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210929]안양 동편마을 입구에 있던 4H클럽 표지판(2004)

안양똑딱이 2021. 9. 29. 16:29

2021.09.29/ #안양 #동네 #골목 #기록 #기억 #동편마을 #4H클럽 #표지석/ 동편마울이 개발될 무렵인 2004년경 마을입구에서 찍은 4H클럽 표지판 사진이다.
농촌마을에서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천지개벽을 한 동편마을 입구에 새워져 있던 추억의 지덕노체 4H 클럽 콘크리트 펫말. 2004년부터 관악산 남쪽아래 명당이라 불리우면서 안양에서 유일하게 농사지으며 아늑했던 전원마을이 개발될 당시 함께 사려져 버렸다.
4H클럽은​ 실천을 통해 배운다는 취지로 설립된 세계적인 청소년 단체로 1892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조직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52년 국가시책사업으로 채택되어 새마을 운동으로 이어졌다.
4H클럽은 19세기말 미국사회가 공업화로 진행되면서 농촌경제가 위출되자 교사와 농촌지도자등 농촌 젊은이들 사이에 새로운 각성이 일면서 확산되었고, 1902년 알버트 그레이엄이 학생과 공무원을 모아 만든 것이 모태가 된 것이라 한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군사 및 경제원조가 늘어나면서
각국으로 파견된 4H클럽 출신이 고문단에 의해 4H사상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4-H의
H 이니셜은
두뇌(head) · 마음(하트) · 손(hand) · 건강(health)을 의미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지(智), 덕(德), 노(勞), 체(體)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1970년대 4H회원으로 활동할 당시 마을회관 느티나무에 걸려있는 스피커에서 새마을운동 노래소리가 흘러나오면 빗자루를 하나씩 들고나와 마을길 청소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각 마을 어귀에는 4H라는 표지석이 동네마다 설치되어 4H의 이념을 심어주면서 학문과 농사일을 동시에 일깨우며 농촌의 변화를 가져왔다.
지덕노체와 4H영어를 외치며 손으로 머리,가슴,팔,다리등을 가리키는 행동을 동네 선후배들과 열심히도 배웠다.
저녁에는 마을회관에 모여 4H사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농사일과 마을가꾸기 사업, 새마을운동에 관련된 이야기로 토론장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산업화와 도시개발로 인해 표지석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젊은이들은 4H의 의미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듯 하다.
위 4H표지석은 안양시 동안구의 동편마을 입구에서 촬영한 모습인데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면서 표지석도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진듯 하다.
82년 쌀다수확선도 농가라는 표찰이 시골 대문옆에 부착되어 있듯이
4H운동과 새마을운동등이 절정을 이룬 시기로 쌀 자급을 위해
각 시군마다 쌀다수확상을 선발하여 표창하기도 했다.
이렇듯 쌀이 자급자족이 되지 않다가 신품종 통일벼를 개량하면서 전국적으로 재배되어 쌀 수확량을 높여 1977년에는 우리나라 쌀 자급을 달성하게 되었다 한다.
1981년 한국4-H중앙연합회가 창립돼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원단체로 가입하면서 조직관리가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이관되었으며,
‘4-H구락부’ 명칭도 ‘새마을청소년회’로 바뀌었습니다. 1983년에는 한국4-H후원회 사업 일부 도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이관되어 4-H운동은 새마을사업의 하나로 추진되었고 100만 회원이 가입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87년에는 ‘한국4-H운동40년사’를 발간하여 그간의 역사를 정리 하였고, 88년에는 ‘4-H회’라는 이름을 되찾는 등 4-H운동이 전반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였다.(김정진 시인-전 안양경찰서 정보과 정보관 글중에서) 

 

동편마을의 2004년 무렵 사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