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왕 내손동 일대는 백제시대 대규모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2002년 의왕 내손라구역 주택재개발 정비사업 현장에서 백제시대 문화재가 발견되면서 공사가 전면 중단되는 등 올해 말 계획했던 분양 일정이 수개월 미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의왕 내손라구역 주택재개발 정비사업조합은 포일로 104(내손동) 일원 9만3천990㎡에 공동주택 2천180가구 대단지 신축을 추진하면서 사업부지 내 건축물 철거를 마무리하고 문화재 조사에 착수, 사업지 내 32곳에 대한 표본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백제시대 아궁이 터 등이 발견되면서 사업이 중단됐다.
이에 조합 측은 문화재 발굴에 의한 사업지연 등 공기 일정을 줄이고자, 표본조사 이후 단계인 시굴조사를 건너뛰고 곧바로 정밀 발굴조사에 착수, 3개 조사기관을 선정해 조사지역을 나눠 동시에 착수한 결과 백제시대 주거지 및 수혈과 관련한 토기편 등이 함께 확인됐다.
당시 정밀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재)겨레문화유산연구원·(재)기호문화재연구원·(재)한울문화재연구원 등의 조사기관이 2022년 8월1일부터 10월14일까지 주택재개발부지에서 유물을 발굴한 결과, 총 994점이 출토됐다.
주요출토 유물은 장란형옹·심발형토기편·삼족고배·기와 등 토도 958점, 철도자·주조괭이 등 금속 30점, 지석 등 옥석유리 6점 등 총 994점에 달하는 백제시대를 포함한 삼국시대의 유물이다.
최근에 이들 기관이 유튜브에 올린 숏영상을 보면 2022년 끝난 문화재 발굴 조사 와 관련 최근 유물 분류 및 보고서 작성 작업이 이루어지고 잇다
한편 지난 2006년 세종대박물관이 의왕시 의뢰를 받아 의왕시 오전동과 내손동 경계에 있는 모락산(慕洛山·해발 385m)의 정상부를 둘러싸고 축조된 이른바 퇴뫼식 산성인 모락산성 일대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를 벌인 결과 한성도읍기(BC 18-AD 475) 백제 영역에서 제작된 5각형 토기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당시 조사에서 5각형 토기는 북측 성벽 근처에서 발견됐다. 회색을 띠는 소형 연질 단경호(短頸壺·아가리가 짧은 항아리)이며 완형이다. 몸체가 5각형인 이 토기는 바닥은 편평하고 짚에 얹었던 흔적이 발견됐다. 아가리 지름 8.4㎝, 바닥지름 7.0㎝, 높이 14.2㎝였다. 이런 백제 토기는 이전까지 발견된 적이 없다고 조사단은 말했다.
아울러 건물터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성 안쪽 평탄지에서는 장독과 같은 대형 옹(甕·독)이 출토됐다. 아가리와 어깨 일부가 깨져 나가긴 했으나 완제품에 가까운 이 대옹은 속심이 적갈색을 띠는 회색 경질토기였다. 현존 높이 60.4㎝, 몸체 최대지름 49.6㎝이며, 몸체 기준 두께는 0.7㎝다.
땅에 묻는 지금의 김칫독과 같은 이런 대형 옹은 전북 익산시 왕궁리 백제 유적에서도 지난 2001년 확인된 적이 있다. 동체 최대지름 77㎝에 높이는 76㎝에 달한 왕궁리 `장독'은 발견 당시 아가리에큼직한 돌 한덩이가 놓여 있었고, 몸체는 온전히 땅 속에 매몰돼 있었다.
학계에서는 이런 장독류는 곡물 등을 저장하기 위한 용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성주단지'와 같은 구실을 했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특히 조사 결과 모락산성은 전체둘레 878m에 이르는 평면 사다리꼴의 석축산성으로 밝혀졌다. 한성도읍기에 백제는 석축 산성을 축조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한 때 상식처럼 통용됐고 지금도 그런 견해가 우세하지만, 모락산성에서 얻은 결론만으로도 그것이 잘못임을 충분히 입증했다.
아울러 유물로는 성벽과 그 안쪽 구역 각지에서 적갈색 연질 타날문토기와 회청색 격자 타날문토기, 승석문토기 등 백제터기류가 다수 수습됐다. 유독 한성도읍기 말기에 등장하는 토기만 집중적으로 수습된 점으로 미뤄 한성도읍기에 백제가 축조해 사용하다가 이내 폐기된 성곽으로 판단햇다.
의왕 모락산성 - 한성 백제 전략요충지
모락산성은 의왕시 오전동과 내손동 경계에 있는 모락산(慕洛山ㆍ해발 385m)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성곽 둘레가 878m에 이르는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삼국시대 백제의 성곽으로 추정돼 지난 2007년에 경기도기념물 제216호로 지정됐다.
기원전 18년에 온조가 건국한 백제는 하남 위례에 도읍을 정했다. 잠시 ‘삼국사기’ 백제본기 권23의 기록을 살펴보자.
“강의 남쪽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처럼 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백제라는 이름은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왔다”[백가제해百家濟海] 혹은 “백성들이 즐거이 따랐다”[백성낙종百姓樂從]는 말에서 비롯됐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백제를 마한의 50여 개 나라 중 하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한에 속한 작은 나라 백제가 마한 전체를 지배하는 고대국가로 성장하는데 한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학계가 모락산성을 백제가 한강유역을 지배하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추측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500년 긴 세월을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고대국가 백제를 부르는 이름도 여럿이다. ‘삼국사기’에는 ‘십제(十濟)’, ‘삼국지’에는 ‘백제국’, ‘일본서기’에는 ‘위례국’이라고 기록됐다.
한강유역에 자리 잡은 ‘한성백제’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웅진으로 천도하기까지 무려 493년 동안이나 유지됐다. 이때 백제는 중국의 진, 송은 물론 바다 건너 왜와도 교류했을 정도로 외교력도 뛰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수도를 생각하면 여전히 필자의 머릿속에 부여와 공주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마도 학창시절에 배운 국사교과서 때문일 것이다.
■ 다시 주목해야 할 모락산성
모락산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는 물론 ‘조선왕조실록’에서조차 모락산성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모락산성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조선총독부가 1942년 펴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를 통해서였다.
“모락산성은 군포장역의 동쪽 약 10정(町) 거리의 모락산 정상에 있는 소형의 토루(土壘)인데, 지역 주민은 이를 문록역(文祿役:일본이 1592년 임진왜란을 표현하는 용어-필자 주) 때 쌓은 것이라고 하나 믿기 어려우며 유래불명이다”란 짧은 기록이다. 이를 통해 의왕 지역 주민들은 모락산성의 존재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모락산성은 대한민국의 문화적 역량을 결집해 야심차게 펴낸 ‘한국문화대백과사전’에 조차 실려 있지 않다. 이 책보다 앞서 펴낸 1989년에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이 펴낸 ‘한국의 성곽과 봉수’에 처음으로 소개됐다. 그러나 내용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총독부가 펴낸 책에 실린 글을 전재한 다음 “소형의 토축이라 주목하지 않았거나 유실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라는 짧은 평(評)을 단 것이 전부다.
그런 면에서 10여 년 전부터 의왕시가 모락산성의 가치를 깨닫고 발굴에 나선 것은 칭찬받을 일이다.
지난 2005년 의왕시의 의뢰를 받은 세종대학교 박물관이 모락산성 지표 조사를 실시해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다. 이 성곽이 백제의 축성 기법으로 축조됐으며 발굴된 유물 역시 백제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모락산성 북측 성벽 근처에서 발굴한 5각형 몸체 백제시대 토기는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것으로 관심을 모았다. 건물터로 추정되는 성 안쪽의 평탄지에서 장독과 같은 대형 독이 출토됐다. 이러한 유물을 미루어 이 산성이 백제의 최전성기인 근초고왕대부터 개로왕대까지 사용되다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웅진(부여)으로 천도한 이후에 폐쇄된 것으로 추정했다.
발굴조사에 앞서 지난 2003년 한국고대사학회에서 ‘백제 한성기 모락산성에 관한 연구’라는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모락산성은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할 5세기 말 무렵에 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모락산이 안산과 남양만에서 수원, 안양을 거쳐 북상하는 길목에 자리한 요충이자 위례성이 있는 하남으로 들어가는 최단거리에 위치했기 때문에 이곳에 성곽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의왕시는 모락산성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밝히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시민들까지 적극 호응해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하려는 운동으로 발전해 모락산성 문화재를 열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이후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친절한 안내판을 달자
모락산은 작지만 매력적인 산이다. 등산로 곳곳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형상의 멋진 바위들도 산을 타는 맛을 더해 준다. 암벽등반을 할 수 있는 깎아지른 암벽도 있다. 곳곳에 안전사고를 방지하는 로프를 설치해 두었다. 정상 근처에 쌓아둔 돌무더기는 산성을 수호하는 상징처럼 여겨진다. 가파른 바위고개를 넘어서면 사시사철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는 국기봉이다.
이제부터 내리막이다. 암벽을 몇 개 지나면 놀랍게도 산등성이에 울타리를 설치한 복숭아밭이 나타난다. 이곳이 사유지라는 뜻이다. 밭을 지나 넓은 공터와 정자가 서 있는 모락산성 남치성 부근이 나타난다.
정자 옆에 모락산성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서 있다. 한글과 영문으로 된 두 개의 안내판이다. 안내판을 기점 삼아 성벽의 흔적을 찾아 주변을 서너 차례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석축의 흔적은 끝내 찾지 못했다. 안내문에 적힌 설명만으론 성곽의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마침 주말이라 등산객이 많다. 매일 산에 오를 것 같아 보이는 연세 지긋한 남성을 불러 세웠다.
“여기가 성터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혹시 산행을 하시면서 성벽을 보신 적이 있나요?” 아마 열 사람 이상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성벽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다. 안내판에 성곽의 모양을 그리고 위치를 표시했더라면, 이 성터가 왜 중요한지를 알려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단위의 등산객들이 많기에 아쉬움이 더했다.
남치성 부근에서 바라본 모락산성 내부
모락이란 이름이 붙여진 전설이 몇 가지 전해지고 있다. 그중 가장 그럴싸한 것은 세종의 셋째아들 임영대군과 관련된 전설이다. 조선의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사실에 절망한 임영대군이 이 산기슭에 숨어 살며 옛 중국의 수도인 낙양을 그리워하던 산이라 하여 그리워할 ‘모(慕)’와 낙양의 ‘낙(洛)’ 자를 써서 모락산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전설의 주인공 임영대군의 묘소가 이 산자락에 있고 모락산의 상당부분이 임영대군의 후손인 전주 이씨의 사유지이다.
모락산성에 오르면 가슴이 시원하다. 시계방향으로 과천, 성남, 용인, 수원, 화성, 군포, 안양시까지 7개의 도시가 둘러싸고 있어 사방을 굽어보는 풍경이 그만이다. 모락산을 찾으면 산성 아래 아늑하게 자리 잡은 샘터를 찾으시길 권하고 싶다. 백제 혹은 고구려 군사들도 이 샘물을 마셨을 터인데 물맛이 아주 좋다.
끝으로 의왕시에 당부 하나 드린다. 모락산성을 소개하는 안내판에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계양산성과 문학산성 같은 백제시대 고성들의 위치를 소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당국의 세심한 노력은 모락산성을 찾은 시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출처 : 경기일보 2016.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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