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지도읽기

[20250416]서울특별시도시계획행정망도(1966년)속 군포장 위치

안양똑딱이 2025. 4. 16. 18:50

 

서울특별시도시계획행정망도

발행년도 : 1966

크기 : 78*108

1966년 6웧 5일 한국지도공업사에서 발행한 서울특별시도시계획행정망도는 1:50.000만 지도로 서울중심부로 부터 8키로,15키로 반경내 행정망 계획도를 나타내고 있으며 시 도 읍간 경계, 철도, 도로와 지형현화에 대한 참고 범례를 표기하고 있다.

특히 당시 사흥군 안양읍, 남면(군포), 의왕면, 과천면 등 현 안양권의 지형은 동네 지명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지도를 부분적으로 확대하여 들여다보면 군포장을 표기하고 있다./ 이곳은 현재의 안양시 관내인 호계구사거리다. 경기도는 3.1절 독립만세운동 유적지 표석중 하나로 현 군포교 다리앞에 '군포장 만세운동시위지' 표지판을 세웠으나 이는 정확한 위치가 아니다. 아피트단지가 들어서고 상가들도 많이 축소되는 등 군포장이 있던 주변이 많이 변했으나 '군포장 만세운동시위지' 표지판을 호계구사거리로 이전하여 오가는 시람들이 이를 볼수 있도록 하고 시민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야 한다.    

 

역사적 기록을 들여다보면 군포장(軍浦場)은 안양장(安養場) 보다도 역사가 더 깊다. 군포장(軍浦場)은 수원에서 지지대 고개를 넘어 안양을 거쳐 한양으로 가던 시흥로 역로(驛路)의 중간 지점인 현재의 안양천 (맑은내, 군포천) 군포교와 구군포교 중간 지역인 안양시 호계동 평촌두산위브(더프리임+리버뷰) 아파트 단지와 호계구사거리 주변으로 군포장이 사라진 이후에도 이곳을 구장터라 불렀다.

 

또 주변 도로는 구군포길로 불리우고, 옛 군포장이 위치하던 지역에는 ‘구장터1로’에서 ‘구장터3로’까지의 도로 명칭으로 지명한바  있어 이곳이 장터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군포장(軍浦場)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는데 도양리, 지금의 안양시 호계3동 구군포사거리 근처였다. 이곳은 시흥길과 삼남길의 갈림길이다. 이 군포장은 수원 북문밖장과 연계되어 있어서, 19세기 후반에는 작은 장으로 언급되지만 인근 안양장에 비해서는 3배의 장세를 내고 있어 안양장보다 훨씬 활성화되고 규모 또한 컷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군포장(軍浦場)은 조선시대 지도에도 표기될 정도로 컸다. 1872년 지방지도-과천편에는 군포장과 안양장(安養場)이 표기돼 있다.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1827)에서도 군포장과 안양장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군포장이 서는 날은 이웃 안양장과 더불어 수차례 바뀌어 왔다. 조선시기에는 개시일이 3․8일로 나와 있는데 1905년 군포장이 되면서 1․6일로, 1923년에는 5․10일로, 1926년에는 2․7일로 나타나는 등 주변장의 영향에 따라 변화를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군포장은 충청도에까지 입소문이 흘러 장돌뱅이들과 장꾼들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담배를 비롯하여 소금, 광목 등과 쌀, 콩, 조, 보리쌀 등 농산물이 주로 거래되었으며, 안양, 군포, 의왕, 과천 등은 물론 멀리는 용인, 남양, 판교 등지의 상인이 붐벼 성시를 이루었다. 군포장의 명물은 씨름과 정월 대보름에 개최되는 줄다리기로, 이때는 시장의 열기가 고조를 이뤘다고 한다.

 

활기 넘치는 군포장은 역 명칭에도 영향을 미친다. 광무4년(1900)에 경부선 철도를 가설하면서 군포장에서 다소 거리가 떨어진 군포 남면 당리에 역사를 짓고 역명을 군포장역(軍浦場驛)이라 했기 때문이다.(영업개시 1905년 1월 1일) 역사 설치 후 민가가 늘어나자 군포역 일대 또한 점차 상설로 문을 여는 가게들도 생기는 등 주거지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군포장역이 생기면서 주변에 면사무소·순사주재소·우편소 등 주요 시설도 자리를 잡았다. 1913년에는 군포장역의 이용객수가 연간 2만 9,727명, 발착화물은 1,997t으로 이용객수 연간 2만 7,166명, 발착화물 1,367t이었던 안양역보다 더 컸다. 이는 지금의 의왕역인 부곡간이정차장이 1944년 세워지기 전까지는 의왕과 반월 주민들도 이 역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안양 지역이 군포 지역보다 더 먼저 산업화하면서 군포와 안양의 세는 뒤집어지고 만다.

 

특히 군포장(軍浦場)하면 만세 시위를 빠트릴 수 없다.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31일 군포와 안양 인근의 주민 2,000여 명이 모여 펼졌는데 당시 시위 군중은 경찰관주재소(시흥군 남면 당리 군포장역 앞)로 행진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특히 주민들이 사전에 매우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하에서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당시 군포장이 안양과 의왕, 군포의 경계지이자 당시 서울-수원 가도에서 과천, 안산으로 갈라지는 곳으로서 상업적 요지였기에 시장을 중심으로 인근의 주민 참여가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독립기념관 사적지 http://sajeok.i815.or.kr/i815/view_region/1755 )

 

1938년 경부선 복선화가 되고 기차역 주변이 지역유통의 중심지로 자리잡자 그해 4월 1일부로 군포장역(軍浦場驛)은 군포역(軍浦驛)으로 역명이 바뀌게 된다. 또 5월 1일에는 새로 신축한 역사가 준공된다.

 

번창하던 군포장은 1925년 소위 을축년 대홍수로 맑은내(군포천, 안양천)이 범람하자 그해 12월 23일 장을 군포역 앞(현재의 군포 역전시장)으로 이전하고 5일장 시장 명칭은 그대로 승계한다. 당시 안양 북쪽에 있던 안양장도 하천 범람으로 피해를 입자 안양1동 소재 구시장(안양1동 진흥아파트앞)으로 장을 옮기고 상설시장인 안양시장으로 개설했는데 그해인 1925년 12월 안양시장이 조선총독부 경기도지사에 의해 인가되었다.

 

역이 설치되면서 지역의 중심이 이동하였고, 군포라는 지명이 유지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던 군포장 마저 이전해 오면서 군포역 일대가 기존 ‘군포’를 대신하여 새롭게 군포가 되면서 5일장으로 열리던 군포장은 도시화와 함께 사라지고 상설시장(현 군포역전시장)이 생긴다. 이후 옛 군포장이 서던 지역(호계3동)을 구군포(舊軍浦)라 했고 '당말'이라 부르던 군포역 인근을 신군포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번창하던 군포장은 1925년 소위 을축년 대홍수로 맑은내(군포천, 안양천)이 범람하자 그해 12월 23일 장을 군포역 앞(현재의 군포 역전시장)으로 이전하고 5일장 시장 명칭은 그대로 승계한다. 당시 안양 북쪽에 있던 안양장도 하천 범람으로 피해를 입자 안양1동 소재 구시장(안양1동 진흥아파트앞)으로 장을 옮기고 상설시장인 안양시장으로 개설했는데 그해인 1925년 12월 안양시장이 조선총독부 경기도지사에 의해 인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