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31./ #아카이브 #기록 #탁본 #유리건판 #since1931/ 안양사 칠층탑명 탁본
일제강점기 당시인 1931년 유리 건판으로 기록한 안양사 칠층탑명 탁본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안양시향토문화사료에 따르면 이 비문(碑文)은 삼국사기( 三國史記)의 저자인 김부식(金富輯)이 지은 것으로 대동금석서(大東金石)에 탁본(招本)만이 실려 있다. 이 비문은 안양사(安養寺)에 관한 비문은 분명하지만 왕건이 안양사를 창건할 당시 세웠던 칠층 벽돌탑을 위한 탑비(搭牌)는 아니고 그 당시 이 절의 고승인 속성 고씨(高氏)를 위한 비가 아닌가 생각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재질: 유리
크기: 가로 25.2cm, 세로 30.3cm
소장품번호: 건판 16995
촬영연도: 1930 ~ 0
건판크기: 대판
소장품설명원판번호 D300206.
1931년 촬영. 탁본 안양사 칠층탑명.
연관단어 #건판16995번
"중초사지(中初寺址)→ 안양사지 (安養寺址)→ 포도밭 → 유유 산업 → 안양 박물관"
1. 중초사 터(中初寺址)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삼층석탑(三層石塔)
☞당간지주는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 깃대)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말함
ⓐ약 1200년 전인 827년에 세운 중초사 터(中初寺址) 당간지주(幢竿支柱)
▶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삼층석탑(三層石塔) 옆에 있으며, 지주(돌기둥)는 85cm의 간격을 두고 동ㆍ서(東西)로 세워져 있음
▶높이는 약 3.8m로 특별한 조각이 없으나 상부(上部)에 약간의 가공(加工)이 있어 옛 형식(古式)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음
▶이곳을 중초사 터(中初寺址)라고 하는 것은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에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쓴 글에 826년(신라 흥덕왕 1) 8월 6일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 30일에 완성했다고 표기됨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희귀한 예로, 만든 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당간지주로 보물로 지정됨
ⓑ 중초사지 삼층석탑
▶고려 시대(高麗時代)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높이 222cm)은 원래 당간지주에서 동북쪽으로 약 60m 떨어진 지점의 중심공간으로 추정되는 곳에 무너져 있었는데, 1959년 유유 제약의 전신인 유유산업의 안양 공장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움.
▶옥개석(屋蓋石, 돌지붕) 사이의 2층과 3층 탑신이 사라짐
2. 10세기 안양사 중창(重創) 및 안양사로 이름 바뀜
10세기 초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하여 중초사는 안양사로 바뀌게 되었고 안양사지 발굴 시 중초사의 건물지와 관련한 초석과 유물, 안양사란 기와 파편이 확인됨
3. 안양사 자료(도은집, 여지승람, 대각국사 문집)
고려 태조(왕건, 877~943))가 반항하는 자들을 정벌하려고 행차할 적에 이곳을 지나가다가 산머리의 구름이 오색찬란한 것을 바라보고는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사람을 시켜 그곳에 가서 살펴보게 하였답니다. 그러고는 구름 아래에서 능정(能正)이라는 이름의 노승(老僧)을 만나 그와 이야기를 해 보았더니 뜻이 맞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 절이 세워진 유래입니다. -도은집(이숭인, 1349~1392) 4권-
고려 고종 때 안양사에 있던 승군(僧軍)이 최충헌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다 파괴된 안양사가 시중(侍中, 현재 국무총리)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의 안양사 7층 전탑 중수(重修)와 낙성식에 왕이 내시를 보내어 향을 내리고 사리 12과(顆)와 부처 치아(佛牙) 하나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이때 공사에 보시한 사중(승려 + 신도)이 3000명이었다. -도은집(이숭인)-
1383년 탑 내부의 사방 벽에 동쪽에는 약사회(藥師會), 남쪽에는 석가 열반회(釋迦涅槃會), 서쪽에는 미타 극락회(彌陀極樂會), 북쪽에는 금경 신중회(金經神衆會)를 그렸으며, 회랑(回廊)의 12칸에는 하나의 벽마다 하나의 형상을 그려서 이른바 십이행년불(十二行年佛)을 이루었습니다. -도은집(이숭인)-
ⓑ안양사(安養寺)는 삼성산에 있다. 안양사 남쪽에 고려 태조(太祖)가 건립한 7층 전탑(甎塔)이 있는데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쓴 비문(碑文)의 글자가 마모되었다. -여지승람-
ⓒ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이곳에 와서 능정(能正)의 진영(영정)을 참배하고 조사당(祖師堂)에서 경전을 읽고 가기도 했다.-대각국사 문집 17권-
4. 없어진 7층 전탑(벽돌 탑)
ⓐ 10세기 경 건립했으나 현재 소실되어 없고 안양 박물관과 김중업 건축 박물관 사이에 전탑이 있던 장소로 추정함
ⓑ 1131년 7층 탑명(塔銘, 탑에 새긴 글) 일부 –이우의 대동금석서(1668년)-
ⓒ1382년에 칠층 전탑(벽돌탑) 중수
절의 남쪽에 기와로 덮고 벽돌로 쌓은 7층 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래의 한 층은 12칸의 회랑(回廊)으로 둘렀는데, 하나의 벽마다 불(佛)ㆍ보살(菩薩)ㆍ인(人)ㆍ천(天)의 형상을 그려놓았으며, 그 외부에는 난간을 세워서 출입을 제한하였으니, 거대하고 화려한 장관은 다른 사원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도은집(이숭인)-
5. 조선시대 자료
ⓐ 1406년 (태종 6) 어가(御駕)가 금주(衿州, 시흥+ 안양) 안양사(安養寺) 남교(南郊)에 머물렀다. 좌정승 하윤(河崙) 등이 어가를 기다려서 향연을 베풀고자 하였는데, 임금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중지시키고, 또 하윤 등을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조선왕조실록-
ⓑ1411년(태종 11) 상왕(上王)이 금주(衿州) 안양사(安養寺)에 거동하였으니, 목욕하고자 함이었다. 처음에는 충청도 온수(溫水)에 가고자 하였으나, 정부에서 정지하기를 청하는 뜻을 알고 드디어 금주로 나갔다. 세자(世子)가 강가에서 전송하고 인하여 동교(東郊)에 나갔다.-조선왕조실록-
ⓒ 1448년(세종 30)이 폐사 직전 상태인 안양사를 중수하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극구 반대, 1450년(문종 1) 때에도 신하들 반대로 중수하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
ⓓ 안양사에서 자고 이튿날 앞 시내에서 물고기를 잡고 남쪽으로 가는 채수(蔡壽, 1449~1515)를 보내다. 宿安陽寺翌日捕魚前溪送耆之南行 -용재총화를 쓴 성현(1439~1504)의 글에 보이는 안양사-
ⓔ 금천 안양면 염불암(念佛庵) 아래에는 깨어진 안양사비(安養寺碑)가 있는데 이것은 고려 초의 것이다. -이덕무(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안양사(安養寺)는 삼성산에 있다. 안양사 남쪽에 고려 태조(太祖)가 건립한 7층 전탑(甎塔)이 있는데 김부식(金富軾)이 찬한 비문(碑文)의 글자가 마모되었다. 고려 말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승(僧) 혜겸(惠謙)을 시켜 중수하게 하였고 이숭인(李崇仁)이 기문을 지었는데 지금은 모두 퇴락하고 유허(遺墟)만 남아 있다. 안양사 동쪽 산기슭에 또 옛 비석이 있는데, 고려 명필 이원부(李元符)가 글을 쓴 것으로 자획이 매우 단정하고 엄밀하며 굳세고 예스럽다.-여지도서(1765년)-
ⓖ 해동지도(18세기, 1724~1776년 사이에 발간)에 안양사가 삼성산 남쪽에 있고 고려 태조가 7층 전탑을 재건했다고 적혀있음
ⓗ 안양사 금폐(今廢, 현재는 사라짐) -범우고(梵宇攷) 1799년-
6. 근· 현대
일제 강점기에는 포도밭으로 변한 이곳에 1959년에 유유 산업의 안양공장이 들어섰고, 이 공장이 충북 제천시로 이전한 뒤 2006년 이곳을 박물관으로 리모델링 하려고 했지만 당시 근처에 중초사(中初寺, 통일 신라 사찰)의 당간지주와 탑이 있는 것에 주목하여 발굴조사를 실시, 건물 터(금당, 전탑지, 회랑 등)가 발견되었고, 이곳에서 "안양사"라 적힌 기와가 발견되어 고려의 안양사의 터인 것이 밝혀졌음.
결국 중초사에서 안양사로 다시 유유 산업으로 갔다가 현재 안양 박물관(김중업 건축 박물관 포함)으로 바뀜.
II . 칠층전탑
안양사와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할 만한 유물이 가지 었다 탑과 비가 그것인데 유물의 잔존 상태와 기록의 착오 내지는 오목으로 그 실체가 모호한 상태이다. 현재 새롭게 발견된 유물이나 기록은 없지만/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합리적으로 재해석 해보기로 한다.
탑/ 비에 관해 발견되는 최초의 기록은 15~6세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安養놓(在三聖山춤之南有高麗太祖所建七層觀搭金富輯擺牌字缺)28) 이를 문자 그대로 읽으면y “안양사(삼성산에 있다. 고려 태조가 세운 칠층전탑이 있다. 김부식이 찬술한 비는 글자가 결락되었다.)”가 된다. 이 기록을 문자에 얽매어 무심코 읽으면 칠층전탑과 비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물은 분리해서 읽는 것이 옳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탑에 관한 기(記)가 있을 수는 있지만/ 비(牌)와 명(銘)이 따르는 예는 없다. 절에서 비명은 승려의 사리를 모시는 부도탑에 따르는 것이 상례이다. 이를 전제하고 이 항에서는 먼저 칠층전탑에 관해 살펴본다.
이에 관한 기록은 이숭인의 〈금주 안양사탑 중신기>가 기본이 된다. 탑의 건립은 절의 창건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한데/ 그 시기는 고려 태조 개국 초 후삼국 통일 전인 918년 ∼ 936년 사이가 된다. 항복하지 않는 자를 정복하러 왕건이 직접 출전한다는 사실/ 정복 전쟁의 승리를 둡는 비보처로서 승려의 자문을 받아 안양사와 탑을 지었다는 사설/ 안양이 정복 전쟁의 걸목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좀 더 26) *}道鉉, 〈安養놓記〉에는 갑오년(1954) 으로 되어 있고, 명부전 상량기에는 엄진년(1952) 으로 되어 있다.(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1998년 전게셔 83 84쪽) 이때의 사찰 재건축이 이루어진 얼마 후인 1956 년에는 안양사 정문 앞에 김창룡의 묘가 仙遊園이란 이름으로 조성되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과 능정의 ‘비보풍수처’치고는 기이한 생각이 든다. 더구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를 거쳐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사학계를 쥐고 혼들던 이병도가 이 혼란기에 근 만 천명을 처단하는 ‘혁혁한’ 공을 세운 김창룡 추모 글을 짓고, 후대 군사정권의 핵심 정일권이 묘비를 세웠다는 샤설도 심상치 않다. 어쨌든 이 기묘한 풍수 배치가 세간의 이목에 오르내리자 음택을 대전으로 옮기기에 이르렀으니, 이제 안양사가 비보풍수처의 본래 위치를 되찾은 셈이다
27)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1998 년 상게서 83 88쪽 참조
28) 〈〈신증동국여지승람〉>권 10 금천 불우
시기를 좁혀보면/ 통일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936년의 천안I 선산으로 이어졌던 일리천 전투를 제외하고 홍성/ 온양/ 목천, 천안/ 청주/ 충주 방면 등 충청도 지역 정벌이나 순행에 직접 나선 927 r 928년/ 930년/ 934년이 떠오른다. 이 중 930년에는 목천에 행차
하고, l 서두솔을 합쳐 천안도독부를 설치하는데,29) 이와 관련해서는 〈<세종설록지리지〉〉에 다음과 같은 민간의 이야기가 전한다. 술사 예방(藝츄~)이 태조에게 아뢰기를/ 3국의 중심으로 다섯 마리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셰이므로 큰 관부를 설치하면 백제가
저절로 항복할 것이라 하니/ 태조가 이에 산에 올라 둘러보고 비로소 천안부를 설치했다 한다‘ 이 이러한 정황을 근거로 이 탑의 건립시기를 930년 경으로 비정해둔다.건립은 태조 왕건의 시주에 의해 능정(能正)의 감독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능정은 개국 비보 공로로 승통에 추대되어 역대 왕을 비롯한 고승의 추앙을 받아왔는데/ 창건 후 200년이 지난 인종 (1131) 에 이르러 칠층전탑비로 오인되어왔던 /일명탑비 가 건립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항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r 여기서는 이 칠층전탑이 일명탑비l 건립의 근거가 되었다는 점만을 확인해두기로한다.
이 탑의 대대적인 중건이 이루어진 것은 건립 후 450여 년이 지난 고려말 우왕 년 신유(1381) 의 일이었다. 즉 칠층전탑은 이 해 월 당시 안양사 주지 혜겸(惠讓)의 발의와 시중 최공(崔公)의 합의에 따라 중건 계획이 결정된 뒤/ 월에 기공하여 월에 준공되고 10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이 날 우왕은 내시 박원계(朴元桂)를 보내어 향을 내리고l 승려 1,000명으로 큰 불사를 열어 사리 12개와 불아를 탑 안에 봉안한 y 무려 3,000명의 백성들에게 보시하였다. 이듬해 엄술년 월에 단청을 올리고/ 그 다음해 계해년 월에 벽화와 불상 설치를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짓게 된다. 투입된 총 노동력과 비용은 역도 400여명l 쌀 595석/ 콩 200석/ 베 1,155필이었는데l 이는 최영의 알선에 따라 양광도의 군자전에서 조(租)를 차감하여 비용에 충당하고r 정부(T 夫)를 징발하였으며 여기에 안양사 비축분과 단월의 회사로 l y 돈/ 베 약간을 마련하였고, 여유가 있는 승도 약간명의 손을 벌어 보충하였다.
탑의 중건이 완료된 후 안양사 주지 혜겸은 그의 스승이며 당시 자은종사 양가도승통이던 임공(林公)의 소개로 도은 이숭인에게 기록을 부탁하니/ 이것이 현재까지 안양사의 내력을 가장 소상하게 전해주는 〈금주안양사탑중신기>인 것이다.
당시 안양사 성격과 관련하여 이번의 탑 중건 과정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최공과 임공이다. 여기서 최공은 이 시기인 고려 우왕 년에 수시중(守待中)에 오르면서 그 부친 순충(純忠)이 아량염검보셰익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판문하사 영예문춘추관사 상호군 동원부원군에r 그 모친 지씨(智民)가 삼한국대부인에 추증된 최영(崔瑩)31)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안양사와의 인연과 칠층전탑의 중건 동기이다.
29) 〈〈高麗史〉〉권 1 세가 1 태조 13 년 월
30) 〈〈世宗實錄〉〉권 149 지리지 충청도 천안군
31) 〈〈高麗史〉〉 113 列傳26 崔瑩. 〈〈범우고〉〉에서는 최영의 이름을 밝혀놓고 있다.
중신기에 의하면l 최영은 당시 안양사 주지 혜겸의 방문을 받고 탑의 중건을 권유받자/ 어릴 때 이 탑 아래서 하루 밤을 유숙한 적이 있는데 이때 태조 왕건이 국가 기초를 연 것을 우려러 생각하고 출세하면 이 탑을 중건할 것을 하늘의 신령을 두고 스스로 맹세하였다고 말하며 승낙하고 있다. 또 이 거대한 역사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최영의 맹세 덕이라고 공로를 치하하면서 최영이 오로지 나라의 복리를 추구한 결과일 뿐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님을 부연하고 있다.
이 기록을 액면 그대로 읽으면/ 최영과 안양사의 인연은 /어릴 때 탑 아래서 유숙한과 주지 혜겸의 중건 권유를 받은 것으로 정리된다. 어린 시절 사찰 방문은 기록이 없어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I 아마도 사학에서 과거 준비하던 어느 여름의 하과(夏課) 기간 중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32) 최영의 본관은 동주(철원)이고, 모친 지씨의 본관은 봉산일 가능성이 크며,33) 최영의 음택은 고양에 마련되어 있어 안양과의 지리적 공간을 고려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주지 혜겸의 권유를 받게 된 더 큰 이유는 다음 항에서 일명탑비명의 주체로 추측되는 창건 화주 능정의 본관이 동주였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칠층전탑 중건 동기와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그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기록대로라면 동기는 오로지 태조 왕건의 개국 공로를 기리고 나라의 복리를 추구함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기문 찬술자인 이숭인이 구태어 최영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부연하고 있는점은 여말선초 왕조 이행과정에서 그가 겪은 파란만장한 정치적 역정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는 고려 후기 권문셰족의 하나인 철원 최씨 가문 출신으로 신돈을 등용한 공민왕의 개혁 때 설각했다가 신돈 몰락 후 복귀하였다. 공민왕이 암살된 후 새로 성장한 신진사류 출신 권세가 이인임과 연합하여 우왕을 즉위시키고/ 이어 권력을 전횡하던 지윤r 임견미I 염흥방을 숙청하며 나아가 이인임까지 축출하여 이성계와 함께 정계의 주역 자리를 유지하다가 위화도 회군으로 귀양가면서 정치적 생명을 다하게 된다,34)
즉 그는 고려 국가 위기의 주요 책임자인 권문셰족 출신으로/ 새로 성장하는 신진사류의 개혁 요구를 수렴하는 한편 그들의 전횡을 견제함으로써 고려 국가를 끝까지
지키면서 운명을 같이 해야 했던 지극히 힘겨운 위치에 있었다. 당연히 그에게는 고려국가의 정통성을 부각시키는 대의명분이 필요했겠고/ 그 정통성을 자신과의 관련 속에서 드러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럴 때 그가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 애쓰던 시절에 32) 사학을 처음으로 연 문헌공도 최충은 귀법사의 승방을 빌어 하과즐 열고 학생들을 공부시켰다.(〈〈高麗史〉〉卷95 列傳 中) 이런 전통은 이후 사학 12 도에서도 계승되었다.
33) 현종 때 거란 격퇴에 공이 큰 智蔡文이 鳳州 으로 되어 있고(〈〈高麗史〉〉卷94 列傳蔡文), 선초에 봉산군의 亡姓에 智民가 포함되어 있다.
34) 〈〈高麗史〉〉卷 113 列傳26 崔瑩
인연을 맺어 다짐해두었던 안양사탑의 중건은 그 좋은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고려 왕조의 개창자 태조 왕건이 개창주이며/ 동향 출신 승 능정이 화주였으니/ 공적으로 국가를 위하며 사적으로 가문을 위하는 명분에 합당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인물은 임공이다, 여기서 염공은 탑이 중건되던 1381 년에 자은종사(縣恩宗師) 양가도승통(兩街都增統)으로r 그의 문도인 안양사 주지 혜겸을 〈금주안양사탑중신기>의 찬자인 도은 이숭인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임공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기사가 있어 조금 더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게 한다.
공민왕 23년에 전법총랑으로서 사직하고 상주 노음산 아래에 거처하면서 자호를 석간서하옹이라 하고 짐짓 미친 척하며 스스로를 숨기고 출입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다. 기우도(騎牛圖)를 짓고/ 석간가(石調歌)를 불러 그 뜻을 나타내었다. 자은 승려종림과 더불어 방외(方外)의 교유를 맺어 초연히 세상 바깥에 있고자 하였다,35)
귀후서(歸훔暑)---정이오의 기문에 영락 년 월---관곽소를 용산강가에 설치하고 자은종 도승통 신 종럼에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더니 ___ 36)
한양부 풍양현 출신으로 광주 고원성에서 죽고 양주 아차산 남쪽에 묻혔으며 기록된 바로 우리 나라 최초의 자찬 묘지명을 쓴 조운흘(趙공吃)이 1374년에 벼슬을 버리고 상주 노음산에서 거처할 때 방외의 교유를 맺은 자은 승려 종림(宗林), 조선왕조 경도문직공서 중의 하나였던 용산강가 귀후서의 설립을 1406년에 주관한 자은종 도승통 종럼은 같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정리하면/ 이 임공의 이름은 종림(宗林)이며r 자은종(법상종) 승려였다. 1374년 경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던 당시 43세의 조운흘과 친교를 맺고 있었고/ 1381 년에는 도승통으로 그 문도 혜겸을 당시 신진사류로서 권근l 이색과 문장을 다투던 이숭인에게 소개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으며/ 조선왕조에 들어온 1406년에도 도승통 직책을 가진 채 귀후서 설립을 주관하고 있었다. 생존연대는 1330년경부터 1410년경까지로 추측되며/ 신진사류 중의 옹건개혁파I 급진개혁파와 고루 친교를 맺은 것 같다. 권문셰족 출신인 최영과는 그 문도인 혜겸을 매개로 연계되고 있으며/ 이숭인과 이인임이 같은 경산부 족친이어서 이인임과 더불어 정권을 주도하던 최영과는 글을 부탁할 정도로 절친했던 이숭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연계되었을 것이다. 이로 보아 그의 출자가 권문세족이 아니었을가능성이 크다.
35) 悲廳 --- 二十三年 以典法擺郞 蘇職 居尙州露陰山下 自號石關樓露鎬 후狂自廳 出入必!騎
著騎牛圖 贊石쩌휩歌 以見意 與錢恩增 宗林 寫方外交 超然 有世外之想、(〈〈高麗史〉〉卷 102
25 :L:fZ:)
36) 歸멸暑 --- 鄭以콤記 永樂四年秋七月 設*흠鄭所子龍山之 許 以鉉恩宗都增統 g;: 宗林
其事---(〈〈新增東國戰也勝賢〉〉卷 京都下 文職公暑)
이제 당시 중건된 탑의 구성을 보기로 하자. 우선 전체 모습은 벽돌로 층을 쌓고 기와를 입혔다. 국보 제 16호인 현존 통일신라기의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벽화와 불상 장식은 다른 양식을 보이고 있다. 제일 아래 층에는 따로 회랑 12간을 둘렀는데l 각 간의 벽에 불상 개씩을 두어 이른바 12행년불을 이루고 있다.
또 탑 안의 벽에는 부처/ 보살/ 사람/ 하늘 등으로 구성된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동쪽은 약사회/ 남쪽은 석가열반회/ 서쪽은 미타극락회y 북쪽은 금경신중회를 이루고 있다. 탑 바깥으로는 난간을 둘러 출입을 제한하였다.
1381년 대대적인 중건을 본 칠층전탑은 15세기 중엽 안양사의 대규모 중창 시기를 거쳐 18세기 중엽 폐사될 때까지 퇴락한 채로 남아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500여 년이 지난 한일합방 무렵인 20세기 초 일명탑비의 파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지고 일제 때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겨우 그 벽돌 조각만이 보관되는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m. 일명탑비 37) 명
안양사에는 칠층전탑과 관련하여 그 탑에 부속된 비석으로 잘못. 알려진 일명탑비가있다. 전 항에서도 언급했듯이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탑에 비가 딸리는 경우가 없으므로y 일단 이 탑비는 안양사에 주석했던 승려의 것이었다는 전제 위에서 논의를 시작하기로 한다.
이 탑비가 건립된 시기는 1131년이다,38) 비문을 쓴 사람은 이원부(李元符)39), 이원불(李元帝)때) 두 가지 기록이 있으나/ 동일한 인물인 이원부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김부철(金富輸)41), 검부식(金富輸)42)으로 엇갈리는데/ 비를 세울 당시
상서(尙書)' 벼슬을 가지고 있던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두 사람의 관력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37) 명칭은 정명호(1960), 〈안양의 마애종과 일명탑비〉(〈〈고고미술» 1-4) 의 추론에 따라 이하 ‘일명탑비’로 부른다.
38) 安養牌 在함川三聖山 尙書金富轉文 安養놓七層搭銘 李元符書 南宋高宗 紹興元年辛*立麗仁宗九年也〔李候편 (1668)' 〈〈大東金石書〉〉 〈大東金石目〉〕,
李元符 --- 仁宗九年辛갖 安養좀七層搭銘 金富輸 李元符 在始興三聖山(海東金石總目)〔오세창(1928)' 〈〈樓域書畵徵〉〉〕
39) 위의 책 〈〈대동금석서〉〉, 〈〈근역서화징〉〉과 〈〈범우고〉〉
40) 〈〈여지도서〉〉 금천 고적
41) 앞의 책 〈〈대동금석서〉〉, 〈〈근역서화정〉〉
42)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범우고〉〉
이 표를 보면 일명탑비가 건립된 인종 년을 전후한 시기에 부식은 판삼사사/ 정당 문학 수국사r 검교사공 참지정사f 수사공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역임하고 있고/ 부철은 이부상서/ 호부상서/ 예부상서를 역임하고 있으므로/ 결국 인종 년 당시 상서로서 일명탑비를 찬솔한 사람은 김부철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 맏형 김부필을 제외\하고 김부일이 1125년에 합천 <반야사 원경왕사비>/ 검부식도 1125년에 개성 〈영통사대각국사비>를 쓰고 있는데/ 이들과 더불어 당시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3 형제가 각각 하나씩의 고승비문을 쓴 것으로도 보고 싶다.43)
「안양학논총」 (2001), 227
그러니까 이 일명탑비는 인종 년에 왕명을 받플어 상서 검부첼이 짓고I 원외랑 이원부가 쓴 것이 된다. 그러면 이 탑의 주인은 누구일까? 이를 밝힌 곳은 〈<여지도서>>가 유일한데/ 이를 〈普昭國師牌〉라 명기하고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안양사 창건 화주
능정은 개국 비보 공로를 인정받아 승통에 추대되고/ 역대 왕의 추앙을 받았으며l 이 비가 건립된 시기로부터 그리 멸지 않은 숙종 조에 당시 최고의 승려였던 대각국사 의천이 그의 영정에 참배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탑은 인종의 명령에 의해 당시 최대 문장가 중의 하나인 킴부철이 짓고I 최고 명필 중의 하나인 이원부가 글씨률 썼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이 비의 주인공은 바로 창건 화주인 능정(能正)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렇다면 그의 부도비를 왜 200년이 지난 이 시점에 와서야 새삼스럽게 세웠을까?
건국 이후 세기가 지난 이 시점에서 고려는 국내외적으로 큰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밖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여진이 거란을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남쪽으로 몰아내며 금나라를 세우는 커다란 판도 변화를 겪고 있었다. 안으로는 전국의 농민이 대규모로 유망하자 이들을 추쇄하기 위하여 지방 감무를 파견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몰려가는 가운데l 외척인 인주 이씨의 전횡이 급기야 이자겸 난을 몰고 올 정도로 왕설의 권위를 흔들었으며f 이어 묘청의 난을 거쳐 머지않아 무신 쿠데타와 전국적 농민 항쟁의 발발을 앞두고 있었다
어지러운 수도 개경을 피해 남경으로 천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숙종 때 이미 일어나고 있었지만/ 문종은 1126년 이자겸 난으로 궁궐이 불탄 후 그해 자신의 생일을 맞아 남경에 행차하여 보름 이상을 보내며y 그 이듬해에는 묘청r 백수한 동의 권유로 서경에서 개월을 보내면서 국가와 왕실의 재정비에 진력하고 있었다. 서경 행차에서 돌아와서는 이자겸 난의 잔재인 척준경을 암타도로 유배보내고 10조에 달하는 유신의 교시를발표하였다.
국가의 명분을 되살리기 위해 태조 왕건의 검소한 덕을 되새기는 조서를 반포하는가 하면/ 백관에게 명하여 태조의 <계백료서〉를 베껴 집에 보관하면서 자손에게 가르치게 하였다, 이와 아울러 정신적 기반을 재정립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128년에
는 홍교원에 화염도량을 여는 한편, 역대 고승이었던 원효, 의상I 도선 등을 추증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또 1132년에는 대의명분 때문에 외척을 제거한 불가피성을 자책하며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큰 정치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43) 〈般若총 元景王師牌〉, 〈靈通좀大覺國師牌〉 〈〈韓國金石全文〉〉中世 566. 574쪽
안양사 일명탑비가 건립된 것은 이러한 정세 변화 시기의 한가운데인 1131 년이었다. 안양은 지리적으로 천도 후보지인 남경r 외척 이씨의 본관인 인주와 지근 거리에 있으며/ 안양사는 고려 건국을 도운 비보처로서 태조가 세운 사찰이다. 국내외적으로 총체적인 위기에 봉착하여 국가의 정신적 기틀을 바로 셰울 대상으로서는 적절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 사정은 불명이지만l 개국 공신으로서의 숭앙을 받으면서도 영정으로밖에 남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능정의 유허비를 마련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원효y 의상f 도선 등과 더불어 능정이 보소국사로 추증된 배경은 이러했을 것으로 보인다.
보소국사 능정 부도탑비로 추정되는 이 비문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 <〈대동금석서〉>에서 안양사칠층탑비로 소개된 탑본I 정명호가 채집한 비편f 이숭인의 <금주 안양사탑 중신기>, 김부일의 〈반야사 원경왕사비>를 통하여 추정해보기로 하자.
국사의 탑비명은 대개 일정한 형식을 따른다. 정면 제일 첫머리에 제액과 글 지은 사람과 글씨 쓴 사람을 밝힌다. 서론부에서 불교 일반에 대한 언급/ 주인공과 관련된 특별한 엽적이나 일화가 소개되고/ 본론부에서 가계와 탄생연기/ 출가/ 수행r 중국 유
학/ 귀국 및 교화/ 입적/ 입비 과정을 기술한다. 그리고 결론부에서 주인공을 찬미하는 운문 형태의 명(銘)이나 사(詞)가 붙고 제일 끝머리에 세운 시기와 글씨 새긴 사람을 기록한다. 그리고 뒷면에 음기가 붙는다.
이 형식을따라가보자.
제액은, 體議普昭國師牌銘/高麗國 *·”‘l 故三聖山安養총 制說普昭國師 口之搭銘井序쯤으로되겠다.
글 지은 사람과 글 쓴 사람은 朝散大夫 尙書更部待郞 知制語 陽緊金魚흉 톰 金富奉宣擇 / 橋林郞 尙書都官員外郞 陽排魚흥 톰 李元符 奉宣書 井義賴 정도로 된다.
서론부는 〈금주 안양사탑 중신기〉의 도입부와 〈안양사 칠층탑명〉에서 불교 도입과 태조 왕건의 능정 조우와 대화 사실을 추려 재구성하면 대략 다음과 같이 된다. 佛£入中國自漢之쓴法蘭 逢훌훌延予天下而 홈東方自阿道始 實新羅民之時也 其說宏放{多大能動人以網福 以故 天下皆歸끓 雖英響之主 忠義之면 往往뿔建좋宇 以張其敎 皆欲馬좋5求其福利 亦君子用心之탤也 我太祖 開國之初 佛者 有以繹補之說千之者 隨用其言置港願 若今션’‘l、 安養총搭 其一也 太祖將↑正不底 行過此 望山頭 雲成五彩 異之往視 果得老浮屬雲下 名能正 問道 正日 홈從成佛以來 種種因緣予眉 論議紹然 使學者亡以寫終 華嚴如實 ~具四性太祖稱之 此총之所申立也
본론부 중 가계와 탄생연기 부분은, 姓高民 東州伊JI Lf\. ---- ------有振 ----- 誠生 정도로 된다.
출가, 수행, 중국 유학 과정에 대한 설명은 자료가 없어 추론하기 어렵고, 귀국 및 교화 과정의 편련을 〈안양사 칠층탑명〉의 말미에서 찾을 수 있다. 즉 至東 始小終大覺而語之가 그것이다.
안양학논총 창간호(2001)
https://memory.library.kr/files/original/e0918e862503ec4010fad6bdde5a5995.pdf
안양 안양사 터(安養寺址)
https://blog.naver.com/jawkoh/223063511143
안양사(安養寺)
https://blog.naver.com/jawkoh/223067845284
안양문화원 향토사료 제13집 安養金石文
https://memory.library.kr/files/original/c305e55bd4f386bca3dd0aa3557010cc.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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