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7월에 촬영한 안양풀의 풍경입니다. 국가기록물보존소에서 발견한 사진으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속으로 간듯 합니다.
안양풀은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일본인 안양역장이던 혼다 사고로(本田貞五郞)가 철도수입 증대와 안양리 개발을 위하여 조한구 서이면장과 야마다(山田) 시흥 군수 및 지역유지들을 설득하여 당시 1,500원의 예산으로 삼성천 계곡을 막아 1933년 개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양풀은 안양유원지로, 현재는 안양예술공원으로 명칭이 바뀌고, 사진속 아름답던 풍광들도 많이 바뀌었지만 사진 앞쪽 자연석 암반에는 '안양 풀 소화 7년 8월 준공(安養 プ-ル 昭和 七年 八月 竣工)'이라는 명문과 '마쓰모도(松本)'라는 공사책임자의 이름이 적힌 기록이 남아 있지요.
안양예술공원의 安養プ―ル(안양 풀)
일제잔재 처리 논란
일제잔재 처리 논란
안양예술공원의 安養プ―ル(안양 풀 pool)
안내판도 없는 일본어 표기 명패석... 역사속 일제 기록 보존 논란
일제강점기 우리 고유 문자인 한글 사용을 금지시켰던 일본은 당시 조성한 건축물과 시설물, 자연석 등에 일본어 표기로 기록을 남겨놓았다. 경술 국치 100년을 맞이하는 오늘날에도 현존하는 일제 잔재의 보존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첨예하게 대립중이다.
2005년 문광부 광복60돌기념 문화사업 추진위원회는 '일제 문화잔재 바로 알고 바로잡기' 공모로 건축.기념물중 러-일전쟁 승전기념 거제도 취도탑, 경부 철도선 터널에 새겨진 일제 문구, 송진포 기념비 등을 선정해 일제 잔재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바 있다.
경기 안양시 안양예술공원. 과거 안양 풀 또는 안양유원지로 불리우던 이곳에도 일제강점기 당시 계곡을 막아 풀장을 조성하고 하천 암반에 한자와 일본어를 섞어 安養プ―ル(안양 풀 pool)'이라고 기록하고 일본 연호와 조성자 이름도 새긴 흔적이 남아있다.
현장을 찾아간 안양예술공원. 공원 입구 주차장을 나와 하천을 오른쪽 도로를 따라 약 100여 미터를 올라 목재 기둥이 끝나는 곳에서 하천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나온다. 하천에 내려서면 바로 정면의 바닥 암반(바위) 옆면에 일본어 표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연석 암반위에 새겨진 글씨를 보면 '안양 풀 소화 7년 8월 준공(安養 プ-ル 昭和 七年 八月 竣工)'이라는 명문과 '마쓰모도(松本)'라는 공사책임자의 이름이 뚜렷하다.
일본식 표기 바위의 존재는 안양시와 지역 향토문화사 관계자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 과거에 있었던 안양 풀 위에 뚝을 쌓았으나 일본식 표기가 쓰인 명패석은 불룩하게 나와 있다. ⓒ 최병렬
안양시사와 안양학연구소 문원식(성결대) 교수에 따르면 안양 풀은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일본인 안양역장이던 혼다 사고로(本田貞五郞)가 철도수입 증대와 안양리 개발을 위하여 조한구 서이면장과 야마다(山田) 시흥 군수 및 지역유지들을 설득하여 당시 1,500원의 예산으로 안양유원지 삼성천 계곡을 막아 1933년 개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 일본인 공무원들과 지역유지들은 이 계곡에 안양 풀을 조성한 후 일종의 명패처럼 안양 풀 준공 일자와 공사책임자 이름을 바위에 새겨 넣은 것으로 보인다.
안양 풀은 1977년 안양 대홍수로 토사와 바위로 뒤덮여 용도가 폐기됐다. 원형은 보존돼 왔으나 2000년 안양유원지 정비사업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만 조성기록을 담은 바위가 뚝위로 돌출돼 '安養(안양)'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도 시멘트로 메워져 관심에서 멀어졌으나 세월이 흘러 시멘트가 떨어져 나가면서 글씨 대부분이 드러난 것이다.
일본어 표기를 한 '안양 풀' 명패석이 알려진 것은 한 네티즌이 지난 달 22일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게시판에 '안양시 공공시설에 일제 잔재 바위 글이 버젓이'라는 제목의 글과 함께 사진을 올리면서다. 이로인해 게시판에서는 찬반 논쟁이 뜨거웠다.
▲ 일본 연호와 풀장을 조성한 공사 책임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최병렬
일부 네티즌들은 "지금까지 방치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글자를 깎아 없애야 한다", "얼른 부셔버려야 한다", "보기만 해도 끔찍하다"며 적지않게 격분했다.
반면 "울화가 치밀지만 역사는 역사다. 옛 사실을 알고 다시는 그런 민족적 불행이 없어야 한다는 각오를 하자", "글자를 깎아낸다고 해서 역사가 바뀌지 않는다", "없애는게 능사는 아니다. 일재 잔재를 기억할 수 있는 유물로 보전하자"는 의견도 다수다.
또 "안내판을 만들어 치욕의 현장입니다. 곱씹고 반성합시다' 라는 문구라도 적어 놨으면 좋겠다", "일제 잔재를 통해 역사를 상기시키기 위해서라면 바위에 설명을 달아서 교육 자료로 사용해야 한다"며 안내판 조차 없는 안양시를 지적하는 글도 적지 않다.
안양시는 암반에 새겨진 글씨를 어떻게 할지 고민중이다. 시 관계자는 "일제 강점기때 안양 풀을 조성하면서 바위에 새긴 것으로, 일제 잔재이나 당시의 역사를 기록한 하나의 유물이자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록이기에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안양 풀이 있던 안양유원지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70년대까지만 해도 대단한 명소였다. 1960년대 말 피서철에는 안양유원지 입구에 기차 임시 승강장이 설치했고, 70년대 여름철 휴일에는 하루 5만 명의 피서객이 찾은 것으로 신문들은 기록하고 있다.
[ 과거의 안양유원지와 안양 풀 그리고 현재의 안양예술공원 ]
▲ 지금은 흔적이 사라진 안양 풀 전경 1969년 안양에 주둔했던 주한미군이 촬영한 '안양 풀' 칼라슬라이드 사진이다. 아래가 제1풀(성인용), 위가 제2풀(어린이용)이며, 왼쪽으로는 휴게용 돌계단 놓여 있었다. 앞에 두사람이 서 있는 바위가 현재의 명패석으로 추정된다. ⓒ 닐 미샬로프
1933년 개장한 '안양 풀'은 바위돌과 콘크리트로 뚝을 쌓아 성인용과 어린이용 2조의 천연수영장을 만들고 계곡 양쪽에 계단식으로 돌을 쌓아 피서객들이 휴식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뚝에는 청소 등을 위해 물을 빼낼 수 있는 일종의 문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풍부한 수량과 숲으로 1920년 부터 여름철 피서지였던 삼성천 계곡에 공짜 천연풀장이 생기자 인기는 폭발적이다. 1960년대 유료수영장이 서너개 생기자 1970년대에는 한 해 평균 100만 명이 몰리는 서울과 수도권 인근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과 명성을 날렸다.
관보를 보면 1966년 여름피서철인 8월 6일-28일까지 토요일.공휴일에 경부선 안양 풀 임시승강장(시흥~안양역, 안양풀입구)이 운영됐으며, 1967년에는 7월 14일부터 8월 20일까지 여객을 받는 등 안양 풀 임시승강장은 1969년에도 운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안양지역 원로인 변원신(78) 선생은 1933년 안양 풀이 생기자 당시 "일제가 서울에서 안양풀행 철도를 운영했다"도 증언하고 있어 안양 풀의 유명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해방 이후 서울과 수도권 시민들의 피서지로 이어져 1967년 7월29일자 <매일경제>에 안양유원지에는 하루 평균 4만여명(일요일 10만)의 피서객이 몰리고 서울에서 당일코스로 40원이면 왕복할 수 있고, 기차도 매시간마다 입구에 정차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1963년 7월17자 <동아일보>에는 국립도서관이 피서객을 위해 안양유원지 풀장에 7월26일부터 8월14일까지 임간문고를 설치해 운영했으며, 1968년 6월8일자 <동아일보>에는 체신부가 6월10일부터 8월30일까지 안양우체국 임시출징소를 운영한 기록도 있다.
1976년 3월25일자 <경향신문>에는 안양유원지에 해마다 100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자 입장료를 받기로 했다는 기록도 있다.
안양 풀이 쇠락의 계기를 맞은 것은 1960년대 말 상류에 대형풀장, 맘모스풀장, 만안각 풀장 등 인공풀장이 들어서고, 또 행락객들이 버린 오물들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면서 자연하천인 삼성천이 오염되어 자연풀장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부터다.
또 1969년 1월 21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입구에 아치모양의 철구조물로 '안양유원지'라는 간판이 나붙고 '안양 풀' 대신 '안양유원지'라는 명칭을 처음 쓰기 시작했으며 경기도관광협회 안양유원지지부가 결성되어 입장 수입으로 유원지를 관리하게 된다.
그러나 1971년 7월 30일 개발제한구역(일명 그린벨트)으로, 1973년에는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건축 및 재건축이 억제되는 특별관리하에 들어가면서 발길이 뚝 끊긴다.
더욱이 1977년 사상 유례없는 안양 대홍수는 기존 안양유원지 계곡의 경관을 참혹하게 파괴하고 지나갔다. 이로인해 안양 풀은 상류에서 내려온 토사와 자갈, 대형 바위돌로 메꾸어지고 휩쓸리며 완전히 자취를 감춰서 결국 잊혀져 버리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잃어버린 안양유원지는 이후 계곡을 넘칠 정도로 풍부하던 수량도 줄어들면서 인적이 끊긴 유원지로 전락하자 결국 교통부는 1984년 11월 28일 국민관광지 지정을 취소했으며, 안양유원지의 번창과 영화는 지난 추억의 이야기가 됐다.
안양시는 1994년 유원지의 명성을 되찾고, 지역경제활성화 및 지역개발 차원에서 다시금 바라보기 시작했다. 특히 1995년 지방자치의 실시로 민선시장체제가 출범하면서 유원지 정비 및 개발계획은 주요 공약의 하나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된다.
안양시는 2005년 APAP(공공예술프로젝트) 사업을 통해 안양유원지를 단순 휴식공간 차원을 넘어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고 거기에 예술까지 결합된 국제적 명소로의 완전 탈바꿈을 시도했으며, 명칭공모를 통해 2006년 '안양예술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하지만 2000년 안양유원지 정비사업 과정에서 보존보다는 개발에 치중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던 안양 풀의 둑과 계곡 양 측면으로 조성된 돌계단의 휴식공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제 바위에 새겨진 안양풀(安養プ―ル)'이라고 쓰인 기록만 남았다.
▲ 과거 안양유원지에 있던 안양풀장의 조성 사실을 바위에 기록한 安養プ―ル(안양 풀 pool) ⓒ 최병렬
안내판도 없는 일본어 표기 명패석... 역사속 일제 기록 보존 논란
일제강점기 우리 고유 문자인 한글 사용을 금지시켰던 일본은 당시 조성한 건축물과 시설물, 자연석 등에 일본어 표기로 기록을 남겨놓았다. 경술 국치 100년을 맞이하는 오늘날에도 현존하는 일제 잔재의 보존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첨예하게 대립중이다.
2005년 문광부 광복60돌기념 문화사업 추진위원회는 '일제 문화잔재 바로 알고 바로잡기' 공모로 건축.기념물중 러-일전쟁 승전기념 거제도 취도탑, 경부 철도선 터널에 새겨진 일제 문구, 송진포 기념비 등을 선정해 일제 잔재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바 있다.
경기 안양시 안양예술공원. 과거 안양 풀 또는 안양유원지로 불리우던 이곳에도 일제강점기 당시 계곡을 막아 풀장을 조성하고 하천 암반에 한자와 일본어를 섞어 安養プ―ル(안양 풀 pool)'이라고 기록하고 일본 연호와 조성자 이름도 새긴 흔적이 남아있다.
현장을 찾아간 안양예술공원. 공원 입구 주차장을 나와 하천을 오른쪽 도로를 따라 약 100여 미터를 올라 목재 기둥이 끝나는 곳에서 하천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나온다. 하천에 내려서면 바로 정면의 바닥 암반(바위) 옆면에 일본어 표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연석 암반위에 새겨진 글씨를 보면 '안양 풀 소화 7년 8월 준공(安養 プ-ル 昭和 七年 八月 竣工)'이라는 명문과 '마쓰모도(松本)'라는 공사책임자의 이름이 뚜렷하다.
일본식 표기 바위의 존재는 안양시와 지역 향토문화사 관계자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 과거에 있었던 안양 풀 위에 뚝을 쌓았으나 일본식 표기가 쓰인 명패석은 불룩하게 나와 있다. ⓒ 최병렬
안양시사와 안양학연구소 문원식(성결대) 교수에 따르면 안양 풀은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일본인 안양역장이던 혼다 사고로(本田貞五郞)가 철도수입 증대와 안양리 개발을 위하여 조한구 서이면장과 야마다(山田) 시흥 군수 및 지역유지들을 설득하여 당시 1,500원의 예산으로 안양유원지 삼성천 계곡을 막아 1933년 개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 일본인 공무원들과 지역유지들은 이 계곡에 안양 풀을 조성한 후 일종의 명패처럼 안양 풀 준공 일자와 공사책임자 이름을 바위에 새겨 넣은 것으로 보인다.
안양 풀은 1977년 안양 대홍수로 토사와 바위로 뒤덮여 용도가 폐기됐다. 원형은 보존돼 왔으나 2000년 안양유원지 정비사업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만 조성기록을 담은 바위가 뚝위로 돌출돼 '安養(안양)'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도 시멘트로 메워져 관심에서 멀어졌으나 세월이 흘러 시멘트가 떨어져 나가면서 글씨 대부분이 드러난 것이다.
일본어 표기를 한 '안양 풀' 명패석이 알려진 것은 한 네티즌이 지난 달 22일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게시판에 '안양시 공공시설에 일제 잔재 바위 글이 버젓이'라는 제목의 글과 함께 사진을 올리면서다. 이로인해 게시판에서는 찬반 논쟁이 뜨거웠다.
▲ 일본 연호와 풀장을 조성한 공사 책임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최병렬
일부 네티즌들은 "지금까지 방치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글자를 깎아 없애야 한다", "얼른 부셔버려야 한다", "보기만 해도 끔찍하다"며 적지않게 격분했다.
반면 "울화가 치밀지만 역사는 역사다. 옛 사실을 알고 다시는 그런 민족적 불행이 없어야 한다는 각오를 하자", "글자를 깎아낸다고 해서 역사가 바뀌지 않는다", "없애는게 능사는 아니다. 일재 잔재를 기억할 수 있는 유물로 보전하자"는 의견도 다수다.
또 "안내판을 만들어 치욕의 현장입니다. 곱씹고 반성합시다' 라는 문구라도 적어 놨으면 좋겠다", "일제 잔재를 통해 역사를 상기시키기 위해서라면 바위에 설명을 달아서 교육 자료로 사용해야 한다"며 안내판 조차 없는 안양시를 지적하는 글도 적지 않다.
안양시는 암반에 새겨진 글씨를 어떻게 할지 고민중이다. 시 관계자는 "일제 강점기때 안양 풀을 조성하면서 바위에 새긴 것으로, 일제 잔재이나 당시의 역사를 기록한 하나의 유물이자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록이기에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안양 풀이 있던 안양유원지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70년대까지만 해도 대단한 명소였다. 1960년대 말 피서철에는 안양유원지 입구에 기차 임시 승강장이 설치했고, 70년대 여름철 휴일에는 하루 5만 명의 피서객이 찾은 것으로 신문들은 기록하고 있다.
[ 과거의 안양유원지와 안양 풀 그리고 현재의 안양예술공원 ]
▲ 지금은 흔적이 사라진 안양 풀 전경 1969년 안양에 주둔했던 주한미군이 촬영한 '안양 풀' 칼라슬라이드 사진이다. 아래가 제1풀(성인용), 위가 제2풀(어린이용)이며, 왼쪽으로는 휴게용 돌계단 놓여 있었다. 앞에 두사람이 서 있는 바위가 현재의 명패석으로 추정된다. ⓒ 닐 미샬로프
1933년 개장한 '안양 풀'은 바위돌과 콘크리트로 뚝을 쌓아 성인용과 어린이용 2조의 천연수영장을 만들고 계곡 양쪽에 계단식으로 돌을 쌓아 피서객들이 휴식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뚝에는 청소 등을 위해 물을 빼낼 수 있는 일종의 문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풍부한 수량과 숲으로 1920년 부터 여름철 피서지였던 삼성천 계곡에 공짜 천연풀장이 생기자 인기는 폭발적이다. 1960년대 유료수영장이 서너개 생기자 1970년대에는 한 해 평균 100만 명이 몰리는 서울과 수도권 인근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과 명성을 날렸다.
관보를 보면 1966년 여름피서철인 8월 6일-28일까지 토요일.공휴일에 경부선 안양 풀 임시승강장(시흥~안양역, 안양풀입구)이 운영됐으며, 1967년에는 7월 14일부터 8월 20일까지 여객을 받는 등 안양 풀 임시승강장은 1969년에도 운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안양지역 원로인 변원신(78) 선생은 1933년 안양 풀이 생기자 당시 "일제가 서울에서 안양풀행 철도를 운영했다"도 증언하고 있어 안양 풀의 유명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해방 이후 서울과 수도권 시민들의 피서지로 이어져 1967년 7월29일자 <매일경제>에 안양유원지에는 하루 평균 4만여명(일요일 10만)의 피서객이 몰리고 서울에서 당일코스로 40원이면 왕복할 수 있고, 기차도 매시간마다 입구에 정차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1963년 7월17자 <동아일보>에는 국립도서관이 피서객을 위해 안양유원지 풀장에 7월26일부터 8월14일까지 임간문고를 설치해 운영했으며, 1968년 6월8일자 <동아일보>에는 체신부가 6월10일부터 8월30일까지 안양우체국 임시출징소를 운영한 기록도 있다.
1976년 3월25일자 <경향신문>에는 안양유원지에 해마다 100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자 입장료를 받기로 했다는 기록도 있다.
안양 풀이 쇠락의 계기를 맞은 것은 1960년대 말 상류에 대형풀장, 맘모스풀장, 만안각 풀장 등 인공풀장이 들어서고, 또 행락객들이 버린 오물들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면서 자연하천인 삼성천이 오염되어 자연풀장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부터다.
또 1969년 1월 21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입구에 아치모양의 철구조물로 '안양유원지'라는 간판이 나붙고 '안양 풀' 대신 '안양유원지'라는 명칭을 처음 쓰기 시작했으며 경기도관광협회 안양유원지지부가 결성되어 입장 수입으로 유원지를 관리하게 된다.
그러나 1971년 7월 30일 개발제한구역(일명 그린벨트)으로, 1973년에는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건축 및 재건축이 억제되는 특별관리하에 들어가면서 발길이 뚝 끊긴다.
더욱이 1977년 사상 유례없는 안양 대홍수는 기존 안양유원지 계곡의 경관을 참혹하게 파괴하고 지나갔다. 이로인해 안양 풀은 상류에서 내려온 토사와 자갈, 대형 바위돌로 메꾸어지고 휩쓸리며 완전히 자취를 감춰서 결국 잊혀져 버리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잃어버린 안양유원지는 이후 계곡을 넘칠 정도로 풍부하던 수량도 줄어들면서 인적이 끊긴 유원지로 전락하자 결국 교통부는 1984년 11월 28일 국민관광지 지정을 취소했으며, 안양유원지의 번창과 영화는 지난 추억의 이야기가 됐다.
안양시는 1994년 유원지의 명성을 되찾고, 지역경제활성화 및 지역개발 차원에서 다시금 바라보기 시작했다. 특히 1995년 지방자치의 실시로 민선시장체제가 출범하면서 유원지 정비 및 개발계획은 주요 공약의 하나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된다.
안양시는 2005년 APAP(공공예술프로젝트) 사업을 통해 안양유원지를 단순 휴식공간 차원을 넘어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고 거기에 예술까지 결합된 국제적 명소로의 완전 탈바꿈을 시도했으며, 명칭공모를 통해 2006년 '안양예술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하지만 2000년 안양유원지 정비사업 과정에서 보존보다는 개발에 치중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던 안양 풀의 둑과 계곡 양 측면으로 조성된 돌계단의 휴식공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제 바위에 새겨진 안양풀(安養プ―ル)'이라고 쓰인 기록만 남았다.
▲ 과거 안양유원지에 있던 안양풀장의 조성 사실을 바위에 기록한 安養プ―ル(안양 풀 pool) ⓒ 최병렬
2010-08-14 22:4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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