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47년 박두진 시인 안양중앙교회 장로 되던 날

안양똑딱이 2017. 6. 22. 20:28

 

1947년 박두진 시인 안양중앙교회 장로 되던 날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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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탐방에 나서 재개발을 앞두고 한집 두집 이사를 떠나가는 동네의 골목을 다니다 보면 버려진 물건들 속에서 귀중한 물건을 득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사진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발굴한 것으로 1985년 5월 17일 발행한 안양중앙교회 55년사에 실린 것으로 철거 공사가 한창인 안양6동 소골안(소곡마을)을 마지막 풍경을 사진에 담기 위해 갔다가 철거를 앞둔 어느 집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한 책속에 담겨진 사진중 한 컷이다. 

사진은 청록파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혜산(兮山) 박두진 시인이 안양에 거주하던 젊은 청년 시절 안양중앙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31살의 젊은 나이에 장로에 장집되던날(1947년 11월 30일)에 찍은 기념사진이다.

박두진 시인은 1916년 안성에서 태어나 1998년 9월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는데 젊은 청년시절인 1942년부터 1950년까지 안양3동에 거주하고 안양중앙교회를 다니면서 시 창작과 종교생활을 하는 등 안양과 연고가 있었음을 아는 이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

박 시인은 1939년에 ‘문장(文章)’을 통해 등단한 후 1942년 8월에 일가족 5인이 안양으로 이주하고 금융조합의 사무원으로 취업했다. 1944년 8월에  안양중앙교회에서 일가족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했으며 박 시인은 열심히 활동해 1947년 11월에 장로에 장립되었다. 1947년 말부터는 안양 4동에 있는 삼덕제지 서무과장으로 근무했는데 6.25전쟁 직전인 1950년 초 가족이 서울로 이주하면서 안양과의 인연도 끊어진다.

안양을 대표하는 문학인 김대규 시인은 박두진 시인이 8년 동안 안양에 거주하면서 남긴 두 가지 문학적 업적이 있다고 글에서 말했다.

그 하나는 한국시문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청록집’의 출간이다. 박두진·박목원·조지훈 시인의 합동시집 ‘청록집’이 간행된 것은 1946년, 곧 박두진 시인이 안양에 기거하던 때다. 그러니까 시인은 ‘청록집’에 수록된 12편의 주옥같은 시들을 안양에서 탈고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양은 박두진 시인을 잊을 수 없다.

또 하나는 ‘안양문학동인회’의 결성과 동인지 ‘청포도’의 간행으로 1947년 8월 30일자의 동아일보 신간 소개란의 기사로 확인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동인들의 면면이나 활동내용, 특히 ‘청포도’ 동인지가 남아 전해지지 않음은 문학적 유실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창간 주역인 정귀영 평론가 자신도 “8·15광복 직후에 안양에 「청포도」라는 동인지가 탄생했는데, 이것이 아마도 안양문학의 효시였다고 생각한다. 워낙 오랜 세월이 흘러 당시의 동인들 이름도 박두진 외에는 기억에서 되찾을 수 없다”고 회상한다.

이에 안양문인협회에서는 2008년 12월 25일 안양문학 60년사를 발간했는데  ‘안양문학동인회’를 결성하고 ‘청포도’를 창간한 1947년을 기점으로 삼았다.

한편 김대규 시인은 이 두 가지 사실만 가지고서라도 박두진 시인이 안양에서의 문학생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인 바, 박 시인이 근무했던 ‘삼덕제지’ 자리인 현 삼덕공원에 박두진 시인를 기리는 시비를 건립했으면 좋겠다늰 의견을 오래전부터 각종 기고 글을 통해 피력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