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탐사16]안양 비산동 망해암과 비행기 등대(2013.06.01)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안양기억찾기탐사대가 16번째 여정으로 찾은 곳은 안양8경중 제1경인 망해암 일몰이 멋진 비봉산 자락의 망해암과 비행기등대인 무선표지국이다.

망해암(望海庵)은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241-54번지 관악산 동남기슭에 위치하는 조계종 사찰로 망해암에서 바라본 일몰은 안양시가 선정한 안양8경중 제1경이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1번 국도를 타고 평촌에 이르기 직전 대림대학 방향으로 좌회전 한다. 대림대학 정문을 지나 마을길을 따라 계속 가다가 마을이 끝 날 때 쯤 부터 산길로 약 2㎞정도 오르면 된다. 소형차는 망해암까지 들어갈 수 있지만 산행삼아 관악산의 수려한 경관을 즐기며 2㎞ 정도 걷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망해암에 오르면 안양시가지(만안구)가 한 눈에 들어온다. 탁 트인 시야 때문에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데, 절 뒤편 바위 사이로 오르면 있는 전망대에서는 바라보는 일몰이 장관이다. 야경은 절벽위에 세운 절 난간에서 보는 것도 멋있는데, 절 장독대 뒷편으로 돌아가면 암벽위에서 바라보는 일몰과 야경이 으뜸이다.
1986년에 새워진 <안양망해암사적비>에 따르면 망해암은 신라문무왕5년(665)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이것은 1940년대에 쓰여진 <봉은본말지>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원효 창건설을 뒷받침할만한 아무런 근거는 없다. 대부분의 사찰이 원효와 의상의 창건설을 주장하는 것은 두 스님이 직접 창건했다기보다는 그 스님들을 계맥하고 있다는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망해암이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 태종 때의 일이다. 태종은 한양의 풍수적 균형을 위해 사방에 절을 지었는데 이 때 망해암도 중수되었다. 망해암의 창건은 관악산의 연주암처럼 기암괴석 틈바구니에 옹색하게 지어진 지형적 특징으로 볼 때 드센 기를 누르고 취약한 부분을 치료하기 위한 비보사찰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적비에는 또 세종 때의 미륵불에 대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전설로 전해진다.
삼남지방에서 세곡을 거두어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인천 앞바다의 팔미도(八尾島)를 지나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심한 풍랑이 일어 배들이 전복될 위기에 처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당황한 선원들이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홀연히 스님 한분이 뱃머리에 나타나 선원들을 안심시키고 스님의 인도로 무사히 위기를 면하게 되었다. 풍랑도 잠잠해지고 안정되자 목숨을 건진 선원들은 ‘대사님은 어느 절에 사십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스님은 ‘관악산 망해암에 있노라’하고 또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일행은 한강까지 무사히 도착한 후 생명의 은인이요 신통자재했던 스님을 찾아 망해암에 올랐다. 하지만 스님은 보이지 않고 다만 스님과 용모가 비슷한 미륵부처님 만이 법당에 모셔져 있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크신 자비와 신통력으로 자신들이 살아났음을 깨닫고 곧 왕에게 상소하여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왕은 크게 탄복하여 매년 한 섬씩의 공양미를 불전에 올리도록 했으며 이것은 이후 400년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전설은 미륵불의 신통력을 나타내는 것이며 다만 전설을 통해 태종 이후 조선 왕실과 인연을 갖고 망해암이 유지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설이외에 조선중기 이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다만 순조3년(1803)에 홍대비(洪大妃)가 재물을 내어 중수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홍대비는 혜경궁 홍씨를 말하는 것으로 사도세자의 부인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인으로 꼽히는 혜경궁 홍씨가 절을 중창한 것은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을 달래기 위함이라고 보인다. 이후 철종14년(1863)에 대련(大蓮)주지스님이 중창하였고 1922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1926년에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했다. 1939년에는 용화전을 중건하고 1940년에는 대방을 중수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또다시 전소했다. 그래서 지금의 건물들은 6.25이후에 모두 새로 중창한 것들이다. 1973년에는 보경스님이 대방을 증축하고 도량을 일신하였다.
지금은 꽤 여러 채의 건물들이 있다. 절은 전체적으로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며 서향하고 있다. 현재는 차량으로 오르기 때문에 절 뒤쪽이라고 할 수 있는 동쪽에서 진입한다. 망해암의 주전은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다. 용화전 또는 미륵전이라 부르는 이 전각은 6.25 직후인 1952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3칸, 측면2칸인데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반영하듯 규모도 작고 부재의 쓰임도 열악하다. 전면에만 조각한 살미부재를 사용해 장식했으며 나머지 삼면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처마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팔작지붕이지만 웅장함과 화려함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소박한 건물로 내부에는 미륵석불입상을 모셨다.
이 미륵불은 1479년(조선 성종 10년)에 조성된 것이라는데 보개(寶蓋)를 쓰고 도톰한 코와 입, 길게 늘어진 귓볼에 법의(法依)는 통견(通肩)이며 굵은 U자형의 옷자락선이 조밀하게 표현 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안정된 상호(相好) 등은 당시의 불교신앙과 대불조성(大佛造成)에 대한 시대적 유형을 살피는 자료로 평가된다.
특이하게도 현재 미룩불은 가슴 이하는 마루 밑에 묻히고 그 이상만 나와 있다. 얼굴과 몸은 하얗게 회를 발랐는데 특히 얼굴은 두껍게 발라 석불의 느낌이 전혀 없고 미륵불의 소박하고 투박한 맛이 사라졌다. 머리에는 둥근 두관을 썼는데 검은색 칠을 했다. 석불의 높이는 223㎝인데 지금은 극히 일부분만 노출되어 있다. 장기적으로는 건물을 헐고 원래 모습처럼 야외에 노출된 미륵석불로 중창불사한다는 계획이다.
용화전 바로 앞에는 3층으로 된 콘크리트 건물의 설법전을 두었다. 197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용도는 대방이었다고 한다. 대방은 경기도 사찰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왕실이나 귀족들의 원찰에서 왕실이나 귀족들이 절을 찾았을 때 기도하는 건물이다. 대개 불전 앞에 지으며 불전보다 큰 것이 특징이다. 미륵전 서북쪽으로는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집으로 지은 삼성각이 있으며 그 앞에 석탑과 사적비가 놓였다. 미륵전 남쪽으로는 서향하여 정면3칸, 측면2칸의 규모가 작은 맞배건물로 관음전이 놓였으며 그 남쪽으로 인접하여 사방 단칸의 범종각이 있다. 관음전과 범종각 앞쪽, 즉 서쪽으로는 민가풍의 선실과 객실이 놓여 선방과 요사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건물들은 대개 바위 암반을 활용해 경사지에 옹기종기 놓였으며 건물들 앞으로는 최근에 마당을 만들고 마당 앞쪽에 정면8칸, 측면2칸의 우람한 누각을 새로 지었다. 이곳은 현재 종무소로 쓰고 있는데 규모가 절을 압도한다. 중창불사 계획도를 보면 앞으로 설법전과 관음전, 요사채 등을 헐고 정면3칸, 측면3칸의 대형불전을 지을 계획을 갖고 있다.

 

안양 상공은 비행기 항로의 광화문 사거리

망해암에서 50여 미터 더 올라간 비봉산 정상에는 1950년대 설치된 관악산 무선표지국이 있다. 이곳은 지상항법 유도장비인 ANYANG VOR(VORTAC)가 있어 비행기들의 등대 역할을 하고 있다.

지상으로 자동차, 사람이 다니기 위해서는 길이 있듯이 하늘위를 날아다니는 비행기도 지정된 길(항로)이 정해져 있다. 특히 안양은 비행기 항로의 심장 부분에 해당되는 곳으로 안양상공을 오가는 비행기가 많아 꽤 복잡한 지점이다.

VOR이란 VHF Omni-directional Range 라는 뜻으로 VOR 지상국은 360도 전 방향으로 전파를 방사하여 항행하는 항공기에 방위정보를 알려 주는 장비로 하늘의 길목에도 이를 가리키고 유도하는 등대나 이정표 역할을 하는 일종의 "무선국"이다.

VOR의 주 임무는 항공기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 공항의 방위각정보, 즉 방향을 제공하는 시설로 선박으로 치면 항해지도에 해당하는 엔루트챠트(En-route Chart)에 군데군데 VOR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는 주파수 108∼118MHz, 출력 50∼100W의 정현파(正弦波)로 변조한 9,960Hz 전파를 전 방향으로 쉴 사이 없이 발사하고 있어 항공기는 이 신호를 받아 위치를 확인하고 목적지 공항의 방향과 남은 거리 등 정보를 얻게된다.

안양 관악산 상공은 지도상으로 보아도 우리나라의 한 가운데에 있고 여러 항로가 만나고 갈라지고 있어 가장 붐비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즉 우리나라 항로의 간선 교차로가 되는데 도로로 치자면 광화문 사거리 정도에 해당한다.

관악산 정상의 안양 VOR을 기점으로 서쪽으로 가면 인천공항이나 중국으로, 동쪽으로 가면 강릉, 일본, 미주로 가는 항로가 되고 남쪽으로는 제주, 광주, 동남아, 호주 방면으로 이어지는 항로가 된다.

항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항로란 사전에서 보면 항공기가 다니는 비행경로로 공중에 설정된 일정한 폭(이를 보호공역이라 한다)을 지닌 통로로 항공로라고도 한다. 중심선 좌우 폭이 최소 4nm(7.4km)씩 이므로 8nm(14.8km)의 띠 모양의 공간이다.

이들 항로에는 군데군데 VOR이 있어 일종의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즉 비행기는 VOR 상호간을 연결하는 길을 따라 날게되는데 이를 VOR의 첫 글자를 따서 빅터항로(victor airway)라고 부르며 국내 항공로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비행기는 항로의 중앙선을 따라 비행하며 동일방향 동일고도를 비행하는 항공기와는 서로 시간차를 두고 같은 방향, 다른 고도의 항공기끼리는 29,000피트 이하에서는 2,000피트 차이를 두어 분리하고 29,000피트 이상에서는 4,000피트 씩 간격차이를 두고 있다

[안양]안양 8경중 제1경 망해암에 대한 이야기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망해암(望海庵)은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241-54번지 관악산 동남기슭에 위치하는 조계종 사찰이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1번 국도를 타고 평촌에 이르기 직전 대림대학 방향으로 좌회전 한다. 대림대학 정문을 지나 마을길을 따라 계속 가다가 마을이 끝 날 때 쯤 부터 산길로 약 2㎞정도 오르면 된다. 소형차는 망해암까지 들어갈 수 있지만 산행삼아 관악산의 수려한 경관을 즐기며 2㎞ 정도 걷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망해암에 오르면 구 안양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탁 트인 시야 때문에 시원함을 느낄 수 있으며 절은 기암괴석들 사이로 건물들이 옹기종기 놓여있다. 최근에는 앞에 대형 누각건물을 지어 마당공간을 확보했다.
1986년에 새워진 <안양망해암사적비>에 따르면 망해암은 신라문무왕5년(665)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이것은 1940년대에 쓰여진 <봉은본말지>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원효 창건설을 뒷받침할만한 아무런 근거는 없다. 대부분의 사찰이 원효와 의상의 창건설을 주장하는 것은 두 스님이 직접 창건했다기보다는 그 스님들을 계맥하고 있다는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망해암이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 태종 때의 일이다. 태종은 한양의 풍수적 균형을 위해 사방에 절을 지었는데 이 때 망해암도 중수되었다. 망해암의 창건은 관악산의 연주암처럼 기암괴석 틈바구니에 옹색하게 지어진 지형적 특징으로 볼 때 드센 기를 누르고 취약한 부분을 치료하기 위한 비보사찰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적비에는 또 세종 때의 미륵불에 대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삼남지방에서 세곡을 거두어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인천 앞바다의 팔미도(八尾島)를 지나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심한 풍랑이 일어 배들이 전복될 위기에 처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당황한 선원들이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홀연히 스님 한분이 뱃머리에 나타나 선원들을 안심시키고 스님의 인도로 무사히 위기를 면하게 되었다. 풍랑도 잠잠해지고 안정되자 목숨을 건진 선원들은 ‘대사님은 어느 절에 사십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스님은 ‘관악산 망해암에 있노라’하고 또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일행은 한강까지 무사히 도착한 후 생명의 은인이요 신통자재했던 스님을 찾아 망해암에 올랐다. 하지만 스님은 보이지 않고 다만 스님과 용모가 비슷한 미륵부처님 만이 법당에 모셔져 있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크신 자비와 신통력으로 자신들이 살아났음을 깨닫고 곧 왕에게 상소하여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왕은 크게 탄복하여 매년 한 섬씩의 공양미를 불전에 올리도록 했으며 이것은 이후 400년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전설은 미륵불의 신통력을 나타내는 것이며 다만 전설을 통해 태종 이후 조선 왕실과 인연을 갖고 망해암이 유지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설이외에 조선중기 이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다만 순조3년(1803)에 홍대비(洪大妃)가 재물을 내어 중수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홍대비는 혜경궁 홍씨를 말하는 것으로 사도세자의 부인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인으로 꼽히는 혜경궁 홍씨가 절을 중창한 것은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을 달래기 위함이라고 보인다. 이후 철종14년(1863)에 대련(大蓮)주지스님이 중창하였고 1922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1926년에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했다. 1939년에는 용화전을 중건하고 1940년에는 대방을 중수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또다시 전소했다. 그래서 지금의 건물들은 6.25이후에 모두 새로 중창한 것들이다. 1973년에는 보경스님이 대방을 증축하고 도량을 일신하였다. 
지금은 꽤 여러 채의 건물들이 있다. 절은 전체적으로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며 서향하고 있다. 현재는 차량으로 오르기 때문에 절 뒤쪽이라고 할 수 있는 동쪽에서 진입한다. 망해암의 주전은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다. 미륵전은 6.25 직후인 1952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3칸, 측면2칸인데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반영하듯 규모도 작고 부재의 쓰임도 열악하다. 전면에만 조각한 살미부재를 사용해 장식했으며 나머지 삼면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처마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팔작지붕이지만 웅장함과 화려함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소박한 건물이다. 내부에는 미륵석불입상을 모셨는데 가슴 이하는 마루 밑에 묻히고 그 이상만 나와 있다. 얼굴과 몸은 하얗게 회를 발랐는데 특히 얼굴은 두껍게 발라 석불의 느낌이 전혀 없고 미륵불의 소박하고 투박한 맛이 사라졌다. 머리에는 둥근 두관을 썼는데 검은색 칠을 했다. 석불의 높이는 223㎝인데 지금은 극히 일부분만 노출되어 있다. 장기적으로는 건물을 헐고 원래 모습처럼 야외에 노출된 미륵석불로 중창불사 할 계획을 갖고 있다. 
용화전 바로 앞에는 3층으로 된 콘크리트 건물의 설법전을 두었다. 197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용도는 대방이었다고 한다. 대방은 경기도 사찰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왕실이나 귀족들의 원찰에서 왕실이나 귀족들이 절을 찾았을 때 기도하는 건물이다. 대개 불전 앞에 지으며 불전보다 큰 것이 특징이다. 미륵전 서북쪽으로는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집으로 지은 삼성각이 있으며 그 앞에 석탑과 사적비가 놓였다. 미륵전 남쪽으로는 서향하여 정면3칸, 측면2칸의 규모가 작은 맞배건물로 관음전이 놓였으며 그 남쪽으로 인접하여 사방 단칸의 범종각이 있다. 관음전과 범종각 앞쪽, 즉 서쪽으로는 민가풍의 선실과 객실이 놓여 선방과 요사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건물들은 대개 바위 암반을 활용해 경사지에 옹기종기 놓였으며 건물들 앞으로는 최근에 마당을 만들고 마당 앞쪽에 정면8칸, 측면2칸의 우람한 누각을 새로 지었다. 이곳은 현재 종무소로 쓰고 있는데 규모가 절을 압도한다. 중창불사 계획도를 보면 앞으로 설법전과 관음전, 요사채 등을 헐고 정면3칸, 측면3칸의 대형불전을 지을 계획을 갖고 있다. 이러한 중창불사의 일환으로 대형 누각건물을 근래에 지은 것이다.

1973년 안양 망해암행 안양천 건너던 줄배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응답하라 #1973 #안양 #양명고 #안양천 #나무다리/ 1970년대 초 안양천을 건너던 줄배입니다. 당시 안양천에는 물이 많았답니다. 이 배가 운행되던 곳은 현재의 양명고앞인데 먼길을 돌아다녀야 했던 주민들과 여름철에는 안양유원지로 가고자 하는 이들이 이배를 타고 건너가기도 했지요. 이후 1970년대 중반에는 안양2동 토박이 김귀연 전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장 부친께서 나무다리를 놓아 양명고 학생들의 통학을 위해 애쓰셨지요. 평소에는 나무다리라도 건너 등하교를 할 수 있었지만 여름철 비라도 많이 내려 물이 불어나면 다리가 잠기거나 다리가 물에 떠내려가면 비산동 임곡교 또는 안양유원지쪽으로 빙 돌아다녀야 했답니다. 
안양천은 60-70년대 초만 해도 은모래가 깔려있고, 어항을 놓아 물고기도 잡고, 멱도 감을 정도로 정감어린 곳이었지요.
그러나 70년대 중반들어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인구집중, 공장 폐수, 생활하수가 뒤덮으면서 서서히 오염되기 시작해 8-90년대에는 악취가 코를 찌르며 물고기가 살수 없던 죽음의 하천으로 변했답니다. 
안양시 자료를 보면 1992년 안양천의 BOD(생화학적 산소요구량) 농도는 66.7ppm으로 양재천 16ppm, 중랑천 14.3ppm, 탄천 3.9ppm 등에 비교할 수조차 없었는데, 2001년부터 시작한 안양천살리기 사업이 결실을 맺으며 2012년 측정한 안양천의 수질은 BOD는 3.9㎎/1으로 2급수를 유지하고 있지요.
따라서 안양의 가장 큰 변화는 되살아난 안양천이 아닐까 싶네요. 철새와 버들치, 참게가 다시 돌아오고 기피했던 천변 아파트가 살기좋은 곳이 됐으니까요./ 사진 제공; 김귀연 전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장


 

1960년대 안양 망해암 가는 길목 오시오매점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안양 #응답하라1960 #추억 #기억 #과거 #옛이야기#안양 #망해암/ 1950년대 안양천(현 양명여고)에서 망해암 올라가는 길목에 있던 매점이다. 
1950-70년대 안양읍내에서 연인들이 데이트, 밀회를 할만한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안양유원지, 청계호수(현 백운호수), 그리고 안양천 모래가 쌓인 삼각주의 미루나무숲(당시 한국특수제지 옆)과 망해암 등이 인기 코스였다.
당시 안양시내에서 망해암을 가기 위해서는 차가 한대 겨우 지나갈 비산동의 수푸루지 다리와 수푸루지 마을을 지나 바포장 산길을 올라가기도 했지만 너무 멀어 안양천을 건너 곧바로 멍해암으로 오르는 산길을 택했다. 
가는 길을 보면 만안초교 건너편에 있던 안양 최초의 극장인 화단극장옆으로 철길을 건너고 안양천을 나무다리, 여름철 물이 많아 다리가 떠내려 갔을때는 드럼통 줄배를 타고 건넌후 30분 정도면 올라갈 수 있었는데 이곳 매점에서 주점부리용 과자나 사이다, 또는 술 한병을 사들고 올라가는 중요한 장소였다. 
또 1970-80년대 초 까지만 하더라도 산과 계곡에서 휘발유, 석유버너를 이용하여 코펠에 밥도 짓고, 꽁치통조림 찌게를 안주 삼아 소주 한잔 할수 있었기에 등산로 입구에 있던 매점들은 제법 호황을 누렸다. 
지금도 안양8경중 제1경인 망해암은 안양읍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기에 나들이객이 적지 않았다. 당시의 절은 목조로 지어진 암자 형태로 소박하고 자그마했지만 아주 예뻤다. 오히려 큰크리트 절로 중창을 해 삭막해진 지금은 그 멋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쉬기만 하다. 
이 사진은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한 김귀연 전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장이 제공한 것으로 당시 요 매점은 김귀연님 부친과 연관이 있지않을까 싶다.

 

1970년대 초반의 비산대교 가설 공사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안양 만안구와 동안구를 연결(안양 중앙로에서 산업도로와 관악로) 하는 비산대교(길이 98m) 공사가 한창인 1970년대 초반의 모습으로 안양천을 동서로 가로질러 교각만 세워져 있습니다.
사진 좌측은 안양 만안구쪽 우측은 이마트 쪽으로 뒷쪽으로는 망해암이 있는 비봉산과 수푸루지 마을이 보이는 것을 볼때 안양7동 덕천마을 쪽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현재 대림매학이 들어선 비봉산에는 산 증턱까지 판잣집이 들어선 것이 살기 힘들었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처 안양역사사료관
비산대교는 1975년 6월25일 당시 안양동 지역(현재 만안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비산동 지역 개발과 교통량 증가에 발맞춰 동서축을 연결하는 교량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다리를 세웠으며 동서 연결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90년 9월에는 홍수로 교각이 침하되고 상판 슬라브가 내려앉는 피해를 입어 6차선으로 확장 보강됐고, 교통량의 증가와 매년 장마철 되풀이되는 안양천 수위상승으로 내하력 부족 등의 결함에 따라 99년 8월 재난위험시설 D등급 판정을 받아 재가설이 추진됩니다. 
이에 지난 2002년 12월 철거를 시작으로 재가설공사에 들어가 99억3천만원을 들여 2005년 11월 16일 현재의 다리를 완공했지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 다리는 13m 높이의 조형물 4개와 경관 조명을 설치했고 교량 상판을 아치형으로 바꿨으며 종전 7개에 달하던 교각이 3개로 줄여 교각 사이를 넓히는 등 대공사를 했습니다. 공사 과정에서 당초 안양시는 비산대교를 전면 철거후 재가설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1일 6만대의 차량이 이용하는 교량이 전면 통제될 경우 극심한 교통난이 발생할 것이 우려됨에 따라 공사를 좌우 절반씩 실시하기도 했답니다. 비산대교, 안양천과 관련 떠오르는 기억과 추억의 댓글을 환영합니다

 

화진 안양동초1학년때 (1977년도)난데없이 홍수났으니까 학교가지 말라고 어머님이 그러셨네요.. 그땐 저 비산주공살았구요.. 어린마음에 홍수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학교안간다는것에 대만족하여 집에서 이리 뒹굴,저리뒹굴 .. 문제는 밖에 못나간다는것.. 그때 울아버지 안양역전파출소장이셨는데 .. 아마 비상걸리셨겠네요 .. 우리아버지이래뵈도 박대통령님 청와대 경호대 저격주특기 출신이라는^^지금은 천국에 계시구요 .. 어쨓던 몇일후 비그치고 아파트밖에 나가보니 진흙이 무릎까지 차 슈퍼갔다오기도 불가능할 정도였네요 .. 그당시 구주공의 쓰레기는1층및에 슬라이딩식으로 집하되었는데 .. 악취가 장난아니었구요 .. 4-~5일후인가 학교에 다시 등교할 수 있었는데 ..애들이 겪은 경험담에 조용해질 시간이 없었네요 .. 누구네 담벼락이 무너졌데나 .. 집이 지붕채로 떠다니더라 .. 그런데 그위에 사람이 같이 떠내려 가더라..돼지가 둥둥떠내려 가는데 꽥꽥거리더라 .. (전 왜 이대목에서 이늠들 내가 잡았었어야 했는데..라고 욕심을 부렸나 모르겠어요..^^)어디선 사람이 죽었다더라 ..이건 뭐 누가 더쎈거 본늠이 대장이라도 된냥 떠들어대다가는 ..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에 다들 .. 더이상 쎈것없다 싶어 가만있던.. 희미한 기억이 나네요 .. 그리고 1990년도 홍수때 저는 안양7동에서 방위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네요 .. 그당시 상황은 초비상상황 그자체였네요 .. 범람할랑말랑 얇은 포처럼물이 뭍으로 영역을 넓히며 흐르기 시작하는 상황 .. 동사무소직원분들은 연락주고 받고 바삐움직이시고 홍수에 뭔가를 해야한다는 의무와 책임감에 정말 비상사태 그자체엿네요 .. 근데.. 정말 위험한 상황은 쌍개울의 범람이 아니라 안양7동의 저지대 특성상 집집마다 하수구가 다 역류되어 그야말로 하늘에서 퍼붙고 땅속에서 샘솟듯 솟구치고.. 지금생각하면 어떻게 이시간이 지나갈 수 있었나 싶었네요 .. 동직원분들 다들 초죽음.. 비그치고 물어느정도 빠지고 생각나는것은 개천옆 주택가는 거의 살림들을 다 집밖 인도에 가구집기류들 의류들 다 꺼집어 내놓았는데 어휴 .. 나중에 저도 반지하살때 하수구역류로 침수당해보았는데 .. 그때 그분들 심정이 오죽했으랴 싶네요 .. 요즘 안양7동 재개발이 진행중에 있네요.. 하천은 잘 정비되어있다고 알고 있지만 그래도 7동자체도 토목이니 건축이니 홍수때를 철저히 대비하여 잘 그리고 제대로 그리고 멋지게 새로운 모습을 안양에 보여주었으면 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