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74년 안양역과 열차통학생

안양똑딱이 2017. 7. 2.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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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의 안양역 풍경으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는 학생들과 전철 플렛폼 공사가 한창인 모습이 담겨있는 한장의 흑백사진이다_경향신문.  
1960-70년대 서울, 부산 등 대도시 주변에는 '통학열차'로 등교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지금은 서울~인천, 서울~수원 구간 등이 멀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지만 그때에는 등교에만 족히 2시간 가까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특히 중·고교 평준화가 이루어지기 전인 1973년 까지만 하더라도 안양에 있던 고등학교는 안양여고, 안양공고, 근명여고뿐으로 인문계 남자고등학교가 없어 서울과 수원, 인천으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열차통학생은 지각이 가장 큰 두려움중 하나였다. 통학열차가 떠난 뒤에는 온가족이 늦잠을 잘 경우 통학열차를 놓쳐 허겁지겁 달려 오던 모습, 거울 보며 머리단장하다 열차시간 놓쳐 출발하는 기차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여학생, 역무원의 눈길을 속여 가며 친구들 응원소리에 힘입어 달리는 기차에 뛰어올라 만용을 부리던 남학생도 있었던 것이 당시 역의 아침 풍경이었다.
연탄불이 꺼지거나 석유풍로의 기름이 없어 도시락은 커녕 아침밥도 못 먹고 통학열차에 올라 하루종일 밥을 쫄쫄 꿂는 경우도 예사였던 시절이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기 까지 3년 내지 6년동안 매일 1-2시간씩 함께 기차를 함께 타다 보니 심심치 않게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사랑 얘기도 터져나와 다른 학생들이 부러워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사진속 열차 통학생들은 지금쯤 60대가 되어 있을터이다.
만원 통학열차의 추억
만원 찜통버스의 추억
호젓한 주말 열차여행의 추억
지나고 보면 가슴 한켠이 따뜻한 이야기들이다.

의왕 포일리 출신(1945년생)으로 1960년대 매일 새벽녘 청계에서 안양역으로 그리고 다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통학을 했던 정진원 선생(수필가이자 문학박사)은 통학열차의 추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기차통학’ 시절이 있었다(정진원_ 문학박사, 수필가)
천안역에서 출발해서 안양역을 거쳐 서울역까지 ‘통근(학)차’가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처음에는 증기기관차가 머리였었고, 나중에는 디젤기관차가 되었으며, 지금은 그마저도 볼 수 없게 된 전철의 시대이다.
정해진 시각이 되면 육중한 증기기관차가 수증기 물방울 뿌리며 기적을 울리면서 안양역으로 들어왔다. 서울 학생들의 등교와 직장인들의 출근 시간에 맞추려면 안양역 아침 통근차의 출발 시각은 오전 7시경이 아니었나 싶다. 통근차를 놓치게 되면 학교를 가지 못하게 되므로 통근차가 안양역에 들어올라치면 사람들이 허둥대면서 역으로 달려가곤 했었다. 저녁때가 되면 두 번인가 천안행 통근차가 있어서 아침 역의 그 사람들을 토해내듯이 내려놓고는 미끄러지듯이 떠나가곤 했었다.
천안에서 출발한 통근차는 성환, 평택, 오산, 병점, 수원, 부곡, 군포, 안양, 시흥 등 역에서 기다리는 학생들을 차례차례 싣고 서울역으로 달렸었다. 영등포, 노량진, 용산에서 내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나는 노량진에서 내려 한 20분 걸어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달리는 기차 안은 언제나 악동들의 전국시대였다. 자기 동네 역의 명예를 걸고 싸움을 벌여 길어야 두 시간여 치외법권 지역 안의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전사들이 있었다. 어떤 때는 평택파가, 그 다음은 부곡파가, 그러다가는 시흥파가 패권을 잡았었다. 돌멩이를 날리며, 유리창을 부수며 적군을 대하듯이 전의가 충천했었다. 기차 안에는 이른바 잡상인들이 들끓었다. 바늘장수, 오징어와 땅콩장수, 각종 약장수 등의 장광설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일반 객차가 있었지만 때로는 새카만 화물차가 대신 오기도 했었다. 거기에는 발판이 없었기에 어린 중학생이 화물차에서 자갈밭으로 뛰어내리곤 했었는데, 다리를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화물차를 개조해서 조잡하게 만든 객차도 있었는데, 거기에는 나무 의자를 놓고 겨울이면 석탄 난로를 피우면서 다녔었다. 일반 객차에는 의자에 융단이 깔려 있었지만, 구두를 닦는 데 쓴다던가, 면도날로 도려내가 볼썽사나운 의자가 많았었다.
노량진에 있었던 학교에 다녔던 나는 한강철교를 건너오는 기차의 긴 기적소리와 하얀 수증기를 보게 되면 거의 기차와 나란히 뛰어 노량진역에서 기차에 오르곤 했었다. 토요일 낮 기차를 타고 안양역에 내리면 바로 고향집으로 간다는 설렘 때문에 한강 철교를 건너오면서 내는 기적 소리를 누구보다도 먼저 들었었던 것 같다.
아침이면 서울에 있는 모든 중ㆍ고등학교, 대학교 학생들이 안양역 플랫폼에 모여들었다. 제복과 모자를 입고 쓰고, 명찰과 교표, 학년 표시 배지(badge)를 달고 다니던 시대였다. 지금도 서울 시내 거의 모든 학교의 교복 모양, 교표 등이 눈에 선하다.
동복은 검은 색으로 한 가지였으나, 하복 상의는 학교에 따라 다양하였다. 남학생 모자에는 백선을 하나, 또는 둘, 또는 아예 없게 한 학교도 있었다. 경기고의 흰 스티치를 한 마름모꼴 명찰이 인상적이었다. 서울고의 세모꼴 교표, 내 모교인 동양공고의 ‘다윗의 별’ 같은 교표, 경복고의 ‘福’자 교표 등등. 창덕여고의 꼭지 달린 ‘고바우 모자’, 수도여고의 허리띠 중간의 하트형 버클, 진명여고와 양정고 학생들은 백선이 들어간 ‘표지’를 가슴에 붙이고 다녔었다. 고려대는 호랑이상의 빨간색 교표, 이화여대는 배꽃 모양 교표였다. 서울대 교표는 뭐 그리 복잡하게 만들었는지, 국립서울대의 한글 이니셜 상징을 ‘공산당’으로 읽기도 했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안양역에서 불가피 만났다, 헤어지는 학생들이었기에 그들 간에는 이성 간에 짝사랑에 빠져 학교보다는 그와 함께 기차를, 교실보다는 그녀와 함께 객실에 있기를 더 좋아하게 되거나, 노골적으로 마각을 드러내면서 서로간의 견인을 확인하려 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통근차가 인연이 되어 혼인에까지 이르게 된 커플이 있을 것이며, 그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 이름을 ‘○통학’이나 ‘○기차’로 지은 사람은 없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