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인 1872년(고종 9)에 제작된 지방지도로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과천지도(果川地圖, 규10370)로 관악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한강과 양재천, 북쪽으로는 남태령과 노량진, 서쪽으로는 수리산과 만안교, 안양장, 남쪽으로는 군포천과 군포장, 인덕원천과 청계산, 지지대고개까지 등 현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와 서울시 서초구와 동작구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보여주는 조선후기 지방지도에 현재의 위치와 지명을 겹쳐 기입한 것이다.
지도 위쪽에 그려 놓은 산이 과천의 진산(鎭山)인 관악산이다. 연주대와 자운암이 보인다. 한강을 건너 수원으로 향했던 두 갈래 길이 보인다. 관악산 서쪽을 지나는 길은 시흥통로이다. 만안석교를 지나는 길이다. 또 다른 길은 남태령을 넘어 과천행궁을 지난다.
관악산은 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의 발원지가 된다. 관악산 서쪽에서는 도림천이 나와 안양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들어간다. 이 하천은 조선시대 시흥 땅에 해당하므로 이 지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관악산 동쪽에서는 양재천이 나와 탄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양재천교를 그려 놓았다. 동작진 옆에 그려진 승방천은 지금은 복개된 사당천이다.
현재는 서울특별시에 속하는 강남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경기도였다. 관악산에서 한강까지 과천현이었다. 지도 아래쪽에는 청계산이, 왼쪽에는 수리산이 그려졌다. 그 사이에는 안양장, 군포장, 군포천, 인덕원천이 표시되었다. 지금보다 훨씬 넓은 지역이 조선시대 과천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과천시사에서의 지도 설명을 보면 1872년(고종 9) 제작된1872년(고종 9) 제작된『과천지도』(규10370)에는 과천현 읍치가 위치한 지역을 주산(主山)인 관악산 아래에‘읍(邑)’이라 표기하고 우측의 건물은‘행궁(行宮)’으로 표기하였다. 읍 좌측에는 향교가 위치한다. 지도에서‘읍’으로 표시한 지역이 과천현의 관아가 위치한 지역이며 객사 건물은 역대 국왕이 행행한 행궁으로서 격을 존중하여‘행궁’으로 표기하고 별도의 건물 그림을 그려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과천현 읍치는 관문동이었고, 관아 터는 현재의 과천초등학교 자리인데, 지금도 객사(지도상의 행궁과 인접하였다)의 주춧돌이 교정에 남아 있다. 읍치는 관악산(冠岳山)을 주산, 청계산(淸溪山)을 안산으로 여기는 풍수지리상 명당의 형국을 갖춘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한양에서 삼남지방으로 가는 대로변에 위치하였으며, 관천읍내는 읍취락인 동시에 교통취락의 역할이 컸다. 지도에 行宮이나 행궁터가 보이는 것은 정조대왕의 초기 헌릉원행 등 왕의 행차가 잦은 구간이었기 때문이다. 다리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이다.
향교는 지금도 관악산 등산로 입구에 남아 있다. 남태령(南泰嶺)은 본디 여우고개라 했으나 정조대왕이 수행원에게 고개 이름을 물었을 때 속된 이름을 꺼내지 못했던 수행원이 ‘남태령’이라 답한 데서 이름이 바뀌었다는 전설이 있다. 서울에 올라가는 관문이었기에, ‘남태령에서 긴다’ ‘과천에서 긴다’는 말이 행인들 사이에서 전해져 왔다.
만안교에서 왼쪽 아래(남쪽)의 삼남대로와 연결된 도로에는 『해동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던 안양장과 군포장이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그 표시 방법이 아주 인상적이다. 두 개의 장을 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그 외에 『해동지도』에 표시되어 있지만 『과천지도』에는 없는 것이 몇 개 있다. 노량진에서 현재 서울대학교 서쪽 도림천을 따라 안양시 비산동으로 넘어가는 도로, 안양교 부근에서 안산으로 빠져나가는 도로, 군포장 남쪽에서 광주부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도로 등이 생략되어 있다. 삼남대로에서 언급했듯이 도로의 표시라는 측면에서 『과천지도』가 상당히 소략했음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과천시는 ‘남태령 옛길’을 복원해 놓았다. 삼남대로는 이 고개에서 지금의 동작대로를 따라 북상해 銅雀津(동재기나루)에 이르러 한강을 건너 한성으로 들어갔다. 軍浦場은 이름 그대로 현 군포시의 기초가 된 장터거리인데, 지금도 ‘구장터’라는 취락명이 남아 있다. 기타 鷺粱津을 거치는 시흥로, 漢江津과 良才川橋를 거치는 영남대로 등이 보인다.
과천은 고구려의 율목군(栗木郡), 신라 경덕왕 때는 율진군(栗津郡), 고려 초에는 과주(果州)라 불렀다. 조선 태종 13년(1413)부터 과천(果川)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주변 지역과 합해진 시기도 있었다. 고려 현종 9년에는 광주(廣州)에, 조선 태종 14년에는 금천(衿川)과 합해져 금과(衿果)라 불리기도 했다. 세조 때에도 잠시 금천에 합해진 적이 있으나 이후 조선시대 내내 독립된 군현으로 존재하였다.
1914년 3월 1일 군면 폐합에 의해 시흥군에 편입되면서 과천면으로 불렸다. 과천시 중앙동 주민센터를 옛 면사무소 위치로 보면 된다. 1982년부터 정부 제 2 종합청사와 서울대공원이 들어섰고 1986년 1월 1일부터 과천시로 불린다.
위에 있는 조선후기 지방지도 과천지도는 한강을 지도 오른쪽에 배치하였다. 나루터인 노량진, 동작진, 한강진을 표시하였다. 노량진과 동작진 옆에 그려놓은 용양봉저정은 정조가 배다리를 건넌 후 쉬어갔던 곳이다.
한편 임란, 호란의 양란을 겪은 조선사회는 18세기 영·정조대에 이르러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각종의 문물 제도가 정비되고 사회적으로 안정되면서 중심 산업인 농업부문의 생산력이 높아지고 이와 더불어 상품유통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특히 이 시기는 실학을 비롯한 학문뿐만 아니라 문학·예술부분에서도 많은 성과들이 축적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지도제작에서도 이 시기는 최고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19세기로 넘어가면서 조선사회는 세도정치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三政의 문란 등으로 민생의 안정이 위협받게 되었다. 관료사회의 부패는 정상적인 국가 정책의 집행을 더욱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外戚의 세도정치를 일소하고 당쟁을 타파하며, 군제를 정비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각종 개혁 정책을 추진한다.
특히 두 차례의 洋擾를 겪으면서 서양의 침략에 적극적인 대응책을 모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방과 치안을 위한 관제 개정, 軍制의 개편, 군사시설의 확충과 경비의 강화, 軍器의 정비와 실험 등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지방의 실정 파악은 시급한 과제였고 이를 위해 1871년에는 전국적인 邑誌 편찬사업을, 이듬해인 1782년에는 전국적인 차원의 지도제작 사업을 추진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조선시대 官撰地圖 제작사업의 마지막 성과로 평가되는 1872년 지방지도가 소장되어 있는데 총 459매이다. 이 때 제작된 지도들은 郡縣지도뿐만 아니라 營·鎭堡·牧場·山城 등을 그린 지도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한 시기에 제작되어 收合된 지방지도로는 가장 많은 양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지도는 1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제작되어 收合되었기 때문에 통일적인 제작 원칙 하에 체계적으로 그려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전 시기의 지도보다 큰 규격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지도에 들어있는 정보량은 현재 남아 있는 다른 郡縣地圖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풍부한 편이다.
과천시사 자료중에서
1872년 제작 『과천지도』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거친 후 흥선대원군(1820~1898)은 국방력의 강화를 위해 전국 군현과 군사기지(진보와 수영 및 병영), 역참 등의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하여 올릴 것을 명령하였다. 『과천지도』는 흥선대원군의 명령을 받고 이듬해인 1872년에 과천현에서 직접 그려 올린 지도이다. 앞서 『해동지도』의 과천현 지도가 현에서 직접 올린 것을 중앙에서 재편집한 것인 반면, 『과천지도』는 중앙에서의 재편집이 없는 원본 그대로이다.
그만큼 과천현의 지도 제작 기술, 더 나아가 인문 정보에 대한 인식 수준을 가감 없이 파악할 수 있는 지도라는 뜻이 된다. 『과천지도』는 전국적 통일성을 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체계적이지 못한 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과천현의 옛길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도 『해동지도』보다 다소 소략한 편이다. 그렇더라도 현존하는 과천현의 지도 중에서 『해동지도』 다음으로 풍부한 옛길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작진에서 시작되어 과천현 읍치를 지나 수원으로 빠져나가는 삼남대로가 『과천지도』의 오른쪽 위(북쪽)에서 왼쪽 아래(남쪽) 방향으로 선명하게 나와 있다. 또한 삼남대로의 과천현 구간 중 가장 높은 고개인 남태령이 읍치 오른쪽 위쪽에 잘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과천현의 읍치 앞에 나무와 흙으로 만든 다리가 인상적이다. 과천현 읍치에는 행궁이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도 남아 있는 과천현 객사인 온온사이다. 수원에 있는 융건릉을 갈 때 임금이 잠시 머무는 곳이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과천현 지도는 삼남대로의 위치가 약간 다르다. 『해동지도』의 과천현 지도에는 삼남대로가 『과천지도』의 가운데 왼쪽에 표시된 갈산(葛山) 위쪽을 지나 군포천(軍浦川, 현재 안양천 상류)을 넘어 수원으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과천지도』에 표시된 삼남대로는 갈산 남쪽을 지나기 때문에 현재의 과천-의왕간 고속화도로 방향을 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길은 『해동지도』의 과천현 지도에 표시된 도로와 달리 산길을 많이 지나기 때문에 쉽지 않은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삼남대로가 아니라 이 길을 표시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삼남대로에서 『해동지도』의 과천현 지도에는 있지만 『과천지도』에는 없는 것이 남양부로 가는 중로, 즉 과천현 읍치를 약간 지나 광주부의 판교로 빠지는 중로이다. 그만큼 『과천지도』가 『해동지도』의 과천현 지도에 비해 도로를 자세하게 표시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오른쪽 위(북쪽)의 한강진으로부터 시작되어 오른쪽 아래(동남쪽) 광주부의 판교로 넘어가는 영남대로 역시 간략하지만 실제에 부합되게 표현되어 있다. 중간에 양재천을 넘어가는 곳에 나무와 흙으로 만든 다리도 인상적이다. 과천현 읍치에서 영남대로 방향으로 나 있는 2개의 길 역시 『해동지도』에 나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왼쪽 위(북쪽)의 노량진에서 시흥현 읍치를 지나 왼쪽 위(서쪽)의 안양천을 넘는 도로는 『해동지도』와 달리 시흥현 부분이 빠져 있다. 그러나 정조가 아버지 장헌세자의 무덤이 있는 수원까지 가기 위해 새로 개척한 길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들이 보인다.
노량진에는 능행시 정조가 이용했던 행궁인 용양봉저정이 표시되어 있고, 왼쪽 위(서쪽)의 안양시 안양동 부근 안양천 위에 있었던 만안석교도 실제의 모습과 비슷하게 그려 놓았다.
만안교에서 왼쪽 아래(남쪽)의 삼남대로와 연결된 도로에는 『해동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던 안양장과 군포장이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그 표시 방법이 아주 인상적이다. 두 개의 장을 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그 외에 『해동지도』에 표시되어 있지만 『과천지도』에는 없는 것이 몇 개 있다. 노량진에서 현재 서울대학교 서쪽 도림천을 따라 안양시 비산동으로 넘어가는 도로, 안양교 부근에서 안산으로 빠져나가는 도로, 군포장 남쪽에서 광주부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도로 등이 생략되어 있다. 삼남대로에서 언급했듯이 도로의 표시라는 측면에서 『과천지도』가 상당히 소략했음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참고 자료
과천시사 http://gcbook.or.kr/web/main.html?book=1&page=14
출처: 서울대 규장각 지리지종합정보 http://kyujanggak.snu.ac.kr/geo/contents/con_map.jsp
지도 크게 보기: http://kyujanggak.snu.ac.kr/geo/common/pop_image.jsp?path=/geo/data/mapimg/160420134617_128_etc1.jpg
과거와 현재 지명 비교 보기: http://kyudb.snu.ac.kr/pf01/rendererImg.do?item_cd=GZD&book_cd=GM99999_00&vol_no=0000&page_no=0029&imgFileNm=KYKH001_0000_002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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