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7)/ '홍사영-안양예술인장'

안양똑딱이 2017. 2. 18. 15:32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7)
‘안양예술인장’         

 

지난 11월9일 이른 아침 7시에 샘안양병원에서 ‘故홍사영화백 안양예술인장’이 안양예총 주관으로 거행되었다.
이는 안양 최초의 일로서, 지역 문화예술인들은 물론이요 지역사회 전반에 걸친 뜻 깊은 영결식이었다.
고인이 생존시에 위문을 마친 예총 및 미술협회 임원들은 상황의 위급성에 따라 작고시에 ‘안양예술인장’으로 치룰 것을 잠정 결정하고, 유족의 동의를 얻고 그대로 집행한 것이다.
한 마디로 고인이 안양지역사회에 남긴 예술적 공로에 대한 예우인 것이다.
故홍사영화백의 생전의 활동상을 여기 일일이 예거할 수는 없다.
고인은 국전 입선(1981) 이후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펼쳐 7회의 개인전, 40여회의 국내외 전시회 출품, 그리고 안양예총 회장을 비롯한 한국미협 이사, 경기미협 회장, 국제 현대수채화학회 부총재 등의 직책과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경기미술대전 대회장, 관악현대미술대전 운영위원장 등의 행사 및 심사를 통해 그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니, 경기문화상과 안양시민대상은 오히려 부족하다 할 것인 즉, 몇 년만 더 살았어도 그 이상의 영예가 주어질 즈음에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니, 안타깝고 아까워 애통한 마음 형언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고인을 각별히 기리게 되는 것은 위에서 짧게 소개한 활동상들도 있지만, 안양시청·비산사거리·안양민자 역사·평촌먹거리촌·자유공원·현충탑 등 10여개 처에 제작 설치한 조형물들이 고인의 발자취를 여실히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인은 떠났지만 그의 분신들은 안양의 곳곳에 서 있어, 그곳을 지날 때마다 우리는 ‘홍사영’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길 것이다.
안양의 예술인들이 모두 알고 있듯, 고인과 필자와의 관계는 일반성을 훨씬 뛰어 넘는다.
내가 대학생 때, 그림을 잘 그리는 중학생이 있다는 얘길 얼핏 들었고, 안양여고 교사로 재직시에 그가 고등학교 2학년 생으로 개인전을 열고부터 8년 차의 나이를 무시한 인간적·예술적 관계가 불붙듯 시작됐다.
당시에는 얼마 되지 않던 문인·미술가들과 함께 만나면 술이었고, 통금을 핑계로 밤을 지새우며 마시기가 일쑤였다.
그때부터 고인이 되기 전까지 나는 “사영이”, 그는 “형님”이라고 불렀다.
서로 시인이니 화백이니, 선생님이니 회장이니 하는 호칭들은 거추장스런 덧옷이었다.
그놈의 술 때문에 그가 너무 일찍 ‘고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같아 웬만큼 가슴이 아픈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의 일생에서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예술과 인생과 사랑을 논하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니, 고인도 그 추억 속에서 편히 잠들기를 바랄 뿐이다.
영결식이 진행되는 동안, 고인이 생전에 즐겨 부르던 애창곡들이 배경음으로 잔잔히 흘러 나왔다.
모두 서글픈 노래들이다.
그는 참 노래를 잘 했다.
특히 목소리가 감미로웠고, 성량 또한 넘쳐났다.
한창 때는 음반도 냈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본인은 실패한 노래들이라고 한사코 들려주기를 거부했다.
나는 매번 그의 노래를 듣는 것으로 술자리를 파하자고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그를 찾아갔을 때, 초점을 잃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알았다는 듯 손을 움적거리던 모습, 내가 손을 꽉 잡고 “대규 형님 왔다!”고 소리치니 한 줄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영 지워지지 않는다.
영결식장에서 조시(弔詩)를 낭송하며 솟구치는 울음을 참느라 몹시 힘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시 대신 한바탕 통곡을 할 걸 그랬나 싶다.
故안진호시인의 ‘안양문인협회장’때도 그랬지만, 마지막 가는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가장 애통스럽다는 것을 새삼 절감했다.
그는 안양 출생인 모든 예술가 중에서 가장 천부적이고 가장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너무나 빠른 영결식은 우리 모두의 불행이자 손실이로되 지역사회 최초의 ‘안양예술인장’이 다소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또한 ‘故홍사영화백 안양예술인장’을 통하여 모든 예술인들의 지역예술 활성화에 대한 의지가 새로워지고, 안양시나 안양시의회를 비롯한 지역인사들의 예술단체와 예술인들에 대한 관심이 배가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09년 11월 13일(금) 01:01  [안양시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