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사진기록/골목풍경

[20170331]안양3동 대농단지 주변과 골목 풍경

안양똑딱이 2017. 4. 2. 19:58

 

#안양 #동네 #골목 #안양3동 #대농단지/ 안양3동에는 대농단지라 불리우는 대규모 주택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서이면 안양리 약 1만평에 달하는 부지위에 일본인 자본에 의해 군복용 광목을 생산하는 조선직물주식회사라는 최초의 근대적 방직공장과 조선견직이 들어섰다. 이는 일제가 섬유공업에 적합한 공업용수를 찾아 전국의 물을 조사해 본 바, 박달동 일대에서 채집한 안양천의 수질이 최상이라는 판정을 얻은 결과였다. 덧붙여 안양리 일대의 풍부한 노동력과 서울에 인접한 교통상의 강점도 고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공장 자리에는 1938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화신백화점 총수였던 박흥식이 해방을 앞둔 1944년 8월19일 자본금 5천만원(당시화폐)으로 부지 3만평에 건평 1만평 규모의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설립과정은 박흥식에 대한 반민특위 공소장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데, 인근 토지를 몰수하는 등 총독부 힘을 빌려 접수해 비행기공장을 건설하였으며 생산시설은 조선군사령부 병참부의 중개로 만주 관동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공장 노무인력은 전적으로 당시 시흥군일대에서 징용자들이 차출되었다고 한다.
1945년 5월 제1호기의 주익(主翼)·동체를 위시하여 대부분의 작업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을 하였으며, 제2·3호기도 부분품 제작 중에 있었고 평촌 달안동에는 비행기 활주로 공사를 시작했던 것으로 드러나는 등 비행기 양산체제 제조계획은 거의 완성단계로 만약 전쟁이 계속됐다면 아마도 안양은 일제의 전투기 생산기지가 됐을 것이다.
해방이후 이 부지는 1948년 10월 5일 안양1동에 금성방직을 설립한 쌍룡그룹 창업주가 된 경북 달성사람 김성곤 씨가 인수해 1949년 3월 10일 섬유 공장을 준공한다.

한국 재벌형성사(이한구 지음. 비봉출판사)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말기 일본정부는 연합군의 일본 폭격을 피하기 위해 일본내의 주요한 산업시설을 한국으로 피신시켰다. 이에 해방직후 안양역전에는 일본방적 소유의 방적기 2천추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금성방직을 설립한 김성곤은 방치된 방적시설을 이용하여 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관할관서인 미 군정청과 교섭하여 안양에 소재한 조선직물주식회사(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일부인 3천평을 임차받아 인견사 생산공장에 나서게 된다.(쌍용그룹 전사편) 김성곤은 기술자를 대동하고 안양역전에 나뒹굴고 있는 기계부품의 목록을 작성하여 미 군정청 관재처에 제출하여 사용 가능한 431대를 확보해 불하 받은 후 공장 귀퉁이에 설치하였으며 이는 금성방직의 시초이다. 불하금액은 당시화폐로 2천만원 정도였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금성방직이 전소되자 김성곤은 UNKRA원조자금을 확보하고 이를 이용하여 금성방직 공장 재건에 나섬으로 재벌로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성곤은 1956년 5월15일 안양1동 현 진흥아파트에 자리한 태평방직도 인수하여 공장 확대에 나서는데 태평방직은 1953년에 자본금 1억환으로 안양읍 안양리 97번지 일대에 설립된 삼흥방직이 전신으로 방기 1만추, 직기 50대를 구비하고 1954년 10월부터 생산을 시작하였으며 자금사정을 겪자 금성방직이 인수한다.

당시 공장 규모는 아주 컸다. 1960년대 공장 사진을 보면 안양역에서 공장안까지 철길이 있어 화물열차가 들어올 정도로 규모가 컸으며, 담장 둘레만 십리라고들 했다. 특히 공장안에는 천연 잔디가 깔린 축구장까지 있었다. 1960년대 당시에는 잔디구장이 전국에 3개 밖에 없었는데 한국 국가대표팀이던 양지선수단을 비롯 공군사관학교 축구부, 실업팀 등이 이곳에 와서 연습경기를 했다. 당시 만안초등학교와 안양중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시멘트블록 담장 중간 중간에 난 구멍으로 이회택 등 국가대표선수의 볼 차는 모습을 보며 축구의 열정을 불태운 덕에 안양중,안양공고가 전국 축구를 재패하던 것도 이 무렵이고 이는 축구하면 안양을 떠올리던 부흥기였다.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은 1960-70년대 안양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웁니다. 전성기에는 종업원 수가 약 3천여명에 달했다. 월급날에는 안양 일번가 식당과 술집이 호황을 누릴 정도로 봉급 특수가 안양경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기업이었다. 특히 충청,전라,경상도에서 상경한 여성 근로자들이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형제 친척들까지 안양으로 올라오는 배경으로 인해 현재 안양에 팔도민이 골고루 분포돼 있고 타 위성도시와 달리 팔도향우회가 매우 활성화 된 것도 하나의 배경이 아닐가 싶다.
이와 같이 막강한 영향을 지역사회에 미치던 금성방직은 1967년 10월 안양 1동에 자리한 태평방직(현 레미안 아파트)과 함께 대한농산(대농)에 매각된다. 공장 부지는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택지개발을 통해 1977년 일반에 640여개의 단독필지로 분양되는데 안양 최초의 대규모 주택단지로 농사를 짓던 평촌벌이 신도시로 개발되기 전까지 안양에서 주택가격이 가장 비쌌던 주택가였다.

오늘날 국민은행 안양지점 뒤편을 대농단지로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사연에서 비롯되었다.
대농이 떠나면서 안양의 섬유공업도 말라버린 안양천과 더불어 한 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안양의 산업성장의 배경에는 안양의 편리한 교통, 풍부한 양질의 노동력 및 최상의 공업용수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금성방직 : 쌍룡그룹 창업주가 된 경북 달성사람 김 성곤 씨에 의해서 1948년 10월 조선직물주식회사 바로 옆에 설립되었다. 금천지(1950)에 의하면 경영난에 처한 조선직물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되는데, 당시 안양사람들이 김 성곤 씨를 찾아가 종업원의 고용을 승계해준 데 대하여 고마움을 표시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6.25사변으로 조선직물주식회사와 같이 미군의 폭격을 당해 불타버렸으나 수복 후에 UNKRA(유엔 한국부흥위원단)의 자금으로 복구에 성공한 뒤 굉장한 호황을 누렸다. 후에 시멘트공장 건설로 자금난에 처하자 대한농산에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