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240108]1960년대 안양 경제 타운타운 시대동(市垈洞)

안양똑딱이 2024. 1. 9. 11:55

2024.01.09/ #아카이브 #옛사진 #안양 #태평방직 #기록 #역사/ 사진에 나오는 거대한 지역은 과거 1970년대 안양읍 시절 시대동(市垈洞.현 안양1동)이라 불리우던 곳으로 안양에서 비산동, 인덕원, 청계, 서울 강남(말죽거리)으로 가던 길목에 있던 마을로 사진에는 경부선철길(욍복2차선)과 1번국도(현만안로), 안양 최초의 시장인 안양시장(구시장)과 태평방직 공장, 안양천과, 수푸루지 다리 그리고 수푸루지마을 등이 보인다.

사진 아랫쪽에 경부선철길과 1번국도가 보이고 사진 중간이 태평방직 안양공장(진흥아파트딘지)다, 사진 좌측 동네가 당시 시대동(안양1동)과 안양시장(구시장)으로 1950-60년대 안양의 다운타운이었다. 동네 좌측으로는 한국제지가 있었다. 사진 위쯕으로는 안양천이 보이고 사진 왼쪽 위 다리가 수푸루지다리(임곡교)다. 다리 건너 보이는 마을이 수푸루지마을이다. 당시 저 다리는 안양읍내에서 인덕원과 과천, 청계로 가는 길목이었다.
구시장은 1926년 1월 군포장이 폐쇄되고 이곳에 안양시장(구시장)이 개설되고 1926년에 안양에서 전깃불이 가장 먼저 들어왔던 곳이다. 당시 구시장에는 정미소와 우시장과 대장간, 잡화상, 이발소, 중국집과 호떡집, 양복점 등이 즐비했다. 1960년대 안양4동에 새시장(현 중앙시장)이 개설되어 상권이 이전하기까지 안양읍시절에 가장 번화가였다.
태평방직은 1953년 1월에 서선하 사장이 자본금 1억환으로 안양읍 안양리 97번지 일대에 설립된 삼흥방직이 전신으로 당시 방기 1만추, 직기 50대를 구비하고 1954년 10월부터 생산을 시작한다. 하지만 자금사정을 겪자 안양3동에 있는 금성방직의 김성곤시장이 1956년 5월 15일 인수하면서 공장은 다시 기운차게 돌아갔다.
당시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은 시흥군 지역 경제를 살리는 대표적인 기업으로 두 공장에서 일하는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1960-70년대 안양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논한다. 당시 두 공장에만 3천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일해 월급날에는 안양시내 식당과 술집이 호황을 누릴 정도로 봉급 특수가 안양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의 3천 궁녀가 안양을 먹여살린다는 소리가 오랫동안 회자될 정도로 안양사람들의 기억에는 거대기업이자 돈줄이었다.
특히 태평방직과 금성방직은 안양의 인구를 증가하는 계기도 만들었다. 1960년대 당시 안양시 인구는 불과 5만여명 정도에 불과해 공장에서 일할 인력이 태부족했다. 이에 두 공장에서는 수시로 지방으로 내려가 일할 사람을 모집했는데 보릿고개로 어려웠던 시기였기에 중학교를 갓 졸업하면 취업이 가능했다. 이에 충청,전라,경상도에서 안양으로 상경한 이들이 많았는데 그중 가까운 충청도에서 올라온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안양에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기도 했지만 오빠, 삼촌 등 형제 친척들까지 안양으로 불러오는 계기도 만들어 현재 안양에 팔도민이 골고루 분포돼 있고 타 위성도시와 달리 팔도향우회가 매우 활성화 된 것도 하나의 배경이 아닐까 싶다.
이같은 배경은 안양시 인구수에서도 나타난다. 1941년 10월 1일 시흥군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되었던 당시의 인구는 10,000명, 1949년 8월 15일 안양읍 승격 당시 인구는 20,021명에 불과했는데 많은 굴뚝공장들이 들어선 이후인 1973년 7월 1일 안양시 승격 당시의 인구는 111,075명으로 무려 9만여명이나 증가했다.
태평방직은 1967년 10월 금성방직과 함께 대한농산(대농)에 매각되고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택지개발을 통해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는데 1983년 신축한 진흥아파트(5층/12층. 33개동
1940세대)로 지어진지 30년이 지난 지금 건물의 노후화로 인해 대규모 아파트단지(안양역 푸르지오 더샵. 지상 17층~37층 21개동 총 2,736세대) 재건축이 추진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