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3/ #아카이브 #기록 #지도 #항공사진 #한국전쟁/ 한구전쟁 개전 초기 북항군의 진격에 따른 도시 현황을 보여주는 항공사진과 지도로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보관된 자료다. 1950년 7월 4일 항공사진 오버레이(비행궤적과 비행정보를 담고 있음)와 1대 25만 항공지도를 중첩시켜 항공기가 지나간 궤적과 항공 촬영한 지역을 직관적으로 볼 수 있게 재편집했다(출처: NARA, RG 373)
아래 항공사진은 1950년 7월 4일 미5공군 제8전술정찰비행대대에서 촬영한 서울 용산-마포 일대의 희귀한 항공사진이다. 이 항공사진이 촬영된 시기는 아군의 한강선 방어전투(1950.6.28~7.3) 직후로 개전 직후 서울 용산-마포 일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최초의 항공사진으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개전 직후 대한민국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있던 용산기지를 점령했던 북한군 부대는 이영호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3사단이었다. 제3사단은 북한군 최정예 사단으로 개전 초기 서울을 최초로 점령했던 북한군 주력 2개 사단(제3사단, 제4사단) 중 하나였다. 북한군 제3사단은 포천-서울 동쪽 축선으로 진격해 서울 용산 일대를 점령했다. 항공사진이 촬영되기 하루 전인 7월 3일 국군의 한강 방어선은 북한군에 의해 돌파되면서 전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북한군의 주공인 제4사단은 이 날 한강철교 보수 후 전차를 앞세워 한강을 건넜다. 용산기지를 점령했던 북한군 3사단은 신사리 방향으로 진출했고 일부 병력은 노량진 방향으로 도하했다.
요컨대 위 항공사진은 미5공군이 북한군 점령 아래 있는 서울의 적정(敵情: 전투 상황이나 대치 상태에 있는 적의 특별한 동향이나 실태)을 파악하기 위해 촬영한 것으로 개전 초기의 역사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참고 자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강선 방어전투 (漢江線 防禦戰鬪)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0954
[박종인의 땅의 역사] 191.노들섬의 비밀2 : 사진으로 분석한 인도교 폭파사건의 진실
박종인의 땅의 역사
https://www.youtube.com/watch?v=6iljrGWLlyg&t=985s
[한겨레21]포토스퀘어 1519호
가장 대규모의, 가장 파괴적인 서울 폭격
6·25전쟁 74주년… 1950년 6~8월 서울역과 용산역, 한강 철교, 한강 인도교를 향한 미군의 항공기 폭격 전후 사진 공개
김규원기자구독
등록 2024-06-22 10:13 수정 2024-06-25 09:36
https://h21.hani.co.kr/arti/photo/story/55689.html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 김일성 군대의 전면적인 남침으로 한국 정부와 군은 사흘 만인 6월28일 새벽 서울(현재의 서울 강북)을 내주고 한강 남쪽으로 총퇴각했다. 국군은 이때 한강 인도교(현 한강대교)를 스스로 폭파해 북한군이 남쪽으로 전진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춘천 전투에서의 실패로 6월30일까지 서울에 머물렀고, 남쪽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그동안 한국군과 미군은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1950년 6월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미군은 다음날인 6월29일부터 서울에 대한 항공기 폭격을 시작했다. 목적은 한강 남쪽(현 노량진 일대)에서 북한군과 대치 중이던 한국군의 사기를 높여주고, 한강 북쪽 기슭에 주둔 중인 북한군의 병력과 보급품을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최초의 폭격 목표물은 서울역이었다. 서울역에 대한 폭격은 비(B)-29 4대에 의해 북동쪽에서 남동쪽으로 비스듬하게 이뤄졌다. 서울역의 북한군과 보급품, 열차 등을 정밀하게 폭격하고, 주변 지역에 피해를 줄이려는 의도였다.
서울에 대한 가장 대규모의, 가장 파괴적인 폭격은 7월16일 용산역과 공작창(열차 만들고 고치는 곳), 조차장(열차 붙이고 떼는 곳)에 대해 이뤄졌다. 이른바 ‘용산 대폭격’이었다. 이날 폭격은 그 이전 서울역과 한강 북쪽 기슭에 대한 폭격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날 폭격은 용산역의 북한군이나 보급품, 열차가 아니라 용산역과 공작창, 조차장 전체를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용산역 공작창은 1년에 25대의 기관차와 2500량의 열차를 만들 수 있는 한국 최대의 철도 제조 시설이었다. 북한군과 보급품의 수송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설이었다.
7월16일 미국 극동공군 소속 B-29 폭격기 47대가 1504발의 폭탄을 용산역과 공작창, 조차장에 쏟아부었다. 말 그대로 ‘융단폭격’이었다. 그 뒤에도 미군은 3차례 더 용산역 일대를 폭격해 모든 시설과 장비를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이 연속적인 대규모 폭격으로 용산역 일대는 쑥대밭이 됐고, 주변 지역 주민들까지 심각한 피해를 봤다. 6·25전쟁 초기인 1950년 6월25일~9월28일 석 달 동안 서울에서 1만7127명이 사망했는데, 당시 서울의 9개 구 가운데 용산구의 사망자가 2706명으로 가장 많았다. 특히 항공기 폭격에 의한 사망자는 9개 구에서 4250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용산구가 1587명으로 37.3%에 이르렀다. 전쟁 초기 용산구의 전체 사망자와 항공기 폭격 사망자가 가장 많은 이유는 용산역 일대에 대한 대규모 폭격 때문이었다.
미군이 용산역과 함께 핵심 수송 시설로 판단한 것은 한강의 다리였다. 미군은 서울역에 첫 폭격을 가한 6월29일 서울 한강의 모든 다리를 파괴하라고 극동공군에 지시했다. 그 뒤 7월1일~8월17일 한강철교와 한강 인도교, 북한군의 임시교에 8차례 걸쳐 항공기 폭격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한강철교와 한강 인도교, 임시교는 모두 ‘불능’ 상태가 됐다. 이 지속적인 대규모 폭격으로 한강 다리 주변은 폭탄 자국으로 뒤덮였다.
전쟁은 국가의 목표를 이루는 방법으로는 너무나 위험하지만, 전쟁으로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는 언제나 불확실하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그 결정에 아무런 권한이 없었던 하급 장교와 병사, 민간인은 반드시 희생된다. 시민들은 국가의 목표가 전쟁으로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지도자에게 이렇게 요구해야 한다. “전쟁을 결정한 당신이 최전선에 서서 싸워라.” 전쟁을 결정한 사람이 최전선에 서서 싸워야 한다면 전쟁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전시 공개영상》 1951년 미 공군 B-29, 용산 대폭격 2021. 7. 16.
【 영상소개 】 1951년 미 공군 비행기에 포탄을 싣고, 용산 상공으로 날아와 72톤의 포탄을 투하하는 장면과 용산기지, 용산 철도정비창, 한강백사장, 파괴된 한강철교의 모습이 연속적으로 담겨있음.
영상자료 원출처: 미국립문서보관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자료수집 및 편집: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국
https://www.youtube.com/watch?v=l-QiUShLI6E
1950년 7~8월 미군의 ‘용산 대폭격’으로 파괴된 용산역의 기관차. 1950년 9월23일 사진. 용산학연구센터 제공,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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