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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정진원]의왕의 옛 마을 지명 이야기

이야기보따리/자료

[정진원]의왕의 옛 마을 지명 이야기

우리나라 지명, 특별히 마을이름의 역사에서 볼 때 1914년은 마을이름의 ‘창촌개명(創村改名)’의 해였다. 일제에 의한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우리네 선조들을 모욕한 것이라면, 창촌개명은 우리네 땅을 더럽힌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일제는 당시 7만여 개 정도의 우리나라 마을(구동리)을 2만여 개 정도의 신동리로 통폐합하였다. 세 개 정도의 마을을 합쳐서 하나의 신동리를 만들고, 거기에 어김없이 한자 이름을 붙였다. 그때 순수소박한 우리말 마을이름이 잡종생경한 한자 동리 이름으로 바뀌었다.
 
 
*사그내 [사근천(沙斤川), 사천, 모래내]
 
지금 의왕시 고천동이 그때 이름 붙여진 신동리이다. 그 신동리 안에 가장 큰 마을이 ‘사그내’였다. 지금 고천초등학교, 전 의왕면사무소를 중심으로 한 동네였다.
지금 고천동에는 골짜기에 있는 우물가에 만들어진 동네라 해서 골우물 [고정(古井)]이란 마을이 지지대 쪽으로 있었고, 벌사그내 [평사천(坪沙川)]란 동네가 있었는데, 이 두 동네와 고고리, 내곡리를 병합하여 고천리(古川里)가 되었다는 것이다.
먼저 있었던 (벌)사그내를 나중에 그대로 음역해서 사근천(沙斤川), [평(坪)사천(沙川)]이 되었을 것이다. 벌사그네는 골사그네에 대해서 벌(들)에 있는 사그내란 뜻인데 벌사그내가 원래 사그내이다.
우리나라 어디서나 대개 우리말 마을이름이 먼저 있었고, 나중에 그것을 한자 이름으로 바꾼 경우가 많았다. ‘사그내→사근천(沙斤川)’도 그와 같은 선후관계로 된 것이다. 지금 고천동의 사그내란 지명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해동지도」, 「춘향전」 등에도 나타난 것으로 볼 때 사그내와 그 음역 사근천이 적어도 조선 중기 이후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사그내’란 어떤 뜻일까?
우리나라 작은 하천이 대개 그렇듯이 여름 다우기에는 범람하는 내가 되지만 겨울철에는 물이 ‘말라서(삭아서?)’ 개울 바닥이나, 냇가의 모래사장이 넓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게 된 마른(삭은)내가 ‘마른내>삭은내>사그내’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마을이름에 ‘모래내’가 많은데, 그것을 한자로 고칠 때도 사천(沙川), 사근천(沙斤川)이라 하였다.
즉 사천, 특히 사근천은 ‘마른내’ [전북 전주시의 건산천(乾山川)], 냇물이 모래 밑으로 흘러서 물이 보이지 않는 ‘모래내’(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에서 유래되었고, 서울 성동구의 사근동은 신라 시대에 세워진 ‘사근사(沙斤寺)’에서 유래하였다는데, 이 절은 매우 낡아 ‘삭은 절’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삭은(나무) 다리’가 놓여 진 내라 해서 ‘삭은내’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가평군 설악면에 사그내, 안성시 죽산면, 서산시 수석동에 사근다리 등의 지명이 있다.
 
 
*오매기
 
의왕시 오전동에 오매기란 마을이 있다. 지금 의왕문화원이 있는 곳에서 위쪽으로 백운호수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밑에 있는 동네이다. 그곳에서 아래로 사나골, 용머리, 목배미, 뒷골, 백운산 등 작은 마을들을 합쳐서 넓게 오매기라 부르기도 했었다.
8ㆍ15 해방 때에 약 70호 정도였다고 한다. 어떤 분은 그곳에 집[막(幕)]이 다섯 채가 있어서 ‘오막(五幕)>오막이>오매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그것은 적절치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 골짜기에 동네가 형성될 때에 집 다섯 채가 한꺼번에 만들어질 수도 없었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다 해도 마을이름을 바로 ‘오막(五幕)>오막이>오매기’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은 지나친 견강부회이다.
움막이 아닌 다음에야 집을 막(幕)이라 하지는 않았으며, 다섯 채 집이 만들어질 때까지 마을이름이 없다가 갑자기 ‘오막(이)’이 되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세 집으로 된 동네를 ‘세집매’(영등포구 당산2동, 영등포동2가), 네 집으로 된 마을이라 해서 ‘네집매’(영등포구 양평1동, 서산시 태안읍) 등의 마을이름이 있기는 했었다.
그렇다면 오매기는 ‘다섯집매’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어떻든 어색하고, 발음도 어려워서 그렇게 쓰였을 것 같지 않다. 오매기는 우리나라 마을이름이 대개 그렇듯이 마을이 들어앉은 곳의 지형을 형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쉽고도, 바른 이해일 것이다.
우리나라 마을이름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골, 실[곡(谷)], 구석(억)-’ 형이다. 산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분지(盆地)인 경우도 있었겠지만 대개는 삼태기 모양의 ‘ㄷ’자형 지형 안에 만들어진 마을이름들이다.
남쪽이 터져있고, 동구 밖으로 시내가 흐르고 있다면 안성맞춤의 배산임수 촌락입지가 되는 곳이다. 이 ‘ㄷ’자형 지형을 ‘오목’하다고 본 것이리라.
그래서 ‘오목이>오모기>오매기’가 된 것으로 본다. ‘골, 실[곡(谷)]’ 형의 지명이 우리나라 남한에만 약 2만여 개 있다. 구석진 곳에 있는 마을이란 뜻의 ‘구억(석)말’이 서산시에만 16 군데나 있다
 
 
*한재굴
 
의왕시 청계동에 한재굴이란 동네가 있다. 지금은 고가도로가 얼기설기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마을이 되었지만 우리 어릴 적에는 덕장초등학교에서 남쪽으로 개울 건너에 한재굴이란 마을이 있었다.
길가에 늘어선 동네였다. 판교ㆍ성남으로 나가는 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안양에서 가끔씩 들어오는 버스의 종점이었다. 당시에는 대단한 터미널이었다.
한재굴에서 청계ㆍ 청계사, 학현ㆍ원터, 백운호수ㆍ능안 방면 등의 세 길이 만나서 안양 쪽 한길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한재굴’이라 했었다.
그것을 어떤 근거에선지 ‘한직동’이란 조금 딱딱한 한자 이름으로 고쳐 썼다. 마음이름, 특히 그 작명 이유를 살펴보는 데 다음과 같은 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첫째는 대부분의 마을이름은 순수한 우리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억지 한자(漢字)로 둔갑한 것이 많으므로 한자 지명에 매달려서 마을이름의 본뜻을 캘려고 하면 아주 동떨어진 데로 빠질 위험이 있다.
둘째는 발음하기 쉽게, 소리 나는 대로 굳어진 것을 그대로 보아야 하고, 지방의 어투로 된 것도 그대로 두고 마을이름의 원형에 가까이 가야 한다.
이때에도 어떻게든 왜곡 한자화된 것에 주의해야 한다. 셋째 주변의 지형, 동식물에서 따온 마을이름이 많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한재굴도 한자로 한직동(漢直洞)으로 표기한 다음, 그 한자명을 가지고 여러 가지 설명을 붙이려는 것은 본말이 뒤집힌 엉뚱한 결과를 낼 수 있다.
어떤 분은 한재굴 일대가 한재(旱災)가 심했던 데서 나온 이름이라 하는데, 그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한재굴은 크다는 뜻의 ‘한’, 고개 ‘재’에서 ‘한재’하면 큰고개를 뜻하게 되고, 그것은 아마도 하우고개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말하자면 한재굴은 하우고개, 즉 큰고개(한재)가 시작되는 초입에 만들어진 동네라는 뜻일 것이다.
서산시 지곡면에 ‘한잿말’이란 마을이 있다. 그 한잿말도 큰 고개 밑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손골 [손동(蓀洞)]
 
지금 의왕시 내손동 능안 마을에서 북쪽으로 모락산 높지 않은 산길을 넘어가면 계원예술대학교 근처에 손골(손동)이란 마을이 있었다. ‘내손동(內蓀洞)’은 원래 의왕시 의일내동(儀逸內洞)과 손동(蓀洞)에서 ‘내’자, ‘손’자를 따서 된 동명이라고 한다.
‘손(蓀)’자는 잘 쓰이지 않는 한자로 뜻이 창포(菖蒲)이다. 창포는 연못가나 습지에 잘 자라는 다년초인데, 그것의 잎이나 뿌리를 우려낸 물은 단오 때 여자들이 머리를 감거나 몸을 씻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샴푸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창포물로 정갈하게 씻은 몸에서 비롯되었을 ‘창포의 아름다움’ 손미(蓀美)는 미덕(美德)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지금 모락산 북쪽 기슭 손동에 실제로 창포가 자라고 있었는지는 더 조사해 보아야 할 것이지만, 북향 산기슭 음습한 곳에 창포 군락지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
짐작해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을이름을 ‘창포골’이란 뜻의 손골이라고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곳은 연못이나 창포무더기가 사라진지 오래일 것이다.
백운호수에서 평촌 쪽으로 터널이 뚫려서 능안에서 손골로 넘어가는 오솔길 고개가 소용없어졌으며, 고가도가 얼기설기 어지럽기 그지없는 어수선한 마을이 되어버렸다. 지금 거기 손골에서 창포물에 머리 감고 나온, 하얀 가르마, 윤기 있는 머리칼 찰랑거리는 누구를 만날 수 있겠는가.
 
 
*하우고개
 
하우고개’ 란 고개 이름이 우리나라 여러 곳에 있다. 의왕시 청계동에서 성남시 판교(너더리) 쪽 뫼루니로, 부천시 소사동에서 시흥시 대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하우고개이다.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에서 아미리로 넘어가는 하오고개도 있다. 왜 하우고개라 하였을까?
넘기 어려운 고개를 힘겹게 오를 때 ‘하우 하우’ 가쁜 숨소리에서, 아니면 고개 마루에 올라앉아서 내쉬는 ‘하아― 하아―’ 소리에서, 또는 산적이나 귀신을 만난 두려움에서 자기도 모르게 나온 외마디 소리에 따른 의성어가 지명으로 굳어졌나?
학고개(鶴峴)가 ‘학고개>학오개>하우고개’로 음운변화를 거쳐서 하우고개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마도 정설일 듯싶다.
여우가 출몰하는 여우고개[호현狐峴]를 좋게 말해서, 소가 드러누운 모양의 ‘와우(蝸牛)고개’, ‘여우(如牛)고개’로 하고, 거기서 ‘하우고개’로 되었는지? 어색한 억지 해석은 고개에서 일어난 돌발 사건에서 숨을 ‘구석이 어디인가?’
 ‘하우(何隅)’인데 현학적이기만 하지, 가당치 않은 것이다. 의왕시 청계동의 ‘하우고개’는 다시 한자로 ‘하우현(下牛峴)’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너무도 어색하고, 억지스러운 한자어이다. 그곳에 유서 깊은 하우현성당이 있다.
 
 
□능안 [능안말(골), 능내(陵內)]
 
능(陵)은 임금이나 왕후의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다. 능묘(陵墓)라고도 한다. 그런데 능은 원래는 왕이나 왕후의 무덤이지만 대군(大君)이나 군(君), 고관대작 등의 무덤이나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큰 무덤을 그냥 능이라 불렀던 것 같다. 
양주시 주내면의 곽가능은 왕족이 아닌 곽씨(郭氏)의 무덤을 능이라 한 것이다. 마을 근처에 아무것이라도 있으면 자랑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가까운 곳이면 더욱 그랬겠지만, 상당히 떨어진 곳이라도 왕이나 왕후의 능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로 여겼을 것이다. 
하다못해 말무덤만 있어도 그것을 따서 마을이름을 ‘말무데미’라 하였다는데, 왕릉이나 특별히 큰 무덤이 있으면 얼마나 으스대면서 ‘능안’, ‘능마을’이라 하고 싶어 했겠는가. 그러나 감히 능 가까이 마을을 만들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므로 대개는 능의 안쪽으로 마을이 만들어지게 마련이어서 ‘능안’이 되었을 것이다.
 의왕시 내손동의 ‘능안’은 조선 제4대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 )의 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 한다. 아직도 그 후손들이 전주이씨(全州李氏)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어디에나 능안이란 마을이름이 많은 이유는 비단 왕이나 왕후의 능이 아니라도, 그냥 큰 무덤을 능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태안군 근흥면, 당진군 송산면,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강화군 양도면, 과천시 막계동, 시흥시 군자동, 옛 광주군 서부면, 인천 서구 검단동, 김포시 양촌면, 남양주시 와부읍, 진접읍, 금곡동, 양주시 광적면, 동두천시 생연동 등지에 능안(말)이란 마을이 있었다. 여주군 여주읍의 능말[능촌(陵村)]은 뒷산에 여양부원군의 무덤이 있어서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덕장골과 큰집골
 
[큰집 “죄수들의 은어로, ‘교도소’를 이르는 말”]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은 마을이랄 것도 없이 서너 채 집들로 된 작은 동네였는데, 동네 이름이 ‘덕장골’이었다. ‘덕짱꿀’이라 소리 나는 대로 불렀었다. 그곳에 큰집이 있다고 해서 그런 동네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큰 ‘덕(德)’, 집 ‘장(莊)’하여 ‘덕장골’이 되었단다. ‘큰집골’이라 하면 더 좋았을 것을 딱딱한 한자식 이름이 되어 좋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떠랴. 그야말로 큰일이 터지고 말았다.
큰집골에 진짜로 ‘큰집’이 들어오게 되었다. 1987년 11월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던 서울구치소가 의왕시 포일동 큰집골, 덕장골로 밀고 들어왔다. 국어사전에서 ‘큰집’을 찾으면 네 가지 정도의 뜻을 풀이하고 있다.
네 번째가 이렇게 되어 있다. “죄수들의 은어로, ‘교도소’를 이르는 말”이란다. ‘큰집 갔다 왔다’ 하면 구치소나 교도소에 다녀왔다는 말로 알아듣는다. 지명도 예사롭지 않다.
큰집골 덕장골에 정녕 큰집 서울구치소가, 충북 청원군 내수읍 비상리(飛上里)에 청주공항이, 옛날 관청들이 많아서 수레들이 모여드는 동네, ‘수렛골(차동車洞)’이 지금의 서울 중구 순화동에 있더니, 나중에 큰수레 기차가 모여드는 서울역이 멀지 않은 곳에 만들어졌다.
 
 
□감나무골
 
밤나무가 많으면 밤나무골(율촌, 율곡, 밤섬), 은행나무의 은행나무골(행촌), 배나무의 배나무골(이목리), 대추나무의 대추나무골(대조동) 등 유실수의 이름에서 비롯된 마을이름들이 전국적으로 흔하다.
그 가운데서도 감나무골이 가장 정다운 이름이다. 감나무 자체가 그런 나무이다. 잎이 그렇고, 감꽃이 그렇고, 가을 단풍이 그렇게 수수하고, 정겹다.
반가운 친구를 우연히 만난 것처럼 보는 순간에 마음이 따듯해지고, 푸근해지는 나무가 감나무였다. 한 채 집도 보이지 않는 산 속에서, 폐허가 된 어느 사하촌에서도 거기 감나무가 서있으면, ‘아, 이곳에는 옛적에 마을이 있었나보다’ 생각하게 마련이다.
감나무는 그렇게 마을사람들과 함께 있었고, 마을의 일원이었다. 그러므로 감나무를 보게 되면 그 감나무와 더불어 있었던 마을과 마을사람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인걸은 떠났어도, 산천에 감나무는 의구(依舊)한 모양으로 남아있어서 거기 마을과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덕장골(지금 서울구치소 관사 아파트 자리)에 들렸었다. 전에는 벌모루 길을 지나면서도 짐짓 외면하고 지나쳐버렸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옛날이 그립고, 고향이 그립고,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가끔씩 찾아가는 곳이다. 덕장골은 감나무골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60여 년 전에 있었던 감나무들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특별히 반가운 것은 O자네 집 헛간 뒤에 있었던 ‘속솔이(?) 감나무’였다.
아직도 옛날 모습으로, 샛노란 작은 감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늘어져 가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맑내골 [맑은내>맑내>막내>막계(莫溪), 청계(淸溪)]
 
지금의 과천시 서울대공원 초입에 ‘맑(은)내골’이란 동네가 있었다. 말 그대로 맑은 시냇가에 있는 마을이란 뜻의 지명이겠다.
우리나라 마을이름이 대개 그렇듯이 ‘맑내’를 억지 한자로 고치려다 보니 ‘막계(莫溪)’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한자 ‘莫(막)’은 형용사로 쓰일 때는 ‘아닐(not)’이란 뜻이 되므로 막계(莫溪)는 한자대로 쓰면 맑은내가 아닌 ‘흐린[탁(濁)]내’가 되어버린다.
허명이 본질을 흐리게 하는 꼴이 되었다. 왜 이다지도 한자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한자를 써도 바르게 써야 할 것이다. 차라리 맑은내를 ‘청계(淸溪)’라 하면 뜻은 맞게 된 것이다. 그렇잖아도 이곳 맑내를 청계라 부르기도 했었다. 그것은 근처의 청계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시내라는 뜻도 되어서 막계보다는 훨씬 좋아 보인다. 청계산 동남쪽에도 의왕시 청계동이란 마을이 ‘상청계-중청계-하청계’로 늘어서 있고, 그 옆을 흐르는 시내를 청계천이라 하였다.
서울에도 잘 알려진 청계천이 있다. 얼마나 물이 맑으면 청계라 했겠는가. 님 웨일즈는 우리나라의 맑은 시내를 이렇게 예찬했다. ‘반짝이는 조약돌이 깔려있는 냇가에서 시골 아낙네와 처녀들이 무명옷을 눈처럼 희게 빨고 있다.
이상주의자와 순교자의 민족이 아니라면 이처럼 눈부시도록 깨끗한 청결을 위하여 그토록 힘든 노동을 감내하지는 않으리라.’(님 웨일즈, 아리랑, p.28)
 
 
□부곡(釜谷) [가마골, 가마울]
 
예전부터 써왔던 솥은 모양과 크기가 여러 가지이다. 용도에 따라 골라 쓰게 마련이었다. 솥은 단순한 주방기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을 ‘한 솥 밥’을 먹는다고 하지 않는가? 솥 가운데 크고, 우묵한 솥을 가마(솥)이라 한다. 한자로는 ‘부(釜)’로 쓴다.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는 산이 마을을 에워싸서 흡사 우묵한 가마솥 가운데 마을이 들어가 있는 모양으로 된 것들이 많았다. 요즘 말로 그런 지형을 ‘분지(盆地)’라 하는데, 이 때 ‘분(盆)’은 ‘동이(basin)’의 뜻으로 가마솥[부(釜)]과 비슷한 모양이라 하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부터 우묵하게 생긴 가마솥이나 동이 같은 지형 안에서, 활달한 유목민족의 눈으로 보면 욱여쌈을 당한 것처럼 숨 막히게 답답해 보일지라도, 편안ㆍ안온ㆍ온화를 공유하며, 함께 살았던 것 같다.
요형(凹形) 선호이다. 내향성ㆍ정적(靜的)ㆍ방어적이다. 서양의 주거는 우리네와 아주 달랐다. 분지보다는 언덕이나 산등성이에 취락이 발달했다. 특별히 유럽 지중해 연안에서 그렇다.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acropolis)는 높은 곳에 있는 도시라는 뜻의 말이다. 철형(凸形) 선호이다. 외향성ㆍ동적ㆍ공격적이다.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광주시 실촌읍에 가마울, 김포시 월곶면, 양촌면, 월곶면에 가마골 등은 모두 한자로는 부곡(釜谷)이라 쓴다. 이 경우는 모두 가마솥처럼 생긴 지형에서 비롯된 마을이름들이란다. 다른 뜻의 가마골(울) 부곡(釜谷)도 있다. 부산 금정구 부곡동의 부곡(釜谷)은 우리나라에 많은 ‘검은돌[흑석(黑石)]’을 뜻하는 감실의 뜻으로, 양평시 개군면, 창녕군 부곡면의 부곡(釜谷)은 역시 우리나라에 흔한 사기막, 도기막, 회가마의 가마[요(窯)]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양주시 장흥면의 가마골[부곡(釜谷)]은 이름 난 이의 묘가 있어서 날마다 성묘하러 오는 사람들이 가마[교(轎)]를 타고 왔다 하여 그런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서초구 서초동, 의왕시의 부곡은 한자로 부곡(富谷)으로 쓰는데, 이것은 여기에 큰 부자가 살았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옥박골
 
마을이름을 대할 때에는 그냥 가까이 가서, 있는 그대로 보고, 쉽게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필요에 따라 마을이름을 상고할 때에는 내 안에 먼저 들어와 있는 선입개념을 버리고, 본질을 ‘바로 보는(직관)’, 이른바 ‘현상학적 방법’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버려야 할 것 가운데 우선은 ‘한자(漢字)’의 우상이고, ‘한자화(漢字化)’의 오류이다. 한자화는 본래말보다 더 좋은 뜻으로 음역한 경우도 있지만, 전혀 엉뚱한 한자를 쓴 경우가 허다하다.
‘참새울[작동(雀洞)]’하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을이름인가, 그것을 ‘진조동(眞鳥洞)’이라 했고(연천군 백학면), ‘쇠무덤’은 소의 무덤이란 뜻인데, 그것을 셋이 모였다는 뜻으로 ‘삼회리(三會里)’라 했으니(가평군 외서면) 우습지도 않다.
마을이름에서 쉬운 것을 어렵게 생각하고, 거기서 대단한 것을 찾아내서 그것을 자랑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의왕시 청계동 청계, 청계사로 이어진 골짜기 초입 왼편 언덕배기에 ‘옥박골’이란 마을이 있다. 전부터 그 뜻이 궁금했었다. 마음대로 생각해보았지만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옥(玉)돌이 박혀있는 곳인가, 옥(獄) 밖에 있는 마을이란 말인가, 옥구슬 같은 박이 열리던 마을이란 것인가, 옷과 밥이 넉넉한 동네 옷밥골[의식리(衣食里)](아산시 음봉면)인가, 등등.
그러다가 이렇게 쉽게 보고자 하였다. 그곳 뒷동산에 옻나무가 많은 옻나무밭이 있어서 ‘옻밭골’이 되지 않았나, 생각하는 것이다. ‘옻밭골>옥박골’로 적은 것은 용납해도 좋을 성싶다.
옻나무는 우리나라 어디에나 자라고 있어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이다. 옻나무는 익목(益木)이면서, 동시에 해목(害木)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검붉은 잎의 옻나무는 경계 대상의 해목이었다.
그래서 인상에 오래 남아있게 되었고, 마을이름에도 쓰이게 되었을 것이다. 서산시 부석면에도 옻밭굴[칠전(漆田), 칠전리(七田里)]이 있고, 마포구 공덕동, 용산구 청파동에 옻나무골이 있었다.
그 밖에도 나무 이름에서 비롯된 마을이름은 부지기수로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감나무골[감골, 시동], 밤나무골[밤골, 밤실, 밤밭, 율전(栗田) 등이다.
 
 
□길마재 [질마재, 질매재, 지르마재]
 
길마는 예전 우리나라 농촌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농기구 가운데 하나였다. 그림처럼 말굽쇠 모양으로 구부러진 나무 두 개를 앞뒤로 나란히 놓고, 안쪽 양편에 두 개의 막대기를 대어서 이들을 고정시키고, 안쪽에 짚으로 짠 언치를 대어 소의 등에 얹어서, 물건을 나르는 데 썼던 도구이다.
그대로 쓰기도 했고, 옹구, 발채 또는 거지게 따위를 올려놓기 위한 받침대 구실을 하기도 했다. 대개의 고개 모양이 길마와 비슷한 것이 많았다. 고개의 규모나 형상도 가지각색이지만 공통점은 시작점에서 마루를 넘어가 반대편 종착점이 있다는 것이다.
고개가 클 경우 그 터미널에 동네가 만들어졌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峴底洞)이 글자 그대로 고개 밑 마을이란 뜻의 지명이다. 길마의 모양도 지방에 따라 여러 가지였으나 대개 말굽쇠 비슷하게 생긴 것이 보통이었다.
굽이 고갯길의 종단면을 한 눈에 볼 수는 없지만 머릿속으로 생각할 때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길마를 떠올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고개 이름이 ‘길마재’로 되어있는 경우가 전국적으로, 여러 군데 나타난다.
길마의 모양대로라면 비교적 경사가 급한, 포물선 형태의 고개가 되겠지만, 그런 것까지 예민하게 따질 것은 없다고 본다. 서울 서초구 원지동, 가평군 상면, 하면에 길마재, 가평군 하면에 질매재, 강화군 강화읍에 길막재, 안성군 서운면에 질마재, 충남 서산에 질마섬[안마도(鞍馬島)], 의왕시에 길마잔등 등의 지명이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진마) 마을은 시인 서정주의 고향 마을이다. 그의 시집 「질마재 신화」는 고향 마을이름에서 따온 제호이다. 길마재와 질마재는 여기저기 섞여 나타나고 있다. 길마재가 원래말인데, 입천장소리되기로 부드럽게 되어 질마재가 된 것인데, 그것이 더 정겹게 들린다.
 
 
□박석고개 [박동(洞), 박새기]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ㆍ갈현동에서 구파발로 넘어가는 고개가 박석고개이다. 옛날에는 경의가도 북한산 서쪽 자락의 그다지 높지 않은 고개였다. 지금은 고개의 상당한 부분이 뭉그러져 내렸고, 아스팔트 포장으로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박석고개의 박석(石)은 한자 뜻 그대로라면 ‘널리 덮여있는 돌’이란 뜻이다. 박석고개를 ‘박석(薄石)’이라 쓰기도 하는데, 이때 박석은 ‘얇은(얇게 쪼갠) 돌’이란 뜻으로, 대개는 그 뜻으로 쓰였다. 은평구의 박석고개에는 얽혀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귀한 사람들의 발이 고갯길 진흙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넓적한 돌들을 깔았다고도 하고, 풍수설에서 좋은 지맥을 보호하기 위해서 돌들을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유럽에선 일찍이 쇄석(碎石)을 깔아서 포장도로를 만들었다. 유명한 로마길은 전문적인 쇄석포도로 유명했으며, 영국에서는 19세기 초반 ‘macadam’이라고 하는 쇄석도로를 창안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디서든지 (잔)돌은 흔한 것이어서 길을 포장하는 재료로써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갯길에 비가 내리거나, 봄철 언 땅이 녹으면 유난히 질퍽거려서 사람이나 수레가 다니기 어렵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판판한 돌들을 고개 비탈길에 넓게 깔아서 이용했을 것이다. 그런 고개를 유식한 한자어로 박석고개라 하였다.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서 송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박석고개라 하였고, 그 어름에 있었던 마을을 ‘박동(洞)’이라 하였다. 마포구 신수동, 강남구 양재동에도 박석고개가 있었다.
안성군 금광면, 이죽면, 가평군 상면, 포천군 가산면, 연천군 청산면 등지에도 박석고개가 있다. 의왕시 포일동 ‘이미’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과천시 갈현동 방향으로 가면서 왼편으로 ‘박새기’란 마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박석이>박서기>박새기’에서 된 것으로 짐작한다. 안성군 금광면에 있는 박석고개를 ‘박서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진원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으로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 문리과대학에서 지리학과를 공부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문화역사지리학을 전공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지리학과 강사를 역임하였고,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방배중학교 교감,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현재는 수필가이자 의왕시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며 안양광역신문을 통해 과거 시흥군 지역에 대한 담론을 연재하고 있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