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원 13

[조성현]KBS 인기사극「정도전」의 등장인물과 문헌 속 안양사(安養寺)

개관 1주년을 맞아 ‘안양김중업박물관’의 역사성을 조명한다. 안양시문화유산해설사 조성현/ 김중업박물관 뮤지엄패밀리 KBS 대하사극 「정도전」이 지난해 6월 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안양시민의 일원으로서 사극에서 사료를 토대로 당시의 국가 왕실사찰인 '안양사(安養寺)'를 단 한번도 조명하지 않은 점은 여간 아쉬운 대목이다. 개혁을 주도하며 ‘역성혁명’의 과업완성으로 조선건국의 기틀을 다졌던 삼봉 정도전(鄭道傳)과 때로는 당여(同志)로 또는 정적(政敵)으로 얽히며 섥혀 함께했던 구도 속에서 드라마 속 주요등장 인물들이 문헌 속 ‘안양사’에 속속~ 등장한다. 드라마 정도전과 동시대를 함께 풍미하며 한때는 동지가 되고 상황이 바뀌면 역적이 되는 혼란과 격동기 속에서 드라마 속 주요인물들은 고려안양사와 관련된 ..

[기억-조성원]마음의 고향, 기억속의 안양

[조성원]마음의 고향, 기억속의 안양 수필 집 문을 열며/ 마음의 고향 시골에는 폐교가 많다. 가르칠 아이들이 없다는 것인데 정말 시골에는 나이든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게임방에 PC방 노래방 만화방 쯤 갖춘 소읍은 나와야 학원도 보이고 아이들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 그렇게 불러대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란 동요를 요즘은 더 이상 찾지들 않는 것도 같다. 내 어릴 적은 응원가가 바닥이 나면 자연스럽게 이 노래를 이어서 부르곤 했다. 고향의 정서는 결국 고향을 아련한 추억으로 간직하였을 때나 가능한 것이 아닐까. 동요의 끝머리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구절이 새삼스럽다. 그래도 내 세대는 떠난 고향에 대한 향수는 그득하지 않은가 한다. 이 나라 산천이 괄목할 ..

[기억-조성원]안양초교 운동장의 추억

[조성원]안양초교 운동장의 추억 ( 늘 푸른 운동장 ) 나는 안양 초등학교 38회 출신이다. 입학하던 해가 1964년이니 우리학교는 일제 때 생긴 안양에선 제일 오래 된 학교다. 그 시절의 안양은 시흥군에 속하는 읍 소재지였으며 인구가 2만 명이 채 안되었다. 그러기에 그 시절의 안양사람을 만나면 모두가 동문인 셈도 된다. 지금의 안양은 과거의 논밭이나 하다못해 냇가마저도 시멘트가 덮이면서 모양을 달리 하였고 평촌과 산본이라 하는 신도시까지 생겨나 인구 50만이 넘는 큰 도시가 된 것이지만 당시 안양은 공설 운동장 하나 없는 여느 가난한 시골의 소읍과도 같았다. 4학년 때 배운 지리책에 안양은 아주 짤막하게 6 25때 격전지로 포도밭이 많은 어령칙한 동네로 표기되어 있으며 실제 우리 집 주변은 모두가 포..

[기억-조성원]무의식에 스며들었던 국민교육헌장

[조성원]죽어라 외웠던 국민교육헌장 (국민교육헌장) 1968년 12월 5일 . 결혼기념일은 가물가물한데 그 날만은 까먹지를 않는다. 아침에 눈뜨면 스피커에서 국민체조 노래가 훈육처럼 흘러나오던 그 무렵. 학교 모든 교실 앞에는 붓글씨로 쓴 국민교육헌장 액자가 정성스레 놓여 있었으며, 모든 교과서 앞부분에 실려 있었고, 입학식 졸업식은 물론 모든 국가 행사 앞부분 식순에는 반드시 국민교육헌장 낭독이 있었다. 기독교 신자들이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줄줄 암송하듯이 외우고 통독한 덕분으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지금도 한 줄 빼놓지 않고 적을 수 있다. 그 시절 그렇게 외워댔던 국민교육헌장을 떠올리면 달콤하기는커녕 머리 쭈뼛 서고 통증을 유발하는..

[기억-조성원]안양에는 예쁜 동네 이름 있었다

[조성원]안양에는 예쁜 동네 이름 있었다 (안양 지명은) 안양은 어디에서 유래된 지명일까. 글을 다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그간 무심했다는 생각도 든다. 양산의 통도사에서 안양암이란 암자를 본 적이 있다. 安養이란 한자가 똑 같아 혹여 불교에서 유래된 지명은 아닐까 싶었다. 요즘은 동네 인터넷에 접속하면 사는 동네에 대한 현황이 조근 조근 잘 설명되어 있다. 곳에서 발췌한 사항이다. 안양(安養)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효공왕 4년(900)에 궁예의 후예인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등의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산꼭대기의 구름이 5가지 빛으로 채색을 이룬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피게 했다. 구름 밑..

[기억-조성원]60년대 국민학교 졸업 선물 '도장'

[조성원]60년대 국민학교 졸업 선물 '도장' (졸업과 도장) 우리 학교(안양초등학교)는 큰 강당이 있었다. 학예발표회라든지 영화상영 같은 많은 행사를 그곳에서 하였다. 나는 중앙에 두 번 서봤다. 한 번은 합주 반 일원으로 하모니카를 불기위해 올라갔으며 또 한 번은 졸업식 때 작은 상을 받기 위해 단상에 올랐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이 노래를 부르면 눈물부터 주르륵 흘러내렸던 순순한 시절이 있었다 . 송사와 답사는 또 어떠하였던가. 강당 한구석에서 귀뚜라미 같이 엷게 훌쩍이던 소리는 어느 틈 개구리 울림통 마냥 일시에 터져 울음바다가 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눈물은커녕 졸업노래를 아예 행사에서 제외시..

[기억-조성원]안양초-안양중-안양공고 축구의 배경

[조성원]안양초-안양중-안양공고 축구의 배경 (새학기) 방학숙제를 3일 만에 해치웠다. 그런 엉터리 숙제물이 전시하는데 뽑혔다. 나는 몰래 전시실에 들러 내 숙제 물을 꺼내왔다. 짧은 봄방학은 덤으로 얻은 것 같아 겨울 방학보다 더욱 고소했다. 그리고는 새 학기가 시작된다. 반 편성도 다시 하고 선생님들도 전근을 가시고 또 새로 전학 온 아이들도 생겨난다. 안양이 커져 가면서 갈수록 전학 온 아이들은 늘어만 갔다. 사투리가 심한 아이들은 입을 오므려가며 표준말을 하려했지만 그것이 곧 웃음꺼리였다. 새 반이 편성되면 서먹서먹하고 같은 반에서 올라온 아이들끼리만 어울린다. 한동안은 말 수 적어진 아이들로 교실은 조용하다. 탐색의 과정이 있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기 위해서는 누구든 그러한 과정을 거친다. 여..

[기억-조성원]학교급식 강냉이빵을 기억하나요

[조성원]학교급식 강냉이빵을 기억하나요 (강냉이빵) 내 나이 또래가 참 많다. 내 또래부터 학급수가 가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육이오를 겪은 당시의 소년소녀들이 첫 출산을 하던 때가 바로 내가 태어난 1957년 이후 쯤 되기 때문이다. 헐벗은 탓이겠지만 그 시절엔 고아들이 많았다. 고작 2만 명도 채 안 돼는 읍내이건만 우리 동네엔 유독 고아들이 많았다. 동네에 미군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아들을 돌보았었다. 고학년이 되자 한 반이 무려 칠팔십 명을 넘어섰는데 그중 대여섯 명은 고아원 출신 아이들이었다. 기독보육원, 평화보육원, 안양보육원. 안양에는 그렇게 세 곳이 있었다. 그 애들은 거의 대부분 생년월일이나 성조차 모르고 지냈다. 우리보다 훨씬 큰 아이들이 많았으며 여드름에 턱 ..

[기억-조성원]1960년대 그시절, 호마이까 전축

[조성원]1960년대 그시절, 호마이까 전축 (호마이까 전축) 사람들은 집에 그들만의 특질을 갖추고 또 나름의 정서를 만들어내며 산다. 물론 선뜻 비추어지는 것들이 그 집의 전체가 될 수는 없겠지만 분위기는 금세 와 닿는다. 운동기구가 즐비 한 집엔 우람찬 근육의 사내가 있고 책이 꽉 차 있으면 공부벌레가 있다고 보아도 별로 틀리지 않는다. 나는 고등학교 입시에서 낙오가 되었다. 나는 눈에 띄지 않게 아이들의 등교가 끝난 후에 학원을 다닐 정도로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 무렵 고등학교에 들어간 친구네 집을 어쩌다가 간 적이 있었다. 당시엔 고등학생이라면 서클도 들고 취미도 가꾸고 하였는데 라디오로만 듣던 팝송LP판이 친구 집엔 방안 그득했다. 1년 차가 그리 달리 보일 수가 없었다. 느낌을 스스로 갖고 산..

[기억-조성원]1960년대 끔찍했던 연탄가스의 기억

[조성원의 기억속 안양]1960년대 끔찍했던 연탄가스의 기억 (연탄 가스) 연탄하면 떠오르는 안도현의 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그 시절 연탄만한 가치도 많지 않았다. 겨울이 되면 소외된 이들에게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지는'사랑의 연탄 나누기' 행사,' 연탄 배달의 봉사 이야기' 돈 몇 푼에 찾는 따스함이 어디 흔하였던가. 하지만 요즘 연탄은 사는게 구차하거나,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때 연탄을 피워놓고 자신과 가족의 목숨까지 잠재우거나,남에게 치명적인 해를 가할 악의 형태로 연탄이 이용되기도 한다. 생을 연탄으로 마감한다니 정말 가슴 아픈일이다. 스스로가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죽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