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감각/아카이빙
이 전시는 작가이자, 그림책 화가, 대안공간 기획자, 행정가로 살아온 박찬응의 최근 작업과 코로나 이후 변화된 그의 삶에 관한 기록이다. 그는 최근 자신의 삶을 ‘표류(dérive)’라고 보고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 따라서 전시는 표류의 경로, 표류의 감각, 표류의 기억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 번째 표류의 경로에는 장소를 이동하면서 그렸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가 이동했던 장소는 신안, 제주, 옥천, 의왕, 프랑스의 노르망디, 페깡, 일드 프랑스 베네쿠트, 고메쿠트, 남프랑스 뚜르즈 가베르니, 고창 등 국내외의 여러 곳이다. 전시된 그림은 그가 인상 깊게 보았던 풍경이나 만났던 사람들에 관한 기억이 있는 장소를 그린 것이다. 특히, 이 섹션에는 노르망디에 체류 당시 그의 작업실과 인근 장소에서 그려진 그림들이 많다.
두 번째 표류의 감각은 작업실에서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재료를 두드리거나 문지르는 일들을 통해서 학습하거나 체득했던 것들에 관한 기록이다. 이 감각은 그동안 박찬응이 살아오면서 수행했던 「기억프로젝트 1 : 사람을 찾습니다」(2007)와 「기억프로젝트 2 : Gate Way-사람을 찾습니다」(2012) 그리고 그가 스톤앤워터와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면서 수행했던 수많은 자료 사이에서 피어났다. 또한 『동경대전』이나 최인호의 『바다의 편지』를 필사하거나 『이상범 화집』을 모사하기도 하면서 대양 깊숙이 가라앉아 버린 세계에 관한 통찰력과 표현 감각을 건져 올렸다. 이런 잡다한 생각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이 공간은 작가가 찾고자 하는 경로에 대한 집요한 모색이다.
마지막으로 표류의 기억은 어린 시절 반복해서 꾸었던 악몽에 관한 것인데, 최근 작가는 이 악몽을 주제로 『소년, 날다!』(책마을 해리, 2024)라는 그림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 세션에는 그림책에 사용되었던 원화와 더미북 그리고 꿈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1968-1969년 사이의 일어난 간첩사건들과 그로 인해 파생된 사회적 이슈들과 그가 목격한 한미연합군사훈련 ‘포커스 레티나(Focus Retina)’의 아카이브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그림책에 그려진 그림은 작가의 ‘근원적인 공포’에 관한 것으로 표류하던 중에 그려낸 것이다.
어떤 표류를 말하는 것일까? 그는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2020년 6월, 오랜 공직 생활을 끝내고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퇴직 후, 그는 ‘한 갑자(甲子)의 삶’(60세)이 온전했는지 돌아보며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공직에 나가기 전, 그는 석수시장에서 ‘스톤앤워터(Stonenwater)’를 ‘시장통 미술관’으로 만들면서 ‘생활 속의 예술’의 가치를 실험했던 2000년대 이후 지역의 대표적인 대안공간 기획자였다. 그리고 한 지역 문화재단에서 본부장으로 7년을 일했다. 많은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그림책박물관을 위한 그의 열정을 불사른 시기였지만, 이제 그는 거기에서 도망쳐 나왔다. 다시 돌아올 명분을 던져 놓고 망망대해에 자기 몸을 맡기는 것처럼, 좌표 없는 항해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의 표류는 가장 먼저, 신안의 비금도에서부터 시작했다. 우연히 던져진 섬마을 빈집에서의 한 달은 그 뒤로 이어질 표류의 시간의 전조에 불과했다. 제주에서 며칠을 하염없이 걷다가 세잔(Paul Cézanne)이 에밀 졸라(Émile Zola)와 함께 지냈던 일드프랑스(Ile france) 베네쿠트(Bennecourt)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모네가 살았던 노르망디(Normandy) 지베르니( Giverny)까지 걸었다. 노르망디 페깡(Fecamp) 근처에 작업실을 얻어 작업에 골몰하기까지는 몽유병에 걸린 아이처럼 떠돌았다. 잠들어 있는 몸의 감각을 깨우기 위해 영혼이 자꾸 달아나는 것이다. 그의 그림책 『소년, 날다!』에서 소년은 밤마다 악몽을 찾아 나선다. 그는 그때마다 쏟아지는 벼락같은 광경 때문에 수없이 깨곤 했던 밤들을 기억한다. 그의 그림에서 새벽은 남다른 시간이다. 어둠 깊은 곳, 여명이 시작되는 시간에 누가 그를 그곳에 불렀을까?
무엇에 끌린 듯한 방황은 낮에도 계속된다. 그는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그림을 그리거나 잡다한 생각을 노트에 끄적이기도 했고 여기저기서 가져온 수집품을 두고 오랜 시간 골몰하기도 했다. 그렇게 여러 곳을 떠돌았지만, 언제나 돌아오게 되는 자리가 있다. 석수시장, 스톤앤워터가 있었던 작은 상가건물의 2층은 그 시절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뜨거웠던 여름이 식어 찬 바람이 스치는 무렵, 지금은 작가의 작업실로 사용되고 있는 이 공간에는 기억의 먼지가 내려앉은 사물들 사이에서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는 엉거주춤한 움츠림이 도약을 준비한다.
어떤 감각은 근육에서 비롯된다. 박찬응은 표류하는 동안 끝없이 그림 그리기를 연습했다. 외딴섬 파도치는 소리로 가득했던 빈집이나 모네(Oscar-Claude Monet)가 반복해서 그렸다던 미루나무 길이나 영국대륙이 떨어져 나간 지층이 파도에 부서지는 페깡의 절벽 앞에서도 그의 시선은 근육 깊숙이 잊힌 그리기의 감각을 불러내기 위해 분주했다. 그래서 이 전시는 그가 머물렀던 공간과 그의 내면에 감추어진 시선의 동굴과 같다. 어떤 그림은 그가 이동했던 긴 여정을 담고 있는 하나의 긴 풍경이 되고 또 다른 그림은 서로 마주하고 펼쳐진 한 폭의 그림책이 된다. 작업실 안에서 밖으로 내다보이는 차분한 풍경이 있는 공간을 지나면, 새벽을 그린 그림 건너편으로 절벽이 서 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대작들은 대부분 노르망디 해안에서 멀지 않은 고데흐빌(Goderville)에 있는 저택에 작업 공간을 차리고 그렸다. 이곳은 1883년에 지어진 건물로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의 진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저택 구석구석에는 전통적인 유럽 귀족의 초상화를 비롯해 나폴레옹 시절부터 내려온 그림이나 가구가 있어 오랜 역사적 흔적을 여러 곳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박찬응은 공간의 바닥이나 벽을 한지로 붙이고 먹으로 두드려 간단히 그 흔적을 찍어낼 수 있었는데, 터 무늬에 드러난 세월의 흔적은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의 몸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공간의 기억은 그렇게 몸의 기억이 된다.
박찬응은 타고난 재담꾼이다. 그는 안양의 그림사랑동우회 <우리 그림>에 참여했고, 안양지역 작가들과 미술 동인 <우리들의 땅>을 결성해 활동했던 청년 시절부터 서사가 있는 그림을 즐겨 그렸다. 출판사 ‘아침미디어’를 통해서 그림책과 미술 담론서의 출판을 감행하거나 그림책에 관한 논문을 쓰고, 그림책박물관을 만들고자 했던 것은 그의 어쩔 수 없는 이야기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와 함께 그의 그림은 더 풍성해지고 제 역할을 한다. 그 때문에 그의 표류는 그리기의 감각과 함께 이야기 찾기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작업이 <때무늬>(2024)다. 그는 어느 날 작업실 한쪽에서 오윤의 목판화 <칼 노래>를 떠 올리고는 그 간결하고 힘찬 선을 찾아 휘돌이 역사 무늬를 그려댔다. 거친 먹선은 마치 ‘암모나이트 화석’이나 ‘달팽이’ 모양을 하고 화면 중앙으로 말려 들어간다. 최제우의 시 <검결(劍訣)>을 불어로 번역해서 쓰고 휘돌이 무늬를 따라 한 해씩 연도를 적어 들어가 마침내 수운 최제우를 역도로 몰아 죽게 한 1864년에 도달한다. 그의 청년 시절 목판화는 그림 표현의 수단이기도 했고 그림책을 위한 명료하고 깨끗한 선화(線畫)의 매체가 되기도 했다. 그의 그림 구석구석에 나타나는 선명하고 깔끔한 굵은 선들은 이 시절 목판화에서 보았던 것들이다. 화면 위에 휘적이는 몸동작은 오윤의 <칼 노래>를 거쳐 최제우의 <검결>을 불러내고서야 멈춰 선다.
박찬응은 유화도 그리지만, 주로 종이와 먹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한지(장지, 순지, 옥당지)와 프랑스 벽지 등 종이 위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면 적절한 번짐과 깊이를 낼 수 있다. 여러 번에 걸쳐 그려내는 유화와 달리 빠른 속도로 한 번에 그려내는 그림은 별도의 감각이 요구된다. 겸재(兼齎)나 청전(靑田)을 모사(模寫)하면서 그의 붓끝은 무엇을 찾는 것일까? 모사(模寫)는 동양화가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그림 연구 방법이지만 나는 그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대신 그는 그림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모사했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겸재(兼齎) 정선(鄭敾)이 친구 이병연(李秉淵)의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와 그렸다는데, 친구를 염려하는 겸재의 무거운 마음을 담고 있다. 인왕산의 바위는 습기를 머금고 위태로운 이병연의 집을 보듬어 안고 있다. 그림의 준법, 필치는 ‘칼 노래’처럼 감각과 리듬을 갖고 있다. 박찬응은 칼잡이 장수처럼 그 만의 붓질에 도달하기 위해 연습을 반복한다.
모든 표류는 목숨을 내건 사투와 함께 시작된다. 발 딛고 있는 안전한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지 모르는 파도에 몸을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그 너울 한가운데서 그가 마주했던 꿈같은 순간과도 같다. 그때마다 그는 전시를 개최했다. 2022년 노르망디 노마드 갤러리에서 있었던 개인전 《표류하는 예술가-박찬응》전을 시작으로 두 번에 걸쳐 두나무아트 큐브에서 했던 《표류 이야기, 2023년 2월》가 그것이다. 무엇보다 2023년 8월5일부터 17일까지 노르망디에서 있었던 오픈스튜디오+전시 《새벽절벽 바람-깨진벽돌》은 꽤 성공적이었다. 인근 각지에서 전시를 보러와 준 사람들을 끌어모은 것은 박찬응 특유의 ‘시장통 미술관장’의 친화력이 만들어 낸 산물이었다. 이를 계기로 내년에 프랑스 빨루엘(Pauel)에 있는 르꼬르드페(Le Clos des Fées)에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박찬응의 표류는 아직도 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을 통해서 그리기의 감각과 그 특유의 서사가 함께 춤추는 ‘검결(칼 노래)’에 도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백기영 (前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운영부장)
박찬응(Park Chaneung) 1960년 생
1980년 ‘청년화실’을 운영, ‘포인트’ 전에 참여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7년 부터 ‘우리그림’과 안양문화운동연합, ‘우리들의 땅’을 통해 지역예술 운동을 펼쳤다.
2002년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를 통해 공공성, 지역성, 생태성에 기반한 예술 활동을 펼쳤다.
2012년 일맥아트프라이즈에서 커뮤니티아트 예술가 상을 수상했다.
2013년 군포문화재단에 근무하면서 그림책박물관공원건립을 추진했다.
2020년 지역기반예술연구소 ‘LBAR’를 설립하고 공공미술과 교육예술 활동을 펼쳤다.
2023년 ‘표류‘ 를 주제로 한국과 프랑스에서 전시화를 열었다.
2024년 그림책<소년날다> 출간, 원화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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