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안용승]그때 그 시절, 안양의 산업

안양똑딱이 2017. 2. 17. 01:41

경기 시흥군 안양읍 시절인 1950년대부터 1990년대 까지를 중심으로 현재의 안양 산업 변천사를 '그때 그 시절, 안양의 산업' 타이틀로 꼼꼼히 정리한 글입니다. 안양의 꽤 연륜있는 친목 모임인 '가로등회'에서 활동하는 안용승 님이 작성한 것으로 60-70년대 호황을 누렸던 안양의 산업사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주

 

     그때 그 시절, 안양의 산업

 <들머리>.
 예전 안양의 산업과 그에 관계된 일에 대하여 말하려 하면, 많은 시간 자료를 모으고, 이를 토대로 하여야 하나, 이전하거나 폐업하여 그 흔적도 알아보기 힘든 곳이 많고, 자료조차 찾아보기 어려워, 그리 할 형편이 못됨으로 기억에 의존하고, 부족하다 싶은 것은 알만 한 사람 등에게 물어가며 한 것이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수년 지나면 아무도 아는 이 없어 잊히어져 사라질, 삶에 관계된 일과 사연을 기록으로 남기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1973년 안양시로 승격되기 전의 안양읍은, 몇몇의 공장과 안양역 주변에 형성된 소규모 상가와 시장이 있는, 그리 많지 않은 주민이 사는, 농지가 많은 소도시로서,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였고, 그 다음으로 공장 등 산업체에 근무하는 주민들과, 이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상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극히 일부만이 서울 등 타처의 직장에 출퇴근하며 살았던 번잡하지 않은, 그러나 한적하지도 않은 살기 좋은 곳이었다.

1. 농업.
 1970년대 이전의 안양은 대부분이 농지였으며, 그중 대부분이 논이었고 산자락 아래에 밭이 조금 있었다.

가. 쌀농사.
 비산고가교부터 명학역을 지나 명학육교 구간의 동쪽은 농가 주택지를 제외하고는 탁 트인 벌판으로, 대부분이 논이었고, 이 논들은 안양천과 학의천을 끼고 있었으나 하천이 논보다 1~2m정도 낮았고, 당시에는 모터 펌프 등의 양수시설이 없어 이 하천의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여름철 멱감고 빨래하던, 깨끗한 고운 모래가 깔린, 이 안양천의 맑은 물이, 늘어난 공장들로 인한  하천오염으로, 1970년대 초부터 냄새나는 썩은 물로 변하였고1), 따라서 생활용수는 물론이고 농업용수로도 사용 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1). 저수지와 방죽.
 의왕면 청계리에 조성된 저수지(흥안농지개량조합)의 물로 다라니벌(현 동안구 평촌 신도시 일원)과 범계(호계동) 등의 논은 농업용수가 부족하지 않았고, 또 범계 방죽말 앞에 만들어 놓은 방죽(현 경수 1번 국도에 인접하여 귀인마을 쪽으로 있던 방죽, 겨울에 스케이트장으로 이용)의 물이 범계의 안말 방죽말 등의 논에 모내기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수리조합에서 받던 물세가 비싸 수리안전답인 이 지역의 논이 오히려 수리조합 구역외의 다른 곳보다 싼값에 거래됐다고 한다.
(2). 실개천
(가). 찬우물(안양 5동 현충탑 바로 아래에 있는 샘)에서 사철 마르지 않는 충분한 물이 샘솟아 안양 5동 일원의 주민이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하였고, 그 물이 아래쪽으로 이어져 흐르며 현 남부시장을 지나 안양천에 이르는 실개천이 되어 그 근방의 논에 충분한 용수를 공급하였다.
(나). 닭장개울(수리산에서 시작하여 가축위생연구소 담을 끼고 안양천에 이르는 실개천으로 현재 복개되어 도로가 됨)이란 마르지 않는 실개천이 있어 주제비(안양 6동 수의과학연구소 터부터 상공회의소 부근과 그 일대)일원의 농업용수와 생활용수로 쓰여 졌다.
(다). 수암천은 병목안에서 시작하여 안양역 부근을 지나 안양천에 이르는 비교적 폭이 큰 하천이었으나 그 바닥이 자갈과 비교적 큰 돌로 형성된, 돌 아래로 물이 흐르는 천정천으로서 갈수기에는 물이 흐르지 않아 용수 사용이 제한적이었고 또한 상류는 산지이며 그 아래쪽은 안양중•안양공고, 금성방직과 삼덕제지로 이어지고 그 부근이 주거지와 점포 등이 있는 곳이므로 농업용수로 사용될 일이 없었다.

* 그러므로 안양지역의 논농사는 극히 일부만 천수답이었고 그런 천수답에도 군데군데 샘이나는 웅덩이가 있어 비교적 큰 물 부족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따라서 필자가 안양중학교 재학시절인 1960년~1962년 3년간 매년 모내기철에 미군트럭 타고 수암면과 동면 독산동(현 서울 금천구)까지 양동이나 대야 들고 물 푸러 다니고, 마른 논에 호미모 내러 다녔지만 단 한 번도 안양에서는 그럴 일이 없었다.
다만 식목일 전후하여 수리산에 나무 심으러 다녔을 뿐이다.
(3). 정미소는 구시장 쪽으로 철도 건널목 지나 바로 옆에 삼광정미소가 있었고 , 안양역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인 대영장 카바레가 있던 자리에 삼창정미소가 있었으며, 이 정미소들은 정부양곡을 도정하고 보관하는 영단(營團)방앗간으로 아주 큰 곳이었다.

* 1960년대까지는 안양에서 생산된 쌀이 안양의 소비를 충족하고 남아 서울 등 타처로 팔려나갔었다.

나. 밭농사.
 안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로, 산자락 아래가 대부분 밭이어서 밭농사를 지었으며, 논 옆의 조금 높은 부분과 주거지 부근도 밭으로 이용되었다.
 각종 채소는 물론이고 보리 수수 콩 좁쌀 등의 여러 잡곡과 각종 채소가 경작되어 본격적인 국민주택건설이 시작되기 전인 1970년대 초까지는 안양의 수요를 충분히 공급하고 타처로 팔려갔었다.
 이에 따라 야채 전문 도매시장인 남부시장이 1960년경에 조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 포도농사.
 안양의 농업을 말하며 포도농사를 빼놓을 수는 없다.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형태의 지형과 바람이 적고 온도차가 큰 안양기후와 석회성분이 많은 알카리성 토질이, 당도 높은 명품포도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2)
 포도농사는 왜정치하에 시작되어 계속 포도농사가 늘어갔다.
1970년까지만 해도 안양하면 포도였고, 포도하면 안양이라고 할 만큼 안양은 전국 유일의 포도 명산지였다.
 당시에는 ‘대구 사과’ ‘나주 배’ ‘소사 복숭아’ ‘오류동 참외’ 등과 함께 ‘안양 포도’는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현 안양 7동 동화약품 과 덕천초등학교 부근에 만여 평에 이르는 안양에서 제일 큰 포도밭(권동일 포도밭)이 있었고, 1960년대 초부터 포도재배가 늘어나 재배면적이 27만여 평3)에 달했으며, 한여름 수도권에서 가장 물 좋고 경치 좋기로 유명한 안양유원지에 놀러오는 유객들 또한 포도는 꼭 맛보고 싸가지고 가야하는 명품이었으므로 안양에서 생산된 포도가 안양에서 소비되기도 바빴다고 한다.
 한여름 공휴일 포도밭 원두막에는 포도 사려는 손님이 넘쳤다.

* 포도서리.
 그 시절 필자는 단 한 번도 포도를 사 먹은 적 이 없다.
가난한 탓에 돈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집 근처의 포도밭에서 서리해 먹었기 때문이다.
한밤에 까만 ‘빤스’만 입고 들어가면 바로 앞에서도 안보여, 원두막에 주인이 지켜도 있으나마나였다. 잔뜩 따가지고 나와 망보던 동무놈들과 낄낄거리며 신나게 먹던 생각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깜깜한데서 몰래 딴 탓에 덜 익은 퍼런 것이 태반이었지만 그래도 맛있게 모두 먹어치웠다.
‘훔쳐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는 말이 다시금 생각난다.            
 포도서리!, 지금 같으면 큰일 날, 잡혀갈 일이겠지만, 어른들도 한때 해보던 짓이라 그저 그러려니 하고 크게 야단치지 않았던, 재수 없게 들켜서 혼쭐나는 일이 더러 있어도, 아이들에겐 그냥 재미난 장난이자 놀이에 불과하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미루어 보건대 그 무렵 안양에서 살던 남자아이들치고 포도서리 한 번도 안 해본 골샌님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4)
 집 주변이 모두 포도밭이었던 안양 5동에서 살았던 탓에, 남보다 포도서리를 많이 해먹은 나는 지금도 가위 없이 맨손으로 포도를 딸 수 있다.
 그러나 그 유명하던 포도밭은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국민주택 건설과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로 점차 자취를 감추고, 추억의 단편으로만 남게 되었다.

* 이 명품 포도를 이용한 포도주 공장이 1965년에 현 안양 6동 코암호텔 지경에  세워져 생산을 하였으나 1968년 5월24일 ‘안양포도주’에서 메타놀이 검출되었다는 신문보도5)가 있었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고 폐업하였다.6)
 당시는 포도에 설탕 듬뿍 넣고 소주 부어 담가 먹던 터라 그 포도주가 우리 입맛에 맞지 않아서였는지, 신문에 메타놀 검출 보도 후 경영상의 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정작 그 당시 안양에서 살던 사람 중 그 포도주 맛은 고사하고 그 병도 보았다는 이가 거의 없다.
 다만 그 시절을 산 사람들이 다 그랬듯이 막걸리와 30도짜리 꺼먹병 4홉들이 소주, 그리고 도라지위스키만 보고 먹었을 뿐이다. 간혹 석수동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죠니워커’란 양주를 맛보는 사치를 누리기도 하였지만---.

2. 축산업.
 1960년대 이전에는 우리나라, 특히 안양에는 축산업이라 할 만 한 것이 없었다.
다만 농사짓는 일소인 한우를, 그것도 농토가 많은 잘사는 집에만 농우가 있었고, 그 소가 더러 팔려나가 쇠고기가 되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돼지도 그저 동네에서 겨우 한두 집에서 한두 마리, 뜨물 걷어다가 잇겨(쌀겨. 가난하던 그 시절에는 보릿겨도 식량에 보탬으로 먹어 짐승차례가 가지 않았고, 깔깔해 못 먹는 쌀겨만 짐승을 주었음) 겨우 한 웅큼 넣어 먹여 길렀으니 말이다.
 닭 또한 돼지와 마찬가지로 동네에서 한두 집이 닭 몇 마리 기르며7) 달걀 내어 한 꾸러미 되면 장에 내다 팔아 등잔불 석유 값에 보탤 정도였다(1960년대 이전에는 전깃불 들어오는 집이 별로 없었다. 안양 5동의 우리집도 1962년에야 겨우 전기를 달았다).

가. 가축위생연구소.
 1942년 5월 가축위생연구소 안양지소가 설립되었고, 1949년 1월 부산에 있던 가축위생연구소가 안양으로 이전하였다.8)
 이 가축위생연구소는 우리나라의 축산업 발전에 지대한 공적을 쌓았으며 안양의 축산에도 기여를 했다.
 가축위생연구소는 1994년 12월 수의과학연구소로 명칭이 변경되고 1998년 8월1일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이 되었다가 2011년 6월15일 농림수산검역검사본부가 된 후 2013년 3월23일 농림축산검역본부로 바뀌었고,9) 2016년 5월 경북 김천으로 이전10)했으며 그 부지는 안양시에서 매입하였다.
 가축위생연구소와, 바로 앞에 연이어 있던 임업시험장에는 왜정 때부터 심어졌던 벚나무가 많으며 그래서 버찌가 까맣게 익는 6월에는 버찌를 따 먹으러 몰려든 아이들과 이를 말리려는 직원들 사이에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 양계.
 1956년경 가축위생연구소를 통해, 이곳에서 부화한 병아리가 안양에 소량이나마 공급되었고, 이에 비로소 양계산업이 시작되었다.
 가축연구소 부근의 서너 집에서 시작되어 이십여 집이 닭을 길렀었다.
 그래서 가축연구소 담 옆을 흐르는 실개천이 닭장개울로 불리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보잘 것 없는 아주 소규모로, 이삼십 마리에 불과한 병아리를, 가는 철망으로 울타리치고, 수수깡이나 싸리가지로 벽 만들고 이엉으로 싸 덮고 지붕지어 만든 조그만 양계장이었고 육계 아닌 산란계위주였지만, 이것이 우리나리 양계산업의 태동이었고, 안양의 양계장이 그 효시라고 생각한다.
 당시 사료는 잇겨, 보릿겨, 밀기울 등을 구해 들풀을 썰어 섞어 먹였고, 여름철에는 닭 잘 크고 알 잘 낳으라고 개구리를 구해 삶아서 그 국물에 모이를 섞어 먹이기도 하였다.
당시 필자는 공휴일이나 방학 때, 논틀밭틀 돌아다니며 개구리를 잡아 두레박깡통 한 통에 20환(당시 눈깔사탕 4개값, 현 2원)에 팔았었다.
 하루 종일 부지런히 잡아야 겨우 한 깡통 채우는데, 조금 모자라면 양계장에서 그 값을 후려쳐, 깡통을 다 못 채운 하루는, 동무 몇 놈과 밀대 뽑아 개구리 똥구멍으로 바람을 잔뜩 불어 넣고 속박아 팔아먹었었고, 계속 그짓 하다, 이를 알아챈 양계장 주인이 깡통을 흔들어 바람 빠지게 하는 바람에 오히려 손해 본 경우도 있었다.

 이후 1970년대 초에 도시화로 가축위생연구소 부근의 양계장은 없어지고, 변두리 지역으로 밀려났으며, 평촌 신도시 개발 직전인 1980년대 중반에 평촌 벌말지역에 비닐하우스 형태의, 당시로선 작지 않은 천여마리 규모의 양계장이 십여 개소 있었으나 1989년 신도시개발과 함께 사라졌다.

다. 낙농.
 우리나라엔 낙농이란 산업이 없었다.
옛날엔 우유로 죽을 쑤어 낙죽(酪粥)이라 하여 대궐이나 반가에서 먹기도 하였지만, 철종 임금께서 ‘송아지가 먹을 우유를 사람이 뺏어 먹으면 송아지가 불쌍하여 어찌하냐’고 하며 사람이 우유 먹는 것을 금하여, 그래서 그때부터 낙농이 없어졌다는 설이 있다.

 안양의 낙농은 1954년경 서면 박달리(1963년 1월1일 안양읍으로 편입)에서 신관초(작고)씨가 서너 마리의 젖소로 시작한 것이 최초11)이며 이후 조금씩 농가와 사육두수가 늘어갔다.
 1960년대 초반 안양 6동 철도건널목(현 주접지하차도)옆에서 수십 마리의 젖소를 기르던 구자O씨가 마침 지나가던 열차에 뛰어든 소를 구하려다 사고로 숨진 일도 있었다.
 1960년대의 낙농은 소를 하천 변의 풀밭으로 몰고 다니며 풀을 뜯기기도 하는 방법으로 사육하였고, 우유 처리 및 가공시설이 없어 직접 우유를 소비자에게 배달하여 판매하기도 하였다.12)
 1970년대 초에는 병목안, 관양동, 충훈부 등 변두리 지역에서 이삼십 마리의 젖소를 기르는 낙농가가 수십여 호 있었으나 1974년경부터 시작된 안양의 급속한 도시화로 점차 밀려나다 1980년 이후론 인근의 화성, 안산 등으로 이전되거나 폐업하여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 우유가루.
 1960년 이전에는 우유라는 것은 없었으며, 1954년경부터 미국에서 원조 받은 우유가루(분유를 당시 그렇게 불렀다)를 넣고 쑨 우유죽을 담안의 천주교회(현 안양 4동 중앙성당)에서 나누어주었고(많은 사람이 몰려와 미리 번호표를 주고), 그 바로 후부터 초등학교에서 우유가루배급을 주었는데, 그것을 어찌 먹어야하는지 아는 이가 없어, 당시 늘 배고프던 아이들이 집에 가며 그 가루를 그대로 퍼먹기도 하고, 집에서도 식구들이 둘러 않아 그냥 먹었는데, 창자에 기름기라곤 전혀 없는 뱃속에서 이를 받을 리 없어 똥질에 배 아프고, 도저히 그대로 먹을 수 없어서 궁리 끝에, 물에 개어 파 썰어 넣고 간하여 달걀찜 하듯 해서 밥반찬 하기도 하고, 반죽하여 밥할 때 밥 위에 올려놓고 쪄서 주전주리로 먹기도 하였었다.
 배탈로 결석하는 아이들이 생기자, 얼마 후부터 학교에서 우유가루를 그대로 먹지 말라고 교육도 하였고, 끓여주어 학교에서 먹게 하기도 하였다.

(2). 우유.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유는 몸을 보하기 위하여 먹는, 가게에서 살 수 없는, 서민은 못 마시는 비싼 사치 음료였으므로 부자들은 매일 집으로 배달시켜 먹었으나, 보통사람들은 어쩌다 다방에서 자장면 한 그릇 값인 커피보다 더 비싼 돈 내고 우유 한잔(자장면 30원, 커피 30원, 우유 40원, 갈비탕 80원)시켜 천천히 음미하며 마셨을 뿐이다.

다. 양돈.
 1960년대 이전엔 한두 마리 뜨물 걷어다 먹이는 구정물양돈이 동네에 한두 집 있었을 뿐13)이라 양돈사업이라고 할 만한 농장이 없었고, 1970년대엔 주변의 공장과 식당 등에서 나오는 잔반을 사료로 하는 십여 마리 정도의 소규모 부산물부업양돈을 하는 이가 변두리지역에 더러 있었을 뿐이며, 1980년 이후에 평촌동 벌말지역의 비닐하우스에서 철재 등으로 칸막이하고 백여 두의 돼지를 기르는 생계형양돈장이 양계장과 뒤섞여 십여 곳 있었으나 1989년 평촌 신도시 개발이 시작되며 없어졌다.

 필자도 1979년 초부터 백여 두 규모로 양돈을 안산 목감리에서 시작하였으나 1981년에 화성 남양으로 확장 이전하여 천여 두 이상의 돼지를 키웠다.
이미 안양 근교도 양돈업을 하기 어려운 여건이 되어서 이다.

* 종축장.
 만안초등학교가 개교하기 전, 그 자리를 포함해서 만안로 큰길 건너편 안양2동(북부동) 일원에 경기도 종축장(1946년 6월18일 설립)이 있었으나 1960년 경 석수동 꼬챙이골(지금의 하수종말처리장 앞 하천 건너 편)로 이전하였고, 그 수년 뒤에 경기도 광주로 이전하였다.14)
 그러나 이 종축장은, 이곳에서 돼지새끼 몇 마리 분양받아 기르는 사람이 더러 있었을 뿐, 안양지역의 축산업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3. 임업.
가. 임업시험장.
 안양에는 1939년부터 임업시험장(1971년 1월 12일 오산으로 이전)15)이 있었기에 임업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현 상공회의소와 만안구청을 포함한 안양6동 일원(당시 지명 주제비)에 임업시험장의 시험림과 묘포가 있었고, 시험림에는 각종 수목이 망라되어 있어 임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찾아온 자유의 물결에 따른 방임으로 인한 벌목, 그리고 6•25 사변으로 인한 수목의 파괴, 땔감을 오로지 수목에만 의지 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으로, 울창하던 안양의 산지는 동란(動亂)이후 민둥산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 벌거숭이 민둥산을 다시 푸르게 한데는 임업시험장의 역할과 공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식목을 하고 가꾸는 것은 당시 안양읍민인 주민의 힘이었지만 묘목을 공급하고 그 식재기술을 알려주며, 그 중심에 선 것은 임업시험장이었기 때문이다.
 매년 식목일을 전후하여 학생을 중심으로 읍민이 총동원(당시 의무적인 부역으로 동원)되어 나무를 심고 가꾼 결과가 오늘의 울창한 삼림이다.
 다만 한 가지, 사방과 산림녹화만을 우선으로 생각하여 아카시아와 리기다소나무와 같은 별로 쓰임새 없는 수종을 많이 심고 키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 서울대학교 관악수목원.
 석수동 안양유원지 상류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관악수목원은 1967년 10월21일 설치되어 우리나라 자생 식물 및 북반구 식물을 수집, 증식, 보전, 전시, 연구하며 관련 지식 및 정보의 축적과 교육, 그리고 국내외 관련 기관과의 교류, 협력을 추구하고 있다.
 1972년부터 1975년까지 초등학교 교과서에 있는 식물의 표본 7만여 점을 만들어 700여 초등학교에 배부하기도 하였다.16)
 1977년 7월8일 432mm의 폭우가 단시간에 한꺼번에 쏟아져 안양일대가 큰 수해를 입을 때 이 수목원도 식재수목 모두가 쓸려가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곧바로 공사 착공하여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원상회복하였다.
 그 경관이 수려하여 안양은 물론이고 인근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산보 겸 견학을 오고 있다.

4. 상업.
가. 방물장수, 등짐장수. 엿장수.
 1960년대 중반까지 만해도 안양엔 가가호호 방문하며 참빗, 얼레비, 바늘과 실, 화장품, 옷가지 등 소소한 물건을 보따리에 담아가지고 다니는 방물장수가 있었고, 새우젓, 미역, 등을 파는 도부꾼인 등짐장수와 쇠붙이, 헌 고무신, 등 각종고물을 엿과 바꾸어주는 엿장수, 그리고 떡을 해서 함지에  이고 다니며 파는 떡장수가 다녔다.
 당시에는 교통편이라곤 경부선 철도, 일번 국도를 지나는 시외버스와 안양에서 과천을 오가는 ‘과천버스’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과천 버스‘는 그야말로 ’똥차‘라 언덕에선 모두 내려 밀고 올라가는 형편이었고, 그나마 툭하면 고장으로 세워놓는 바람에 그 버스타기를 아예 생각도 않는 그런 것이라, 인덕원, 일동리(관양동), 이동리(평촌), 범계(호계리)와 청계 등, 먼 곳에 사는 주민들이 자잘한 물건 사러, 걸어서 안양장에 올수 없는 터라 이 도부장수들이 장사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장사꾼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인구가 늘며 동네마다 구멍가게가 하나씩 들어서며 볼 수 없게 되었다.
 지금도 눈을 감고 상념에 잠기면, 그시절 우리집에서 재워주어 묵어가던 늙수그레한 방물장수아주머니의 모습이 떠오르고, ‘새젓사려 새젓, 조개젓사려 조개젓’ 새우젓장수의 목소리, 그리고 ‘짤강짤강’ 엿장수 가위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 구시장.
 1960년대 이전에는 동네마다 구멍가게도 거의 없었고, 그래서 당시 시대동이라 하던 현 안양1동의 안양시장이 당시 안양 유일의 시장이며, 안양 주민들이 생필품을 구입 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구군포 사거리(현 호계고가차도 남쪽에 있는 사거리)에 서던 군포장이 1925년 을축 대홍수로 떠내려가자 군포장의 상권을 흡수하여, 1926년에 5일, 10일 정기시장으로 개장되었으며 1929년 안양에서 최초로 전기가 들어간 곳이기도 하다.17)
 1940년 안양장으로 개칭되어 불리었고 1961년 안양4동으로 시장이 이전된 뒤 구시장으로 불리었으나 중앙시장 개장18) 전까지 군포, 의왕, 과천, 안산 등에서도 장보러 오는, 농축산물과 포목, 일용잡화까지, 거의 모든 필수품을 파는 당시로서는 아주 큰 시장이었다.
안양천 쪽으로 우시장도 함께 있었다.
 6・25동란, 1・4후퇴를 겪고, 1951년 3월16일 서울을 재 수복하고 난지 얼마 후부터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음식찌꺼기를 받아 끓인 ‘꿀꿀이죽’을 이 시장에서 팔았었으며, 난리통에 헐벗고 주린 배를 이것으로 채우기도 하였고, 별미라며 일부러 사다 먹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시장이 안양4동으로 이전하여 개장된 후 구시장은 점차 쇠퇴되어 1960년대 말경에  없어지고 슬럼화 되다가 1997년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시작되어 옛 모습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이후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다. 중앙시장.
 1960년 9월 구시장 화재 후 정책적으로 이전하여 1961년 11월19) 개장된 전통시장으로 농수산물과 포목, 공산품 등을 총 망라한 안양 최대의 시장이다.
 개장당시보다 시장의 면적과 규모가 3~4배 이상 확장되었으며, 한마디로 말하면 ‘없는 것 빼고 다 살 수 있다’고 할 만큼, 다른 시장에서는 보기 어려운 소쿠리와 대바구니, 키, 어레미, 등 다양한 품목을 살 수 있으며, 순대곱창골목 등 맛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서울의 여느 큰 시장에 비하여 빠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큰 시장이다.

라. 남부시장.
 1960년경 처음엔 몇 개 안되는 도매전문상회로 시작하였으나, 곁자리로 불리던, 물건 받아 상회 앞에 자리 깔고 장사하는 소매인이 생기고 늘어나며, 도・소매를 같이하는 시장으로 커갔다. 이에 더불어 물건을 날라주고 배달하는 리어카꾼도 있었고, 그래서 남부시장은 어려운 사람들이 벌어먹는 서민의 일터이기도 했다.
 1979년 9월에 석수동에 청과물도매시장20)을 새로 조성하고 이전하고자하는 세력이 있었으나 석수시장은 청과물도매시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였다.
 남부시장은 개장이후 1997년 9월6일 동안구 평촌동에 안양농수산물도매시장이 개장21)되기 전까지 안양은 물론 군포, 의왕, 과천, 화성, 안산 등의 농산물을 도•소매하던 곳이었다.
 평촌동에 경매장과 같이 있는, 도매시장 개장 후, 그 세가 많이 꺽이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청과물도매시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반면에 농수산물, 식자재와 농자재 등을 도소매하는 점포가 늘어나며 점차 활기를 띠어가고 있다.

마. 안양농수산물도매시장.
 1997년 개장한 경매장과 같이 있는 안양 최대의 농수산물도매시장으로 청과물과 수산물을 도・소매하며, 회센터와 대형주차장을 갖춘 곳이다.
 이 시장 개장이후 김장철 남부시장을 찾던 고객이, 주차 등 모든 것이 편한 이곳으로 많이 발길을 돌리고 있다.

바. 이외에도 박달시장, 청원시장, 석수시장, 비산시장, 명학시장, 호계시장, 관양종합시장, 등이 있으나 1990년대 들어서 개점한 대형매장들에 밀리며 힘겨운 경쟁을 하고 있다.

사. 안양1번가.
 안양1번가는 안양읍 이전의 서이면사무소부터 시작하여 1973년 안양읍이 시로 승격된 뒤에도 수년 후까지 시흥군청, 안양읍사무소, 안양경찰서, 안양소방서가 한 골목에 마주보고 있었던 곳으로, 그 위치가 안양의 중심부로, 음식점, 다방, 술집, 숙박업소 등이 몰려있는 안양의 번화가였다.
 평촌 신도시 건설(1989년~1995년)후 그 세가 평촌의 중심상가에 잠시 밀리기도 하였지만, 의류, 잡화, 장신구 등과 음식점, 술집 등이 함께 어우러져있는 등, 업종의 다양화로 현재까지 여전히 안양의 중심가이고, 젊은이의 거리가 되어 있다.

(1). 안양백화점.
 1976년 안양읍사무소자리에 신축 개점한 안양 최초의 백화점22)이었으나 그 규모가 작고 당시만 해도 안양이 소도시이었으므로 수년 후에 폐업하고 일반 임대상가로 바뀌었다.
(2). 본백화점.
 안양역 바로 앞에 있던 미륵당이라 불리던 용화사의 고목이 벼락을 맞아 불타자, 불길하다 하여 옮긴 뒤, 호계동으로 또다시 이전하기 전까지 있던 그 절터에 신축하고, 1983년 11월22일 개점23)한, 그리 크지 않은 당시 안양 유일의 백화점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에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이후 현재와 같이 의원과 판매점 등이 같이 입주한 임대상가로 바뀌었다.
(3). 일번가 지하쇼핑몰.
 동덕개발주식회사(대표 정덕한)에서 20년 사용조건부 투자하기로 안양시와 계약하고 시공하여 1978년 6월24) 중앙시장 초입부터 삼원극장(현 중앙사거리) 앞까지의 중앙지하상가가 먼저 준공되고, 이어서 같은 조건으로 안양역전지하상가(중앙지하상가와 연결하여 안양역까지의 구간)가 1982년 6월 준공되었다.
 이후 2004년 10월 보수 보강공사 착공하여 2006년 준공하였다.
준공 후, 인터넷을 통한 시민대상 공모와 공무원들의 의견수렴을 통해 ‘일번가 지하쇼핑몰’로 명칭 변경하였다.25)
 안양역과 연결되어 안양 중심가를 지나는, 유동인구가 아주 많은 곳으로 의류, 잡화, 장신구, 구두, 휴대전화 등 다양한 업종의 점포가 영업하고 있다.
(4). 벽산쇼핑센터.
 고려석면고무공업주식회사 터에 1985년 12월 백화점과 유사한 영업방식을 취하며 개점하였으나 영업부진과 모기업인 벽산그룹의 구조조정 일환으로 폐업하고 1997년 12월 2001아웃렛으로 바뀌어 다시 개점하였다.26)

아. 1990년대 들어서면서 백화점과 쇼핑센터가 유통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영업형태로 부상하게 되며, 이 기간 중에 1994년 한양프라자 평촌점, 건영동아상가, 뉴코아 평촌점, 뉴코아백화점 등 4개의 백화점 및 쇼핑센터가 새롭게 개설되었다. 이들 백화점과 쇼핑센터는 1989년 수도권 주택 200만호 건설계획의 일환으로 건설된 평촌 신도시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1990년대 후반에는 1997년 이마트, 1998년 킴스아웃렛, 1999년 까르프안양하이퍼마켓 등 대형할인점이 개점되었다.27)

차. 동네 골목상권.
 1990년대 이후, 이마트 등 대형매장의 등장과 세븐일레븐, 훼미리마트 등 외국계 편의점과 국내 편의점 등의 24시간 영업과 홈쇼핑, 인터넷쇼핑 등의 출현으로 동네 골목상권은 침식되어 무너지고 있으며, 동네 골목에서 정육점, 구멍가게 등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5. 관광•숙박업.
가. 안양유원지.
 안양은 수려한 경관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유수풀장이 있는 안양유원지가 있어 이곳이 관광의 중심지였다.
 안양유원지의 유수풀장은 1932년 6월18일에 건설28)되었으며 이후 1969년 6월 국민관광단지로 지정되었다.
 무료로 운영되는 유수풀장외에 1960년대 후반에 유료풀장이 서너 개 더 생기자 피서 철에 하루 4만여 명(일요일에 10만여 명) 년 간 100만여 명이 몰려들자 1969년부터 입장료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1966년부터 1969년까지 피서철인 7월 중순부터 8월 하순까지 토요일과 일요일에 경부선철도 안양풀 임시승강장이 설치되어 운영되기도 하였고 국립도서관에서 피서철 임간문고를 설치 운영하였으며 안양우체국 임시출장소가 운영되기도 하였다.29)
 늦은 오후에는 안양풀장에서 물놀이와 포도를 같이 즐긴 후에 귀가하려는 행락객이 버스종점이 있던 지금의 현충사거리부터 남부시장까지 길게 줄을 서서 몇 시간씩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유수량이 줄어들고 행락객이 버린 오물들로 인한 하천오염으로 관광객이 줄어들며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특히 1977년 7월8일 폭우로 인한 수해로 계곡의 경관이 무참히 파괴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1984년 국민관광단지 지정이 취소되기도 했다.
 이후 2005년 공공예술프로젝트 사업으로 현재와 같이 되었으며 2006년 그 명칭도 안양예술공원으로 바뀌었다.
 
나. 안양관광호텔.
 1969년 안양유원지에 신축한, 대형 풀장까지 갖춘 안양 최초의 호텔로서 안양지역 공장 등을 방문하는 바이어와 기술자 등 외국인의 숙박과 연회장 역할을 하였으나 안양중심가에 뉴코리아호텔이 영업을 시작하며 그 후 영업 부진으로 1987년경 기아자동차주식회사에서 인수하여  연수원으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불루몬테유스호스텔로 바뀌어 있다.

다. 뉴코리아호텔.
 1979년 2월27일 안양1번가에서 영업을 개시한, 현재까지도 가장 큰 관광호텔이다.
대형연회장과 지하층에 나이트클럽과 사우나시설을 갖추어 안양관광호텔에서 묵어가던 외국인 바이어와 관광객의 숙박을 모두 대신하게 되었으며, 1997년 9월1일 삼원프라자호텔로 바뀌어 현재까지 안양 제1의 관광호텔로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 안양이 대도시로 변모함에 따라 1990년대에 소규모 호텔이 수 개소 생기고, 이후 많은 숙박업소가 성업 중이다.

6. 영화산업.
가. 안양영화촬영소.
 수도영화사가 1956년 7월 착공30)하여 석수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종합촬영소인 안양영화촬영소가 들어섰다. 당시 3만여 평의 대지위에 세워진 동양최대의 영화촬영소로, 정초식에 이승만대통령이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후 재정난으로 신상옥 감독이 1963년 인수하여 ‘신필림’으로 명칭을 바꾸고 1970년대 중반까지 15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등, 한국영화 진흥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1966년 안양영화예술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연기자를 배출 하는 일도 하였다.
 1963년 11월26일 영화세트가 무너져 배우 김희갑씨 등이 부상하는 일도 있었다.31)
 그러나 영화의 흥행성적이 좋지 않게 되며 쇠락의 길을 걸었고 1978년 최은회씨의 납북과 이어서 신상옥 감독의 입북으로 1981년 폐업하였다.32)
 안양영화촬영소는 울타리 없는 개방된 시설이었음으로 주민들이 신기한 눈으로 영화촬영장면을 구경하기도 하였다.

나. 화단극장, 읍민관, 삼원극장.
 화단극장은 안양2동사무소에서 동쪽으로 200여m 되는 구국도변에 있었던, 1953년 3월 개관한 안양 유일의 극장이자 영화관이었다.
이후 1965년 읍민관과 그 다음 삼원극장이 생기고, 1970년대 후반까지 이 세 극장이 호황을 누렸으나, 1980년대 들어 칼라텔레비전 보급과 소극장들이 들어서며 쇠락의 길을 걸었다.
 화단극장은 중심가와 다소 떨어져 있는 위치와 시설투자를 안함으로 노후화되어 1980년경 가장 먼저 폐관되었으며, 1968년 안양극장으로 명칭이 바뀐 읍민관도 그 2005년.에 폐관되었고,33) 삼원극장은 그 자리에 개축한 삼원빌딩에 계속 남아 있었으나, 2004년 4월 다시 개축하고 들어선 CGV에 그 자리를 내어주었다.34)

7. 금융업.
 1924년 4월5일 안양금융조합이 설립되었고, 1950년대 초에 농업은행으로 명칭이 바뀐 후 1961년 8월15일 시흥군농업협동조합으로 개소35)되어 안양의 유일한 금융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그 후 1966년 8월10일 조흥은행 안양지점이 개점36)하였으며 수년 후에 기타 시중은행 안양지점이 차례로 개점되었다.

8. 의료업.
 1960년 이전에는 회생병원, 삼성병원, 김외과, 안치과, 순천병원, 중앙의원, 이렇게 여섯 개 의원급의 의료기관과 만춘당약국, 그리고 두어 개의 한약방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는 안양의 인구가 적기도 하였지만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이라 ‘죽을 만큼 큰 병‘이 아니면 병원에 안가는 탓이기도 하였다.
 1960년대 후반 들어 몇 개의 의원이 늘어났고, 1970년대에 들어서며 인구증가로 안양병원, 중앙병원, 서울병원, 한국병원, 4개의 병원이 생기고, 의원, 한의원, 약국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중 서울병원과 한국병원은 1980년대 중반 경에 폐업하였고, 안양병원은 안양샘병원으로, 중앙병원은 메트로병원으로 그 명칭이 바뀌어 진료하고 있다,
 평촌신도시가 조성된 1994년부터 병원과 의원 그리고 약국이 크게 늘어나고, 1999년 1월 25일 진료개시한, 3차 의료기관인 한림대학교 성심병원이 개원37)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9. 장례식장.
 세월이 흐르며 가장 많이 바뀐 것이 장례문화 인듯하다.
1970년대까지는 있었던, 굴건제복에 머리 풀고 곡지통하는 상제의 모습을 이젠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그렇게 장례를 모셨던 것을 아는 이도 별로 없으니 말이다.
 이는 5・16후 군부정권에서 법으로 풍속을 강제하는 ‘가정의례준칙’이란 괴물을 탄생시킨 것과 생활환경이 급격하게 변한 것에 기인하였다고 생각한다.
 마당이 없는 좁은 집과 특히 아파트가 많아지며, 이 좁은 공간에서 문상객을 맞으며 장례모시기가 어렵기도 하거니와 바로 옆집과도 소통하지 않고 사는 야박하게 변한 생활관습 탓에 도움을 받을 일손 구하기가 어려운 탓이 그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물론 이에 부모를 극진히 섬기는 ‘효’의 문화가 옅어진 까닭도 있었겠지만---.
 1998년 4월 안양장례식장이 호계2동 안양천변 후미진 곳에 들어섰다.
이후 안양의 장례는 이 곳을 시작으로 장례식장에서 모시는 것으로 바뀌어 갔으며, 이어 병원에서 영안실을 확장하여 장례식장을 차례로 개설하면서 지금은 집에서 장례 모시는 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안양장례식장, 석수장례식장과 안양메트로병원, 안양샘병원, 한림대학병원, 등에 달린 장례식장을 합하여 다섯 개의 장례식장이 있다.
 
9. 광업.
가. 광산.
 안양에 규석을 캐는 안양규석광업소와 안양규석광사업소 등이 있었다38)고 하나 그 규모와 장소를 알 수 없다.
 다만 도자기유약광물로 요긴한 장석광인 안양장석광업소가 석수동236-4번지에서 1920년대부터 개발되어 1970년대에는 50여명이 월 700톤을 생산하기도 했었으나 값싼 중국제 수입으로 1998년경 폐광되었다.
 이 곳의 장석은 서울대학교 관악수목원 끝자락에 있는 조선시대 백자 터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9)
 
나. 병목안 채석장.
 1930년부터 1980년대까지 철도자갈을 채취하던 채석장이었다.
이후 이 채석장 대규모 절개 면이 도시미관을 저해하고 낙석 등의 재해 우려가 있어, 안양시가 친환경적 휴식공간으로 조성하기로 결정해서 2004년 6월 착공하고 2006년 5월 개장하여 친환경적 휴식공간인 병목안시민공원이 되었다.40)
 병목안은 그 입구는 좁으나 그 안쪽은 길고 넓은 지형이, 마치 병목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고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다. 석수동 채석장.
 1979년부터 현대건설, 삼부토건, 등 5개사가 허가 받아 건설용 골재채취를 하였으나 자연경관을 해한다는 질책이 많아 얼마 안지나 중단되고 방치41)되다, 그 자리에 2003년 12월23일 착공하여 2005년 3월1일 경인교육대학교 경기캠퍼스가 개교42)하였다.
 이곳에는 예전에도 정으로 돌을 깨는 채석장이 있었으며, ‘삼막골 채석장 노동요’가 전해온다.

라. 연탄공장.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대부분이 연탄을 때던 시절이었다.
 안양역에 바로 붙어있는 롯데백화점주차장 지경에 비교적 큰 태진연탄공장이 있었고,43) 당시 읍민관 뒤에(현재 안양중앙교회 옆 중앙시장 쪽)그보다 조금 작은 규모의 삼일연탄공장이 있었다.44)

10. 공업.
* 안양은 서울과 인천항이 가까운 지리적 위치와 1번 국도와 경부선철도가 지나는 교통과 수송 조건의 유리함과, 안양천을 끼고 있어, 질 좋은 풍부한 용수 공급이 가능하고, 노동인력 확보가 쉽다는 것, 등, 여러가지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어 영등포, 인천과 연계되는 수도권 공업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 8・15 해방 후 한국주요산업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왜놈들이 물러가고 산업생산은 공백을 맞게 되었으나 안양의 공업은 크게 위축되지 않았다. 1949년 안양에 있었던 공장은 제일방적, 금성방직, 안양직물, 조선빠이루직(織)공업, 낙랑실업, 조선견직, 조선직물, 삼덕제지, 고려석면고무공업, 조선제도(製圖)공업, 남해산업, 삼길양산, 조선특수자기, 삼신제도(製陶)공업, 등 14개소로 그 규모는 종업원 6명의 소규모로부터 종업원 298명에 달하는 공장까지였다.
 그러나 6・25동란으로 대부분의 공장이 파괴되어, 1955년에는 금성방직, 태평방직, 협신공업사, 삼덕제지, 고려특수도자기, 삼화타일공업, 삼창건재사, 고려석면고무공업, 등 8개소가 복구되거나 새로 세워져 가동되었으며,  1961년에는 오히려 금성방직, 태평방직, 삼덕제지, 고려석면고무공업, 한국특수제지, 유한산업, 등으로 줄어든다. 이 기간 중, 공장의 수는 줄어들었으나 그 규모는 커지고, 이 중 금성방직은 종업원 2844명(남 506명, 여 2338명)의 대기업으로 성장한다.
 1960년대 초부터 우리경제는 고도성장기에 들어서며 1970년대 초반까지 년 평균 20%에 달하는 제조업 발전을 중심으로 고속성장을 이루었다.45)

* 1960년대에 동일방직, 한국케이불, 락희화학, 금성통신, 동양나이론, 만도기계, 삼영하드보드, 경남제지, 등과 1970년대에 대한전선, 등의 대기업이 더 들어섰고, 그밖에도 많은 공장들이 점차 늘어났으나 안양이 대도시화되고, 1977년 제정된 공업배치법과 1983년 제정된 수도권정비계획법이 시행되며 안양이 과밀억제권역으로 지정됨으로  대부분의 대기업이 이전하거나 폐업하고 현재는 안양7동의 공업지역과 이와 이어지는 호계동에 중소기업,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 안양에 있었던 공장과 현재 가동 중인 기업이 많아 이를 다 열거 할 수 없으므로, 그 중 대표될 수 있고, 안양의 경제에 큰 역할을 하여 안양사람들이 아직 기억하는, 1960년대까지 설립되어 가동되던 대기업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가. 금성방직.
 누가 뭐라 해도 1970년대 이전 안양의 대표기업으로 이 회사가 안양의 경제를 좌우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안양 경제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금성방직은 지금은 대로변에 상가와 주택이 같이 들어서 있는, 대농단지라 불리는 안양3동과 박달동 일부까지의, 담장둘레만 십리라 하였을 만큼 아주 큰 땅에 들어서 있었고 철로가 연결되어 화물열차가 들어올 정도로 아주 큰 공장이었다.
 그 터는 1932년 조선직물주식회사가 들어섰다가 1938년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1944년 친일파인 화신백화점 박흥식이 인수하고, 인근의 토지를 몰수하여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조선군사령부와 관동군의 지원을 받아 비행기공장을 세우고 시흥군 일대에서 징용자를 차출하여 인력을 충당하여 비행기 한 대를 조립하였고, 평촌의 다라니벌(현 평촌신도시)에 활주로 공사를 시작하고,46) 2호기와 3호기 부품을 만들던 중 해방을 맞이하여 그 공장이 진주한 미군에 의하여 철거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미군의 폭격을 피해 일본의 주요 산업시설을 한국으로 피신시켰는데, 해방 직후 안양역전에 일본방적 소유의 방적기 2000추가 방치되어 있었다.
 이에 창업자인 김성곤(후에 공화당 정권하에서 국회의원을 한 거물 정치인)씨가 이 방적기를 사용하여 공장을 세우기로 하고 미군정청과 교섭하여 사용가능한 방적기 431대를 불하받아 1948년 10월5일 금성방직을 설립하고 이듬해인 1949년 3월10일 공장(종업원 138명47))을 준공하였다.
 그러나 6•25동란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자 정부의 도움으로 UNKRA(유엔한국부흥위원단)의 지원을 받아 1953년 6월 재건을 시작하고 영국에서 기계를 구입하여 1954년 5월 면사 첫 제품을 생산한다.
 이후 금성방직은 괄목할 만큼 크게 성장하여 1956년 5월15일 태평방직을 인수하고, 이를 토대로 설립자인 김성곤은 후일 재벌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금성방직은 축구발전에도 공헌을 했다.
 천연잔디가 깔린 축구장을 만들어 국가대표팀과 실업팀들이 이곳에서 연습경기를 하게하였다.(1960년대에는 전국에 잔디구장이 단세 곳 밖에 없었으며, 금성방직이 1975년 청주로 이전한 후 이 잔디는 안양세무서 신축 시 조경용으로 사용되었다).
 1963년에 실업축구팀인 금성방직 축구단을 창단하여 1964년 춘계, 추계 실업축구연맹전 석권, 전국체전 축구 일반부 남자 우승. 1965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67년 금성방직이 매각되면서 쌍용양회 축구단으로 운영되다 해체되었다.48)
 금성방직은 전기사용량이 아주 커서 당시의 안양변전소(삼덕제지 바로 옆에 위치)의 6000KVA 변압기로는 감당 할 수 없어 한국전력에서, 그 구내에 별도의 전용 변압기를 설치한 변전탑을 설치하여 가동하였다.
 1961년경 확장공사 시 신석기시대의 간 돌도끼가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필자는 역사선생님이 보여준 이 유물을 목도하였다.

(1). 금성방직과 안양경제.
 앞에 언급한바와 같이 안양 최대의 공장이었던 금성방직은 안양경제발전에 아주 큰 공적을 쌓는다.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의 여공을 삼천궁녀라 하기도 하였고, 그들이 안양을 먹여 살린다고 할 정도로 금성방직의 월급날은 안양에 돈이 풀리는 날이었다.49)
 금성방직 정문 앞 부근에 금성방직에서 발행하는 전표(금액을 표시한)로 상품을 살 수 있는 종업원 전용의 큰 상점(안양최초의 수퍼마켓, 파주상회)이 있기도 하였고, 이 전표가 안양의 다른 가게에서 통용되기도 하였다.

(2). 인구의 유입.
 창업자이자 사장인 김성곤은 1958년 대구 달성에서 제4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고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그 과정에서 선거운동의 일환으로 대구의 처녀들을 대거 데려와 금성방직에 취업시킨다.50)
 이외에 안양에 사는 주민의 일가친척들도 안양으로 올라와 금성방직 등의 공장에 취직하게 되고,51) 그들이 일가를 이룸으로서 안양은 팔도에 고향을 둔 주민이 골고루 섞여 사는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52)
 그러나 금성방직에 들어가기가 그리 쉽지 않았기에 금성방직 중견사원의 집에서 1~2년 공짜로 식모살이하고 그 빽으로 취직하는 경우도 있었다.

(3). 사회상.
 전국 팔도강산에서 처녀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당시 완고하고 보수적이던 성풍속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다.
 그래서 금성방직 뒷산이 떡산으로 불리기도 하였고, 금성방직 여공들의 몸가짐이 회사의 명예에 관계된다하여 행실을 문제 삼아 여공을 해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은 억지로 막을 수 없는 것이어서 안양의 산부인과의원이 많은 수입을 올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공장이 많아 안양에 돈이 돌게 되고, 안양유원지등에 행락객이 몰리게 되자, 이들을 털어먹는 도적과 깍정이패가 생기게 되었고,53) 그래서 안양이 깡패로 유명해지기도 했었다.

*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은 창업주 김성곤이 1962년 쌍용양회를 창업한 후, 1967년 대한농산(대농)에 매각하고 이후 1975년경에 청주로 이전하며 그 막을 내렸다.
 그 후 1977년 토지금고에 의해 매각되어 주택단지가 되었으나 안양사람들에게는 금성방직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나. 태평방직.
 현재의 안양 1동 진흥아파트 자리인 이 터에 왜정 때에도 직물공장이 있었다고 하나 그 이름과 규모는 알 수 없다.54)
 1953년 11월13일 설립된 삼흥방직이 전신이다.
 태평방직은 방적기 1만추, 직기 50대를 설치하고 1954년 10월부터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경영이 어려워 1956년 5월15일 금성방직에 인수되었다.55)
이후 금성방직과 같이 대한농산에 매각되고 1975년경에 청주로 이전되었다.
 금성방직은 면직물을 생산하였으나 태평방직은 마직물 생산공장이었으며, 이 두 회사 모두 2교대 또는 3교대 근무를 하며 24시간 쉬지 않는 공장이었다.56)            

* 위에 언급한바와 같이 금성방직과 함께 태평방직도 안양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고 안양사람들에 의해 계속 기억될 것이다.

다. 삼덕제지.
 삼덕제지 자리에는 왜정 때인 1941년 왜인 고토우가 설립한 삼왕제지가 있었으나 그 경영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57)
 이후 1945년 11월25일 설립되어 모조지와 선화지를 제조하던 공장이다.58)
 1950년대 말에 경영이 어려워 1961년 전재준씨가 인수하여 경영한,59) 안양의 주요기업중 하나로 2003년까지 가동하여 안양중심가에서 가장 오래 남아있던 공장이 되었다.
 바로 옆이 수암천이고, 이 하천으로 종이슬러지가 흘러나왔고, 갈수기에는 삼덕제지 아래쪽 하천이 이 슬러지로 뒤덮일 지경으로 오염되기도 하였으나, 모든 물자가 귀하던 1960년 이전에는 부근의 주민이 이 슬러지로 함지박 비슷한 그릇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고 땔감으로 쓰기도 했다.60)
 바로 인근에 중앙시장이 있고 안양역과 안양1번가와도 가까운 요지의 땅이지만 2003년 7월 폐업 하며 기업주인 전재준 회장이 기부의사를 밝히고, 11월3일 안양시에 공원조성을 조건으로 기부하였다.
 이후 지하에 주차장을 조성하려는 시와 기증자간에 의견차이로 갈등이 있었으나 당초 기증시의 조건대로 숲이 있는 녹지공원을 만들기로 하고, 2007년 7월18일 착공하고 2008년 11월에 준공하여 삼덕공원으로 명명하였다.61)
 2003년 폐업하며 근로자 중 희망자를 계열사인 삼정펄프로 이직시키려 했으나 강성노조의 장기파업으로, 그대로 폐업하였다고 한다.62)

라. 동일방직.
 1955년 9월 동양방직으로 설립되었으며 1966년 1월 동일방직으로 사명 변경하고, 안양읍 이동리(현 평촌동)에 1969년 4월 안양공장을 신축63)하여 가동하다 1997년 7월 폐업하였다.
 1975년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이 청주로 이전하자 청주로 따라 이사하지 않은 두 회사의 종업원이 동일방직으로 전직하여 근무하기도 했다.64)
 동일방직은 안양의 변두리지역이던 벌말과 인덕원은 물론이고 인접한 의왕 포일리 지역의 상권 형성과 그 지역 경제발전에 기여하였다.
 동일방직도 금성방직이나 태평방직과 마찬가지로 교대근무하며 24시간 가동하던 공장이었다.

마. 한국제지.
 창업자 단사천씨는 명동의 사채업계를 주름잡던 ‘현금왕’이라 불리던 엄청난 자금력을 가진 인물로 삼성 이별철 회장과 현대 정주영 회장도 도움을 받았다고 전해지나, 편모슬하에서 자라 18세에 상점 점원으로 시작하여 성공한 입지적인 인물이다.
 무차입 경영을 원칙으로 하고 무리한 확장을 금기시했다.65)

 한국특수제지공업주식회사로 1958년 2월25일 설립되어 1960년 4월1일 안양공장66)에 장망식 초지1호기를 시설하고 백상지 생산을 시작했으며 1966년 12월 한국제지주식회사로 상호변경 하였다. 이어 장망식 초지 2호기를 증설하여 백상지 생산능력을 배가하고, 1호 코트기를 신설하여 아트지생산을 개시하고 1972년 9월 장망식 초지기 3호를 증설하여 박엽지•특수지를 생산하였고 1973년 10월 2호 코트기를 증설하였으며, 1994년 6월 업계최초로 ISO9002 인증을 받았다.67)
 1960년 당시에 어렵던 66,000V 송전선에 안양 최초로 연결하여 안정적인 전기공급을 받았다.
 1960년 이전에는 지질이 좋은 종이가 아주 귀했었다. 그런데 한국제지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질 좋은 종이를 생산하여 공급한 것으로, 한국제지는 우리나라 제지업계에 크게 한 획을 그었으며 안양지역의 경제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 당시 한국제지는 안양에 소재한 공장 중에서 가장 많은 월급을 주는 곳으로 알려졌으며, 그래서 한국제지는 당시 선망의 직장이었다.
 그러나 1998년 9월 안양공장은 폐쇄되었고, 그 후 안양역 바로 동쪽에 붙어 있던 그 부지에 삼성래미안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러나 한국제지는 그 시절을 함께한 안양 사람들에게 아직도 좋은 회사로 기억되고 있다.

바. 한국케이블 • 락희유지 • 금성통신.
 1960년대 이전에는 회사명을 지을 때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기에 행운을 뜻하는 LUCKY를 음과 뜻이 비슷한 한자를 찾아 락희(樂喜)로 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후 1974년 럭키그룹으로 바뀌고 이어 1983년 럭키 금성그룹을 거쳐 1995년 LG그룹으로, 그리고 그 후 2005년에 LG, GS, LS로 나뉘어 졌지만 그 뿌리는 락희화학공업사68)이며 상속과 기업분리과정에서 타 재벌들과 달리 그 후계자들이 다툼이나 싸움이 없었던 유일한 재벌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케이블, 락희유지, 금성통신, 모두 설립일은 다르지만 1947년 설립된 락희화학공업사를 모태로 한, 그래서 안양 호계동에 나란히 같이 있던 기업이다.

①. 한국케이블.
 1962년 5월15일 설립되었으며 1966년 4월 안양공장 준공하여 가동을 시작하였고 1966년 9월 금성사에 흡수 합병되었으나 1969년 10월 금성전선이 설립되어 독립회사로 출범하였으며 2005년 9월  LS전선이 되었다.69)
 전력을 많이 쓰는 큰 공장으로, 당시에 어렵던 66,000V의 송전선에서 연결하여 수전하였다.
 전력용전선과 일반전선, 통신케이블을 생산하였으며 국내 최고 품질의 전선을 생산하는 최대 전선공장이다.
 20015년 폐쇄되고 구미 등 타 사업장으로 분산 이전되었다.
②. 락희화학.
 1959년 3월 락희유지공업사가 설립되고 1966년 1월 락희화학공업사로 사명 변경 후 같은해 3월 3일 안양공장 준공되어 가동을 시작한 국내최초의 합성세제공장이며, 1974년 2월 주식회사 럭키로 상호를 변경한 후 1995년 2월 (주)LG화학으로 다시 변경하였다.70)
 안양공장은 설립 16년만인 1982년 4월1일 폐쇄되었다.
③. 금성통신.
 1969년 10월5일 금성사에서 분리하여 설립, 전화기 등 통신기기를 제조하였으며 1978년 우리나라 최초로 전자교환기용 MFC식 전화기 개발71)을 하는 등 우리나라 전기통신기기 제조의 선두주자로 전기통신기술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83년경 안양공장은 오산, 구미, 청주 등으로 분산 이전72)되었고 1994년 8월 금성사와 합병되어 1995년 LG전자가 되었다.
 1992년 부지 매각되어 그 후 국제유통공구단지 공구상가가 들어섰다.

* 한국케이블, 락희화학, 금성통신, 모두 안양보다 군포, 의왕에 더 가까운 호계동에 나란히 자리하여 안양은 물론이고 군포, 의왕지역의 경제발전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사. 동양나이론.
 1962년 한일나이론 안양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한일나이론은 1960년 4・19혁명이전 독일에서 수입하였던 나이롱원사 기계설비를, 1961년 5・16쿠데타 이후 수입자인 경성방직이 부정축재로 몰려 문제가 되자, 이 설비를 정부가 소모방협회(후에 한국모방협회로 개명)에 그 처분을 맡겼고 소모방협회에서 이를 다시 대한모방, ‘제일모직’ 판본방적‘ 3사에  각 1/3씩 인수시켜 1962년 한일나이론을 설립하고 1963년 안양공장에서 생산을 시작했다.73)
  1966년 4월26일 농민 60여명이 몰려와 3년 전 건립당시 ‘수리 및 도로시설을 해주겠다’고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옛 수로와 도로를 돌려달라‘며 농성, 종업원 70여명과 투석전을 하여 양측에 7명의 부상자를 낸 일도 있었다.74)
 그 후 1970년 동양나이론이 이를 인수75)하여 현재까지 남아있는 안양 유일의 대기업공장이다.
  1976년경부터 공장 내의 동산을 온통 불게 물들이는 진달래꽃 축제를 매년 봄 열고 있으며, 매년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려 많은 시민이 방문하고 있다.
1998년 사명을 (주)효성으로 바꾸었다.

아. 고려석면.
 1945년 10월3일 설립된 석면 및 고무제품생산 공장이다.
6・25동란 후 불타고 부서져 굴뚝만 달랑 겨우 하나 남았었는데, 1956년 4월13일 재건76)하여 가동하였다.
 임금이 박하기로 소문났었으며, 1965년 5월7일 임금 100% 인상요구 하는 노사분규77) 등 파업이 잦았으며, 얼마 후에 한국스레트(벽산이 1983년 상호변경 하기 전의 사명)에 넘어갔고, 수년 후인 1980년대 초반 경에 철거되어 그 자리에 1985년 벽산아파트와 벽산쇼핑센터가 들어섰다.78)

자. 만도기계.
 1962년 10월1일 현대양행으로 창립하여 1964년 6월1일 인양공장을 박달리에 세운 자동차 부품 생산 공장이다.
 1980년 2월6일 만도기계로 상호 변경하였고 같은 해 6월22일 안양공장에 기술연구소를 설립하였다.79)
 1995년경에 안양공장은 익산, 청원, 신탄진 등으로 분산 이전되었다.80)

아. 삼영하드보드.
 1961년 안양3동 양지말 바로 남쪽에 설립되어 하드보드를 생산하였으며, 이 자리는 왜정 때 왜놈이 운영하던 내하목재회사가 있던 곳이다.81)
1966년 1월31일 폭발사고가 발생하여 4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있었다.82)
 경영수지 악화로 성창기업에 넘어간 후, 1980년대 말경에 폐업하였다.83)
 그 터에 성원아파트가 1995년 11월 준공되었다.

자. 경남제지.
 1968년 호계동(당시 금성전선 정문 맞은편)에 공장 가동, 크라프트지를 생산하였다.
경남제지는 초대 공장장인 박양환(2000년 작고)씨가 직접 현장 제작한 국내 최초의 국산제지기로 생산을 하였으며, 이 국산제지기 가동을 시찰하러 육영수여사가 방문 한 일도 있었다.84)
 그러나 경영난으로 1973년 2월 조일제지로 넘어가 정상 가동되다, 1993년경 경영난으로 폐업하였다.85)

차. 유유산업.
 1941년 2월28일 유한산업 창업86)한 후 1957년 10월 상호를 유유산업으로 바꾸고, 1959년 5월 안양공장을 준공하고, 1963년 제약원료 국산화에 앞장서 우리나라 최초로 파스원료를 생산하였으며, 1965년 9월 우리나라 최초로 연질캅셀제인  종합비타민 비나폴로를 개발하였다.
 1975년 5월 노동조합이 설립되었으나 2005년까지 무분규 노사화합경영을 이어갔으며 2006년 제천공장을 신축하고 이전하였다.
 2008년 사명을 유유제약으로 변경하였다.
 1973년 창업자인 유특한씨가 사재를 출연하여 재단법인 유유문화재단을 설립하고, 매년 장학생을 선발하여 2016년 12월10일 현재 1087명의 학생에게 7억7천여만 원의 장학금을 지원하였다.87)

* 유유산업 자리는 통일신라 때 중초사가 있었고, 고려 때에 안양 지명의 효시가 되는 안양사가 자리했던 절터로, 보물로 지정된 중초사지3층석탑과 중초사지당간지주가 있는 안양의 중요한 유적지이다.
 이 자리에 들어선 유유산업 공장 건물은 우리나라 근대건축의 대가인 김중업선생이 설계한 그의 초기작품으로 공장건물에 조각작품을 접목시키는 등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2007년 5월28일 안양시가 매입한 후 매장유물 발굴조사와 리모델링을 거쳐 2014년 3월28일 김중업건축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88)

카. 대한전선.
 1955년 창립하여 시흥공장(현 금천구 시흥동)에서 1975년 안양시 관양동으로 확장 이전하였고, 1976년 국내 최초로 154KV OF케이블을 생산하였으며, 1979년 국내 최초로 광케이블을 설치하고 1984년 안양공장에 광통신케이블 공장을 준공하는 등89), 금성전선과 쌍벽을 이루는 전선공장이다.
 우리나라의 전선은 물론이고 전기설비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2011년 당진으로 이전하였으며, 그 부지 이용에 관하여 말이 많고 의혹과 잡음이 이어졌으나 그 터에 2016년 평촌더샵 센트럴시티아파트가 준공되었다.90)

* 공장건축 전에, ‘농지의 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이 전면 개정될 것이며, 항공촬영을 하여 농작물이 있는 곳은 절대농지로 지정된다는 정보를 사전 입수하고, 아주 넓은 벌판의 추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벼를 중장비를 동원하여 쓸어 묻는 일도 있었다.

11. 전력산업.
 1960년에 안양지역의 전력을 공급하는, 삼덕제지 바로 옆에 있었던 안양변전소(안양6동에 변전소가 신설된 후 ‘장내변전소’로 명칭 변경되었고 1969년경 폐쇄되었다.)의 변압기 용량은 6000KVA였다. 그러나 1960년대 초부터 경제성장기에 들어서며 공장 설립과 증설로 안양변전소의 변압기 용량이 달리게 되어, 1967년에 변압기용량을 초과하는 7200KW의 부하(변압기가 소손될 아주 큰 부하였으나 다행히 웨스팅하우스 제품인 변압기가 잘 견뎌주었다.)가 걸리기도 하였다.
 이에 한전에서는 긴급히 안양6동에 변전소를 1968년 준공(현 안양변전소)하고 15,000KVA 154KV/22.9KV 변압기를 시설하여 전력수요를 충당하였다.
  특히 당시 안양의 급격한 전력수요의 증가로 인하여, 3,300V의 배전전압으로 전기공급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양질의 전력공급을 위하여 안양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968년에 22,900V로 승압시켜 공급하였으며, 그에 따른 안전과 전력손실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다.    그러므로 안양은 전력산업에 큰 한 획을 그은 곳이기도 하다.
 필자는 당시 승압 전후의 전력손실을 비교분석하였으며, 이 분석이 차후의 22,900V승압공사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후 전국의 모든 배전전압을 순차적으로 승압하였다.
* 1977년 7월8일 안양의 집중호우로 인하여 전주가 매몰되고 도괴되는 등 배전설비에 큰 피해를 입었고, 수많은 공장과 상가, 주택 등이 침수로 전기를 사용 할 수 없는 정도로 심각한 전기설비의 피해를 입었으나 전 직원을 총동원하여 다른 시설보다 가장 빠른 기간인 일주일 이내에 모두 복구하였다.

* 현재 안양지역의 변전소는 안양변전소 45/60MVA 4대, 평촌변전소 45/60MVA 4대, 동안양변전소 45/60MVA 4대, 서안양변전소 45/60MVA 3대, 관양변전소 60/60MVA 2대, 산본변전소 45/60MVA 4대, 의왕변전소 45/60MVA 4대로 총 7개 변전소에서 최대 1500MVA이며 1960년 대비 250배, 1968년에 비하여 100배의 공급능력을 갖추고 전기공급을 하고 있다.

12. 1977년 7월8일 안양 수해.
 저녁나절 시작하여 불과 수 시간 내린 432mm 집중호우로 사망 104명, 실종 17명, 이재민 9,439명, 재산피해 189억원의 큰 재해91)였다.
 당시 삼덕제지 바로 옆에 있던 한전안양영업소에 근무하던 필자는 당일 오후 일곱 시경 서너명의 직원과 잔무처리를 하고 있었다. 늦게까지 일할 예정이었으나 같이 일하던 여직원이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걱정이 된다.’며 집에 가겠다고 하여 창밖을 보니 평소 보지 못하던 장대비가 내리퍼붓고 있었다.
 할 수 없이 회사 문을 나섰으나 몇 발짝 안가서 물이 발목에 닿았고 이십여 걸음 더 가니 정강이를 넘어서고, 삼원극장(현 CGV)앞에 가니 허리를 넘었고, 중앙시장 앞에 이르니 가슴까지 차올랐다. 골목길은 급류가 흐르고, 큰길(현 안양로)은 거센 강물로 변해있었다.
 갑자기 불어난 물에 발만 조금 헛디디면 그대로 떠내려갈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그 비 퍼붓는 급류 속에서 손전등을 비추며 ‘여기는 맨홀이 열려있어 위험하니 피해 가셔요’하는 용감한 의인이 있었다. 경황없어 고맙단 인사도 못하고 지나쳐 길을 서두르다 안양극장 앞(현 벽산사거리)에 이르렀는데, 가슴을 넘어가는 급류 때문에 고려석면(현 벽산쇼핑) 쪽으로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었다.
 잠시 기다리다, 여러 사람이 팔짱끼고 연결하여 겨우 건너기 시작했고 이어서 연달아 길을 건넜다.
 힘들게 집에 당도한 시각이 저녁 여덟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평시 십여 분이면 도달할 것을 무려 한 시간 넘게 걸려 겨우 도착한 것이다.
다행히 우리 집은 안양초등학교 옆의 비교적 높은 곳이라 무사하였으나, 서울과 청계에서 퇴근해 집에 있어야 할 두 여동생과 수원의 학교에 갔던 남동생이 보이지 않아 걱정하고 있던 중, 새벽 두시가 넘어 물이 좀 빠진 후에야 한명씩 도착하여 가족 모두가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이튿날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안양초등학교는 수재민보호소가 되어있었고 안양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일찍 출근하여 현황을 파악하니 그 피해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컸다(당시 한전에 근무하던 필자는 직무상 전기가 들어가는 모든 곳의 피해를 파악하였음).
 안양5동과 6동 등, 비교적 높은 일부지역을 빼고는 모두 수해를 입어, 안양중앙시장을 비롯한 상가와 많은 주택들이 침수로 인한 피해를 보았으며, 안양천과 붙어있는 저지대인 안양1동, 비산동과 안양7동은 2m정도 높이까지 물이 찼었고 병목안과 비산동 등 비탈에서는 사태로 인하여 많은 인명피해까지 있었다. 산본리에서는 작은아이는 안고 조금 큰아이는 손잡고 들이닥치는 물을 피해 나오던 엄마가 큰아이 손을 놓치자 이를 두 손으로 잡아 구하려다, 안고 있던 아이마저 떨어뜨려 잃고 망연자실 슬피 우는 기막힌 사연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한국제지, 동양나이론, 금성전선, 금성통신, 럭키화학, 조일제지 등 대기업과 중소기업들, 거의 대부분의 공장이 안양천과 인접하여 있거나 저지대인 안양7동에 있었기 때문에 침수되어, 원자재와 제품, 그리고 기계의 손상을 당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당시는 고성장기인 경제호황기이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7월10일과 21일 두 차례나 방문92)하는 등, 중앙정부의 지원과 전국적인 도움으로 비교적 짧은 기간인 한 달 이내에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복구하였다.
 농지도 물에 잠겨 피해를 보았으나 이튿날 새벽부터 비가 덜하고 개어 곧바로 물이 빠짐으로 비교적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 수해이후의 복구공사로 동네가 그 이전보다 좋아짐으로, 결과적으로 안양천의 덕을 보았다하여 가장 침수피해가 컸던 안양7동의 주민들이 동네이름을 ‘덕천말’로 바꿔 부르기 시작하며 표석까지 세워,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달라진 그 동네를 아직도 그리 부르고 있다.

 


<맺는말>
 정말 많이도 달라지고 변했다.
모르긴 몰라도, 지난 몇 십 년 동안 변한 것이 그 전의 몇 백 년보다 더 바뀌고 달라졌으리라 생각한다.
정말로 천지가 개벽하고 상전이 벽해가 되었다.
 그야말로 공장 몇 개있던 한적한 지역사회, 옹기종기 모여 살던, 그 사람들이 서로 알고 지내던, 크지 않은 읍(邑)에 불과했던 안양이 이렇게 변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발전이라고도 하고, 남들은 좋아졌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10대째 살아오고, 태어난 동네에서 한발 짝도 나가 살아보지 않은 내 입장에서 보면, 고향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더 든다.
 나 어릴 적은 늘 배고프던, 그런 서러움도 있었고, 그래서 열심히 쉬지 않고 일만하고 살아와, 잘먹고 잘살게 되었지만,
이제 고희 넘어 문득 뒤돌아보니, 산업화・도시화된 지금보다, 공기 좋고 맑은 물 흐르던 그때 그 시절, 정이 흐르던 그 세상이 더욱 더 그리워지기만 한다.


 <참고문헌>
* 안양시사(안양시사편찬위원회, 2008.10.27.).
* 기사로 본 안양 근대사(성결대학교 안양학연구소, 2001.12.31.).
* 안양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안양시 관내 주요 사건 연표. 등).
* DAUM 워키백과. 지도, 등.
* 각 조사대상 업체의 홈페이지.
* 각 조사대상 업체에 현황과, 이전・폐쇄일자 등, 전화 문의.

<제보자>
김정대(전 안양문화원장).
조전덕(안양시 비산동. 동일방직근무, 83세).
권영관(서울시 금천구. 경남제지근무, 78세.).
조태연(서울시 양천구. 72세).
김학철(안양시 관양동. 71세).
김길환(안양시 호계동. 한국케이쁠근무,71세,).
박승범(시흥시 정왕동. 71세).
김상태(안양시 안양7동. 만도기계근무,58세.).
 


 


 
 
 

 

 


 


 

 

 


1)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정동수]안양천. 2016년 5월9일.

2) 안양시사 제3권. 성장 발전하는 안양, 안양시사펀찬위원회, 2008년 667쪽.

3) 안양시사 제3권. 성장 발전하는 안양, 안양시사펀찬위원회, 2008년 667쪽.

4) 이필운 “주로 저희 때 포도서리 다닐 때는 어려서 그랬지만 거의 포도 다 들어갈 때 쯔음.”
   김기택 “친구들하고 포도밭에 가서 서리해먹은 생각도 허허.포도밭은, 여기지금 안양역 밑에 명학역 고 옆에 포도밭이 쫙 있었죠.”
   장석구 “ 어렸을 적에는 포도밭 이런 거 엄청 서리를 하고 했지. 지금 서울은행 지점장 했던 친구들. 그때가 몇 살인가, 남의 집 포도밭가서 서리를 엄청했는데 둑방 가서 보면 퍼런 것만 따왔어.”
   강세일 “포도가 유명했잖아요 안양이. 포도서리 해먹고 우체국 위쪽으로는 다 포도밭이었는데,”
   전만길. “안양은 포도가 유명했기에 포도서리! 조가 5명이된다면 한사람은 밖에서 망을 보고, 나머지는 들어가서 따고, 주로 밤에 한산한 틈을 타서 숨도 안쉬고 조용히 서리를 하였다.”

5) 기사로 본 안양 근대사. 성결대학교 안양학연구소, 2001년 12월31일, 142쪽.

6) 이규용 “지금 유일하게 코아호텔 옆에 안양포도공장이 있었어. 안양포도주공장이 유일하게 있었어. 그게 우리나라 최초의 포도주공장. 그렇게 됐고.”

7) 고정국 “그 주위에 닭을 키울 거라는 생각을, 닭을 키우긴 키워도 광주리만한 데 덮어가지고 서너 마리 키우는 건 봤어도 백 마리 이상 키우고 그런 집은 없었거든요.”

8)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안양시 관내 주요 사건 연표, 2016년 9월21일

9) 농림축산검역본부 홈페이지.

10) 연합뉴스. DAUM뉴스, 농림축산검역본부 김천 이전완료---내일 개청식, 2016년 5월24일.

11) 제보자. 김정대, 전 안양문화원장.

12) 이규용 “지금은 우유를 사먹지만은 그때는 목장이 두 군데 있었어. 주문을 하면 목장에서 직접 배달을 했지.”

13) 이상범 “가축을 좀 길러볼라고 양돈을 시작했어요. 그냥 집 앞에다가 돼지우리를 바닥옆에 공구리를하고, 이제 나무로 짓고 그러는데 댓 칸을 만들었어요.” "어머니가 돼지를 키우시니까 재미가 나신 거예요. 그니까 그 동네에서 무슨 지금 같으면 음식찌꺼기가 많이 나오니까 주체하기 어렵지만 그 당시는 없었어요. 그래서 동네 여러동네 다니면서 바께스로 받아 오시는 거예요.“

14) 제보자. 김학철, 안양 관양동, 71세.

15)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안양시 관내 주요 사건 연표, 2016년 9월21일.

16) 서울대학교 수목원 홈페이지. 수목원 소개, 역사와 발자취.

17)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1968년 안양 구시장으로 가던 땡땡땡 철길, 2016년 6월8일.

18) 안양중앙시장 홈페이지.

19) 안양중앙시장 홈페이지.

20)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자료]안양권 상공업 발전과정(유통업), 2016년 6월11일.

21) 안양농수산물도매시장 홈페이지.

22) 안양시사 제3권. 성장 발전하는 안양, 안양시사펀찬위원회, 2008년 611쪽.

23) 안양시사 제3권. 성장 발전하는 안양, 안양시사펀찬위원회, 2008년 611쪽.

24)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안양시 관내 주요 사건 연표, 2016년 9월21일

25) 뉴시스. DAUM뉴스, ‘안양역전지하상가’-‘일번가 지하쇼핑몰’ 명칭변경. 2006년 4월10일.

26)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자료]안양권 상공업 발전과정(유통업), 2016년 6월11일.

27)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자료]안양권 상공업 발전과정(유통업), 2016년 6월11일.

28)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안양시 관내 주요 사건 연표, 2016년 9월21일.

29)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1958년, 안양풀장(안양유원지) 풍경, 2016년 5월4일.

30)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안양시 관내 주요 사건 연표, 2016년 9월21일.

31)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안양시 관내 주요 사건 연표, 2016년 9월21일.

32)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1958년 동양 최대 규모였던 안양영화촬영소.

33)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1953년개관한 안양 최초의 영화관 화단극장, 2016년 6월20일.

34)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1970년대 안양 삼원극장 주변 거리 풍경, 2016년 6월30일.

35)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안양시 관내 주요 사건 연표, 2016년 9월21일.

36) 안양시사 제3권. 성장 발전하는 안양, 안양시사펀찬위원회, 2008년, 623쪽.

37) 한림대학교 성심병원 홈페이지.

38) 안양시사 제3권. 성장 발전하는 안양, 안양시사펀찬위원회, 2008년, 547쪽.

39) 안양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1982년 안양유원지 유유공장 주변 항공사진, 2016년 10월17일.

40) 경기신문. 전자신문 9면, 2016년 11월16일.

41) MBC 뉴스데스크. 채석장, 산림 경관 훼손 심각[김형철], 1989년 7월2일.

42) 경인교육대학교 홈페이지.

43) 정항래. “태진 연탄이라고. 그 태진 연탄이 한 7·80대들은, 분들은 알거에요. 80대 이상. 그 당시에는 연료 사정이 나빠서 연탄이 주 월동, 월동. 연탄을 주로 썼다고. 그래서 그걸 시작했어요.” “그 때 거기가 옛날에 그 저 마르보시, 대한통운.” “지금 저 저 무슨 백화점? 여기 역전에 백화점. 그 자리.”

44) 제보자. 조태연, 서울 양천구, 72세.

45) 안양시사 제3권. 성장 발전하는 안양, 안양시사펀찬위원회, 2008년, 498쪽~502쪽.

46) 최갑환. “다라니벌? 거기서 일하다 비오면 달아났다고 해서 다라니벌이래. 벌판이 넓으니까. 비가 오면 어디 거쳐날 데가 없거든. 그래서 다라니벌이여. 삿갓 쓴다고 해서 삿갓벌도 있다고. 그 뭐야 일본 정치 말년에 그 벌판을 비행장 한다고.” “박흥식이 그 사람이 시작하다 그만둔 거야. 해방되고, 비행장 만들려고 했다고. 근데 이제 벌판이 옥판이 된 거라고. 물이 젤이거든 농사 짓는데는. 그 벌판이 좋아진 거여. 못자리 했다구.”

47) 안양시사. 제3권. 성장 발전하는 안양, 안양시사펀찬위원회, 2008년, 499쪽.

48)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1960년대 금성방직 안양공장 항공사진. 2016년 5월10일.

49) 김대식. “월급이 나오는 날이 안양에 돈이 도는 날이에요. 다 외상으로 구멍가게에 쌀 얻어다 먹고, 야채도 얻어다 먹고 이렇게 외상 장부를 달 때예요. 월급이 나오면 그걸로 외상 갚고 안양이 그때 활기가 도는, 돈이, 경제가 도는 날이죠. 금성전선 월급 나오는 날 하고, 금성방직 그 대농월급 나오는 날.나중에 태평방직이라는 게 생겼는데, 그런게 세월이 허허.....”

50) 이순무. “경상도 여자들 많이 올라왔어요.”
    안완승. “금성방직이라고 하는 회사는 대구 달성에서 달성군에서 많이 올라왔죠. 왜냐면 그 당시 그 김성권씨인가 달성에 출신이거든요.”

51) 윤성순. “우리 고모가 양진마을이라고 살았는데, 거기서 금성방직 그 쓴다 그래서, 7월 달에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 왔거든요. 그런데 7월 달이 되기 전에...”

52) 안남분. “23살에 올라왔어요, 방직공장에 왔어요, 금성방직이라고. 광목 짜고 그런 회사였었습니다.” “시골서 농사지었죠. 친정아버지 농사지었었죠. 농사 진짜 어려웠죠. 어려우니까 방직공장에 들어가면 돈 번다 그래서 여길 올라온 거에요.” “혼자 왔죠. 여기 와서 출가했어요.”

53) 기사로 본 안양 근대사. 성결대학교 안양학연구소, 2001년 12월31일, 113쪽.

54) 제보자. 조전덕, 안양 비산동, 83세.

55)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안양 태평방직과 1960년대 안양읍내 풍경. 2016년 5월31일.

56) 안남분. “3교대도 하고 2교대도 하고 그랬어요. 2교대 하면 12시간을 밤낮 12시간씩 하고. 3교대 할 땐 8시간씩 했나? 아유, 밤 근무 하면 힘들고. 진짜 그래도 시방 생각하면 그때가 좋아.”

57) DAUM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왕제지주식회사.

58) 안양시사 제3권. 성장 발전하는 안양, 안양시사펀찬위원회, 2008년, 502쪽.

59) DAUM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왕제지주식회사.

60) 박광길. “한국제지하고 삼덕제지하고 종이가 많이 나올 때가 아니에요, 안양천 종이 땔깜을 만들었어요. 염전에서 소금 만들 듯이 화력 좋았죠. 그걸로해서 때고 그랬어요. 말려서 두부 자르듯 잘라서 그걸로 땠어요.”

61) DAUM 까페. 안양동 성원1차 아파트, 기부문화의 상징, 삼덕공원 첫 삽, 2007년 9월20일.

62) 제보자. 김학철, 안양 관양동, 71세.

63) DAUM 워키백과. 동일방직. 2016년 6월1일.

64) 제보자. 조전덕, 안양 비산동, 동일방직근무, 83세.

65) DAUM 워키백과. 단사천, 2016년 4월15일.

66)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안양시 관내 주요 사건 연표, 2016년 9월21일.

67) 한국제지 홈페이지.

68) LG 홈페이지.

69) LS전선 홈페이지.

70) LG화학 홈페이지.

71) DAUM 워키백과. LG그룹, 2016년 12월16일.

72) 제보자. 김길환, 안양 호계동, 71세.

73) 장석재. “박정희 덕분에 한일 나이롱이 선 거 아니에요. 군사혁명이 나면서 나이롱 회사 그 뭐야. 경방하고 어디하고 부정축재를 해서 나이롱 기계 가져온 걸 그 부정축제로 한 거예요. 어따 줬냐면은 박정희가 대한모방, 제일모직. 그리고 영등포에 있는 판본방직 세  섬유회사에다가 권한을 줬어요. 그래가지고 33%씩 가지고  세운거지요.”

74) 기사로 본 안양 근대사. 성결대학교 안양학연구소, 2001년 12월31일, 131쪽.

75) 효성그룹 홈페이지.

76) 안양시사 제3권. 성장 발전하는 안양, 안양시사펀찬위원회, 2008년, 499쪽~502쪽.

77)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안양시 관내 주요 사건 연표, 2016년 9월21일.

78) 제보자. 김학철, 안양 관양동, 71세.

79) 만도 홈페이지.

80) 제보자. 김상태, 안양6동, 만도기계근무, 58세.

81)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1970년대 안양 수암천과 삼영하드보드공장, 2016년 7월7일.

82)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안양시 관내 주요 사건 연표, 2016년 9월21일.

83) 제보자. 김학철, 안양 관양동, 71세.

84) 제보자. 박승범, 시흥 정왕동, 71세.

85) 제보자. 권영관, 서울 금천구, 경남제지근무, 78세.

86) 안양시사 제3권. 성장 발전하는 안양, 안양시사펀찬위원회, 2008년, 502쪽.

87) DAUM 워키백과, 유특한, 2016년 12월10일.

88) 김중업박물관 홈페이지.

89) 대한전선 홈페이지.

90) 중부일보. 대한전선, 혜택 다 받고 안양사옥 건립 포기...‘먹튀’ 놈란. 2017년 1월22일.

91)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1977년 박정희 대통령 안양 수해 현장 방문・현 만안구청, 2016년 5월28일.

92)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1977년 박정희 대통령 안양 수해 현장 방문・현 만안구청, 2016년 5월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