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박철하]근대 민족운동과 안양

안양똑딱이 2017. 5. 10. 21:33

근대 민족운동과 안양
                                  
                                                           박철하(前숭실대 강사)

 

목 차
1. 근대 안양지역의 사회변동
2. 대한제국기 안양․시흥지역의 농민운동
3. 을사늑약 체결 이후 안양지역의 의병활동
4. 안양지역의 3.1운동
5. 1930년대 안양지역의 노동운동
6. 1940년대 이재천․ 이재현 형제의 반일독립운동

 

1. 근대 안양지역의 사회변동

1) 정조의 현륭원행 이후 안양지역의 사회변화

  조선시대에 안양(安養)이라 하면 금천현 현내면의 안양리(安養里)를 의미한다. 현재의 안양지역과 관련하여 볼 때 석수동 일대로 안양사(安養寺)와 관계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과천군 하서면 안양리(安陽里)가 보이는데 이곳에는 역참인 안양역(安陽驛)이 있었으며, 현재의 안양역 주변으로 추정된다. 대한제국기에도 경부선철도의 임시정거장이 있던 곳이 안양장(安陽場)이었으며, 1905년 11월 원태우 지사가 이등박문이 탄 기차에 돌멩이를 던진 곳도 안양장 근처였다. 그런데 안양장과 안양역참(安養驛站, 撥所)은 안양(安陽)과 안양(安養)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이후 안양(安養)으로 통일되었다.
  안양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정조가 즉위한 뒤 수원 땅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시기 위해 현륭원을 조성하고, 새로이 화성을 축조한 뒤 노량진-시흥-안양-수원을 경유하는 길을 조성하면서부터였다. 처음 정조의 '화산능행(花山陵幸)'은 남태령을 넘고 과천을 지나 사근현(지금의 지지대고개)을 넘어 수원에 이르는 길이었다.
  정조는 1794년 시흥로를 개척하고, 그 이듬해부터 화산능행의 노정을 시흥과 안양을 거쳐 현재의 의왕을 지나 수원에 이르는 길로 변경하였다. 정조가 과천로를 버리고 시흥로를 개설한 것은 큰 고개가 없고 평지여서 이동이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시흥로가 개척되면서 새로이 안양역참이 설치되었고, 정조는 능행할 때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도 했다.(安陽站에 이르러 撥所에 잠깐 들르셨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길의 遠近을 헤아려보니 족히 晝停所가 될 만하다” 하셨다. 徐龍輔가 아뢰기를, “村店이 불과 10여 호에 불과하고 從官이 容接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살기를 조금 기다려 논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이어서 命하여 撥將을 불러 하교하시기를, “이곳에 마을이 점차 성취할 수 있겠는가?” 하셨다. 이에 답하기를 “예로부터 輦路에는 人戶가 점차 늘어납니다” 하였다/󰡔승정원일기󰡕 정조20년 1월 20일/1796) 만안교(萬安橋)의 축조는 안양지역의 교통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자연히 역참인 안양역과 안양행궁 주변은 점차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조 이후의 조선 국왕들이 시흥로를 자주 이용하지 않게 됨으로써 발전은 주춤하였으나 안양장시는 계속 존재하였다. 안양장시는 안양역참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이며 호계리의 군포장시와 함께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한편, 1830년대에는 안양 수리산 자락(병목안 담배촌)에 천주교인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현재 이곳은 천주교성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기 광무양안을 보면, 안양지역의 주민생활을 가늠해볼 수 있다. 당시 과천군 상서면과 하서면 농민의 토지소유 상황을 살펴보자. 상서면(336호)의 한 마을(42호)의 경우, 부농과 중농에 해당하는 거호는 3호로, 전체 호수의 7.2%가 전체 토지의 64.9%를 소유하였다. 반면에 빈농과 무전농이 전체의 88.1%를 차지하였지만 토지는 전체토지의 23.1%만을 차지하였다. 하서면(518호)의 한 마을(42호)의 경우, 아예 중농 이상의 거호가 없고, 빈농과 무전농이 거의 83.8%를 차지했으며, 빈농이 소유한 토지는 전체의 32.4%에 지나지 않았다. 이처럼 상서면과 하서면의 농민들은 대부분 소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거나 전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무전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소작지도 갖지 못한 극빈농이 상서면에 11호(26.2%), 하서면에 10호(23.8%)나 되었다. 이들은 토지소유와 경영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고농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2) 일제강점기 안양지역의 사회변화

  안양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04년 경부선철도가 완공되고 안양역이 설치되고부터였다. 1905년 1월 1일 경부선 철도 개통 이후 안양역을 중심으로 인구가 증가하시 시작하였고 안양시장도 꾸준히 발전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 되어 상서면과 하서면이 서이면으로 통합되고 서이면사무소가 호계리에 설치되었는데 이곳은 과천군 하서면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그러나 안양역을 중심으로 시장이 발전하고 주민이 증가하면서 곧이어 1917년 서이면사무소는 안양역 부근으로 이전하였다. 안양역은 인근지역의 물류의 집산지이자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해 갔다. 하지만 안양의 발전에는 커다란 장애가 있었다.
  먼저 1910년부터 진행된 토지신고를 시작으로 1918년 완료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작성된 안양지역 '토지조사부'에 나타난 토지소유 실태를 보자. 안양지역의 전답은 국유지는 극히 적었으며, 민유지의 비중이 98.2%에 달했다. 안양지역 7개리 전답 등의 토지소유자는 모두 833명이었다. 이 가운데 극히 영세한 빈농을 포함하여 1정보 이하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농민수는 524명으로 62.8%를 차지했으나 이들이 소유한 토지는 전체 토지의 10.8%에 그쳤다. 0.2정보 미만의 영세한 토지소유자는 151명으로 전체 인원의 18.1%인데 그들이 소유한 토지는 전체 토지의 0.9%에 불과했다. 이에 반하여 5정보 이상을 가진 소유주는 69명으로 전체의 8.4%에 해당하나 소유 토지는 전체의 61.5%에 달했다. 즉 안양지역은 대토지소유자의 토지소유 비율이 매우 높았으며, 경기도의 다른 평야지역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지주제가 발전해 있었고 대부분의 농민은 영세한 토지소유자들이었다.
  이러한 토지소유의 편중성은 특히 부재지주에 현황에서도 확인된다. 부재지주는 모두 154명으로 이 가운데 경성에 거주하며 5정보 이상의 대토지를 소유한 자는 48명이었으며, 이들이 소유한 토지는 전체의 50%에 이르고 있었다. 10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도 31명이나 되었으며, 이 가운데 안양지역 거주자는 1명뿐이었다. 특히 고종의 형인 이재면(李載冕, 1845~1912)과 대한제국기 법부대신 등을 역임한 한규설(韓圭卨)과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조선귀족'으로 작위를 받게 되는 고희경(高羲敬, 1873~1934), 이윤용(李允用, 1854~1939) 등이 눈에 띈다. 일본인 대토지소유자는 과천과 진위에 살고 있던 2명의 부재지주 외에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1920년대에 들어와도 특별한 변화를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성에 본사를 둔 고뢰(高瀨)합명회사 안양농장이 안양 시가지와 그 부근 전면적의 약 80%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안양농장에 속한 조선인 소작인이 200명에 달했고, 일본인 소작인도 17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집터 값을 인상하고 소작료 체납자에 대하여 소작권을 이동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하였으며, 안양주민들의 생활은 매우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안양지역의 개발에 많은 어려움을 초래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1920년대부터 안양지역은 발전의 속도를 더했다. 1924년 4월 안양금융조합이 설립되고, 1925년 12월 안양시장이 조선총독부 경기도지사에 의해 인가되었다. 시흥군수도 안양시장의 확장 발전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1925년 1월 16일 안양면에 사립학교가 경기도에 의해 인가받고 운영되었다. 1924년부터 면내 유지 李世鎭, 朴敎復, 李宅來, 趙濬九 등의 발기로 설립되었다. 당시 󰡔매일신보󰡕 1925년 3월 14일자에는 “안양면은 천여 호와 만여 인의 인구를 포옹한 대부락임에도 불구하고 상금(尙今)토록 상당한 교육기관이 무(無)”한 상황에서 교육계의 일대 서광을 보여준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안양지역의 아동들은 군포나 시흥, 영등포, 과천 등지의 보통학교를 다녀야 했다. 기차를 타거나 걸어서 통학하기에는 너무 불편한 상황에서 취학 아동들의 입학난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1927년부터 추진된 안양공립보통학교 설립 추진활동은 마침내 1929년에 결실을 맺어 경기도지사의 인가를 받고 12월 20일에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안양역과 안양시장을 중심으로 교통이 편리하고 산물의 집산지이자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안양은 점점 시흥군의 중심지로 성장해 갔다.
  안양소년척후대와 안양청년회가 결성되어 안양지역의 지도계발에 앞장섰다. 안양소년척후대의 주최로 1927년 6월 제1회 안양소년축구대회가 개최되었으며, 안양청년회는 1928년 10월 안양역 앞에서 활동사진대회를 개최하였다. 1929년부터는 타카세농장(高瀨農場)과 안상호(安商浩)농장을 설득하여 도로변에 전주를 세우고 전등이 가설되기 시작하더니 그해 안양에 전기공사가 완공되어 11월 20일부터 점등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 안양지역의 산업도 발전하였다. 󰡔동아일보󰡕에서 “경부선 안양역 일대는 시흥군의 중심지요 공장지대로 이름이 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1932년부터 추진된 조선직물주식회사 안양인견(人絹)공장은 그 이듬해 3월부터 조업하였으며, 1935년 조선직물주식회사 안양인견공장 노동자, 1936년 조선직물주식회사 염색가공부 직공들의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천연적 풍경을 자랑하는 안양수영장(풀장)도 수선하여 더 많은 관광객이 찾게 되어 수영장 주변에 임시정거장도 설치하고, 기차삯도 할인되었다. 심지어 피서객을 위해 임시열차도 배정하였다. 더욱이 1936년 4월 1일부로 경성부구역확장에 따라 시흥군청이 있는 영등포읍이 경성부에 포함됨에 따라 시흥군청을 안양으로 유치하기 위해 군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나 결국 해방 후에나 결실을 보게 되었다. 즉 시흥군청의 이전 유치를 희망할 만큼 이제 안양은 시흥군의 주요 중심지로 부상하였던 것이다. 1938년에는 영등포 신길교에서 안양까지 도로포장이 이뤄지고 경부선도 복선화되고 안양역사도 신축되었다. 1938년 12월 28일부터 전화도 개통케 되었다. 1940년에는 하수도공사가 이뤄졌다. 학생이 점차 증가하면서 학교 증설운동이 전개되었고 1940년 3월 2일부로 안양공립심상소학교는 6년제로 승격되었다. 이시기에 안양발전책이 새로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안양지역도 일제의 전시동원체제로 휩쓸려 들어갔다. 전시상황에서 목재의 필요성에 따라 1939년에 도립 임업시험장이 신설되고, 경방단이 결성되었다. 중일전쟁에 참가했던 안양지역의 일본인 청년(沖井國治)이 전쟁 중에 사망하여 유골로 돌아왔는데, 시흥군사후원연맹장으로 안양소학교 교정에서 고별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1940년 2월에는 식량통제를 위해 안양지역의 정미업자와 관련자들이 중심이 되어 시흥군식량배급통제조합을 결성하였다. 조선직물주식회사 안양공장에 설치된 경방단과 서이면 경방단에서는 검열이 시행되었다.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1930년대 전반에 안양청년단이 성립된 뒤에 1940년에는 안양여자청년단이 결성되었으며, 1941년 6월에는 안양에서 시흥군청년단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1941년 10월 1일 시흥군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되었다. 명실상부하게 '안양'이 시흥군내에서 이제 경제와 행정, 정치상의 중심부로 부상했다고 할 수 있다. 시흥군청이 소재한 영등포가 경성부로 편입된 상황에서 군청이 소재하지 않을 뿐 이제 안양은 시흥군의 중심지였다. 1942년 11월에는 시흥군체육진흥회가 결성되었고, 1943년 10월에는 조선총독부 가축위생연구소 안양지소가 개소하였다.
  한편, 1944년 5월 박흥식의 조선비행기주식회사 안양공장이 시운전에 들어가 6월부터 작업을 개시하였다. 박흥식은 조선직물주식회사와 동양방적회사를 헐값에 인수하고 현재의 평촌지역에 비행장부지를 계획하였다. 1949년 반민특위 공판 청구 기록을 보면,󰡒공장과 비행장 부지로 농토 2,300여 평, 45만여 평에 달하는 토지를 군부 세력을 이용, 강제 몰수하여 250여 지주와 900여 호에 달하는 농가 4,000여 농민이 농지를 박탈당하고 생로가 막혀 가두에서 방황하여 눈뜨고 볼 수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구 서이면사무소에서 진행된 피해 농가 진술 자료를 살펴보면, 각계각층의 면민이 농지 몰수와 강제 노역, 우마차 징용 등으로 착취에 따른 큰 고통이 뒤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만행으로 박흥식은 광복 후 반민특위 제1호 검거자로 구속 되었다. 하지만 친일파 청산은 왜곡, 무산되었고, 박흥식은 보석으로 풀려났으며, 겨우 공민권 2년 정지라는 가벼운 판결을 받아 국민들을 허탈하게 하였다.

3) 안양시의 행정구역 변천


구분
18세기
19세기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
2007년
과천 상서면
삼현일리
일동리
일동
서이면 일동리
동안구 관양1ㆍ2동
부림동
삼현이리
이동리
이동
비산리
비산리
내비산리
서이면 비산리
동안구 비산1ㆍ2ㆍ3동
부흥동 달안동
외비산리
과천 하서면
안양리
안양리
안양리
서이면 안양리
만안구 안양5ㆍ6ㆍ7ㆍ8동
발사리
발사리
만안구 안양1동
석수촌
석수동
만안구 안양2동
장내동
만안구 안양4동
후두미리
후두미리
후두미리

만안구 안양3ㆍ9동
호계리
범계리
호계리
서이면 호계리
동안구 호계2동 범계동 신촌동 동안구 호계1ㆍ3동 갈산동
도양리
도양리
도양리
귀인일동
일동리
일동
서이면 이동리
동안구 평촌동, 평안동, 귀인동
귀인이동
이동리
이동
시흥
현내면 안양리
현내면 안양리
동면 안양리
동면 안양리
만안구 석수1ㆍ2ㆍ3동
서면 박달리
현내면 박달리
군내면 박달리
서면 박달리
만안구 박달1ㆍ2동
합계
4면 11동
3면 13동
3면 14동
3면 7리
2구 31동

(󰡔안양시사󰡕 제1권, 215쪽)

2. 대한제국기 안양․시흥지역의 농민운동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침탈이 동아시아를 휩쓸기 시작했다.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개항 이후 일반 민중경제의 파탄은 더욱 가속화되고 민족적 위기는 고양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변혁적인 농촌지식인 집단이 성장하면서 농민층의 정치,사회적 의식은 점차 근대적으로 성숙되어 갔다. 특히 동학교단을 매개로 이전의 민란단계를 뛰어 넘어 국지성을 극복하고 조직과 대중적 기반을 갖춘 새로운 농민항쟁으로의 전환이 이뤄졌다. 이러한 역량을 바탕으로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했다. 갑오농민전쟁은 봉건적 폐단을 개혁하고, 나아가 외세의 침투에 저항하여 일어난 반봉건, 반외세 민족운동이었다.
  갑오농민쟁이 좌절된 이후 일본의 토지약탈과, 철도 및 광산 등의 이권침탈, 일본의 경제적 침투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특히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실질적으로 식민지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이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대한제국기(1897~1910) 안양지역을 포함한 시흥지역에서는 두 차례의 농민운동이 전개되었다. 첫 번째는 1898년 군수의 가렴주구와 관리들의 불법행위 등 봉건적인 수탈에 저항하는 농민항쟁이었다. 특히 군수를 지낸 문봉오(文鳳梧)의 불법적 탐학과 가렴주구, 부패한 향리(鄕吏)들의 작폐는 농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농민봉기의 주모자들은 모여서 회합일을 정하고, 향리들의 잘못을  정리한 다음, 사발통문(沙鉢通文)을 통해 각 동리에 알렸다. 집강이나 이장 등은 농민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향회에 불참하할 경우 벌전(罰錢)을 부과하는 등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였다. 또한 원성의 대상이 된 향리들의 죄상을 정소(呈訴)하여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봉기한 농민들은 원성의 대상이 된 아전과 향리 등 이서배들의 가옥, 창고 등을 파괴하고, 이후에도 해산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읍내에 계속 머물렀다.
  새로 부임한 군수 이교영은 경기관찰사 김영덕의 지시를 받아 농민군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며 농민군을 해산시키고 원성의 대상인 이서들과 농민군의 주도자인 집강 성우경(成禹慶) 등을 옥에 가두었다. 하지만 농민군 지도자는 체포 수감되었으나 전 군수 문봉오는 재판도 받지 않자 다시 군내 동민들이 모여 문봉오의 재판을 요구함과 동시에 성우경의 석방을 요구했다. 나아가 만민공동회장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고, 만민공동회에는 고등재판소에 총대위원을 파견하여 농민군의 요청에 부응하였다. 전 군수 문봉오는 태(笞) 100대에 처해지는 벌을 받고 일시적으로 면관되었으나 3년 뒤 다시 평북 시찰관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농민항쟁은 사건 발생 1개월 만에 일단 수습되었다.
  두 번째는 지방관의 수탈은 물론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 강압적으로 체결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에 근거하여 일제가 군사용지와 철도용지 명목으로 토지를 강탈하고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이나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하는 등의 행위에 저항하는 반봉건, 반외세 투쟁이었다.
  시흥군수 박우양(朴嵎陽)은 각 면의 집강들을 소집하여 일본군사령부가 요구하는 러일전쟁 지원을 위한 수송 역부 80명의 동원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집강 성우경은 그 부당함과 함께 농번기이므로 역부 모집 시기를 연기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관찰부의 독촉과 군수의 직접적인 농민 설득과 차출로 강제모집이 진행되었다. 심지어 역부의 비용이 마을에 할당되는가 하면, 일본 정부에서 보낸 돈을 군수가 횡령하기까지 했다.
  농민항쟁 주동자들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역부 모집의 부당성과 모집 과정의 관아비리를 여론에 알리고자 󰡔황성신문󰡕에 투고하기로 했다. 그러나 내부 밀고로 실패하게 되자 집강들은 통문을 발송하여 시흥 읍내 한천교(寒川橋)에 1만여 명이 모였다. 농민들은 관아를 습격하고 군옥(郡獄)을 파괴하였다. 군수 박우양의 아들이 사망하고 관아를 지키던 일본인들 가운데 사상자가 발생했다. 농민들도 사상자가 있었는데 대부분 일본인이 휘두른 칼에 의한 것이었다.
  일본군사령부는 일본인의 살해를 이유로 일본군을 파견하여 성우경, 하주명(河周明, 1879~1915/河永泓) 등의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측에 교섭하여 이들을 인도받아 진상조사를 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한편 일본인 사상자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했다. 이후 역부모집을 둘러싼 저항이 철도 연변은 물론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3. 을사늑약 체결 이후 안양지역의 의병활동

  일본은 러일전쟁에 승리한 뒤 이등박문을 파견하여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등박문은 고종을 위협하고 각부 대신을 협박하였으며, 마침내 '을사오적'의 찬성을 얻어 1905년 11월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그 보호국이 되었다. 이에 분노한 민영환 등은 충군애국적 상소투쟁이나 자결을 단행하였다. 도시상인들은 철시를 하고 농민들은 납세거부투쟁을 하였으며, 곳곳에서 군중들의 집회와 시위가 있었다.
  이러한 때에 1905년 11월 22일 안양에서 을사늑약의 원흉 이등박문을 처단하려는 의거가 있었다. 안양리에 거주하는 원태우(元泰祐, 1882~1950)는 수원을 지나 안양을 경유하여 서울로 가던 기차가 안양역 부근에 잠시 정차할 때 이등박문이 있는 곳을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유리창을 깨뜨리고 날아간 돌멩이는 이등박문의 얼굴을 스쳐지나갔으나 큰 부상은 입지 않았다고 한다. 원태우는 일본 헌병에 잡혀 철도방해죄로 감옥에 감금되어 징역 2개월에 곤장 100대를 맞는 형벌을 받고 모진 고문을 당한 뒤 1906년 1월 24일 풀려났다. 함께 체포된 이만려, 김장성, 남통봉 등은 혐의 없이 석방되었다. 원태우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불구가 되어 평생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정부는 보호조약에 반대하여 발생한 이 사건을 축소하려 애썼다. 이를 전후하여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국권을 수호하려는 반일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1907년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도 해산시켰다. 군인들이 지방의 반일 의병대열에 합류하고, 의병항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1907년 9월 초 경부선 안양역 부근에 의병 약 100명이 나타날 것이란 정보를 접하고, 군포장역과 안양역에 거류하는 일본인들이 영등포로 피난하였으며, 10월에는 의병 20여 명이 안양 등지에 나타나자 이를 탐문하기 위해 순검 2명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안양 근교의 과천, 광주, 안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의 의병항쟁이 몇 차례 있었으며, 퇴역병 출신인 윤치장의 경우 안양을 비롯한 과천과 광주군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1909년 10월경 양주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된 사실이 확인된다.

 

4. 안양지역의 3.1운동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합병하여 완전한 식민지로 만든 뒤 조선총독부의 헌병경찰력을 배경으로 무단강압정책을 펴고, 경제적 지배체제를 구축하면서 이에 대항하는 한국민들의 저항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합병 이후에도 계속되던 항일 의병투쟁은 일본군과 헌병경찰의 무력탄압으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특히 국내에서는 대한광복회, 풍기광복단, 조선국권회복단, 혈성단, 혜성단, 조선국민회 등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외 독립단체와 연락하거나 군자금 모집, 무기구입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노동자와 농민들도 파업과 소작쟁의를 전개하며 일제의 식민정책에 저항하였다.
  이러한 때에 제1차 세계대전 종결처리 과정에서 윌슨의 14개조 선언, 즉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었다. 이는 패전국의 식민지에 국한된 것이었지만,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과 한국 민중들에게는 우리민족의 자결을 천명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표명하고자 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1919년 3월 국내의 각계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 배포하면서 3.1운동은 촉발되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시작된 독립만세시위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점차 주요도시로 번져나가던 만세시위는 전국 농촌지방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전민족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발전하였다. 3.1운동과 관련하여 제일 먼저 확인되는 안양지역의 인물로는 당시 20세로 서이면 호계리 289번지에 거주하며 경성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다니던 한흥리(韓興履, 1900~1979/ 해방후 韓恒吉로 개명)이다. 한흥리는 기차통학생으로 3.1운동 당시 경성고보 2학년 재학중이었으며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3월 5일 남대문역 앞에서 전개된 시위에 참가하여 붉은 천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르고 다니면 독립이 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강화회의 결과 독립을 희망하는 나라는 독립할 수 있다는 것으로 우리도 만세를 부르고 다니면 독립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만세를 부르면서 다닌 것이다"라고 답변하였다. 더욱이 "장래에도 독립운동을 할 생각인가"라는 질문에 서슴지 않고 "조선인이니까 조선이 독립할 시기가 오면 그때 또 할 작정이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징역 6개월에 처해졌으나 미결기간까지 합산하여 11개월의 옥고를 치뤘다.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1990년 한흥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현재 자유공원에 그의 흉상이 세워져있다.
  안양지역에서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처음 발생한 것은 1919년 3월 27일이었다. 당시 서이면 비산리에 거주하며 포목행상을 하던 45세의 이영래(李英來, 1873~1949)는 서울에서 전개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보고 귀향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3월 27일 행상도중에 서이면 일동리(현재의 관양동)에 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다른 마을에서는 조선 독립만세를 크게 불러 기세를 올리고 있는데 당신들은 짚신만 삼고 있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마을 주민 몇몇과 함께 그날 밤 8시 마을 서쪽 언덕 위에 올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영래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과 제령 등의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1919년 7월 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징역 6개월에 처해져 옥고를 치뤘다. 정부에서는 2007년 이영래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이어서 3월 29일에는 안양리에서 주민 3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관들은 보병(2명)과 함께 주민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5. 1930년대 안양지역의 노동운동

  안양지역은 1930년대에 들어 안양역과 안양시장을 중심으로 인근에 공장과 상점이 확산되면서 영등포 못지않게 시흥군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특히 안양역은 인근 지역 물류의 집산지이자 물류교통의 중심이었다.
  1932년 여름부터 조선직물주식회사는 안양역 주변에 300만원의 자금으로 1만 2천평의 안양공장을 추진하였다. 1933년 2월 시운전을 하고 3월에 조업을 개시하여 4월부터는 제품을 생산하였다. 제품의 품질과 염색의 수준이 일본제품보다 우수하다고 자부하였으며, 그해 8월부터는 야간작업까지 진행되었다. 1934년에는 공장을 증설하였고, 직기수가 430대에 달했다. 조선직물회사 안양공장의 직공들은 안양과 인근의 주민들은 물론 지방에서 몰려왔다. 상당수의 여공들이 두메산골에서 진흥회장 또는 기타 알선에 의해 모집되어 왔다. 1935년에는 직공이 거의 1천명에 달했다(남직공 200명, 여직공 750명).
  그러나 직공들의 작업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노동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12시간에 달했으나 보수는 20전 내지 30전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기숙사비는 하루 5전 내지 10전에 달했다. 직기의 벨트는 안전시설이 미비하여, 직공들은 항상 사고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기숙사에 머물고 있는 직공들은 대우가 매우 나빴다. 기름냄새가 너무 심해 밥 먹는 것이 힘들 정도였으며, 휴일마저도 외출의 자유가 엄격히 제한되었다. 더욱이 여공들은 입사할 때 3년 고용을 약속하고 입사하였는데, 그 이전에 퇴사할 경우 15원의 위약금을 지불해야 자유롭게 퇴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노동환경과 근무조건에 대하여 직공들은 단결하여 동맹파업을 하거나 공장의 기숙사를 탈출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명하였다.
  1935년 4월 직공들의 첫 번째 동맹파업이 발생하였다. 그 발단은 4월 7일 20세의 한 남자 직공이 벨트에 휘감겨 사망한 사건에 있었다. 직공 방태권 등 20명은 회사측에 위험수당을 지급할 것, 벨트의 지하실 설비, 사망유족 보조금 지급 등을 요구하였다. 공장주측은 사망자 장의료와 보조금 지급에는 응하였으나 위험수당은 임금인상에 해당되며, 벨트의 지하실 설비도 지금은 응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이에 직공들은 8일 저녁부터 동맹파업에 들어갔다. 영등포경찰서에서는 직공 방태권을 데려다가 취조하였으며, 다른 직공들도 점차 동요하는 기색이 보이자 경찰서에서는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파업은 이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중단된 것으로 판단된다.
  같은 해 10월에는 여직공 10명이 기숙사 들창을 열고 뒤쪽 울타리를 넘어 탈출한 사건이 발생했다. 모집원의 말과는 달리 막상 공장에 와보니 “24시간을 기계와 함께 심한 노동에 시달리고 폐병환자처럼 얼굴이 창백해진 종업들을 보고 가슴이 서늘할 정도였다”고 한다. 기숙사 생활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으며, 기름 냄새로 밥조차 먹기 힘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휴일마저도 마음대로 외출이 어려웠다. 이에 여직공 몇몇이 기숙사를 탈출한 것이었다. 여직공 모집에 관계한 사무원은 감언이설로 꼬이거나 허위 수단을 이용하였다는 책임을 물어 면직되기까지 하였다. 이 사건으로 주도한 여직공 1명은 고향으로 쫓겨나고 나머지는 다시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조선제사직공의 두 번째 파업은 회사가 한창 발전하기 시작한 1936년에 일어났다. 과거 6개월 이상 근무한 직공에게는 6개월의 상여금을 주었는데 1936년에는 상여금을 주지 않은 것이 발단이었다. 염색가공부의 직공 70여 명은 1936년 7월 9일 아침 금년도 상반기 상여금을 지불할 것, 일급(日給)을 인상할 것, 제반 대우를 개선할 것 등 3개 요구조건을 공무주임을 통하여 회사에 제시하였다. 일급인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10전 내지 15전 증급해줄 것을 요구하였고, 대우개선에는 벌금제도의 폐지와 기숙사와 식사에 대한 개선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회사측은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그동안 쌓여온 직공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동맹파업이 전개되었다. 같은 날 밤에 다시 직공대표와 공장장이 만나 교섭에 들어갔으나 쌍방의 태도가 강경하여 사태가 악화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영등포경찰서에서는 고등계 주임과 7,8명의 순사들을 파견하여 경계에 들어갔다. 공장측과 파업단측은 10일 오전 7시 교대시간을 기해 6개월 이상 근속한 직공 350명에게 최고 7원에서 최저 50전을 지급하고 다른 조항에 대해서는 거절하였다. 파업단측에서 10일 정오까지도 강경하게 파업을 계속하자 공장장은 파업단대표 5명을 각각 불러 면회하고 "지금부터 성실히 취업하여준다면 요구조건을 충분이 고려하겠다"고 얘기하였으나 파업단은 양보하지 않고 계속 투쟁하였다. 파업의 결과는 자세히 알 수 없는데, 당시의 언론보도에 의하면 '오후 1시경 모든 직공이 전부 작업에 복귀하여 약 30시간의 파업은 끝이 났다'고도 하고, '계속 대립하고 있다'는 정정 보도가 전해지기도 하였다.

 

6. 1930년대 안양지역 사회주의운동 관련 인물

○ 1933년 조선직물주식회사 안양공장 동맹파업 추진
1933년 4월 30일 인천에 살포된 격문사건의 주모자인 인천의 특별요시찰인 金相根(金萬石)이 연인 안양인견회사 여성노동자 최경창(崔慶昌)에게 통신연락
출전 : 영등포경찰서, 「(永警高秘 第1696號) 치안유지법위반피의자체포에 관한 건」(1934.5.31)
* 최경창(17세, 女) : 본적(수원군 성호면 오산리 번지 불상), 주소(시흥군 안양면 조선직물주식회사 내 직물여공)
* 홍화순(洪花順, 16세) : 본적(수원군 성호면 세교리 번지불상), 주소(시흥군 안양면 조선직물주식회사 직물여공)
김만석은 조선직물주식회사 내 직물여공 최경창과 홍화순 등 순진한 농촌여자에게 치열한 주의사상을 주입시키는 등 공산,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잠행적 실행운동에 함께 하였다. 김만석은 치안유지법위반 및 출판법위반으로 기소하고, 최경창과 홍순화는 의식정도가 낮고 범죄가 경미하여 처벌할 필요가 없다고 인정되어 불기소의견에 붙여졌다.
적색노동조합 재건 준비조직에 연계된 김만석은 1933년 초 수원군 성호면 세교리에서 홍화순, 최경창을 우연히 만나 무산청년의 사회주의 연구를 종용하고 󰡔적기󰡕 잡지를 교양자료로 전달하여 숙독하도록 하고 공장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1933년 5월 1일 메이데이에 즈음하여 격문살포사건에 연루된 김만석은 1934년 3월 홍화순, 최경창을 조선직물주식회사의 여공으로 입사시켰다. 김만석에게 교양 지도를 받은 홍화순은 1934년 4월 28일 여직공 洪鳳順이 직공 감독에게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미리 계획하고 있던 동맹파업을 일으키고자 자신의 雜記帳 1장을 찢어 한글 격문을 작성하여 여공의 출입이 가장 많은 식당입구에 던져 넣어 여공의 투쟁심을 환기시키고 동맹파업을 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양공장 직공들이여, 노예처럼 감독하는 것을 반대하라. 잘못한 것도 없는데 우리를 매일 같이 노예처럼 감독하고 구타하므로 동맹파업을 단행하라”
출전 : 인천경찰서장, 「(仁高秘 第3615號) 적색노동조합기관지 격문사건 기소중지자 검거에 관한 건」(1934.7.5)

○ 1935년 인천적색그룹 사건 관련
이재유사건에 연루된 공사주의자들이 1935년 인천에서 ‘적색그룹’을 결성하고 동양방적(東洋紡績) 공장과 안양의 조선직물공장 등에서 다수의 동지를 획득하여 운동을 전개하려다 일제에 탄로되어 검거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해 일제가 작성한 계통도는 다음과 같다.

 

權榮台/太勞系      (△는 미체포)
󰠐
金根培△
󰠐
朴承吉 李正來 田甫鉉
          󰠐
韓泰烈 李昌煥△ 韓昌喜        朴永善 李正來 田甫鉉 / 仁川赤色그룹
󰠐讀書會          󰠐東紡그룹       󰠐
李昌煥      姜致安 趙慶鎬     安養그룹         客友親睦會
盧學植    △金榮黙 朴化玉    朴永善 李承吉    李長順 李在乭
崔英彬      韓東秀 韓承喜    李京求 元顯在    元顯在 朴化玉
河壽福      李喜昌 李正來                     李時載 朴永善
韓泰烈      朴潤植
               󰠐
           吉福女 韓浩

 

위 조직 가운데 ‘안양그룹’의 지도자인 박영선(29)은 당시 안양 조선직물공장 직공으로서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박영선은 개성 사립 제일 송도보통학교 4년을 수료한 뒤 개성운송공동조합 배달부 등 자유노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가정은 매우 빈곤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제도에 불만을 품고 좌익서적을 탐독하는 한편 사회주의자들과 가까이 했다. 1932년 1월 4일 대구적색노동조합사건에 연루되어 같은 해 7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처분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박영선은 1934년 4월 이후 8월 사이에 田甫鉉, 韓昌喜 등과 함께 ‘인천적색그룹’을 결성하고 “일본제국주의 절대반대” “전조선 노동자 농민의 해방” “일본제국하에 신음하는 식민지 조선의 무산계급에 대한 계급의식을 교양 훈련할 것” “東紡을 중심으로 하여 읫ㄱ분자를 획득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부서로는 자금부, 조사부, 고려부, 조직부 등을 두었다.
또한 8월경에는 박영선, 한창희, 한태열, 이성래 등 4명이 중심이 되어 인천에서 각 공장에 침투하여 무의식대중을 의식적으로 훈련할 것, 산업 각 부문에 근거지를 둘 것, 특히 東紡을 중심으로 하여 주력을 모을 것, 동지획득에 만전을 기할 것 등을 당면 목표로 하였다.
특히 박영선은 1934년 8월 초순경부터 李成來의 소개로 金根培를 만나는 등 조직확대를 하는 가운데 1935년 1월 중순 안양의 조선직물공장의 적화 공작에 착수하였다. 조선직물공장의 元顯在, 李京求, 李承吉 등을 규합하여 적색그룹을 결성하여 실천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도중에 검거되고 말았다.
출전 : 경기도경찰부장, 「(京高特秘 第895號) 인천적색그룹사건 검거에 관한 건」(1935.4.4)

○ 1935년 경기도 광주공산당협의회 사건 관련
  1935년 2월 경기도 광주에서 광주공산당협의회가 결성되었다. 당협의회는 비서부, 교양부, 조사선전부, 경재부 등의 조직 부서를 갖췄다. 비밀단체로서 조직 구성원들은 무산계급의 공고한 단결과 근로대중 본위의 신사회를 건설할 때까지 죽을 각오로 매진하며, 운동과 동지를 잊어버리는 반역자는 용서 없이 사형에 처벌한다는 내용의 ‘서약문’에 합의했다.
  2월 7일 석혜환의 집에 다시 모인 그들은 동지들끼리 서로 비밀을 지키고, 당원을 획득할 때 의사가 강고한 자를 선정하되 당에 자문한 뒤 당원 전체의 찬동을 얻어 입당시키기로 하였다. 이 자리에서 석혜환은 중부면 산성리 출신으로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에 거주하며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李順應(31)이 "평소에 공산주의에 공명하고 의지도 강고하므로 당원으로 가입시킬 것"을 제안하였고, 모두 찬성하여 이순응을 입당시키기로 하였다. 2월 23일 이순응이 산성리 집으로 왔을 때 석혜환, 정영배, 김흥종, 최청룡, 김귀용 등 5명은 그의 집을 찾아가 당협의회의 목적과 조직과정을 설명하고 권유하여 입당시켰다. 김흥종(金興鍾, 35) 역시 광주군 중부문 산성리 출신으로 이순응과 함께 안양의 김원식(金元植)의 집에 기거하며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당협의회의 당경비는 영등포나 안양에 조선주 판매장을 개업하여 그 이익으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이순응과 김흥종은 당협의회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안양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당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전 : 경기도 경찰부장, 「(京高特秘 第731號) 비밀결사 광주공산당협의회사건 검거에 관한 건」(1936.4.9), 󰡔광주시사󰡕(1910)

 

7. 1940년대 이재천․ 이재현 형제의 반일독립운동

  이외에도 안양출신으로 중국지역에서 임시정부의 조직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재천과 이재현 형제가 있다. 그들은 1919년 이후 아버지를 따라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중국지역에서 반일 독립운동을 전개한 는 대표적인 안양지역의 인물이다. 이재천은(1913~?)은 조소앙과 김구의 지도 아래 소년운동에 참가하면서 임시정부 활동에 관계하였으며, 1935년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인천으로 귀국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0년 8월 18일 석방되었으나 행방불명되었다.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1963년 이재천에게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시신이 없어서 서울 국립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만 봉안되어 있으며, 2003년 평촌자유공원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이재현(1917~1997)은 1934년 남경 임시정부 특별훈련반에 입대하여 1937년 상해에서 지하활동에 참여했으며, 1939년 한국청년단전지공작대 결성에 참여했다. 1940년 중국 태항산 유격대에 속하여 전투에 참여하고 산서성에서 정보수집, 적정 탐색 및 유격전에 참가했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되자 제5지대에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1944~1945년 미국 OSS(전략정보처) 훈련 때 통역 및 무선조교를 담당했다. 1945년 8월 광복군 국내 정진군 낙하산부태 제2조장을 맡아 국내 침투공작 활동을 위해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후에 독립장으로 개칭)을 받았으며, 서울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2003년 평촌자유공원원에 형 이재천과 함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1) 본 내용은 󰡔안양시사󰡕 제1권을 토대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추가 보완 자료들은 이 글에서 주 또는 출전으로 표기하였습니다.
2)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1827)에서 군포장(동안구 호계동 군포사거리/1.6)과 안양장(안양시 만안구 안양동/3.8) 확인.
3)  󰡔承政院日記󰡕 128冊(고종5년 3월 16일 갑자). “以司謁, 口傳下敎曰, 始興縣衙各處公廨, 不得不重修, 錢二千兩當內下矣, 趁卽修改, 而安養里行宮撤毀移用事, 分付畿營”.
4)  [萬安橋]의 글씨는 유한지(兪漢芝, 1760~1836)가 쓴 것으로 당나라 예서의 웅장한 필체를 보여주고 있다.
5)  안양의 발소(撥所)에 이익이 되도록 하기 위해 안양장이 설치되면서 군포천의 군포장이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군포장에 의지해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은 마침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지날 때에 생계의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채제공은 이 사실을 정조에게 보고하며 안양장과 군포장을 각각 허용하도록 요청하였고, 정조는 이를 허용하면서 곧바로 병설하여 양쪽 모두 편리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비변사등록󰡕 정조20년 11월 24일/1796년)
6)  경부선철도 부설에 필요한 사석(砂石)으로 삼막동(三幕洞)의 돌을 채취하여 이용하였다.
7)  10정보 이상의 대지주는 안양거주자 1명과 수원군에 거주한 1명을 제외하고 28명이 경성에 거주하는 부재지주였다.
8)  한일합병 찬성단체인 대한평화협회 총재에 취임하였고, 1910년 8월 22일 어전회의에 황족대표로 참석하여 한일합병조약 체결에 동의했다. 1911년 1월 13일 일본정부로부터 은사공채 83만원을 수령하였으며, 1912년 8월 1일 일본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하여 그의 행위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었다.
9)  「農耕期에 際하여 소작권을 박탈, 地料는 전보다 3배 인상, 안양 高瀨農場 처사」, 󰡔중앙일보󰡕 1932년 4월 17일. 고뢰 안양농장은 1910년대에 90여만 평의 황무지를 개간하였는데 1932년 현재 23만평 가량의 임야와 10만평의 잡초지, 10만평의 밤나무밭, 1만 8천여 평의 주택지를 제외한 50여만 평의 밭과 논을 200명의 조선인 소작인과 17명의 일본인 소작인에게 소작을 주어 경영하였다. 借地料에 있어서 그동안 1년에 1전 하던 것을 2전 내지 3전으로 인상하고 택지료에 대해서도 평당 연 3전 내지 10여 전 하던 것을 6전 이상 12전, 19전 심지어 30전으로 인상하기까지 했다. 당시 借地料 체납자가 조선인 45명과 일본인 8명이었는데 고뢰농장 측에서 소작권 이동과 지료 인상에 대한 계약을 요구함에 따라 특히 일본인들의 강경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이미 1931년 12월에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借地料를 배 이상 인상함에 소작인들이 단결하여 12월 10일 지주에게 항의서를 제출한 바 있었다(「高瀨農場에 항의서 제출」, 󰡔동아일보󰡕, 1931년 12월 17일)
10)  「시흥 안양에 사립학교 신설, 4씨의 열성으로」, 󰡔매일신보󰡕, 1925년 3월 14일.
11)  조선직물주식회사는 共益社 전무 高井 등 여러 명이 발기하고 100만원의 자금으로 창립하였는데 처음 임시사무소를 경성부 황금정에 두고 당시 안양의 대지주 高瀨政太郞에게 공장대지 3만여 평을 기부받아 설립되었다고 한다. 공장은 총 3백만 원의 자금으로 1만 2천평의 면적에 3기로 나눠 건설하기로 하였는데 1기에 일본 大阪에 있는 大林組가 총 11만 8천원에 낙찰받아 7천 평의 넓이에 공장 및 기숙사를 짓기로 했다.(「안양역전에 朝織社 신축」, 󰡔동아일보󰡕 1932년 8월 2일, 8월 13일)
12)  안양역사는 목조 콘크리트 슬레이트식으로서 1938년 8월에 건평 88평의 공사가 시작되어 10월 21일 신축 낙성식이 거행되었다.(󰡔동아일보󰡕 1938년 10월 24일)
13)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1944년 7월 설립 취의서를 발표하고 주식을 공모하여 10월 실립등기 및 항공기 제조사업 허가를 받았으며, 그해 12월 일본 육군대신으로부터 군수회사로 지정되었다.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안양공장이 일부 작업을 개시하기까지에는 朝鮮軍司令部와 총독부의 힘을 빌어 前記 조선직물회사 及 동양방적회사 안양공장을 접수한 것은 물론 건설에 있어서 공장과 비행장의 설계를 끝내고 정비조립공장 공사에 착수 一面 지하공장의 계획을 진척 중이었으니 이 지하공장은 공장과 창고 2천여 평을 부근 山形을 이용하여 실시코자 한 것이며, 1945년 8월 초순에 공사에 착수하여 11월경에 완료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14) 인근 소하리에서는 3월 28일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한 한 주민이 경찰관주재소에 검거되자 300여 명의 주민들이 동료주민을 탈환하고자 주재소를 습격하여 파괴, 방화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5) 󰡔조선신문󰡕, 1935년 11월 1일(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6) 󰡔조선신문󰡕, 1935년 11월 1일(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