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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2]최헌섭 원장의 통영로(한양~의왕 구간) 이야기

안양똑딱이 2025. 11. 12. 20:24

 

2025.11.12/ #약사 #기록 #답사 #통영로 #최원섭원장 #경남도민일보

 

통영로는 임진왜란 이후 해방(海防)의 중요성을 깨달은 조선 정부가 당시의 수도인 한양에서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통영까지 이르는 길을 열고, 그 길을 일컫던 이름이다. 이번 통영로 답사는 통영의 통제영을 출발하여 경북 문경 유곡역에서 동래로(東萊路: 속칭 영남대로)와 만나 문경 새재(조령: 鳥嶺)를 넘어 서울로 이른다.

 

다른 길로는 통영별로(統營別路)가 있는데, 한양에서 전남 해남으로 이르는 삼남대로(三南大路)를 따라 내려오다가, 전북 전주 삼례역에서 분기하여 임실 남원 운봉과 함양 산청 진주 고성을 거쳐 통영에 이른다. 통영로와 통영별로는 조선시대 있었던 서울을 기점으로 삼은 10대 간선도로 가운데 현재 경남에 종점을 둔 하나뿐인 도로다.

 

이글은 경남도민일보에 실린 두류문화연구원 최뤈섭원장의 글로 <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연재 글의 일부다 

 

정조 임금 어가 행차하듯 가는 '통영별로' 첫걸음

기자명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35)통영별로(統營別路) 다시 출발선에 서다

 

앞선 호에서 지난 2년간 진행해 온 통영로가 숭례문에 도착함으로써 긴 여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도착은 새로운 출발을 전제하는 것이니, 방향을 바꾸면 들머리가 날머리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계사년 1, 이제 통영으로 향하는 다른 길(통영별로, 통영일로)을 잡아 새로운 출발선에 섰습니다. 통영별로(統營別路)는 서울과 삼도수군통제영을 오가던 통영로(統營路)의 다른 길입니다. 그 경로는 숭례문을 출발, 동작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너 삼남대로(三南大路)를 따라 남행하다가 전주 삼례역(參禮驛)에서 갈라져 임실 남원 함양 산청 진주 고성을 거쳐 통영으로 이릅니다. 이 길은 정조의 화성 행차로, 춘향전에서 이몽룡의 암행로가 겹치고, 공주에서 전주에 이르는 구간에서는 동학농민전쟁 루트와도 부분적으로 겹치는 역사적인 길입니다. 독자 여러분,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선 저희와 길벗이 되어 길 위의 역사를 찾아 떠나시기 바랍니다.

 

숭례문을 나서다

 

우리가 걷는 통영별로의 서울수원 구간은 대체로 정조 임금이 화성 행차를 위해 오간 길과 겹치게 되어, 이 노정을 따라 옛길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남대문을 출발한 길은 통영로와 달리 곧바로 남쪽으로 이르지 않고 남서쪽으로 길을 잡아 지하철 1호선과 비슷한 선형을 따릅니다. 대동지지에는 예서 동작나루까지 20리라 했습니다.

 

남대문을 나서서 얼마 걷지 않으면 옛 남지(南池)가 있던 자리에 이릅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화기(火氣)가 강해 그것을 막기 위해 동대문 안쪽에 동지(東池), 서대문 북쪽에 서지(西池)와 이곳에 남지를 두었습니다. 뒤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에도 광화문 바깥에 물에 사는 상상 속 신수(神獸)인 해태를 새긴 석상을 세운 것도 그런 까닭이었습니다. 이렇듯 도성의 여러 곳에 못을 둔 것은 지방의 읍성 내에 연못을 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평소에는 풍치를 돋우는 수변공원의 구실을 하고 화재가 발생하면 불을 끄기 위한 방화수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이곳의 옛 경관을 살필 수 있는 이기룡의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에는 연못 안의 연꽃과 어우러진 버들이 그려져 있어 남지의 그런 쓰임을 잘 일러주고 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서울시가 정도 600년을 기려 세운 남지-터 표석에는 '서울 도성 숭례문 밖에 있던 연못으로 장원서(掌苑署)에서 관리하였음'을 새겨 두었습니다. 이제 시한을 다해 가는 MB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지 않아 불에 타버린 숭례문을 바라보며, 처음 이곳에 못을 두었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 봅니다.

 

청파 배다리를 향하다

 

숭례문을 나선 정조 임금의 어가는 남지를 지나 지금의 서울역 부근에 있던 도제골(도저동:桃楮洞) 앞길을 지나 청파 새다리가 있던 청파동 1가를 향하게 되는데, 우리는 옛길을 덮어쓴 세종대로를 따라 걷다가 이문동에서 육교를 통해 서울역을 건넙니다. 육교를 통해 서울역을 가로질러 건너면 머잖아 옛 청파역(靑坡驛)이 있던 청파동을 지나게 됩니다. 이 역은 고려시대 청교도(靑郊道)에 속한 청파역(靑波驛)이었다가 조선시대까지 그 쓰임이 이어져 왔습니다. 청파역은 동대문 밖 4리에 있던 노원역(盧原驛)과 더불어 조선시대 한성부 관할(도성에서 10) 안에 있던 두 역 가운데 하나로서, 신증동국여지승람한성부 역원에는 '숭례문 밖 3리에 있다'고 나옵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이곳은 남태령을 넘어 통영별로와 삼남대로를 오가는 길과 노량진을 거쳐 시흥을 오가는 길의 갈림길로 그려져 있습니다. 숙대 앞에서 옛 밥전거리(밥을 팔던 곳)가 있던 삼각지로 이어지는 지금의 청파로가 대체로 옛길이 지나던 곳으로 여겨집니다.

 

용산 언덕 앞길을 지난 어가는 석우(石隅:돌모루) 만천주교(蔓川舟橋)를 거쳐 한강 배다리에 이릅니다. 지금 옛 돌모루 자리에는 어린이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만천주교는 지금의 남영역 앞에 있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청파배다리터' 표석을 세우고 '조선시대 도성에서 청파·원효로로 통하는 주요 길목인 만초천에 놓였던 돌다리터'라 새겼습니다. 바로 이 청파배다리가 신증동국여지승람등 옛 기록에 남대문 바깥에 있었다고 전하는 청파신교(靑坡新橋)입니다. 이 다리는 처음에 만초천(蔓草川)에 배로 다리를 놓아 배다리 또는 선교(船橋)라 했다가 뒤에 돌다리로 고쳐 쌓았는데, 그 즈음에 청파 새다리라 한 듯합니다. 정조 임금의 능행길은 예서 노량진으로 길을 잡아 그곳에 미리 설치해 둔 배다리로 한강을 건넜는데 그 자리는 대체로 지금의 한강철교가 놓인 곳이랍니다. 한강을 건넌 어가 행렬은 시흥과 안양을 거쳐 사근참행궁(肆覲站行宮)에 이르기까지 통영별로와 헤어지게 됩니다.어가가 용산 언덕 앞길에 나오자 관광민인(觀光民人:구경꾼)이 모여들었는데 왕은 이를 막지 말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이때 어가가 당도한 곳은 청파동 1가에 있던 밤동산(율동산:栗東山)에서 이어지는 율원현(栗原峴)으로 불리던 방울재 부근으로 지금의 효창공원 동쪽입니다.

 

한강을 건너다

 

통영별로는 청파배다리에서 지금의 용산역 부근을 지나 동작나루에서 한강을 건너게 됩니다. 배다리를 지나는 옛길은 옛 밥전거리가 있던 삼각지를 지나게 되는데, 이즈음에 이르러 남대문을 나선 길손들이 허기를 달래며 발품을 쉬어갔을 듯 싶습니다. 삼각지에서 곧장 남쪽으로 나 있는 길이 바로 옛 통영별로인데, 얼마 가지 않아 군부대에 막혀서 돌아갑니다. 옛길은 예서 와현(瓦峴)을 넘었는데 바로 근처에 있던 와서(瓦署)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와현을 내려선 길은 국립중앙박물관 앞을 지나 동작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넙니다. 우리는 지독한 강바람과 맞서며 동작대교를 걸어서 한강을 건넜습니다. 동작나루를 지난 길은 4리를 더 걸어 우면산 자락의 승방평(僧房坪)에 들게 되는데, 이즈음에 이르렀을 때 짧은 겨울해가 어둑해지기 시작합니다.

 

남태령(南泰嶺)을 넘다

 

승방평에서 남태령까지는 7리 길입니다. 고개 들머리의 사당역 부근에 닿으니 벌써 해가 져서 남태령을 오르기 위해 이곳에 즐비한 포장마차에서 허기를 달래며 힘을 돋웁니다.

 

과천과 서울의 지경고개인 남태령 고갯마루에는 새로 세운 표지석이 우뚝하고 최근 확장한 8차로 도로 위로 두 지역을 오가는 자동차 행렬이 맹렬하게 치닫고 있습니다. 과천의 진산인 관악산과 우면산 사이의 잘록이에 열린 이 고개는 삼남으로 오가던 옛길이 지나던 곳입니다.

 

남태령

 

이 고개는 여우고개(호현: 狐峴) 또는 여시고개(엽시현:葉屍峴)라거나 도적고개로도 불렸는데, 앞 이름에는 근처 낙성대역 출신인 강감찬 장군과 관련한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런 이름을 가진 고개가 남태령이 된 데는 정조의 능행 때 있었던 이야기 한 토막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이 고개에서 쉬어가던 정조가 고개의 이름을 물으니 어느 시골 늙은이(일설에는 과천현 이방 변씨)가 남태령(南泰嶺)이라 아뢴 데서 비롯한 것이라 합니다.

 

 

과천에서 본 남태령. /최헌섭

당시 정조를 수행하던 관리 가운데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을 알고 있던 이가 있어 거짓 아뢴 것을 꾸짖었습니다. 임금께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감히 거짓으로 아뢰고자 한 것이 아니옵고, 이 고개는 원래 도적고개 또는 여우고개라 하오나 상감께서 물으심에 그런 상스런 이름을 알려 올릴 수 없었사옵니다. 이 고개가 한양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맨 처음 큰 고개인지라 남태령이라 아뢰었나이다'라고 하자, 정조가 촌로의 마음 씀씀이를 가상히 여겨 주지(周知)라는 벼슬을 내리고 앞으로 남태령이라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한 것이지요.

 

그러나 춘향전어사출두 부분에 '청파역 말 잡아타고, 칠패 팔패 배다리 얼른 넘어 밥전거리 지나 동작이를 얼른 건너 남태령을 넘어'라 한 구절에 이미 그런 이름이 나오므로 남태령은 정조 이전에 만들어진 지명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이 고개가 자리한 곳이 관악구 남현동(南峴洞)인 점도 이 고개를 한양의 남쪽 고개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나그네 쌈짓돈 뜯던 사또 민담 뒤로하고 사근행궁으로

기자명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입력 2013.01.31 23:00

 

[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36) 통영별로(統營別路) 2일차

 

오늘은 과천과 경계를 이루는 남태령에서 길을 잡습니다. 이곳이 지경(地境) 고개임을 알 수 있는 현대적 증거는 고개의 서쪽에 자리한 수도방위사령부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수도를 지키는 부대가 이곳에 있음은 이 고개가 지경으로서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노정을 과천시지에는 남태령(南泰嶺)-과천현행궁(果川縣行宮)-읍내전천교(邑內前川橋)-냉정점(冷井店)-은행정(銀杏亭)-인덕원점후천교(仁德院店後川橋)-인덕원천교(仁德院川橋)-독박지(禿朴只)-갈산점(葛山店)-독동현(禿洞峴)-군보천점-자잔동(自棧洞)-원동점-사근참행궁(肆覲站行宮)으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과천, 교통의 요충

 

남태령 옛길의 자취는 고개 동쪽에 살려두었고, 고갯마루 한 가운데에는 남태령(南泰嶺)이라 새긴 큰 빗돌이 세워져 있습니다. 남태령을 내려서면 관문동(官門洞)인데, 과천관아의 문이 있어서 그런 지명을 가졌다고 합니다. 예전 이곳 속담에 '현감이면 다 과천현감이냐' '(서울이 무섭다고) 과천서부터 긴다'는 말이 있는데, 당시 과천현감 중에는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에게 남태령을 무사히 넘도록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받아내기도 했나 봅니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과천과 남태령이 한양을 오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 요충임을 풍자적으로 일러 주고 있습니다.

 

 

과천현 옛터의 은행나무와 송덕비.

과천현 옛터

 

옛길은 관문사거리에서 서쪽 산기슭을 따라 난 지금의 중앙로와 비슷한 선형을 따라 걷습니다. 과천 신도시 들머리에서 옛 과천현의 치소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 바로 앞 식당 돌계단이 예사롭지 않아 사진에 담고 조금 더 가니 바로 의구심이 풀립니다. 곁에 있었던 과천현 관아에서 가져다 쓴 돌로 만든 계단이었던 것이지요.

 

왕의 거둥 때 행궁(行宮)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던 과천현 옛터는 중앙동 주민센터와 과천초등학교 일원입니다. 지금 그곳에는 주민센터 자리에서 1986년에 옮겨온 온온사(穩穩舍)가 복원되어 있고, 늙은 은행나무 아래에는 과천현감을 지낸 이들의 선정비 15기를 옮겨 두었습니다. 온온사는 인조 임금 27(1649)에 여인홍 현감이 과천현의 객사로 건립한 것인데, 1790년에 정조 임금이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고 돌아가던 길에 이곳에 들러 경치가 쉬어가기에 편안하다고 그런 이름을 지어 친필을 내렸다고 합니다. 건물은 중앙의 정청과 양쪽의 동·서헌이 각각 세 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패를 모신 정청은 원주(圓柱)를 쓰고 지붕을 높여 격을 달리했습니다.

 

이곳 온온사 들머리에는 수세가 예사롭지 않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우뚝하니 버티어 서 있습니다. 밑동의 둘레가 6.5m이고, 높이가 25m에 이르는 거목으로 나이가 600살을 헤아리니 조선 개국 무렵부터 자리를 지켜 온 셈입니다. 그 아래에 모아져 있는 송덕비는 홍천말 도로변에 있던 것을 옮겨왔는데, 정조 6(1782)에 세운 정동준 현감의 것이 가장 오래됐습니다.

 

과천현감 송덕비에 얽힌 이야기

 

옛적 어느 때 과천 현감을 지낸 이가 고을을 떠나면서 미리 만들어 종이로 덮어 둔 송덕비를 벗겨 보았더니, 빗돌에 '금일차송도(今日此送盜: 오늘 이 도둑을 보내노라)'라 적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해서 현감은 그 비문 곁에 '명일래타도(明日來他盜: 내일 다른 도둑이 오려니)' '차도래부진(此盜來不盡: 이 도둑은 끊임없이 올진저)'라 써 두고 고을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의 부패한 공직자상을 풍자한 이야기이지만, 과천이 처한 장소성과 연동하여 이해하자면 위의 과천현감 통행세 뜯는 이야기와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위의 선정비 15기를 다 살펴봐도 그런 내용이 적혀 있는 빗돌은 없습니다.

 

원행길을 바꾼 사연

 

과천현 옛터를 나서 정부 제2청사를 뒤로하면, 지금은 옛 자리를 헤아리기 어려운 읍내앞다리를 건너 냉정점(冷井店)이 있던 찬우물에 이릅니다. 아마도 이곳에 점이 두어진 것은 갈현삼거리 서쪽에 있는 이 우물 때문이었던 듯합니다. 정조가 수원 현륭원(顯隆園)에 원행할 때, 이곳의 물을 마시고 가자(加資:3품 이상의 품계 또는 그것을 올리는 일) 우물이라 불렀을 만큼 물맛이 좋았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정조는 머잖아 수원 거둥길을 과천로에서 시흥을 지나는 길로 바꾸게 되는데, 일설에는 이 우물 가까이에 있는 김약로의 무덤 때문이라고 합니다. 까닭인즉 정조 임금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김상로의 형이 바로 그이니, 효심 지극한 정조가 이 사실을 알고도 이리로 지나기가 편치 않았을 겁니다.

 

갈재 넘어 안양으로

 

이곳을 지나 나지막한 갈재(가루개·갈현:葛峴)를 넘으면 안양시에 듭니다. 갈재는 과천의 남쪽 고개라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갈현동은 지금도 과천신도시의 남쪽 경계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 지명유래를 살피기 위해 과천문화원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를 찾으니 그 변천을 갈고개-갈오개-가로개-가루개로 해두고 있더군요. 또한 갈을 갈림을 뜻한다고 보고 관악산과 청계산을 잇는 지맥에 의해 물이 양쪽으로 나뉘어 흐르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세상 어느 고개가 분수령 아닌 게 있던가요. 남태령도 지지대고개도 모두 분수령이니 저로서는 갈을 달리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곳의 갈재 가루개 갈현은 남쪽을 이르는 우리말 갈과 고개가 합쳐진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칡이 많아 갈현이라 했다는 설도 역시 갈을 뜻으로 읽었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일 뿐입니다. 이 고개를 경계로 과천과 안양 사이에는 아직 미개발지가 많이 남아 있어 찬우물 가루개 옥탑골 등 정감어린 지명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인덕원

 

이 고개를 넘어 옛 자리를 잃은 은행정(銀杏亭)과 인덕원점(仁德院店) 뒷다리를 지나면 머잖아 인덕원에 듭니다. 다리의 이름이 그리 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원의 기능을 점이 대신하면서 인덕원점으로 불리게 된 듯한데, 신증동국여지승람과천현 역원에 인덕원(仁德院)은 부의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에서의 위치와 이수가 조금 달라 보입니다. 대동지지에는 인덕원(仁德院)이 과천에서 8리라 했으니 이 이수가 실제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지금 안양시에서는 인덕원을 지나는 옛길이 남아 있는 구간에 '인덕원 옛터'를 알리는 표지석을 세워 두었습니다. 47번 국도가 지나는 대로에서 약간 서쪽으로 들어선 주막1길과 2길이 만나는 즈음인데, 지금은 상업지역으로 변해 옛 정취를 살피기 어렵습니다. 빗돌에는 인덕원이란 이름이 한양에서 내려 온 환관들이 어진 덕을 베푼 데서 비롯한 것이라 했고, 15975월 초사흘에 이순신(李舜臣)이 이곳에서 쉬어갔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한편, 춘향전에는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행할 때 이곳에서 점심을 들었다고 했는데, 이 또한 이곳이 원으로서 점으로서 여전한 교통의 요충임을 알게 해 주는 예라 할 것입니다.

 

인덕원 옛길.

사근행궁 가는 길

 

인덕원에서 지금은 없어진 인덕원천(지금 학의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 벌말인 독박지(禿朴只, 민배기)를 지나면 원에서 3리 거리의 갈산점(葛山店)이 있던 평촌동 갈뫼마을입니다. 예서 모락산 자락을 돌아 독동현(禿洞峴:의왕에서 독박지로 가는 고개)을 넘으면 안양교도소 뒤의 모락산 기스락을 따라 난 옛길이 잘 남아 있습니다. 이즈음이 군보천점(軍堡川店)을 지나던 길인데, 조금 더 가면 원동점(遠東店)이 있던 성라자로마을 입구를 지납니다. 옛 원동점을 지나면서 지방도를 버리고 1번 국도와 비슷한 선형을 따라 수원으로 길을 잡아가면 사근행궁(肆覲行宮)이 있던 고촌동 주민센터에 이릅니다. 옛 이름이 사근평(肆覲坪/沙近坪)인 것은 오래되어 바탕이 변한 것을 이르는 '삭은'의 음차로 보입니다. 지금 이름이 고촌(古村)인 것은 사근을 예스러운 마을을 훈차한 것으로 보이니 더욱 그렇게 볼 수 있다 여겨집니다.

/·사진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