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관악산 무너미 고개
색시처럼 다소곳이 숨어서 산객을 반기는 무너미 고개
입력시간 : 2018-11-19 18:03:54 , 최종수정 : 2018-11-27 00:22:53, 편집부 기자
http://www.bukgunews.com/news/10873
서울의 조산(朝山)인 관악산(632m)은 전형적인 골산(骨山)으로, 송악산, 화악산, 감악산, 운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五岳)의 하나다. 악(岳)의 명칭이 말해주듯 산 전체가 불꽃처럼 펼쳐진 웅장한 암릉과 암봉으로 이어져, 바위의 강한 기운 때문에 예로부터 화산(火山)으로 불려온 산이다. 역사의 격변기마다 구설에 오르내리는데 기자에게는 그저 아름다운 바위산으로만 여겨진다. 산자락은 넉넉하며 맑고 깨끗한 계곡이 7부 능선까지 이어지는데 이렇게 수기(水氣)가 넘치는 산에 화기(火氣) 운운하는 것이 어쩐지 낯설기만 하다.
관악산이 거느린 주능선, 팔봉능선, 육봉능선의 산줄기 때문에 바위가 발달해 어느 등산로를 택하든지 험한 암릉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관악산은 예상 외로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 위에 부드러운 언덕길을 숨기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무너미 고개다.
험준한 관악산이 무너미 고개를 품은 모습은 마치 무뚝뚝한 사내가 조용하고 은밀한 이곳에 예쁘고 얌전한 색시를 감추어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고개 같지 않은 고개지만 묘한 매력을 풍기는 곳이어서 만추에 물들어가는 오늘도 관악산 자락을 찾는다.
서울대 입구에 있는 관악산 공원 시계탑에서 산꾼들을 만나 ‘관악산 공원’ 현판이 붙은 커다란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여기서 널찍한 도로를 따라 가면 호수공원 입구에서 길이 갈린다. 삼성산은 직진, 왼쪽으로 가면 무너미 고개 방향이다. 호수공원을 지나면 왼쪽으로 시원한 계곡길이 이어진다. 제법 수량이 많은 완만한 계곡 옆에 난 산길을 따라가면 아카시아 동산을 지나 널찍한 공터인 제4야영장에 닿는다.
만추에 젖어가는 관악산 자락길. 무심히 단풍잎을 흔들며 지나는 바람결에 솔향이 묻어 있다.
여기서 길이 갈리는데, 왼쪽은 관악산 정상 연주대 방향으로 대부분 사람들은 이곳으로 간다. 인적이 드문 무너미 고개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이윽고 삼막사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오고 약수터에서 목을 축인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숲길 옆 개울 물소리와 단풍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뿐이다. 이름 모를 산새들이 내는 소리는 마음을 일깨워 머릿속을 비어주는 자연의 가르침으로 들린다. 약수터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수줍은 색시처럼 다소곳한 자태로 산객을 기다리는 무너미 고갯마루에 이른다. 관악산 공원 입구에서 여기까지는 가파른 길 하나 없이 그야말로 구렁이 담 넘듯 고갯마루에 오른 것이다.
제4야영장에서 무너미 고개로 가는 이 길은 인적도 뚝 끊겨 호젓하기 그지없다. 기자가 가장 좋아하는 관악산 산길이다.
고개 정상은 참으로 볼품없다. 지형 상으로 보면 옛날 관악과 안양의 등짐장수와 봇짐장수들이 짐을 바리바리 메거나 머리에 이고 넘어간 고개다. 무수히 많은 옛사람들이 이 길을 오가며 흘렸을 땀과 아름다운 추억과 간절한 기도가 배어 있는 산길일진대, 오가며 쌓아놓은 돌무더기도, 잠시 숨을 돌릴 작은 공터도 없다.
이 조그마한 고개를 통해 관악산과 삼성산이 연결된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어쩌면 두 산이 만나면서 서로 자신을 낮추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무너미'라는 땅이름에는 아름답고 고운 우리말의 예스러움과 멋스러움이 담겨져 있다. '무너미'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 사전적 의미로 보면 논에 물이 알맞게 고이고 남은 물이 흘러넘쳐 빠질 수 있도록 만든 둑을 말한다고 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물넘이'로 해석할 수 있고, 지금도 물을 넘치게 하는 시설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지명에서의 무너미는 지형적으로 높은 지역에 위치하여 물이 넘어간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므로 그 어원을 밝혀볼 필요가 있다.
서울의 '수유(水踰)리'는 '무너미'의 '무'를 '물(水)'로 보았고, 음성 평곡리의 '무너미'는 한자로 '군월티(群越峙)'로 표기하여 '무'를 '무리', '뭇'의 의미로 보았다. 또한 산(山)의 고유어로 '미, 뫼, 메, 매' 등이 있는데, 단양 대강 금곡의 '매나미재'의 예처럼 '무'의 어원은 '뫼(山)'로서 '뫼너미〉매너미〉무너미'의 변화 과정으로 유추해 볼 때 '산을 넘어가는 고개'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어느 설이 맞는지 기자가 판단할 능력은 없지만, 관악산 무너미 고개를 넘다보면 세 설이 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숲은 가을이 장관이다. 온갖 수목이 오색으로 물들고 특히나 단풍나무의 붉은 빛이 햇살에 빛날 때 왜 단풍의 상징성을 단풍나무가 가져갔는지 알게 된다. 고개 정상에서 학바위 능선쪽으로 길을 잡고 산길을 따라 가면 저 아래 계곡 물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관악산 팔봉능선에서 출발한 물이 삼성천으로 흐르며 내는 소리다.
팔봉능선에서 삼성천으로 흘러들어가는 계곡물. 삼성천은 삼성산에서 발원하여 시흥계곡을 따라 흘러 안양천으로 합수된다.
삼성천을 따라 울창한 숲속으로 평탄한 하산길이 이어진다. 신발을 벗고 맑디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근 채 시원한 막걸리 한잔을 들이키면 이게 바로 신선놀음이 아니던가.
막걸리 마시는 공터 위로 한줄기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처럼 안팎으로 거리낌이 없어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는 것. 본래 내 것이 있었던가. 한 때 맡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놓아 버리는 연습을 익혀 두어야 지혜로운 자유인이 될 수 있는데 이게 참 힘들다.
하산하는 숲길 도란도란 길섶에 웅크린 풋풋한 풀들이 얼굴을 내민다.
나무 그림자 내린 맨흙바닥은 푹신하고 맑은 한지처럼 순수하다.
산길이 해맑아 온몸으로 산과 섞인다. 여기에 그 어떤 욕심도, 고뇌도, 번민도 없다.
그저 그 자체로 무구하고 아름답다. 길이 도(道)이고 도가 길인 이유가 이와 같다.
계곡과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있는 오솔길을 따라 산길을 내려온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산길을 한참 내려오면 서울대 수목원 후문이 시야에 들어온다.
서울대 수목원은 2017년 2월부터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단, 뒷문만 개방하기 때문에 관악산을 하산하는 경우에만 수목원을 지나서 안양예술공원으로 나갈 수 있다. 수목원이 막혔을 때는 후문 오른쪽에 난 우회 등산로를 자주 이용했는데, 삼성산 허리를 가로지르는 길이기에 수목원 길을 포기하고 발품을 조금 팔면 이제까지의 평탄한 코스와 달리 제법 가파른 오르막과 아기자기한 암릉을 즐길 수 있고, 관악산 주능선의 장엄한 암봉도 조망할 수 있다.
수목원 안의 저수지에 떨어진 늦가을의 나뭇잎새. 기약 없이 떠나는 운수(雲水) 신세다.
수목원을 지나 이 길이 끝나는 안양예술공원에는 트레킹을 마친 산꾼들을 위한 보너스로 전통 유물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예술공원 입구 주차장 한쪽에 자리잡은 우리나라 유일의 석수동 마애종(石水洞磨崖鐘)이다. 마애종이란 암벽에 종을 새긴 것으로, 석수동 마애종은 남서향의 암벽에 장방형의 목조 가구와 그 안의 종을 새겨 넣고 스님이 그 종을 치는 장면을 묘사했다.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마애종으로는 유일한 작품으로 가치가 높으며, 종의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 청동제와 다를 바 없어 종 연구에도 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석수동 마애종은 인근의 중초사지(中初寺址) 유적과 연관성을 생각해볼 때 고려시대 초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마애종을 지나 삼성천을 따라 관악역으로 가는 도중에 충남 공주시 계룡면 가교리에 있는 무너미 고개 전설 하나가 떠오른다.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이 정해지면 금강 물이 이 고개를 넘어서 논산시 노성면의 초포(草浦)를 지나 논산천과 합하여 강경포(江景浦)로 들어가서 초포에 배가 드나들게 된다고 한다. 이는 정감록 부류의 이야기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세상이 물에 잠겨 있는 상황은 곧 카오스(CHAOS) 상태이다. 이것은 코스모스(COSMOS)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러한 예언도 결국은 혼란한 현실에 대한 부정과 질서가 바로 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민초들의 열망을 담고 있다.
전국에 산재한 무너미 고개의 전설들은 서사구조가 단순하고,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관악산 무너미 고개를 넘나들던 민초들도 이런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았는지 모른다.
여계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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