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공지]안양탐사대 174차 탐방(20191130) 관양 수촌마을 골목

도시사진기록/탐사공지

안양탐사대 174차_안양 관양동 수촌마을 골목

11월 30일(토) 오후 3시/ 집결_운동장사거리 정성담명가원 설렁탕 앞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이하 안양탐사대)가 2019년 후반기 탐사를 재개하며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합니다.

2019년도 후반기에는 재개발로 사라지는 동네와 도심 골목 탐사를 통해 삶의 흔적들이 사라지고 있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계속합니다.

당초 기획탐사로 안양지역 대학캠퍼스 돌아보기를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일부 탐사대원들의 바쁜 일정으로 내년으로 연기합니다.

 

2019년 11월 30일(토) 오후 3시 출발하는 174차 여정은 안양 관양동 수촌마을을 찾아갑니다. 이 동네는 1970년대 이전 안양에서 과천-청계-말죽거리를 잇는 길의 중간으로 길손들이 점시 쉬며 호흡을 가다듬으며 막걸리 한잔을 들이키던 주막집이 있던 동네로 지금도 옛길 양쪽으로는 많은 음식점과 술집들이 있지요. 이 동네 끝자락은 1900년에 지어진 현대아파트가 있는데 당시로서는 넓은 평수에 관악산 남쪽에 있는  명당자리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인기를 끌었는데 정부 부처 장관들과 별을 단 군 장성들도 많이 거주했는데 지금은 아파트 노후화로 재개발이 추진중이지요. 

특히 이 동네에는1970년대 이후 지어진 다세대 다가구들이 많은데 그래도 다보란, 꽃동산, 수목, 해동, 수촌등 여러개의 어린이놀이터겸 쌈지공원들이 자리하고 있지요. 

 

 

■ 안날미(內飛山) <비산3동>안양종합운동장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果川郡 上西面 內 飛山里라칭했다가, 1914년에 내비산리와 외비산리를 통합, 비산리로 통칭 되자 자연취락으로 전락되었다. 이곳에 처음 세거한 성씨는 전주 이씨 익안대군파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후 덕수 장씨, 문화 류씨, 보성 오씨 등이 살아와 현재는 전주 이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비산동 골짜기 안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안날미 라 칭하고 있는데, 마 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개천을 따라 동쪽 지역은 웃말(또는 음짓말), 서남 쪽지역은 아랫말(또는 양짓말)이라 각각 부르고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태해 안양종합운동장 북쪽 柳德玉(1653 - 1711 안악군수 역임)묘소 위에 있는 노송 앞에서 마을의 안정을 위해 산신제를 지내다가 외지인이 많이 입주하자 1970년대 말부 터 祭를 지내지 않고 있다. 이곳에는 류덕옥의 묘를 비롯하여 유탁 (1686- ?, 문과급제), 장언방(병조참판 역임) 등의 묘가 있다.

 

■ 말무덤이(馬音洞) <관양1동>뺌막(秀村)과 가운데말(中村)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로, 조선시대 마장골 (현 매곡동)에서 기르던 말이 죽으면 이곳에 매장했다고 하여, 말무덤이 (馬音洞)이라 부른다고 한다. 일설에는 큰 무덤이 있는 고싱라 하여 말 무덤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60년대만 해도 현 관양중학교 아래에서 말에게 편자했던 쇠 조각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는 마을 촌로들의 증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말의 무덤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김해 김씨, 나주 정씨, 韋氏 등이 오래 살아 온 말무덤이 마을이 오늘 날처럼 크게 번창되기는 1978년에 시작된 안양7지구 구획정리 사업을 실시하면서부터 이다. 이후 1982년 현대식 건물이 간간히 신축되다가, 1985년에 이르러 농경지 (논)이었던 곳에 현대아파트가 들어선데 이어, 야산이었던 곳에 아리랑 아파트와 남광2차아파트가, 밭과 논이었던 곳에 태광아파트가 각각 신축되면 서 인구가 급격히 늘었다. 또 밭과 임야였던 관양동 538 일대는 1948년 관양국민학교가 세워졌는 데 이는 동안구청 관내에서는 최초의 현대식 교육기관인 동시에, 이 학교 校名으로 인해 1973년 시제가 실시되면서 이 일대를 冠陽洞으로 명명 하기까지 하였다. 그후 1977년에는 포도밭이었던 관양동 산 90-3에는 관양중학교가 세워져, 한낱 말의 매장지에 불과했던 불모지가 오늘날에는 교육의 요람지로 크게 탈바꿈 되었다. 마을에서는 뺌말, 가운데말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1일 뺌말 뒤에 있는 산에서 山神祭를 지내는 곳이 뺌말 지역이라는 연유로 1960년대 초부터 제를 지내지 않는다.


■ 망령골(亡靈谷) <관양1동>망령골 고개주변에 있다. 본래 동편에 속한 마을로 청주 한씨 등의 세 거지이며, 민가 7호의 작은 취락이다. 구전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어떤 사람이 서울에서 나무를 팔고 과천을 거쳐 이곳을 지나가는데, 어느 여인 이 소복을 하고 나타나 하룻밤을 유숙하며 여인과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그 후 그 여인이 다시 나타나 하는말이 관악산 바위 틈에 아이가 있으니 가보시오 라고 한마디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여인이 일러준대로 현장에 띵가보니 과연 바위 틈에서 아이가 울고 있어 데려다 정성껏 기르니, 이가 후에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이라는 것이다. 망령골이란 亡靈, 즉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타났다 해서 붙여진 지명인데, 일설에는 어느 여인이 이곳에서 3년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관악산을 바라보며 기도했다고 하여 망령골(亡靈谷)이라 했다는 것이다.

 

■ 동편(東便) <관양1동>샌말(間村) 동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이 곳에 최초로 세거한 성씨는 조 선중기에 전주 이씨 익양군파인데, 현재(1991) 동편의 57가구 중 30여 가구가 전주 이씨일만큼 전주 이씨가 크게 번성했다. 후손 중에 李冕薰(작 고, 전매청장 역임), 李書九(1923 .대림콘크리트 상임고문)가 있다. 관양1동 28통에 속한 동편마을은 서남지역을 아랫말, 동북지역을 웃말 이라 각각 칭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인데다가 수도물도 안들어오는 도시속의 농촌이다.

■ 부림말 (富林洞) <관양1동>가운데말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남평 문씨와 밀양 박씨가 배판했다. 이곳은 예로부터 산림이 울창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의 다른 마을보다 부 자가 많이 산다고하여 부림말 (富林洞)이라 칭한다. 부림말은 비산동- 인덕원간의 도로확장후 대도, 한미, 골드, 남광, 삼광, 원주 등의 연립 및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일에 관양우체국 옆에 있던 박우물과 신 장로우물, 부림우물(윗우물)에서 마을의 안정과 풍년을 기원하는 井祭를 지내다가, 우물 주변에 민가가 건립되면서 샘물이 끊겨 폐정되자, 1988년 부터 祭를 지내지 않는다.

 

■ 오촌말(吳村洞) <관양1동>샌말 북쪽에 있다. 이곳에 최초로 산 사람은 조선 숙종때 承政院 左承 旨에 증직된 吳益瑞(자는 龍佰, 호는 三山散人)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후 그의 후손인 보성 오씨가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져 오씨의 마을이란 뜻으로 오촌말 이라 칭하고 있다. 마을 뒤에는 그가 생존시에 암각한 三山洞天 이란 바위가 있다.

 

■ 뺌말(秀村) <관양 1동>말무덤이 서편에 있다. 이곳에 사람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조 선 중기로 알려지고 있다. 경상도 김해에서 과거를 보러왔던 김해 김씨 金寧君派의 유생 한분이 과거를 본 뒤 귀향하다 인덕원 쯤에 이르러 관악산을 바라보니 서북쪽 언덕의 지세가 완만하고 남향받 이므로 살기 좋은 곳임을 간파하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 후 상주 김씨, 연안 차씨가 세거해 이들 세 성씨를 뺌말의 三大 姓氏 라 일컫는다. 뺌말 (秀村)이란 취락명은, 마을 내에 뺑대쑥(준말로 뺑쑥 이라함)이 많이 자생하고 있어 뺑말이라 했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지금 의 지명으로 불리워 오고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2일이면 관악산 줄기 나즈막한 봉우리에 있는 당집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기 위해 冠岳山 山神祭를 올린다. 산신제에 있어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산신제를 주관할 堂主를 선정하는 일이다. 당주는 몸가짐이 바르고 집에 상을 당한는 등 부정타지 않은 사람중에서 선정된다. 당주로 선정된 사람은 제를 지날 때까지 바깥 출입을 삼가하고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으며, 대문앞에 진흙(또는 황토)을 발라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예전에는 말무덤이, 가운데말과 함께 지내다가 부림말 등에 교회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뺌말 주민들만 지낸다.

 

■ 샌말(間村) <관양1동>동편과 부림말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샌말 (間村)이라 부른다. 전주 이씨, 보성 오씨, 경주 이씨, 광주 이씨의 세거지로 전주 이씨가 대 성을 이룬 샌말은 안양일대에서는 오지에 속하며, 인근의 마을이 하나같이 하루가 다르게 급격한 도시화 추세로 변모되어 가고 있으나, 이 마을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이곳에는 중종조에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한 柳秀獐(1435-1515), 李義駿 (황해도 관찰사), 柳寧(1507-1583, 전주판관 역임), 吳炳善(1904-1979, 만 안.안양.관양국교장역임)의 묘가 있다.


■ 샘모루(泉隅) <비산2동>삼호아파트 및 희성촌과 임곡아파트 사이에 있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에 시흥시 능곡동 뒤일에 살던 안동 권씨 정승공파 후손 한 사람이 분가해서 살다가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이 마을에 정착했으나 크게 번성하지 못해 5호의 작은 취락을 이루다가 그 중 2호가 외지로 떠났고, 현재는 3호가 남아있다. 샘모루란 마을명은 구름울(雲谷洞) 초입 산 모퉁이에 샘물이 있는데, 그 주변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 소능골(小陵谷) <관양1동>본래 샛말에 속했던 마을로, 샛말에 살던 보성 오씨 후손들의 분가로 취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샛말과 동편 사이에 위치해 있는 소능골은 5 호 남짓한 작은 취락으로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능 골 아래 작은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소능골 이라 칭하는데, 이곳에 숙종 때 문종가로 이름이 높았던 吳文瑞의 묘가 있었다가 1985년 충남 조치원으로 천묘하였다


■ 수푸루지(林谷洞, 林川) <비산1동>비산사거리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 이곳은 조선조 인조 때 좌의정을 역 임한 심기원이 그의 부친인 심간이 죽자 이 마을 뒷산에 예장한 후 그의 후손인 청송 심씨가묘하에 세거하기 시작하였고, 이어 수원 백씨, 고령 박씨, 곡부 공씨, 전주 이씨, 안동 김씨 등이 살기 시작하였다. 이 마을은 깊은 골짜기에 나무와 숲으로 둘러쌓인 고을이라 하여 수 푸루지 (林谷洞)라 칭하였다. 또 마을 앞으로 큰 하천(안양천, 임곡천)이 흐른다 하여 수풀내 라 부르기도 하였다. 수푸루지는 1978년 대림전문 대(비산동 526-7)이 건립되고 이어 비산동 신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예전에는 수푸루지 내에서도 동쪽 지역을 건너말, 서쪽 지역을 아랫말, 북쪽지역을 웃말이라 칭했으며,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2일에 평화보육원 동쪽에 위치한 당봉 정상에서 山神祭를 지냈다.


■ 시대동 (市垈洞, 舊市場) <안양1동>중앙동 동쪽으로 한국제지와 진흥아파트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안 양의 중심부인데다가 지리적으로 군포, 의왕, 과천, 광명, 수암, 군자등이 인접해 있어 시장으로서는 최적지였다. 이곳에 시장이 開市되기는 1926 년 1월 28일이었고, 거래되는 품목은 농산물을 위시하여 축산물, 포목, 일 용잡화까지 다양했다. 開市한 1년후(1927)의 년간 매출액을 보면 농산물 이 15만 6천원, 잡화가 21만 2천원, 그밖에 직물, 축산물, 수산물 등 모두 50여 만원에 달했다. 상인들은 개시 12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6월 4일 단오절을 기해 대대적으로 기념식을 거행키로 했는데, <동아일보>1927년 6월 1일자에 安養市場 一週紀念 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은 군의 중앙일뿐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따라서 산물도 상당함으로 동면에서는 작년중에 안양시장을 설치한 후 유래 성적이 비상히 양호하던 바 더우기 안양번영의 일책으로 오는 6월 4일(단오일)을 기하여 全市場 일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리라 하며 여흥으로 예기의 가무와 烏山靑年의 素人劇 외 안양소년척후대 주최의 축구대회 및 동화동요회 등이 있어서 많은 흥미가 있으리라더라. 1주년 기념식은 예정대로 동년 6월 4일 오후 2시부터 안양시장 내 광장에서 수천의 관객이 참석한 가운대 田代 발기인 대표의 식사와 조한구 서이면장의 경과보고, 神尾 시흥군수의 고사, 종문웅(안양금융조합 이사), 조희철(동아일보 시흥지국 기자), 엄기승(안양공보교 기성회장)의 축사에 이어 기녀들의 기무, 소인극등을 공연해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안양시장측에서는 이후로도 씨름대회.그네대회 등을 잇달아 개최하여 시장의 번영을 잇달아 개최하여 시장의 번영을 도모하였는데, 일례로 1933년 8월 25일, 8월30일, 9월 4일 등 장날을 기해 안양역 광장에서 안양씨름대회 를 개최했고, 같은해 음력 7월 30일 장날부터 추석날까지 매 장날마다 씨름대회를 개최해 1등에 황소1頭, 2등에 광목 1疋이 상품으로 수여되었다. 그러나 이곳이 저지대로 홍수가 나면 안양천의 범람으로 침수가 되기 일쑤였고, 더우기 1961년 11월 6일 안양4동으로 시장이 이전하자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가, 옛 태평방직 자리에 대단위 아파트(진흥아 파트)가 들어서자 번성되기 시작하였다. 1929년에 안양지방에서는 최초 로 전기가 送電된 곳이기도 하다. 市垈洞 이란 마을 명칭은 안양시장이 있었다는 연유에 기인한 것이며, 일명 舊市場 이라 부르기도 한다.

출처: https://anyangbank.tistory.com/525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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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기억찾기탐사대의 지난 발걸음(2013-2019전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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