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20/ #아카이브 #옛사진 #안양 #기록 #현대양행 #만도기계 #since1967/ / 안양 박달동에 자리했던 현대양행-안양기계제작소(이후 만도기계)의 항공사진으로 한라그룹 50년 통사에 수록된 기록이다. 공장 위쪽에 흐르는 물줄기가 안양천이고 아래쪽으로는 안양-안산간 박달로이다. 현대양행 안양기계제작소는 1980년 2월 만도기계(주)로 사명이 변경되고 1999년 만도(주)로 다시 변경된다. 만도는 ‘인간은 할 수 있다’(man do)와 ‘1만가지 도시’(萬都)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닌 뜻으로 창업주인 정인영 명예회장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만도기계는 1996년 평택 경주 청주 등지로 공장시설을 분산이전하고 부지가 한라건설에 매각된후 한라비발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며 2000년 1천385가구가 입주한다.
1962년 설립된 현대양행을 모태로 어찌보면 현대자동차보다 나이가 많은 부품회사가 만도다. 1980년 중화학공업 투자조정 조치, 1997년 IMF 외환위기, 두번이나 모든 것을 잃어야 했던 굴곡진 한라그룹의 중심에는 안양기계제작소 →만도기계→만도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만도는 다시 한라그룹으로 편입되어 국가대표다운 모습으로 그룹의 재건을 주도하고 있다.
현대양행은 1964년 3월 13일 상공부에서 장기구상에 의한 양식기 제조 기계의 수입을 허가받은 데 이어 그해 6월 1일부터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박달리 120번지에 안양기계제작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노선버스가 뽀얗게 먼지를 날리며 비포장도로를 몇 차례 왕복하는 시골이었지만 안양천을 끼고 있어 공장부지로 안성 및춤이었다.
안양기계제작소의 대지는 6만 6115m2(2만 평)이었다. 양식기공장의 규모치고는 너무 큰 것 아니냐며 인근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공사 인부들까지 의아해 했다. 그러나 정인영 명예회장은 당장이 아니라 10년 후를 내다보며 대규모 공장을 계획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안양기계제작소는 공장 건설과 기계 설치를 끝내고 1964년 12월 17일 가동에 들어갔다. 시작과 함께 1년후 수출 목표를 48만 4000달러로 잡았다.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설비 투자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이듬해 봄부터는 양산체제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테이블 용품인 스푼,나이프,포크 등을 생산했다. 아트라스(ATLAS)라는 자체상표로 현대양행은 미주뿐 아니라 유럽으로까지 수출국을 다변화해 나갔다. 세계 양식기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일본의 생산 방식은 소규모 가내수공업이었다. 이에 비해 현대양행의 안양기계제작소는 현대식 시설과 대규모 공장에서 대량 생산체제를 갖췄던 만큼 품질과 가격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수출량이 늘면서 직원도 곧 400명으로 증가했다. 양식기를 싣고 갈 선편이 부정기적이어서 그 일정에 맞추기 위해 야간작업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원재료인 스테인리스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재무상태는 좋지 않았다. 대안으로 내수용 숟가락과 밥그릇 등을 생산하기로 했다. 당시까지도 우리나라는 놋쇠 식기가 대부분이었다. 스테인리스를 원료로 한 숟가락과 젓가락,밥그릇 등은 가볍고 씻기 편리해 금세 인기를 얻었다.
이처럼 안양기계제작소의 가동이 활발해지면서 현대양행도 성장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1966년 3월 1일 현대양행은 상공부로부터 전문계열화 및 수출지정 업체로 지정받았다. 이는 더욱 적극적으로 경영 활로를 모색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듬해인 1967년 12월 28일에는 자본금을 1100만 원으로 증자했다. 이를 통해 안양기계제작소의 시설을 증설해 생산활동을 뒷받침하는 한편 성장에 따른 경영내실화를 도모했다.
정인영 명예회장이 현대양행을 창업한 목적은 기계공업을 비롯한 중공업으로의 진출을 통해 산업보국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무역업과 양식기 사업은 이를 위한 경험 축적과 사업적 토대였다. 때문에 현대건설이 추진하는 해외 사업과 현대양행의 수출선을 개척하기 위해 외국에 나갈때마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세계의 기계공업 추이를 세심하게 살폈다. 그결과 자동차산업과 중공업이 미래의 산업을 이끌어 갈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와 때를 같이해 현대건설이 미국의 포드사와 자동차 조립 기술제휴 협상에 나섰다. 포드사는 한국 진출을 위해 파트너를 물색하고 있던 참이었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포드사와 접촉해 현대건설의 자동차산업에 대한 관심과 조건을 내세워 설득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까지 현 대건설은 자동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1966년 12월 현대자동차(주)를 세우고 자동차 생산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967년 2월 마침내 포드사와 자동차 조립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했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코티나였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현대자동차의 설립과 포드사와의 기술제휴 협상을 주도하며 자동차산업의 핵심은 부품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자동차 조립은 엄밀하게 말하면 생산기술이라 할 수 없고 부품 국산화를 이뤄야만 자동차공업의 국내 정착이 가능하다는 신념을 굳혔다. 더구나 당시 국내에는 자동차부품 업체가 전무했다. 현대자동차에서도 코티나를 현대양행에 보내 부품 연구를 요청했다. 1968년 봄 정인영 명예회장은 이종영 공장장,최계열 부장,백병철 부장 등 간부들에게 자동차부품 개발을 위한 준비를 지시했다.
우선 양식기 생산을 위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프레스와 금형제조 설비를 활용할 수 있는 자동차부품을 생산하기로 했다. 히터박스(Heaterbox),훨캡(Wheel Cap), 자동차 그릴(Grill), 그리고 클러치페달(Clutch Pedal), 와이어하네스(Wire Harness) 등의 생산을 모색했다.
1969년 들어 기존에 생산하던 양식기보다 자동차부품 생산에 주력했다. 양식기 생산라인은 자동차부품 생산라인으로 바뀌어갔다. 국내 최대인 1200톤 프레스를 일본에서 도입,설치하면서 공장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사이드멤버(Side Member), 크로스멤버(Cross Member), 퓨얼탱크(Fuel Tank) 등 프레스 부품들과 히터(Heater), 엔진 라디에이터(Engine Radiator)와 같은 기능 부품들로 제품선을 확대했다. 1972년에는 포드의 영국 공장으로 크로스멤버를 납품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1970년에는 난방용 라디에이터를 생산해 서울 여의도 시범아파트에 납품했다.
현대양행은 프레스 부품과 기능 부품을 생산하는 동시에 그때까지 수입에 의지해오던 자동차부품의 연차적 국산화를 추진했다. 본격적 부품 기술은 전장품(電S品)과 속업 소버(Shock Absorber), 에어컨 등이었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현대양행 간부들에게 해외 유수의 자동차공업 현장을 돌아보도록 하는 한편 기술제휴선을 찾아 나섰다. 당시 전장품,쇽업소버 기술은 영국이 가장 앞서 있었다. 전장품은 루카스사,쇽업소버는 암스트롱사에 기술제휴를 타진했다.
그런데 루카스사,암스트롱사 모두 상당한 기술료를 요구했다. 자신들의 기술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과 자동차 부품 기술 이전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기술제휴선을 일본 쪽으로 선회했다. 도키코사와 미쓰비시사를 대상으로 각각 속업소버와 전장품 기술제휴를 협의했다. 당시 일본도 영국으로부터 도입한 기술을 축적하고 있던 시기였다. 때문에 양사가 힘을 합친다면 기술 면에서 영국을 앞지를 수 있지 않겠냐는 정인영 명예회장의 말은 설득력을 얻었다. 그리하여 현대양행은 1970년 2월 일본 도키코사와 쇽업소버 등 경차부품 생산을 위한 기술제휴를 체결했다. 이어 그해 4월에는 미쓰비시사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고 스타트모터(Start Motor), 얼터네이터(Alternator), 디스트리뷰터 (Distributor) 등의 생산을 개시했다. 미쓰비시사와는 루카스사가 요구한 기술료의 10분의 1 수준인 3만 달러에 기술제휴를 체결했다. 이에 앞서 1970년 3월에는 미국의 미첼사와 기술제퓨를 체결하고 카쿨러 (Car Cooler) 생산을 개시했다. 이처럼 기술제휴를 통한 끊임없는 기술개발 결과 현대양행은 1972년 전장품과 경차부품의 완전 국산화에 성공했다. 전장품은 스타트모터,얼터네이터,와이퍼모터(Wiper Motor), 레귤레이터(Regulator),혼(Horn), 이그니션코일(Ignition Coil) 등이었다. 경차부품은 속업소버,서스펜션스트러트(Suspension Strut), 엔진 라디에이터 히터,난방용 라디에이터를 국산화했다.
현대양행 안양공장은 자동차부품의 국산화를 주도하며 한국 자동차공업 발전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안양공장은 양식기에서 자동차부품으로 생산품목을 완전히 전환하며 회사 발전의 초석을 마련했다.
현대양행은 양식기 생산라인을 자동차부품 생산라인으로 꿈꾸고 1969년부터 자동차부품 생산을 본격화했다.
현대양행은 1971년 11월 21일 본사를 안양공장으로 이전했다. 당시 단순한 양식기 제조에서 나아가 점차 자동차부품 중심으로 사업이 확장일로에 있었다. 본사의 안양공장 이전은 이러한 사업 확대에 발맞춰 현장과 본사의 유기적 경영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안양공장 부근인 군포에 군포종합기계공장을 설립하는데 따른 후속조치의 의미도 담고 있었다.
현대양행은 이후 1974년 2월 프랑스 포크레인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굴삭기 생산을 개시했다. 이어 그해 6월 미국 피아트 앨리스사와 기술제휴를 체결,불도저,모터그레이더,휠로더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때 상표를 ‘HALLA’ 로 하며,‘한라’의 이름이 등장했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세계 진출을 적극 모색하며 발음하기 쉬운 ‘한라’로 상표를 정했댜. 특히 중동에서는 한라가 환영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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