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감동(牧甘洞)
목감동은 시흥시 중심부에서 동쪽에 위치한다. 동북쪽으로 안양시, 남쪽으로 안산시, 서쪽으로 연성동, 북쪽으로 매화동과 경계를 이룬다. 면적은 17.57㎢로 시흥시 전체 면적의 12.9%를 차지한다. 1989년 시흥시 출범 당시 논곡동ㆍ목감동ㆍ광석동ㆍ능곡동ㆍ조남동ㆍ산현동ㆍ물왕동ㆍ하상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으로 개청하였는데, ‘시흥시출장소설치조례’(시조례 제230호)에 따라 1991년 1월 15일 광석동ㆍ능곡동ㆍ하상동이 연성출장소로 분소하여 관할 법정동이 축소되었다.
조선시대 이 지역에 ‘목암사(木岩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경내의 단감나무가 유명하였다고 한다. 절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자 목암사의 ‘목’자와 단감나무의 ‘감’자를 따서 ‘목감’이라 했다는데서 동명이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초산면의 목감리(牧里)와 율포 리(里)였다가, 1912년 2월 5일 조선총독부 경기도고 시 제7호로 안산군 내 동리의 구역과 명칭을 변경할 때, 목감리로 합쳐졌다.
그 뒤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3월 1일을 기해 안산군이 시흥군과 수원군으로 분리 통합될 때 시 흥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같은 해 3월 13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3호에 따라 옛 안산군의 군내면 ᆞ인화면.초산면을 합쳐 수암면을 설치함에 따라 시흥군 수암면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 별다른 변동이 없다가 1988년 12월 31일 제정된 법률 4050호에 따라 1989년 1월 1일자로 시흥군이 폐지되고, 소래읍· 수암면 · 군자면이 합쳐 시흥시로 승격되자 시흥시 목감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물왕동 • 산현동 • 조남동 논곡동을 관할한다. 2005 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2,615명으로 남자가 1,347명, 여자가 1,268명이며, 969세대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호구총수에 목감리는 나오나 율포리 는 없다. 따라서 율포리는 조선 말기에 새로 편성된 행정 구역으로 보인다. 「조선지지자료」 의 안산군 초산면조에는 목감리를 '모감이'로, 율포리를 '밤개물'로 부른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지명의 변화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고저지
목감과 조남동 양단말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밀양 박씨 등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향성된 곳으로 마을의 지세가 높낮이가 심하다 하여 ‘고저지’ 라 부른다고 한다.
• 더푼물
조선시대에는 광명시 학온동 및 부천 지방에서 안양으로 가는 통로로, 서너 가구가 있었는데 도적과 강도 등에 시달려 폐동되었다. 그 후 일제 때인 1930 년 대에 이르러 안양시 박달동에 군용지를 개설하면서 박달동 동수암 출신의 광주 이씨 · 파주 염씨 등이 이주하여 취락을 형성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촌(新 더푼물村)’ 이라 부르고 있다.
또 마을 앞(서쪽)의 산이 문봉인데 풍수로 보아 이 마을을 덮어누르는 형국이라 하여 ‘덮’ 이라고도 했는데 점차 후대에 내려오면서 ‘더푼물‘ 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이 재산이 늘면 문봉이 눌러 30 년을 가지 못하므로 30 년 동네’ 라고도 부르며, 더푼물이라 하여 ‘뚜껑 없는 동네. 등 여러 갈래로 불리고 있다. 일설에는 이 마을 정미소와 범고개 마루턱 사이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오가는 우마로 인해 먼지 등이 날아와 우물을 항상 덮었다하여 ‘더푼물’이라했다고도한다 .
• 목감
뱅깔과 고저지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조선 중엽에 있었던 목암사의 ‘목’ 자와 사찰 경내에 있던 단감나무의 ‘감’ 자를 따서 ‘목감’ 이란 마을 이 생기게 되었다. ‘모감’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목감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성씨는 알 수가 없고,문화 류씨를 비롯하여 평산 신씨 · 전주 이씨 등이 세거해 왔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에 을회관 뒷산에 있는 당할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고 이어 고저지 뒷산에 있는 머니에게 당제를 지냈다고 한다.
• 사거리
월꽂선(안양 월꽂동)과 수인산업도로가 교차되는 네거리에서 논곡동 구역(사거리에서 서북쪽)을 제외한 전역 이다. 이곳은 지리적 여건으로 보면 논곡동에 해야 하나, 조선시대에 노상에서 행려자들이 죽으면 해당 이 장례를 치뤄야 하는 등 번거 롭기 에 논곡동에 사는 대신이 목감동 구역으로 했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 말엽 에 막과 장간 등이 있었다고 하며 이 안양 · 군자 · 인천 · 수원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가 되면서부터 민가가 기 시작하다가 인산업도로와 안산 신도시 건설로 인해 급성장한 곳이다
• 율포(票浦)
푼물과 목감 사이에 위치한 을이다. 언양 김씨 · 성주 이씨 등의 오랜 세거지로 재도 들 성씨가 대성 을 루고 있다. 이 마을은 예로 터 밤나무가 많아 밤이 울로 떠내려 간다고 하여 ‘밤개울’ 이라 했는데 이 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개울 廳빼 을물가 ‘포’자로 하여 ‘율포’ 라하였 며 명 ‘뱅깔’이라부 율포기도 한다. 율포는 을 중앙에서 보아 동북 지역을 ‘웃말’, 서쪽지역을 ‘아랫말’이라 각각 부르고있다
• 가운데봉
무쇠봉과 문봉 사이에 있어 ‘가운데봉’ 이랴 부르고 있다 목감동과 안양시 달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 거정 고개
월꽂선에 있는 고개로 율포와 사거리 사이가 된다. 고개마루 동쪽에 향촌목장이 자리잡고 있다.
있다.
• 계골
율포 가운데봉과 문몽 사이에 있는 산골로 풍수로 보아 닭의 벼슬같이 생긴 골짜기이다.
• 곤두레미고개
목감과 안양시 박달동과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안양에서 안산으로 가는 신도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이 고개길이 유일한 교통로였다. 이곳은 산림이 우거진 험준한 곳일 뿐만 아니라 후미져서 산적이나 강도 등이 많아 이곳을 지나 갈 때면 황급히 서둘러 곤두박질쳐야 지나칠 수 있다 하여 ‘곤두박이고개’ 라 했는데 후대에 려오면서 ‘곤두레미고개’ 로 되었다. 일설에는 술주정문이 술에 만취되어 이 고개에 이르러 자다가 겨울이면 얼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곤두레’ 는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을 뭇하며, ‘미’ 는 모에서 나온 말로 산을 뭇하는 말이니 이곳이 고갯길 이전에는 산으로 술이 몹시 취한 사람이 이곳을 걷다가 지쳐 마루턱에 이르러 쉬어 갔던 고개가 ‘곤드레미고개’ 라는 것이다
• 구리고개
목감과 조남동 장군재 사이로 수인산업도로에 있는 고개이다. 고개 동쪽 산기숨에서 일제 중엽 구리를 채광하였는데 일제 말엽에 폐광되었다고 한다. 1976 년 수인산업도로로 포장공사 때 고개가 낮추어졌다.
• 닥모랭이
월꽂선에서 안양새마을교육원 초입으로 문봉 닥맥이다.
• 능모랭이
광산 서쪽의 산모퉁이이다 .
• 당뒤글
율포 앞의 전답부터 논곡동 앞의 전답에 이르는 큰 골짜기 이름이다 .
• 당터
문봉 아래로 청송 심씨 선대 묘 부근이다. 더푼물이 용수로 보아 30 년을 지탱할 수 없는
마을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아무 탈 없이 살게 해 달라고 이곳에 당집을 짓고 산신령에게 빌
었다고한다.
• 동그란산
월꽂선에서 논곡동 논줄 가는 소두네길 초입에 있는 산이다. 산행이 동그렇게 생겼으며 1970 년대에 개간되어 현재 돈사 등이 들어섰다.
• 매봉재
곤두레미고개 북쪽에 있다. 산봉이 마치 매와 같다 하여 ‘매봉재’라 부른다 .
• 목감천
목감동에서 발원하여 논곡동과 광명시 학옹동을 거쳐 한강에 합류되는 하천을 말한다 .
• 무쇠봉
목감동과 안양시 박달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가운데몽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철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고한다
• 문봉
더푼물과 안양새마을교육원 사이에 위치한 봉우리로 더푼물 서당 앞에 있는 산이라 하여 ‘문봉 이라 했다. 그런데 논곡동에서는 ‘도토리봉’ 뱅깔에서는 ‘계골봉’ 이라 각각 부르고 있다. ‘팽과리산’ 이라 부르기도 한다 1968 년 11 월 일 안양새마을교육원이 동쪽 산기슭에 설립되었다.
• 민드리미골
율포와 목감 사이로 초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깨진 기핫장과 지대석 등이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집터 또는 절터로 추정된다. 좁고 작은 골짜기로 산과 일부는 농경지로 되어 있으며, ‘민드라미골’ · ‘가자골’ 등으로도 부른다.
• 뱀밭
더푼물 남쪽에 있는 밭으로 뱀같이 길고 물이 많아 질며 토질은 끈끈하다. 1970 년대 목장(인선목장)이 들어섰다.
• 범고개
더푼물에서 안양시 박달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 뺑거리골
더푼물과 절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대부분의 지역이 농경지이다 .
• 뺑거리우물
더푼물 뺑거 리골에 있다. 오리현산에서 나오는 샘 우물로, 농업 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 서당터
더푼물에 있는데, 조선 말엽에 광명시 학온동 노옹곡 출신 김 모씨가 개설하여 인근의 주민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글방으로 인해 앞산을 ‘문봉’ 이라 부르게 되었다
• 섬논
더푼과 광명시 학온동 장기촌 사이에 있다. 1. 300 여 펑 규모의 논으로 우물 옆에 나무가 있어 마치 섬같다 하여 ‘섬논’ 이라 부른다.
• 쇠골논
더푼과 논곡동 경계 에 있는 논으로 소가 일을 하려면 병이 들 만큼 논이 좋다고 한다. 면적은 다섯 마지기 정도이다.
• 신사목골
율포 서쪽으로 영지농원이 있는 주변 일대를 말한다. 작은 골짜기로 산과 일부는 밭으로 되어 있다 .
• 쓰레봉
곤두레미고개 남쪽에 있는 목감과 안양시 박달동을 잇는 산이다. 상봉이 레처 럼 생겼으며 일명 ‘무쇠봉’ 또는 ‘싸재’ 라 부르기도 한다.
• 안골
무쇠봉과 골몽 사이에 있는 삼태기처럼 생긴 골짜기 이다.
• 앞골
깔 앞(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대부분의 지역이 논으로 수답이다 .
• 앞들
목감과 수인산업도로 사이에 있다 마을(목감) 앞에 있는 들(논) 이므로 앞들이라 부르고 있으며 문전옥답으로 수답이다
• 오리현산
파주 염씨의 종산으로 오동나무가 많아 ‘오리현산’ 이라 부른다 더푼 과 안양시 박달동 동수암을 잇고있다.
• 왜미논
일제 때 일본인들이 인근에서 제일 상답이라 불렀던 논으로 푼물과 청송 심씨 묘 사이에 있는 논을 말한다
• 의미논
월꽂과 안양 사이의 도로에서 안서 초등학교 초입 에 있는 이다. 수답으로 토질이 좋은 논이라서, 모를 일찍 내려면 일찍 내고 늦게 내려면 늦게 낼 수 있을 만큼 의미대로 할 수 있는 논이다. 면적 은 두 마지기 가량 된다.
• 햇고개
더푼물 마을 내에 있는 고개 이름으로 이곳에 당나무가 있어 마을고사를 지낸다 한다 .
• 절글고개 · 절곳고개
더푼물과 안양시 박달동 동수암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동수암에 절터가 있어 ‘절골고개’라 부르고있다 .
• 주막모퉁이
뱅깔 앞골과 민드리미골 및 초골이 합쳐지는 곳으로 무쇠봉의 낙맥이다. 이곳이 조선시대에는 목감과 뱅깔 사이를 왕래하는 길가로 행려자들이 많아 주막이 번창했다고 한다.
• 집너머고개
뱅깔 뒤(서북)로 뱅깔과 월꽂선 사이에 있다. 농로로 1980년대 초에 포장되었다 .
• 초을
뱅깔과 목감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현재는 대부분의 지역이 농경지이다. 예전에는 숲이 우거져 금수가 많았던 곳이 라고 한다.
• 턱골
안양새마을교육원이 있는 골짜기를 가리킨다 .
• 하자고.하저고
율포 동쪽으로 무쇠봉 아래에 있다. 좁고 짧은 산골인데 곳에 호랑이가 많아 호랑이를 잡으려고 함정을 폈던 곳이라 하여 함장골’ 이라 부르고 있다 .
• 호떡집터
더푼물 앞(서쪽) 청송 심씨 묘 옆으로, 현재 밭이다. 일제 때 안씨 부인이 초가집을 짓고 호먹 장사를 했다가 광복이 되자 범고개 마루턱에서 호먹 장사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
• 회골
수인산업도로의 인천 방향으로 목감사거리에 도착하기 lkm 전의 오른쪽 골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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