 진천으로 이장) 등이 있었다.
진주류씨 이후 병목안에 세거한 성씨는 원주 원씨, 순창 조씨, 달성 서씨 등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병목안을 기점으로 서쪽지역을 새마을, 서남쪽 지역을 창박골, 남쪽지역을 담배촌이라 각각 칭한다.
구전에 따르면 이 마을에 진주 류씨가 부자로 살았는데, 날마다 찾아오는 食客으로 고민하고 있던 차, 하루는 시주하러 온 스님에게 그 방도를 물었다고 한다. 이에 스님이 이르기를 마을초임(새마을교)산밑에 묘를 쓰고 탑을 세우시오 라고 이른 후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가다고 한다.
그 후 류부자의 하인이나 가족이 죽으면 스님이 일러준대로 묘를 쓰고, 그 옆에 탑(돌탑)을 세웠다는 것인데 이렇게 정성을 들이자 과연 류부자 집에 찾아오던 손님(식객)의 발길이 끊겼을 뿐만 아니라, 진주 류씨가 일거에 패가했다는 것이다.
이는 병목안 동쪽에 있는 뉴골든아파트 뒷산이 풍수로 보아 배형국(舟形局)이므로 산 끝에다 묘와 돌탑 등 무거운 것을 쌓았으니 배가 뒤집혀 패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새마을교 옆에 있던 돌탑은 손을 대거나 치우면 병목안 주민들이 위해 를 당할지 모른다는 속설 때문에 그래도 있었다가, 한국전쟁 때 미군들에 의해 어디론가 실려갔고, 묘는 1980년대 초에 대부분 화장되었다. 마을 동남쪽에 있던 안양채석장은 1930년대 초에 개장되었다가 1989년에 폐장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차응설이 이곳에 야학을 세워 문맹퇴치에 헌신 하기도 하였다. 안양3동 15통.17통.18통.24통에 속해있는 병목안에서는, 일제 중엽까지도 창박골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7월 1일이면 창박골 앞산(약수 터 입구)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새마을 <안양9동>
병목안 주민들이 농사를 지을 농경지로 처음에는 신부골(新富谷)로 불리워 오다가 1969년에 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을로 개칭되었다. 시흥군 안양읍 당시 이곳에 안양 공설운동장 설치 계획을 세웠다가 협소하다 하여 신안양리 신촌(현 석수동 럭키아파트 자리)에 조성되었다.1988년에 양지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안골(安谷, 內谷) <안양9동>
담배촌 북서쪽으로 안양9동 13통에 속해 있으며, 청주 한씨와 하동 정씨의 세거지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도자기를 굽던 곳으로 마을의 지세가 아늑하고 물맛이 좋아 사람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안골 이라 칭한다고 한다. 또 수리산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안골 이 라 칭한다는 설도 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서울대 국문과 장덕순(張德順1922- )교수가 이곳 윤모씨의 주택과토지를 매입해 요지(窯地)를 설치했다.
 
■율목동(栗木洞) <안양9동>
안양 3동 11통.12통에 속해 있는 마을로 노적봉 밑에 위치해 있다. 밤 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율목동(栗木洞) 이라 칭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인 1933년과 1934년에는 동아일보사와 그 자매지인 신가정(현재의 여성동아 전신) 주최로 전국부인 밤줍기대회가 열릴만큼 밤의 명산지로 유 명했던 마을이다.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된 밤줍기대회 관련기사 중 그 일부를 전재한다 -풍부한 상품 재미있는 경기- "신동아사 신가정부 주최로 제1회 부인습률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하늘높고 바람맑은 요즈음 가을날 하루를 이용하여 우리 부녀들이 한 곳에 모여 유쾌한 시가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이번에 여는 이 습율대회는 다만 습율 그것을 목적함이 아니라 이렇게 부녀들만 여러 백만 모이는 가운데 서로 교제하고 친목하여 우리 부녀들의 기운을 돋우고 저 함에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날 하루를 유쾌히 놀게 하기 위하여 재미있는 유희도 있겠고, 또 습율기타 여러가지 쉬운 경기들이 있겠으며 그 위에 상품을 많이 준비하여 둔것만큼 이번 대회처럼 재미있는 모임이 없을 것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가정부인 되신이들은 이 대회에 참가하여 시원한 들판으로 나오셔서 집안에서 받은 오랜 동안의 피로를 이날 딱 하루에다 씻어버리시고 그리하여 다시 새 기운을 얻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래 대회의 날짜와 장소와 그밖에 여러가지 규정을 발표합니다"
[ 대 회 규 정 ] =
날 짜 : 10월 1일(일요일)
- 곳 : 안양 - 모일때: 용산역
- 모일시간 : 오전 8시 반
- 떠날시간 : 오전 9시 10분(안양에는 동 49분) -------- 이 하 생 략 ----------- 동아일보 1933.9.26
밤나무 숲이었던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2년 당시 시흥군 안양읍에서 강원도 평강(平康)등 난민들을 집단 이주 시키면서부터 이다. 1977년 7월 8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불과 4시간 동안 쏟아진 집중호우로 해발 110m의 노적봉이 산사태로 이 마을 주민 8가구 29명이 몰사(沒死)하였다.
 
■창박골(蒼岩洞) <안양9동>
안양9동 10통에 속한 마을로 병목안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마을 유래는 첫째, 이곳에 많은 바위색이 유독 푸른 심청색(深靑色)이라 하여 창박골(蒼岩洞)이라 불렀고 골짜기를 창암곡(蒼岩谷)으로 칭했다. 둘째, 안양예비군 교육장 서쪽에 큰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에 구멍이 뚫려있어 흡사 창(窓)과 같다하여 “창바위(窓岩)”라 불렀고 이 바위 안쪽을 "창암골" 바깥 골짜기를 "창박골(蒼外谷)" 이라 각각 칭했는데, 이곳에 민가가 생기면서 마을 명칭도 창박골(蒼外谷)로 되었으나 현재와 같이 창박골(蒼岩洞)으로 쓰이기 시작한 연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산 골짜기에 위치한 이곳은 1970년대 병목안, 담배촌 일대가 시민의 휴양지가 되면서 번창하기 시작했고 이어 1985년 석산연립과 이어 안양서여중이 들어서며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일제 강점기만 해도 마을에서는 음력 7월 1일이면 참박골 앞산(약수터입구)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구룡마을(九龍洞) <석수1동>
관악역 동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한국전쟁(1950) 직전까지만 해도 동국실업(석수동165, 1968년 설립) 주변에 10여 호의 민가가 있었고, 그 밖의 지역은 밤나무, 참나무 등 잡목이 우거져 있었다. 9.28 수복 후 당시 시흥군 에서 난민들을 정착 이주시킨 후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 그후 동국실업 등의 공장과 관악역(冠岳驛. 석수2동 241)이 생기면서 번창되기 시작했다. 구룡마을이란 지명은 석수1동 3통 노인회관 자리가 풍수로 보아 좌청룡(左靑龍)이 완연한 명당지지(明堂之地)라 하여 구룡목이라 칭한데서 연유하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이곳이 명당터라 조선시대 어느 왕비의 묘를 쓰려다가 조산이 약하다 하여 동구능에 썼다는 고사가 전해지고 있다.
 
■삼막골(三幕洞) <석수1동>
밀양박씨, 진주하씨, 청송심씨 등의 누대 세거지로, 진주 하씨의 집성촌 이라 하여 보통 하씨촌(河氏村) 으로 불리워오고 있다. 이 마을에 진주 하씨가 처음 살기 시작하기는 진주하씨 문효공파(文孝公派 세종때 영의정을 역임한 河演을 말함) 후손인 하우청(河禑淸1561-1622 호는 낙선재이며 의금부도사를 역임)의 묘를 이곳 뒷산에 쓴 후에 그의 후손들이 묘하에 세거하면서 부터이다.
삼막골 (三幕洞)이란 마을 명칭은 통일신라 시대의 고승인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윤필거사(尹弼居士)의 세 성인이 삼성산에서 수도하며 유유산업 부근에 제1막을 짓고, 기아의 집(구 안양관광호텔)뒤 수도사(修道寺석수1동 241-40)부근에 제2막을 짓고, 제 3막은 석수1동 산10-1에 지어 이를 삼막사(三幕寺)라 칭했는데, 그 후 그 아래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사찰명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이상의 세 성인이 이 마을에 처음 살아 각자 1막씩을 짓고 살았다 하여 삼막골(三幕洞)로 칭했다는 것이나, 옛 읍지나 지리지 등에 는 고려말엽 불교계를 대표하는 지공(?-1363), 나옹 (1320-1376), 무학 (1327-1405)이 삼성산에서 수도했다는 연유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하나 어느 설이 옳은 지는 알 수가 없다.
안양소년원과 구룡마을 사이에 위치 한 삼막골은 삼막천을 경계로 동쪽지역(안양소년원방향)을 웃말, 서쪽지역을 성재이라 각각 칭하고 있다.
이 마을은 구한말(1898-1904) 지방관리들의 탐학과 한국의 주권이 외세 (일본)에 의해 박탈되어 가자 분연히 일어서 농민운동을 주도한 하영홍이 태어난 곳이며, 1901년에는 하영흥이 선교활동을 할 만큼 일찌기 기독교가 전래되기도 하였다. 또 마을 어귀에는 하우청의 묘가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일과 10월 1일에 성재이에 있는 느티나무(마을에서는 아래 서낭할아버지로 통칭)와 웃말에 있는 향나무(웃말 서낭할머니로 통칭)앞에서 나무제를 지낸다.
 
■꽃챙이(花倉洞.串昌洞) <석수2동>
충훈부 동북쪽에 있다. 이곳은 조선조 말엽까지만 해도 미곡을 저장하는 창고와 철쭉밭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초에 광명시 가학동 공석골 출신 성만제(成萬濟)(1890-1959, 시흥시 미산동 구시미에 묘가 있음)씨가 이 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후 벗나무등을 식재하면서 각종 꽃이 재배되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 꽃과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하여 꽃챙이 (花倉洞)이라 칭하고 있다. 그런데 경기도 시흥군편에 곶창(串昌) 이라고 기재된 것으로 보아 예전엔 이곳 일대가 안양천변에 위치한 곳(串, 바다에 뽀죽하게 내민 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을 내에는 효종 때 예조(禮曹) 및 병조(兵曹)판서를 역임한 박서 (1602-1653)와 일제 강점기 만석꾼으로 자본가였던 김만식(金潤植)의 묘가 있다.
 
■벌터(坪村) <석수2동>
충훈부 북쪽에 위치했던 마을. 서쪽으로는 광명시 일직동 자경리와, 북쪽으로는 서울시 구로구 시흥동 박미마을과, 동쪽으로는 꽃챙이 마을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허허벌판 모래땅 위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벌터라 불렀는데, 일명 벌말(坪村)이라 칭하기도 하고, 또 일제 때는 밤의 명산지라 하여 밤골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이 마을에 최초로 세거한 성씨는 진주 하씨로 알려지고 있다.
석수1동 삼막골에 살던 진주 하씨 문효공(文孝公)하현(河演) 후손들이 이곳으로 분가를 하면서 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15호 남짓했던 이 마을은 임씨가 1호, 이씨가 1호이고 그 외는 모두 진주 하씨였었다. 벌터마을은 풍수로 보아 배형국(舟形局)이므로 우물을 파면 망한다는 속설이 있어 마을 내에는 우물을 파지 않고 식수는 안양천에서 물을 길어다 마셨다고 한다.
그 후 일제강점기 말엽에 죽어도 함께 죽자는 일념으로 마을 중앙에 우물을 파기시작하자 집집마다 우물을 팠다고 한다. 1960년대 초에 럭키아파트 일대에 있던 경기도립종축장이 이곳으로 이전하자 마을이 폐동되었는데, 마을 주민들은 마을 안에 우물을 파지 말아야 하는데 지신(地神)이 노해서 마을이 망했다는 말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기도립종축장은 이곳에 10여년간 있었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삼리 산 26-1로 이전하였고, 그 후 모 재단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개인에게 불하하여 현재는 황량한 벌판으로 있다.
폐동전만 해도 벌터 주민들은 해마다 음력 10월 1일이면 마을 중앙에 있던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정과 무해 및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堂祭)를 지냈다.
 
■신촌(新村) <석수2동>
관악역(冠岳驛) 서쪽으로, 만안교노변(萬安路 路邊) 옆에 있는 마을. 조선조 말엽까지도 대부분 농경지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새로 주택이 들어서자 신촌(新村) 이라 칭했다. 이곳은 1956년 7월에 수도영화주식회사(首都映畵株式會社)에 의해 대규모 촬영소인 안양촬영소 (대지 2만 2천여평)를 건설하여 한국의 허리우드로 불리워질 만큼 한 때는 한국영화의 메카 (Mecca)였었다. 천연광선이 충분하고 우량(雨量)이 적은 곳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이곳을 적지(適地)로 택하게 된 것이다.
신촌마을은 1956년 수도영화주식회사가 설치된 후, 안양예고 등의 교육 기관과1974년 관악전철역이 건설되자 관악아파트, 무림아파트, 산정연립 등이 건립되어 급격한 성장 추세를 보였다. 이곳에는 안양문화의 상징인 만안교가 1980년에 이전, 복원되었다.
 
■연현(鳶峴) <석수2동>
서울시 구로구 시흥동 박미마을과 접경지역으로 석수 전철역(석수동 422-3) 주변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초입인 안양육교 부근(서리재고개)이 풍수로 보아 솔개가 날개를 편 형세라 하여 연현(鳶峴) 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은 1950년대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농경지였으나 태양당인쇄(석수 동 433-1, 1968년 6월 28일 창립), 동아제약(석수동 410, 1972년 설립), 삼흥유지등의 공장과 석수역이 생기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안양 최북단에 위치한 마을이다.
 
■능골(陵谷) <박달2동>
범고개마을 서남쪽으로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新村)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5호 남짓한 작은 취락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초만 해도 안양에서 안산, 소래 등을 가자면 이곳 앞(범고개)을 거쳐야 했으므로 강도.도둑이 득실거렸다고 한다.
마을의 유래는 이 마을 남쪽 약 200m 지점의 논 가운데에 섬같이 생긴 큰 무덤이 있어 애능(兒陵)이라 칭한데서 기인하고 있는데, 이 무덤은 1988년에 김모씨에 의해 경지 정리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안양시 박달동에 속하나 생활은 이웃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 주민들과 함께 한다.
마을 초입에는 일우주철(박달동 753-11, 1989년에 설립)과 세원화학(박달동 753-9, 1972년에 설립) 등의 공장이 있고, 마을에서는 1970년대 까지 만 해도 범고개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2일에 범고개 요골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동수암(東秀岩) <박달2동>
작대들에 소재한 골짜기 중 가장 큰 골짜기에 있던 마을. 고려 때 창건된 동수암사(東秀岩寺)란 사찰이 있었는데, 사찰 주변에 민가가 생기면서 사찰명을 취해 동수암(東秀岩) 이라 칭한다고 한다.
일설에는 옛 시흥군 수암면 동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동수암 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은 파주 염씨와 광주 이씨 등 15호 남짓한 취락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곳 일대가 군용지에 편입되면서 폐동되자,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대부분 인근지역인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신촌)과 박달동, 능골로 분산 이주했다.
 
■미름물 <박달2동>
샛터말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는 대동우물을 미름물이라 했는데, 마을명도 우물명을 취해 미름물 이라 칭했다. 이 마을에 세거한 성씨는 최씨, 김해 김씨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5호 남짓한 작은 취락이었으나, 일제 때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이 들어서자 폐동 되었다. 이곳에는 엄성(1575-1628, 응교), 엄황(1580-1653, 영흥부사), 엄정구 (1605-1670, 한성좌윤)등 영월 엄씨 선대의 묘가 많았다.
 
■범고개(虎峴洞) <박달2동>
친목마을 남쪽으로, 박달로변에 위치해 있다. 범고개(虎峴)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고개이름을 취해 범고개 (虎峴洞)라 칭한다. 예전에는 이곳 남쪽 (현재 군용지에 편입됨)에 웃말(上村)이란 마을이 있었다가 어느 부자가 화재로 가산을 탕진하자 마을을 떠난데 이어, 마을 주민이 범에게 잡혀 죽자 사람 살 곳이 못된다고 하여 모두 지금의 위치로 이주, 정착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성씨는 나주 임씨와 안동 권씨로 알려지고 있으며, 번창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의 건설로 안양-안산간 도로가 개설된 후 1972년 동아유리공업주식회사(박달동 620-5)등을 시 발로 각종 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 이다. 마을에서는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음력 10월 2일에 요골초입에 있는 소나무 앞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붓골(筆洞.富谷) <박달2동>
공군아파트 서쪽에 있는 마을로, 능성 구씨가 배판한 이래 안동 권씨, 전주 이씨, 김해 김씨등이 세거해 40여호의 촌락을 이루다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軍用地)가 건설되면서 폐동되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농지 또한 비옥해 연연세세(年年歲歲) 풍년이 들자 인근의 사람들이 부자가 많이 사는 고을이라 하여 부골 (富谷)이라 불렀는데, 1930년대 일본인들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붓골 (筆洞)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는 임진왜란 때 충신으로 유명한 구만의 묘와 정려각(族閭閣)이 있었으나, 일제때 군용지에 편입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구만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다가 선조때(1591) 사화(士禍)로 사면되었고, 이듬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조랑(天曹郞)에 임명되었다. 이때 왜란을 피하기 위하여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시고 평안도 용만(龍灣)으로 향하던 중,왜병 수천명을 만나 적의 목을 무수히 베었으나 힘이 쇠하여져 적에게 잡힌 몸이 되었다.
그러나 적에게 잡혔어도 굴하지 않고 적을 꾸짖으니 왜병은 끝내 그를 죽이고 말았다. 다행히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유시와 남조가 이르기를 구만은 충성과 효성이 지극하니 그 충효는 가히 일월이 서로 빛을 다투는 것과 같도다 라고 상소하여 숙종 34 년(1708)에 정려(族閭)를 내려 이곳(당시의 지명은 금천현 박달리)에 비각을 세웠다.
 
■삼봉마을(三峯洞) <박달2동>
삼봉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1950년대 말부터 비닐하우스 재배가 시작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 예전에는 논 가운데에 큰 산소가 있어 일명 섬마을이라 불렀는데, 마을 주민들은 이 산소를 말무덤이라 칭했다.
1970년에 주식회사 삼애기업(박달동 604-1)과 삼신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샛터말(新其村) <박달2동>
조선 중엽에 영월 엄씨가 새로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마을로 그 후 달성 서씨, 김해 김씨 등이 세거했다. 일제강점기에 군용지가 건설되자 폐동 되었다. 동수암과 붓골 사이에 있었다.
 
■선녀골(仙女谷) <박달2동>
곤두레미고개 밑에 있던 마을로, 이곳 골짜기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수리산 낙맥인데다가 습한 곳이라 안개가 많이 생겨, 흡사 선녀가 사는 고을 같다하여 선녀골 (仙女谷)이라 칭했다.
선녀골은 조선조 태종(太宗)의 11남인 후령군(厚寧君)의 묘를 이곳에 쓴 후, 그의 후손들이 묘하에 세거 하면서부터 취락이 형성될 만큼 전주이씨령군파가 집성(20여호)을 이루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이 건설되면서 폐동되었고, 후령군의 묘는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으로 이장되었다.
 
■웃박달리(上博達里) <박달2동>
조선시대 박달동(리)에는 모두 12개의 자연취락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 웃박달리였다고 한다. 선녀골 동쪽에 있던 웃박달리는 파평윤씨, 김해 김씨 등 15여 호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가 건설되면서 폐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