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60년대 안양읍내( 2.3.9동) 겨울 풍경

안양똑딱이 2016. 5. 10. 06:52

 

 

1960년대 안양 2.3.9동의 겨울 풍경입니다. 사진 중간 위쪽 커다란 공장이 금성방직이며, 가운데 신작로(도로)가 박달동을 거쳐 안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정중안 길 옆으로 안양여고의 모습도 보이고, 왼쪽 위로는 안양3.9동이 보이네요.
당시에는 1번국도가 구도로쪽으로만 있고 안양시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주도로인 만안로가 건설되기 전의 모습이니 꽤 오래된 사진입니다.
안양 박달동은 일제 강점기 군용지라 불리우며 탄약저장소였으며, 6.25전쟁 이후인 60년대에는 미군이 주둔하며 마이키 혀큘리 미사일과 핵탄두까지 있었다. 또 안양9동 채석장은 일제 강점기부터 경부선 철도 자갈 채취를 했고, 도심 한복판에는 비행기생산공장까지 있었으니 그야말로 군사기지라 할 수 있다.
과거 자료를 찾아보니 금성방직은 일제강점기인1932년 세워진 조선직물주식회사가 전신이지요. 화신백화점을 세운 박흥식은 해방을 앞둔 1944년 8월19일 자본금 5천만원(당시화폐)으로 이 곳에 부지 3만평에 건평 1만평 규모의 초대형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합니다. 
조선비행기주식회사 설립에는 인근 토지를 몰수하는 등 총독부 힘을 빌려 접수해 비행기공장을 건설하였으며 생산시설은 조선군사령부 병참부의 중개로 관동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공장 노무인력은 전적으로 당시 시흥군일대에서 차출된 징용자들이 대부분이다.
이 때는 태평양전쟁이 절정단계에 이르렀을 때임에도 일본의 항공전력 증대를 목적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설립허가를 총독부와 일본내각에 제출하고 수차례 일본을 다녀온 끝에 설립허가를 받은후 10월2일 자신이 대표가 되어 주식을 공모해 설립한다.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설립과정은 박흥식에 대한 반민특위 공소장에 소상히 기록되어 1944년 3월경 박흥식이 일본에 직접 가서 기술과 자재의 지원을 요청하고 중일전쟁 폭발일인 7월7일 항공제조사업 허가서 제출하는 등 전쟁 막바지에 군수품 생산을 꾀했다.
서울시가 기록한 서울6백년사의 '조선비행기공업'과 화신그룹사 등의 지난 기록들을 살펴보면 흔히 박흥식이 안양에 건설한 조선비행기주식회사에서는 전투비행기 시제품만 생산했을뿐 일제패망으로 비행기는 생산하지 못하고 그만둔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조사내용에 따르면, 1945년 5월 당시 제1호기의 주익(主翼)·동체를 위시하여 대부분의 작업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을 하였으며, 제2·3호기도 부분품 제작중에 있었으며 9월말 작업을 완료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기록을 통해 드러났다.
또한 박흥식은 자신이 경영하던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개편, 비행기 기술공을 양성하려 했던 사실도 조사과정을 통해 새로 밝혀지는 등 실제로 전쟁에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안양에서의 비행기 양산체제 제조계획은 거의 완성단계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 공장에서는 건축가 김중업씨가 이곳에서 일했다는 기록도 있다.
한편 조선비행기주식회사는 일제 패망이후 과거사 청산을 하지 못한 채 무죄판결을 받은 박흥식이 조선군사령부로부터 조선비행기에 투자한 금액과 격려금까지 받으면서 운영되다가 이후 금성방직을 설립한 김성곤에 의해 방직회사로 다시금 변모하게 된다.
자료를 보면 이 공장은 1948년 10월 금성방직이 인수하고 1967년 대한농산(대농)에 매도된 뒤, 1977년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일반에 매각되어 안양에서 첫번째 대규모 주택단지로 바뀌게 된다. 지금도 이곳을 대농단지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재벌형성사(이한구 지음. 비봉출판사)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말기 일본정부는 연합군의 일본 폭격을 피하기 위해 일본내의 주요한 산업시설을 한국으로 피신시켰다. 이에 해방직후 안양역전에는 일본방적 소유의 방적기 2천추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금성방직을 설립한 김성곤은 방치된 방적시설을 이용하여 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관할관서인 미 군정청과 교섭하여 안양에 소재한 조선직물주식회사(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일부인 3천평을 임차받아 인견사 생산공장에 나서게 된다.(쌍용그룹 전사편)
김성곤은 기술자를 대동하고 안양역전에 나뒹굴고 있는 기계부품의 목록을 작성하여 미 군정청 관재처에 제출하여 사용 가능한 431대를 확보해 불하 받은 후 공장 귀퉁이에 설치하였으며 이는 금성방직의 시초이다. 불하금액은 당시화폐로 2천만원 정도였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금성방직이 전소되자 김성곤은 UNKRA원조자금을 확보하고 이를 이용하여 금성방직 공장 재건에 나섬으로 재벌로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이는 1956년 5월15일 안양1동 현 진흥아파트에 자리한 태평방직을 인수하고 공장 확대에 나섰다.
태평방직은 1953년에 자본금 1억환으로 안양읍 안양리 97번지 일대에 설립된 삼흥방직이 전신으로 방기 1만추, 직기 50대를 구비하고 1954년 10월부터 생산을 시작하였으며 자금사정으로 금성방직에 인수되었다가 1967년 10월 금성방직과 함께 대농에 매각돼 아파트단지로 바뀌었다.
이 사진은 안양시청 민원실 2층에 전시된 사진을 다시 찍은 것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