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1./ #아카이브 #옛신문 #공립신보 #대한제국 #원태우지사 #이등박문 #이만여
신문명 공립신보
기사제목 投石被捉
기사형식 일반기사
발행년월일 1906년 07월 30일
색인어
이름 : 이등박문(통감), 이만여
지명 : 경기도 안양
주제분류
정치,행정 > 정치,행정,외교(대한제국기) > 통감부 > 통감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 무장,의열투쟁 > 무장의열투쟁 > 암살처단
공립신보 1906년 07월 30일자에 실린 원태우지사의 이등박문을 향한 돌 투석 항일운동 사건 기사로 기사 제목이 投石被捉(투석피착)이다. "投石被捉"는 한자로 "돌을 던졌다가 붙잡히다"라는 뜻이다. "투석(投石)"은 돌을 던지는 행동을 의미하고, "피착(被捉)"은 붙잡히거나 잡히는 상황을 뜻한다. 이 표현은 어떤 행동이 결과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거나, 원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나타낸다. 기사에는 원태우지사와 현장에 함께 있었던 이만여 이름이 등장한다. 사건 발생 8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신문에 실린 것으로 경찰에 체포된 원태우 이름이 아닌 현장에 있다 도망간 이만여가 븥잡혓다고 쓴 이유는 무얼까.
당시 사건을 기록하고 정리한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05년 11월 22일 오전9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민)은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함께 특별열차로 남대문역(서울역)을 출발하여 수원에 도착한 후 수원 화성을 둘러보고 팔달산 구경을 하였다. 그리고 안양으로 이동하여 오후 나절 사냥을 즐긴 후 저녁 6시 15분경 안양역에서 서울행 열차를 탔다.
그 시각, 신문을 통해 이토의 일정을 습득한 안양에 사는 청년 원태우, 이만여, 김장성, 남통봉 등 원태우 일행은 경부철도 안양역 서북방으로 약 800m 떨어진 서리재 고개(안양시 석수동)에서 이토가 탄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기다린 것이 아니라 열차를 전복시키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서 였다. 즉 일행은 선로에 큰 돌을 옮겨놓고 마음 졸이며 열차의 출현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로 인해 열차가 전복하거나 탈선하게 되면 이토와 하야시는 적어도 치명상을 입게 될 터였다. 하지만 이것은 목숨을 내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래서일까, 서리재 고개에서 지켜보던 일행 중 한 명이 돌출 행동을 보였다. 멀리서 기차의 출발음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이만여가 갑자기 선로로 뛰어가 옮겨 놓았던 돌을 밀어내고 달아난 것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크게 당황했지만 선로에 다시 돌을 올려놓기에는 시간이 턱없었다.
하지만 원태우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돌려 던지기 적당한 화강암 돌멩이 하나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는 열차가 고개를 통과하는 순간, 승객이 보이는 차장을 겨냥해 힘껏 투척했다. 원태우가 돌을 던진 장소는 선로 위의 언덕이었다. 옛날에는 철길 양편으로 소나무가 우거지고, 가파른 고개로 경사가 급하고 당시 열차 속도가 느린탓에 서행할수 밖에 없어 열차의 창을 정확히 겨냥할 수 있었고 또한 파괴력도 가중될 수 있었을 것이다.
원태우가 던진 돌맹이는 정확히 이토와 하야시가 탄 객차의 유리창을 박살냈다. 이토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돌렸으나 왼쪽 눈꺼풀을 비롯 여덟 곳에 깨진 유리조각이 박힌 후였다. 객실이 아수라장이 되자 열차는 곧 멈춰 섰고 이토를 호위하던 일본 헌병대장과 헌병들이 서둘러 내렸다. 이후 열차는 현장에서 1시간 가량 머물다 오후 8시경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원태우를 비롯한 일행은 열차에서 내린 헌병과 급거 출동한 경찰들에 의해 오후 9시 30분경 체포되었으며 영등포 형무소로 압송되었다. 철도 근로자들이 일행이 도주한 방향을 가르쳐준 탓에 쉽게 붙잡힌 것이었다. 이후 이만여, 김장성, 남통봉은 조사 후 무혐의로 풀려났고 원태우는 철도방해죄로 징역 2개월을 선고받았다. 사건에 비해 조사와 처벌은 의외로 가벼운 감이 있었는데, 그 뒤에는 이들을 경범죄로 처리하라는 이토의 지시가 있었다. 곧 조선통감으로 오게 될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하고픈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처벌이 가볍다 뿐 체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원태우는 배후를 밝히려는 일본 헌병의 혹독한 매질과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남성 생식기에도 심한 고문이 가해져 후손을 둘 수 없게 되었다. 원태우는 영등포감옥에서 두 달을 보내고 이듬해 1월 24일에 석방되었다.
일제가 감옥에서 풀어준 것은 당시 일제에 대한 우리국민의 팽배해진 민 족적인 울분이 자칫 대규모 저항운동으로 번질 것을 우려한 일제의 간교한 술책이 라는게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당시 이등박문이 가벼운 처벌을 당부했있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책임은 물어 시홍군수를 과면하고 경기도 관찰사를 견책했다.
원태우 지사는 해방 후에도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어렵게 살다가 1951년 한국 전쟁 중 69세로 사망했다. (표지석 등 일부 기록에는 1950년 사망으로 되어있다.)
사망 40년이 지난 1990년 뒤늦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원 의사 의거사실이 공식 확인되고 인정되어 1990년 8월 15일 45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거행된 충남 천원군 독립기념관<겨레의집 에서 각계인사 8백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부로 부터 항일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광복45년만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의거 결행후 85년만에 의사가 세상을 뜨신지 40년만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고 위훈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의사를 대신해 훈장을 받은 양자 원게복씨는 아버님의 뜻을 늦게나마 선열의 반위에 올려 주셔서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원태우 의사의 이름이 단편적으로 원태근이라고 잘못 오기되어 있는가 하면 내용도 잘못 알려져 온 부문이 많으나 바로잡아지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참고로 원태우 지사의 의거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하얼빈 의거보다 4년을 앞섰다.
차제에 항간에 잘못 알려진 사실 몇 가지를 바로 잡고자 한다. 석수동 투석지 현장과 안양역. 등에 설치된 기념비에 1950년 사망한 것으로 표기돼 있는 것과 달리 원 의사는 1951년 7월 7일에 사망했다는 것이 유족들의 증언이다.
유족들은 이름도 정정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판결문 기록과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적 정보기록, 훈장증 등에는 '원태근'으로 기록되어 있고, 지식백과 등 온라인상 지료와 안양문화원 특집 자료 등 일부 문건에는 ‘김태근' 또는 김태우’ 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원태우로 정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석수동 투석지 기념물, 안양역 계단옆 부조, 자유공원 동상에는 늙은 원 의사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 마치 그가 노익장을 과시한 듯 표현하고 있지만 원 의사가 거사를 벌인 1905년, 그는 23세의 혈기 왕성하고 기운 넘치는 창년이었다. 따라서 그의 모습이 노인으로 기억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또한 2021년 무렵 안양시가 주민참여에산으로 석수동 투석지에 새로운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1905년 12월 8일 일본 박문사에서 펴낸 <일로전쟁 사진화보(日露戰爭 寫眞畫報)> 제39권에 속한 삽화를 그대로 배껴 벽화로 만들었는데 이 또한 오류 투성이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木村光太郞)인데, 그저 소문만을 듣고 그렸던지라 23세 청년 원 의사가 흰 도포에 갓을 쓰고 칼을 찬 모습으로 등장한다. 조선인이 일본 사무라이처럼 패검한 것도 이상하지만 원 의사는 당시 농부였던지라 도포에 갓을 썼을 리 없다. 그리고 돌 팔매질도 평지에서 투척한 것이 아니라 언덕위에서 아래로 던졌다.
일각에서는 갓 쓰고 칼을 사무라이처럼 패검한 모습의 원태우 지사 조형물을 하루빨리 바꿔야한다고 지적한다. 나이를 보면 1882년생 원태우 지사가 1879년 생의 안중근 의사보다 3세 아래다. 하얼빈 의거 당시 안중근 의사 나이는 30세이며 안양 의거 당시 원태우 지사 나이는 23세였다. 이상 여러 가지를 미루어 원태우 지사는 노인의 모습이 아니라 안중근 의사보다 훨씬 젊은 청년으로 투영되어야 한다.
아울러 원태우지사 의거가 단순한 돌팔매가 아닌 선로 탈선 작전과 함께 묶어져 알려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아쉽게도 불발이 되었지만 만일 그때 큰돌을 치우지 않아 열차가 탈선되었다면 이토와 하야시 곤스케는 최소한 중상을 입었을 만큼 엄청난 사건이라는 것.
좀더 조사해 밝혀 할 내용도 있다. 원태우 의사의 양자 후손은 아버지가 "만안교 축조 당시 이를 감독하는 관리였다"는 말하고, 원 의사가 "의거 당시 향교에 다녔다"는 증언한다. 그렇다면 그는 농민으로 알려진 사실과 달리 선비였을 가능성도 있다. 기타 생가(生家)도 현재 경기도에서 설치한 생가터 표지석이 안양1동 농협앞에 세워져 있으나 기록에 의하면 시흥군 과천군 하서면 안양리(현 안양1동 642) 와 안양시장(시대동 92 현 안양1동)과 비산동 수푸루지 설 등이 혼재되어 있다.
지난 2023년 8월 30일 광복회 안양시지회 주관으로 안양 자유센터 2층 강당에서 열린 안양시 승격 50주년을 기념 및 안양 독립운동사 발간 기념 학술회의에서 원테우지사 등 안양출신 독립운동가에 대한 공론의 장이 열렸었다.
이날 <제1주제>로 "1905년 원태우의 이토 히로부미 응징 투쟁에 대한 재고찰" 발제자로 나선 단국대 김명섭 교수는 대한민국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적 정보기록, 안양시지 자료, 안양시 관내 각 조형물의 안내문 등 공식기록을 통해 이름, 사망일자, 이미지 등 가짜 정보가 안내되고 오류정보가 계속 재생산되며 역사왜곡과 혼란을 주고 있다고 지적하며 잘못된 사실이 바로잡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안양에서 발생한 원태우 지사의 의거 사실을 면밀하고 정확하게 발굴조사하고 사실을 바로잡음으로 애국지사의 고귀하고 귀한 업적이 더욱 빛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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