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악산은 수도권을 대표하는 명산 가운데 하나입니다. 최근에는 좋은 기운을 받는 산으로 알려지며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지만, 이미 240여 년 전 조선 후기의 명재상인 채제공 역시 이 산을 찾았다. 채제공은 1786년 음력 4월, 예순일곱의 나이에 관악산 연주대를 다녀온 뒤 관악산 기행(遊冠岳山記)을 남겼다. <관악산 기행>(원제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은 1984년부터 5년간 중학교 2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실렸고 지금도 EBS 수능 국어의 단골 지문이다.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db.itkc.or.kr)에서도 국역을 원문과 함께 볼 수 있다.
1786년 병오년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10일). 번암은 몇 년째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노량진 집을 함께 나선 일행은 하인 빼고 양반 어른만 일곱 명이었다.
"10리쯤 가서 자하동으로 들어가 한 칸짜리 정자 위에서 쉬었는데, 정자는 신씨申氏의 장원莊園이었다. (중략) 언덕 위에는 철쭉이 한창 피어 있어 바람이 불면 그윽한 꽃향기가 수시로 물을 건너 풍겨 왔다."(이하 고전번역원 국역)

관악산 동서남북이 다 자하동이다. 번암 일행이 들어간 자하동은 서울대 앞 신림천(도림천의 최상류) 일대 '북자하동'이다. 어디부터 10리를 들어갔다는 것일까? 산길 정취가 제법 나기 시작하려면 지금 미림여고삼거리(서울대벤처타운역)나 녹두거리 입구쯤은 돼야 하지 않을까.
'한 칸짜리 정자'는 사실은 '일간정一間亭'이라는 정자 이름이다. 신씨란 자하 신위(1769~1845, 이하 자하) 집안이다. 자하 고조부 형제가 이곳 북자하동에 별서別墅를 두고 있었고, 자하 자신도 만년에 이곳에 돌아와 북자하동과 동자하동(과천)을 넘나들며 글을 지었다. 고조부 형제는 이곳에 이로당二老堂과 일간정을 지었다. 번암 일행이 쉰 정자가 그 일간정이다.
일간정이 있던 일대는 지금 관악산야외식물원과 호수공원이 돼 있다. 호숫가에 '자하정紫霞亭'이라는 정자도 지어 놓았다. 자하 흉상도 세웠는데, 설명글에 자하가 여기 살았단 말은 없었다.
저물녘 산속에서 길을 잃다
일간정에서 더 가 제4광장에서 왼쪽 시내 계곡으로 올라가는 게 관악산 주등산로다. 그런데 번암 일행은 왼쪽으로 틀지 않고 직진했다.
"다시 10리쯤 가니 길이 험준하여 말을 탈 수 없었다. 거기서부터는 탔던 말과 마부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가며 칡넝쿨을 뚫고 도랑을 건넜다."
관악구와 안양시, 관악산과 삼성산의 경계이고 도림천과 안양천의 분수령인 무너미고개를 넘은 것이다. 고개 넘으면 안양천의 최상류다. 일행은 그 도랑을 건너 계속 갔고, 어디쯤에서 산 쪽으로 틀었다가 그만 길을 잃었고, 해거름이 가까웠다.
"일행 중 숙현(이광국, 당시 65세)이 문득 사라져서는 오래도록 나타나지 않더니, 이윽고 스님 네댓을 이끌고 돌아왔다.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듯 스님들 따라간 절 이름은 불성암佛性庵이었다."
불성암은 어디일까? 안양 쪽 주능선인 관양능선에서 팔봉능선이 갈라지는 지점 바로 아래 태고종 불성사라는 절이 있다. 불성암이 바로 이 불성사라고 보면 글의 행간과 글 밖의 역사가 잘 꿰어진다.
번암 일행은 처음부터 불성암에 묵을 요량이었다. 불성암이 불성사라면, 무너미고개에서 거기 가는 길은 두 개다. 고개 넘자마자 왼쪽으로 도랑을 따라 팔봉계곡 끝까지 올라가 팔봉능선 가슴께를 질러가는 길과, 도랑 건너 안양 방면으로 한참 내려가다 서울대 관악수목원 후문에서 계곡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일행은 도랑 건너 팔봉능선 초입을 지난 뒤 성급하게 산 쪽으로 들어섰다가 길을 잃었다. 숙현이 팔봉능선의 왕관바위 근처 제2~3봉쯤으로 올라가 눈으로 절 위치를 확인하고 가서 스님들을 데려온 것이었다.

일간정이 있던 근처 관악산호수공원 내 자하정.
일간정이 있던 근처 관악산호수공원 내 자하정.
南人 허목·이익도 거쳐 간 불성암
글의 처음과 끝에서 번암은 '미수 허선생眉.許先生'이 여든세 살에 관악산에 오른 일을 거듭 이야기한다. 미수는 허목(1596~1682)이다.
번암은 당대 남인南人의 영수領袖였고, 그 100년 전 노론老論의 송시열과 맞장 뜬 남인의 거두가 미수였다. 미수의 관악산 기행은 그의 문집 『미수기언眉.記言』 중 <무오기행戊午記行> 안에 짧게 나온다. 1678년 음력 4월 17일 "금양衿陽의 이문충공 묘를 참배하고 관악산을 유람하였다"고 썼다. 금양은 지금 금천구와 광명시 일원이고, 이문충공은 미수 처조부 이원익인데 그 묘가 광명시 소하동에 있다. 그는 "서자하 수마제須摩題(안양)로부터 '불성'을 지나 '영주대靈珠臺'에 올랐다"고 썼다. 불성이 바로 불성암일 것이고, 영주대는 관악산 정상 연주대의 이명異名이다.
번암의 스승이고 역시 남인인 성호 이익(1681~1763)도 1707년 음력 2월에 관악산을 다녀와서 <유관악산기>를 썼는데, 역시 '불성암'에 묵고 '영주대'에 올랐다고 했다.
꼭 남인들이라서가 아니라, 익히 읽고 들어 '검증된 불성암'을 번암도 베이스캠프로 잡은 것이다.

관양능선 암릉길로 연주대까지
번암 일행은 새벽밥 지어 먹고 건장한 스님들을 앞세워 연주대로 향했다. 스님은 정상이 10리 남짓이라 했는데 실제는 2km가 채 못 된다.
"마침내 절 뒤로 넘어가 산마루로 갔다. 길이 깎아지른 벼랑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그 아래는 천 장 낭떠러지였다. (중략) 거대한 바위가 길 등성이를 온통 차지하기도 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는데, 험준한 곳 가운데 심하게 깎아지르지 않은 곳을 골라 엉덩이를 붙인 채 두 손으로 옆을 지탱하며 건넜다."
불성사 뒤 산마루라면 관양능선 암릉, 관음바위 바로 직전의 국기봉쯤 된다. 암릉 동쪽(과천)은 낭떠러지다. 번암 일행은 관음바위~장군바위를 사족보행으로 지나 지금 KBS 관악산송신소까지 내내 암릉을 탔다. 송신소부터는 안부다. 그렇게 연주대 아래에 닿아 올려다보니 먼저 오른 사람들이 낭떠러지 아래로 위험하게 굽어보기에 사람을 시켜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라고 소리 지르게 했다.
"정상에는 바위가 펼쳐 있어 수십 명이 앉을 정도였는데, '차일암遮日巖'이라고 불렀다. 옛날에 양녕대군이 왕위를 피해 관악산에 와서 머무르며 때때로 이곳에 올라 궁궐을 바라보았다. 이글거리는 햇살이 따가워 오래 머무를 수 없을 때면 작은 장막을 펼치고 앉았다. 바위 귀퉁이에 꽤 오목하게 파인 구멍이 네 개 있는데, 장막의 기둥을 설치했던 곳이다."

관악산 정상 연주대가 운발이 좋다는 속설 때문에 요 몇 달 찾는 이들이 갑자기 늘어나 몸살을 앓는 중이다. 내가 간 날도 정상 인증석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인증석 있는 바위는 관악산의 진짜 정상이 아니다. 진짜 정상은 관악산기상관측소의 하얀 레이더 보호돔dome 옆, 통행이 금지된 불꽃바위(횃불바위)다. 양녕대군 '차일암'과 바위에 구멍 네 개는 아마 그 정상부 근처에 있었던 모양이다.
멀리 소나무 빽빽한 경복궁 터가 보였다. 벼슬 떠난 번암은 임금을 그리워하는 짧은 고시古詩를 하나 지어 읊었다. 그리고 불성암으로 돌아와 하루 더 묵고 노량진 집으로 돌아왔다.
번암은 글 마지막에 다시 미수를 들먹인다.
"천지신명의 도움을 받아 내가 만약 83세에 이른다면 비록 실려서 오더라도 반드시 다시 이 대에 올라 고인의 자취를 계승할 것이니, 그대(숙현)는 부디 기록해 두게나."
숙현도 "그때 저도 마땅히 따라오겠습니다"라고 화답했다.
관악산의 기를 받아서일까, 그해 번암은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화려하게 관직에 복귀한다. 이후 영의정 없는 좌의정(국무총리대행) 겸 수원 유수留守로서 정조正祖의 화성華城 성역城役을 총지휘했다. 영의정에 올라 과천 동자하와 안양 서자하 길로 정조의 화성 능행陵行들을 수행했다. 다만 1799년 80세로 졸卒하는 바람에, 83세에 다시 오겠다던 그날의 공약을 지키지는 못했다.

관악산 연주암에 템플스테이를 예약하면, 추가요금을 내고 과천~KBS 송신소를 왕복하는 케이블카를 탈 수 있다.
월간산 6월호 기사입니다.






240년 전, 조선의 명재상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걸었던 관악산 길
티스토리 by 청솔나무 2026. 6. 13.
원문보기(https://chungsolnamu.tistory.com/999)
. 이 글은 오랫동안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었으며, 현재도 수능 국어 지문으로 자주 활용될 만큼 문학적,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작품입니다. 오늘날 관악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정상 인증을 목표로 하지만, 채제공은 자연을 감상하고 선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산을 찾았습니다.
1786년 5월 10일에 해당하는 날, 채제공은 노량진의 집을 출발했습니다. 함께한 사람은 하인을 제외하고 모두 '일곱 명의 양반'들이었습니다. 당시 채제공은 관직에서 물러난 상태였지만, 관악산을 향한 발걸음에는 여유와 기대가 담겨 있었습니다. 일행은 약 10리를 걸어 자하동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채제공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언덕에는 철쭉꽃이 만개해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꽃향기가 물 건너까지 퍼져 왔다' 지금처럼 봄철 철쭉이 관악산을 붉게 물들이던 모습이 240년 전에도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채제공 일행이 쉬어간 곳은 '일간정(一間亭)'이라는 작은 정자였습니다. 이 정자는 훗날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이자 문인으로 평가받는 신위 집안의 별서에 속한 건물이었습니다. 당시 북자하동에는 신위의 고조부 형제가 세운 별장이 있었으며, 그 안에 이로당과 일간정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이 일대는 관악산야외식물원과 호수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자하 신위를 기념하는 자하정과 흉상도 세워져 있어 당시의 흔적을 일부 느껴볼 수 있습니다.
휴식을 마친 일행은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후 현재의 무너미고개에 해당하는 지점을 넘으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무너미고개는 관악산과 삼성산을 나누는 경계이자 도림천과 안양천의 분수령입니다. 채제공은 이곳에서 말과 마부를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이후 지팡이를 짚고 칡넝쿨을 헤치며 계곡을 건너 산길로 들어섰지만, 예상치 못하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해가 저물 무렵 일행은 큰 어려움에 처했지만, 동행했던 이광국이 스님들을 데리고 돌아오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채제공 일행이 도착한 곳은 불성암이었습니다. 현재 안양시 관양동 일대에 위치한 불성사와 같은 장소로 추정됩니다. 이곳은 단순한 산중 암자가 아니었습니다. 조선 후기 남인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관악산을 찾을 때마다 머물던 중요한 거점이었습니다. 허목은 1678년에 관악산을 유람하며 이곳을 거쳤고, 채제공의 스승인 이익 역시 1707년 관악산을 오르며 불성암에 머물렀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불성암이 당시 관악산 등반의 대표적인 출발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날 새벽, 채제공 일행은 스님들의 안내를 받아 연주대로 향했습니다. 불성암 뒤편 능선에 오르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깎아지른 절벽과 암릉이 이어졌고, 한쪽은 수백 미터 아래로 떨어지는 낭떠러지였습니다. 채제공은 거대한 바위 때문에 길이 막혀 엉덩이를 바위에 붙이고 양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이동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현재의 관양능선 코스로 추정되는 구간입니다.
관음바위와 장군바위를 지나 현재의 KBS 관악산송신소 방향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지금도 관악산에서 손꼽히는 암릉 코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예순일곱 살의 채제공이 이 길을 직접 걸었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험난한 길을 지나 마침내 연주대에 도착한 채제공은 한양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당시 정상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가 있었으며, 이를 '차일암'이라고 불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왕위를 양보한 뒤 관악산에 머물며 궁궐을 바라보던 장소라고 전해집니다. 강한 햇빛을 피하기 위해 차일을 설치했던 흔적으로 보이는 네 개의 구멍도 바위에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주대 정상에서 채제공은 멀리 한양과 경복궁 방향을 바라보며 임금을 생각하는 시를 지었습니다. 관직을 떠나 있었지만 나라와 임금을 향한 충정을 잊지 않았던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현재 많은 등산객들이 찾는 연주대 인증석은 관악산의 대표 명소입니다. 그러나 실제 최고 지점은 기상관측소 레이더 보호돔 인근의 불꽃바위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습니다. 채제공이 기록한 차일암 역시 현재의 인증석보다는 정상부 인근의 다른 바위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됩니다.
채제공은 관악산을 다녀온 뒤 놀라운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그해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며 정계에 복귀했으며, 이후 정조의 신임을 받아 국가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습니다. 정조의 화성 건설 사업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고, 좌의정과 영의정에 오르며 조선 후기 정치의 중심에 섰습니다. 관악산의 기운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인생의 전환점 때문입니다.
채제공의 관악산 기행이 남긴 의미
조선 후기의 학자와 관료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 선현을 존경하는 마음, 그리고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향한 희망이 담긴 기록입니다. 240년 전 채제공이 철쭉 향기 가득한 관악산을 걸으며 느꼈던 감동은 오늘날 관악산을 찾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봄철 붉게 피어난 철쭉 사이를 걸으며 관양능선과 연주대를 바라본다면, 조선 최고의 명재상 가운데 한 명이 남긴 관악산의 발자취를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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