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사진기록/탐사공지

[공지]안양탐사대 186차 탐방(20200704) 안양 옛 담안마을(4.5동)

안양똑딱이 2020. 7. 1. 23:38

 

 

안양탐사대 186차 여정- 과거 담안이라 불리우던 안양 원도심 4(장내동).5동(냉천동)

7월 04(토) 오후 4시 / 집결_안양 중앙성당(안양4동)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이하 안양탐사대)가 2020년 전반기 마지막 탐사를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시작합니다. 이번 186차 탐방은 과거 담안이라 불리우던 안양 원도심 지역인 안양4동(옛지명:장내동)과 안양5동(옛지명:냉천동)을 찾아가려 합니다.

이날 탐사에서는 마치 교황님의 모자를 연상케하는 중앙성당(안양성당-장내동성당-안양중앙성당)을 출발해 1969-2007년 근로자기숙사, 사회복지사업을 운영해왔던 근로자회관(sine 1969, 현 가톨릭회관)을 들러본후 도랑/실개천(공동묘지가 있던 성원 상떼빌-항아리골목)이 흐르던 물길과 70-80년대 주택들이 남아 있는  있는 골목길, 냉천어린이놀이터-실개천(냉천약수터-남부시장-안양천), 간만에 중고서점인 아단문고(sine 1984, 경향문고), 흥농종묘(sine 1956)도 둘러보고, 화단과 2층 양옥집들이 있던 냉천동을 돌아보고, 14년만에 진행되는 주거환경경선사업(재개발)이 본격 시작되면서 주민들이 떠나기 시작한 냉천마을의 아랫동네 골목도 살펴본후 안양6동 배터리골목(배이모포차)에서 전반기 탐사 종강 뒷풀이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안양4동
안양4동의 행정구역 변화를 보면 조선시대에는 果川君 下西面 墻內里로 진주 강씨, 전주 이씨, 원주 원씨 등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으며 1914년 서이면 안양리, 1941년 안양면 안양리, 1964년 안양면 안양리가 된후 1973년 안양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안양시 안양4동이 되었다. (장내동 명칭이 언제부터 언재까지 사용됐는지 기록을 못찾음) 
안양4동에는 과거 밤나무, 뽕나무 등이 많았던 곳인데, 울타리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담안(澹安) , 장내동(墻內洞) 이라 불리웠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밤나무가 무성한 밤동산이었는데 지금의 벽산쇼핑 일대는 ‘좌백율원’이라는 대단위 율원이 조성되어 밤을 주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삼왕제지였던 삼덕제지 앞에 안양변전소가 설치된 후 삼길양상 등의 공장과 천주교 장내동 성당 등이 건립되면서부터 개화하기 시작했다.
장내동의 중심은 천주교수원교구 장내동성당(현 안양 중앙성당)과 중앙시장이라 할 수 있다. 장내동성당은 서울교구가 1937년 밤나무밭 6,657평을 교회부지로 매입한 후 1954년 24평을 구천우(具天祐)신부가 건축하고 노기남 주교의 주례로 축성식을 가져 시흥군 안양읍 최초의 천주교 성당으로 자리했다. 1956년 5월4일 성당에서 안양최초의 유치원을 개설했으며, 그 후 건물의 노후화로 재건축을 실시하여 1991년 김영섭 건축가의 설계로 1998년 새로운 성당이 준공되면서 옛 고딕식 성당은 사라졌다.
성당 맞은편에는 근로자회관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독일여성이 관장으로 임명되었고 근로자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형편이 어려운 근로자에게는 숙박이나 식사를 제공했고 노숙자나 걸인, 홀로사시는 어르신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했었다. 지금은 천주교 수원교구 사회복지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안양 중앙성당(옛 장내동성당)

안양 중앙성당(옛 장내동성당)은 서울교구가 1937년 밤나무밭 6,657평을 교회부지로 매입한 후 1954년 9월 7일 초대 주임신부인 구천우(具天祐)신부가 안양읍내에서는 처음으로 24평의 목조건물 성당을 지어 노기남 주교의 주례로 '안양성당' 축성식을 가졌다. 1956년 5월4일에는 안양 최초의 안양유치원이 개원한다. 1958년에 명동성당과 같은 고딕형 성당을 세멘트와 목조로 신축해 1959년 봉헌식을 갖고 안양지역사회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해 오는 과정에서 성당 명칭도 안양성당, 안양4동성당, 장내동성당, 중앙성당으로 변경된다. 성당은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의 노후화로 안전문제가 생기자 1991년 사진속 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는 현대식 새 성당을 새로 지었다. 성당 주변은 1950-60년대 당시 밤나무, 뽕나무 등이 많았던 곳인데, 밤나무 울타리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내동 또는 담안이라 불렀다.

 

근로자회관

안양시 원도심 한복판인 안양4동(안양시 만안구 장내로 113)에 있던  ‘안양근로자회관’(현 가톨릭복지회관)의 1984년 건물 모습으로 1969년부터 2007년까지 근로청소년, 노동조합, 노인, 외국인노동자 등 소외된 이웃과 시민을 위한 다양한 사업과 프로그램들이 운영되던 공간이다.
안양은 1960년대 공업지대와 함께 급성장을 하던 때였다. 정부가 이끈 경제시책으로 안양 지역에는 섬유공장, 제지공장 등 수많은 공장이 들어섰다. 많은 공장이 생기자 이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근로자들이 살 곳을 찾자 안양 지역의 많은 집들이 남는 방을 하숙이나 자취방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많은 근로자들이 주거지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섬유, 제지 등 경공업이 많았던 만큼 여성 근로자들이 주거지를 찾지 못해 지역사회의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었다.
당시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 주임신부였던 정원진(루까) 신부는 지역사회의 문제에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객지에서 저임금으로 어렵게 생활하는 근로자들을 위해 기숙사 시설을 만들자고 교구에 건의했다.
1960년대 말 수원교구는 갓 설정된 가난한 교구였다.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교구청도 외국의 원조를 받은 기금으로 건설비를 충당했을 정도다. 하지만 당시 교구장이었던 윤공희 대주교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기숙사 시설 신축사업에 나선다. 가난한 이웃을 돕고 또 그러한 노력을 통해 선교하는 것이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윤 대주교는 국제가톨릭형제회(AFI)에 협조를 요청해 AFI는 독일인 선교사 서말가리와 한성인(벨따)를 파견한다. 말가리다와 한 벨따는 성당 한귀퉁이에 살면서 일용노동자들에게 국수를 무료로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에 지원을 요청한다. 이후 교구는 장내동성당 안양유치원이 있던 땅을 제공하고 외국 기관의 원조와 외국인 후원자들의 후원금이 도착하면서 천주교 수원교구가 제공한 장내동성당 안양유치원이 있던 부지에 여자청소년기숙사와 강당을 갖춘 근로자회관을 신축해 1969년 9월 10일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 독일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근로자회관 봉헌미시를 통해 개관식을 갖는다.
이후 1976년에는 증축을 통해 남성근로자를 위한 기숙사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근로자복지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근로청소년기숙사의 경우 10~20대 청소년·청년층이었던 만큼, 단순히 숙식을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낯선 도시에서 의지할 수 있는 가정의 역할을 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장시간 노동, 저임금에 시달리는 청소년 근로자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도 하고 인간적 성숙을 위한 공동체 생활교육과 사회적응에 필요한 교양교육,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노동교실, 신앙 교육 등을 제공하는 등 근로청소년 기숙사를 거쳐간 근로자 수만도 2000여명에 달한다.
또 근로자회관은 노둥자 및 일반시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에도 나서 노동법 강좌 등 노동교육과 당시 국내에서는 상영조차 할 수 없었던 사회.노동관련 영화상영, 서예, 꽃꽂이, 포크댄스, 그림교실, 판화교실, 탈춤, 사뮬놀이 등 사회교육프로그램, 노조 창립, 워크셥 및 세미나, 교육 등 옥내외 행사가 수월치 않았던 시기에 지역사회 단체들에 공간 제공, 근로자가정 임대주택사업, 무료급식소 등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다양한 사업들이 펼쳤다.
1970년대 안양권(안양 • 군포 • 의왕)은 서울 주변에 위치하면서  1980년 대 중반까지 민주화운동 또는 사회운동과 관련하여 활동이 거의 부재한 지역이었다. 대 학에서의 민주화 시위도 없었고 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활동도 없었다. 교회를 비롯한 종교계에서의 활동도 거의 없었다. 이러한 척박한 조건하에서 1982년부터 장내동성당의 근로자회관(현 전진상복지관)에서 JOC(가톨릭교회 노동청년회) 활동이 시작되었고,1983~1987년 사이에 노동법 강좌 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조용한 활동은 안양권 노동운동의 기초가 되어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의 근로자 문제가 점차 해소되자 회관은 빈민청소년, 이주노동자, 노인 등 소외계층을 위한 지원으로 활동영역을 넓혀나갔다.
1980년에는 근로자 가정을 위한 임대용주택(10가구)과 상가를 신축해 청소년기숙사에 살았던기숙생이 결혼후 가정을 꾸린 후 살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또 1990년도에는 노인과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소룰 통해 매일 점심에 따뜻한 한끼를 제공했다.
이후 공간은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운영자의 결정에 따라 1998년 기숙사사업을 종료하고 ‘천주교 수원교구 전진상복지관’으로 이름을 바꿔 외국인노동자 상담소를 비롯 가정폭력상담소 및 여성쉼터 등의 사업 중심으로 변화를 꽤해 운영하다가  2007년 12월 31일을 기해 39년의 지역사회 및 노동사업을 마감하고 문을 닫고 수원교구의 요구에 의해 천주교 수원교구로 넘어간다.
근로자회관부터 전진상복지관까지 40여년 안양지역 사회속에서 펼쳐온  공로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비롯 독일 십자훈장, ‘좋은 한국인 대상’, ‘아름다운 사람상’ 등을 복지관 대표를 통해 받기도 했다.
한편 근로자회관(전진상복지관)은 2009년 교구의 사회복지 중심지로 다시 태어난다. 천주교 수원교구는 이 건물에 대한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2년여 진행한후 2009년 12월 16일 교구사회복지의 중심기관인 가톨릭복지회관으로 재개관하여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회관에는 교구 사회복지회·교정사목위원회·이주사목위원회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교구 사회복지회는 산하 130여 곳의 사회복지시설을 관할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 수형시설에 갇힌 수용자들을 돌보는 교정사목위원회와 이주민들을 지원하는 이주사목위원회도 회관에 있다. 또한 회관은 단순히 교구 사회복지 지원을 하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회관내에 안양시장애인보호작업장과 안양자활센터를 갖췄고 교구 장애인선교회들의 각종 모임과 행사, 이주민 자녀들을 위한 선데이아카데미, 이주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장소로 회관을 제공한다.
근로자회관과 전진상복지관이 그랬듯이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만나고 나눔을 실천하는 구심점이 되어주는 것이다.
또 회관에서는 교구 사회복지회 수익사업단 ‘착한 사마리아인’의 매장도 운영되고 있었다. ‘꽃보다 아름다운 당신’(화원), ‘엔젤마트’(슈퍼마켓), ‘사랑의 국수가게 2호점’, ‘두드림과 열림’(자활매장), ‘카페 뽀르트’ 등 회관에 입점한 매장들의 수익금은 사회복지사업을 위해 활용되고 있다.
교구장 이용훈 주교는 가톨릭복지회관 축복식에서 “이 회관은 사회복지의 행정적 기능뿐 아니라 어려운 이들의 피신처 역할도 하는 행정과 사업 실천이 병행되는 공간”이라며 “회관을 통해 교구 내 지역사회의 많은 이들에게 빛, 사랑이 전해지고 하느님의 정신이 널리 구현되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항아리골목

안양 골목의 향수를 떠오르게 하며 아직도 정감있게 불리우는 골목이 여럿 있다. 밧데리골목. 변전소골목, 곱창골목, 한복골목 등등.. 1970년대 초반에 생긴 항아리골목도 그중 하나로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초까지 활기를 띠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안양에도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일자리를 찾아 충청도, 경상도 등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들며 인구도 늘어나고 당연히 생필품 가게가 줄지어 생겨나기 시작했다.1977년 중앙로가 개통되면서 안양4동의 새시장(현 중앙시장)은 인근 군포, 의왕, 과천은 물론 멀리 안산, 군자에서도 물건을 구입하러 오는 손님들로 항상 붐빌 정도로 호황이었다.
당시 그릇으로는 양은그릇과 함께 항아리 그릇들이 인기였는데 안양4동 중앙시장과 안양1동 남부시장 주변에는 항아리 가게들이 여럿 있었다. 특히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과 벽산아파트 사이 골목에는 철조망 담벼락을 따라 항아리들을 쌓아놓은 가게가 있었고 이에 이 골목을 자연스럽게 항아리골목이라 부르면서 통상적인 지명이 생길 정도였다.
과거 주택에는 뒷뜰, 뜨락, 앞마당, 우물가, 대문위 등에 장독대가 있었고, 장을 담아 놓은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말 그대로 그집의 장 맛을 보여주었지만, 현대화의 물결속에 가볍고 간편한 플라스틱에 이어 가전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항아리는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더구나 유약파동까지 겪게 되자 남부시장 주변에 있던 항아리 가게들이 하나 들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중앙시장 주변의 항아리 가게들도 줄줄이 문을 닫고는 성당 담벼락에 있던 신일항아리 단 한 곳만이 남아 현재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현재 ‘신일항아리’는 안양5동 냉천로길(175-5)에 있다. 신일항아리 창업주는 신영철씨이다. 한동안 그의 둘째아들 신동윤씨가 가업을 이어 점방을 지키다 최근 공부에 매진하고자 부친이신 신영철씨가 다시 점방을 지키고 있다.신일항아리는 1990년대까지는 현 위치에서 약 50m 정도 떨어진 장내동성당과 벽산아파트 사이 골목 담장 앞에 꽃집들과 있었다.
당시 장내동성당은 고딕양식의 성당이었는데 종탑이 위험해 지는 등 낡아 새로 신축에 들어가면서 시에서 도로를 새롭게 정비하자 현재의 장소로 옮긴 것이다.
신일항아리는 당초 있던 항아리골목에서 벗어나 주택가 골목길 인적이 드문 곳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군포나 의왕, 과천, 광명, 성남 등에서도 주문이 올 정도로 오랜 단골과 입소문으로 항아리하면 신일항아리를 찾는다.
안양중앙성당 뒷편 골목길로 점어들면 단독주택 앞에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신일항아리 간판이 보이고 점포안에는 아기자기한 작은 항아리부터 화분, 컵, 장식품, 주전자 등 흙으로 빚은 그릇들이 진열돼 있고, 담벼락에는 커다란 항아리들이 유약을 반짝이며 자태를 뽐내고 있다.
신일항아리는 전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종류의 옹기가 다 모여 있다. 그 옹기들은 주로 충청도나 전라도에 있는 동기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들인데 그 곳의 흙이 옹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옹기는 물론, 약탕기, 떡시루, 콩나물시루, 옹기정수기 및 김칫독, 크고 작은 양념통들 그리고 요강까지.. 각종 항아리들이 있다. 또 옹기로 된 화분들도 즐비하다. 요즘에는 항아리 수요가 많지 않아서 옹기명장,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등 주로 장인들의 작품을 많이 가져온다고 한다.
한 집안의 장맛을 보면 음식 솜씨를 알고, 장맛은 장독에서 나온다고 해서 예전엔 집집마다 장독대를 두고 항아리에 간장, 된장, 고추장을 담가 고이 모셨지요. 항아리는 숨쉬는 쳔연용기로 장뿐 아니라 쌀독, 김치독으로도 사용되고 뒷간이 먼 집에서는 안방에서 오강으로도 쓰여지며 이사갈때는 깨질까봐 애지중지하며 가장 귀하게 모시던 거였지요.
시대는 흘러가고 현대화속에 단독주택들이 아파트와 연립, 다세대로 바뀌며 뒷마당의 장독대도 사리졌지요. 아파트문화에 김치냉장고까지 생기고 단순 간편한 것을 추구하면서 장 담그는 것고 잊혀져 가고, 이제 장독대도 사라지고, 집집에서 큼지막한 항아리 보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발효에도 좋고, 저장 기능이 탁월하고, 내용물을 정화해 주는 숨쉬는 항아리의 효율성으로 아파트에 둘 수 있는 자그마한 응기와 신세대형 항아리를 찾는단다.
예전에는 큰 독이 많이 팔렸는데 주거환경의 변화에 따라 요즈음에는 아파트에 둘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하고, 자그마한 옹기 소품. 즉 신세대형 항아리가 잘 팔리고, 쌀독 용도의 항아리도 많이 나간다고 한다.
골목길 한쪽에 크고 작은 항아리를 보는 것도 옛 문화를 더듬는 하나의 추억이지요. 옛날 잠자기전 방 한쪽에 곱게 자리했던 오강도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는데 요즈음은 어떤 용도로 쓰일려나 궁금하네요. 어느 글에서 보니 한국을 다녀간 외국인 가정에 갔더니 이주 예쁜(어떤 것은 난초, 국화 등 그림까지 그려 있으니까여) 요강단지가 식탁위 스프 단지로 요긴하게 쓰여지고 있더란 믿거나 말거나 야그도 있고요.
신일항아리(☎ 447-1048. 만안구 안양 5동 707-77)

 

음기와 양기가 모여 신기가 센곳, 점집 많은 동네 안양4동

/ ‘안양(安養)’이란 지명은 불교의 ‘극락정토(極樂淨土)’에서 유래된 ‘즐거움이 가득하고 자유로운 이상향의 안양세계(安養世界)’를 뜻한다. 이같은 지명 탓일까. 안양은 예로부터 기와 영성이 강한 도시라고들 했다.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 신과의 소통이 잘 되기 때문일까. 안양 만안구 수리산 계곡에는 치성을 드리는 장소가 많았고, 굿당도 서너곳 자리할 만큼 기가 세다고 소문나기도 했다.. 자연환경 복구차원에서 계곡과 산 깊숙이 있던 치성을 드렸던 장소들은 사라지고, 굿당도 이젠 두곳 밖에 남지 않았지만 현재도 안양 만안구 4.5.6동을 중심으로 8.9동까지 만안구 원도심의 골목길을 거닐다 보면 무속인이 터를 잡고 있음을 알리는 빨간.하얀 깃발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또 안양4동 골목과 안양5동 충혼탑 뒷편 언덕위에는 무속용품을 파는 대형 전문매장이 있을 정도다.
안양 수리산에서 안양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속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태민안과 시민 안녕을 기원하는 신명나는 굿판이 자난 28일 펼쳐졌다.
한국무속연합회 안양본부 한상윤 본부장 말에 의하면 안양에는 1200여 명의 무속인이 활동하고 있으며 등록하지 않은 이들까지 합치면 2천여명은 훨씬 넘을 것이라고 한다. 인구 밀도로 따지면 전국에서 가장 많은 무속인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이들은 토속신앙인 무속을 전통문화로서 시민들에게 전파하고, 유. 무형의 가치를 계승·발전시키고자 한다는 뜻으로 지난 2003년 부터 수리산 자락 병목안시민공원에서 국태민안과 시민안녕을 기원하는 무예술제를 해마다 열고 있다.
한상윤 본부장은 "무속인들이 사회에서 멸시, 천대를 받고있는 현실에서 신앙성과 예술성, 축제성을 지닌 무속문화를 일반인에게 제대로 알리고 무속인들의 규합을 통해 권익 신장을 찾고자 매년 수천만원의 경비를 갹출해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1974년 안양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 뒷골목

https://anyangbank.tistory.com/2844

 

 

 

 

  

안양탐사대는 도시와 마을과 동네의 골목길에서 사라지고 변화되는 흔적들을 찾아 지난 2003년 2월부터 매주 토요일 마을과 동네 골목길을 걷는 마실을 해 왔습니다. 사진, 영상, 스케치, 이야기 등으로 도시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를 통해 또다른 프로젝트, 기획 등을 해보려는 도시.마을.골목연구, 건축, 사진,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탐사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탐사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SNS 페이스북 안양기억찾기탐사대 ( www.facebook.com/groups/132023160294699/ )에 접속후 신청해 주시거나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길잡이 최병렬(010-3311-1001)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의 지난 발걸음(2013-2019전반기)

https://ngoanyang.or.kr/5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