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오숙경]안양 구도심,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들(2025.11.13)

안양똑딱이 2025. 11. 14. 18:34

 

2025.11.13/ #담론 #글 #오숙경 #안양

안양의 오래된 골목을 걷다 보면, 도시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 있습니다.
차곡차곡 쌓인 시간의 냄새, 오래된 기와에 내려앉은 햇볕,
시장 골목을 채우던 소리, 그리고 그 속을 살아온 사람들의 사연들.
그 모든 것이 이 도시의 얼굴이자, 우리가 매일 무심히 스쳐 지나가던 풍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 얼굴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재개발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시간의 톱니가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오래된 도시의 결은 어느새 얇게 갈려 나가고 있습니다.
많은 시민들은 “경제적 이익이 크다”는 이유로 재개발을 당연한 미래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역을 사랑하는 건축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얻는 것이 있으면, 분명 잃는 것도 있습니다.’
■ 우리가 잃을지 모르는 것들
재개발은 오래된 건물을 지우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억을 지우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낡은 벽돌 외벽, 굽은 계단, 창문을 통해 맺히던 이웃의 그림자,
밤마다 불이 켜지던 작은 공방과 식당,
동네 어귀에서 서로 안부를 묻던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이 모든 것이 도시가 가진 소중한 시간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재개발은 이 작은 단위의 접점을 모조리 평탄화합니다.
개성 있는 골목은 하나의 큰 블록으로 흡수되고,
사람들이 엮어냈던 관계망은 대형 아파트 단지의 담장 옆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지역성은 거대한 콘크리트 더미 아래 묻히고,
남는 것은 그저 ‘일관되게 서 있는 아파트들’뿐입니다.
그때부터 도시의 풍경은 더 이상 산업발전기를 거쳐간 ‘안양’이 아니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 모습’이 됩니다.
■ 도시는 콘크리트의 높이가 아니라, 사람이 남긴 흔적으로 채워집니다
도시는 원래 완성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끊임없이 이어지고, 누군가의 손길을 조금씩 받아들이며,
세월에 따라 스스로를 조정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오래된 골목의 한옥 한 채,
좁은 길 위에 드리운 나무 한 그루,
5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가게의 간판 하나가
도시의 시간을 단단하게 붙잡아 줍니다.
서울 종로, 익선동, 서촌, 성수동을 다시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화려한 빌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곳에 ‘걸어 다닐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안양도 그럴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그런 잠재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 그것을 ‘없애지 않는 용기’가 필요할 뿐입니다.
■ 아파트가 도시의 전부가 되는 순간, 우리는 지역을 잃습니다
아파트는 편리하고 안전하며 효율적인 주거 방식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도시를 구성하는 모든 삶의 층위를 아파트 한 종류로 통일하려 한다면, 그 순간부터 도시는 다양성을 잃고, 개성을 잃고, 결국 도시로서의 매력을 잃습니다.
모든 구도심이 동일한 방식으로 재개발되어
대단지 아파트로 치환되는 순간,
우리는 창밖을 볼 때마다
‘도시의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획일화’를 보고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 도시의 미래는 ‘전면 철거’가 아니라 ‘시간의 공존’에 있다
오늘 우리는 중요한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안양은 어떤 도시가 되어야 하는가?”
경제적 이익만을 쫓는다면,
도시는 단기적 이득과 장기적 상실 사이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역의 역사성과 기억을 지키며 발전하는 길은
우리를 더 건강한 미래로 이끌 수 있습니다.
오래된 골목과 건물의 시간성을 보존하고
저층·중층 중심의 사람 크기의 도시를 만들며
지역 가게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작은 틈들을 남기고
시민이 직접 걸으며 느낄 수 있는 도시를 지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안양이 지향해야 할
‘지역을 가진 도시’, ‘시간이 흐르는 도시’,
그리고 ‘사람이 머물고 싶은 도시’의 방향일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재개발이 우리에게 기대감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선택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어떤 도시를 만들게 될지
한 번쯤은 조용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도시는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 도시가 기억을 잃은 도시가 될지,
시간을 간직한 도시가 될지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지킬지, 무엇을 바꿀지에서 결정됩니다.
안양 구도심은 그저 ‘낡은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안양의 시간이고,
안양 사람들의 삶의 무늬이며,
앞으로도 이어져야 할 우리 도시의 뿌리입니다.
모든 지속가능한 삶과 다양성이 공존하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01
 
2025.11.13
 
건축사 오숙경
 
 

편집자주:

에이엔오건축사사무소 대표인 오숙경 건축사는 안양 출신(1975년생)으로 안양여고, 경기대학교,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를 졸업했다. 현재 안양지역건축사회 회원이며, 안양시 건축문화제 위원, 경기대학교 초방교수, 더불어민주당 안양시 만안구 지역위원회 공공건축위원장으로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